영화 묵상
캔 가이어 지음 | 두란노
영화 묵상
캔 가이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1년/272쪽/8,000원
라이언 일병 구하기 묵상
영화는 장엄하게 시작된다. 바람에 나부끼는 미국 국기가 온 화면을 가득 메운다. 한 노인이 가족들보다 한 발짝 앞서 군인 묘지를 걷는다. 부동 자세로 서 있는 군인들처럼 무수히 많은 십자가가 묘지에 도열해 있다. 마침내 자기가 찾던 십자가에 이른 노인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입술이 떨려온다. 두 눈이 반짝인다. 전쟁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장면위로 이런 문구가 겹쳐진다. “1944년 6월 6일. 오마하 해변. 도도그린지구.”
D-데이의 침공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며, 승리의 최대 견인차이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에누리없는 사실적 묘사로, 관객들을 6월의 그 운명의 날에 오마야 해안을 습격했던 미군 병사들 앞에 데려다 놓는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느낀다. 치가 떨리는 전쟁의 공포를... 우리도 그들과 함께 듣는다. 사방에서 터지는 고막을 찢을 듯한 포탄 소리를, 18세, 19세, 20세 된 아이들의 몸을 찢어 놓는 연발탄 기관총 소리를... 우리는 그들과 함께 본다. 해안에 널브러져 있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대학살을.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산산이 찢어진 적군의 몸을. 그리고 모래에 박혀 몸부림치며 백사장을 피로 물들이던 부상병들을...
행크스는 4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막내 라이언을 구하여, 아이오와의 비탄에 잠긴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1개 분대를 이끌고 적진에 들어간다.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 인간을 아끼는 마음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이것은 샌환 고지의 돌격 작전이 아니라 자비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관객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침내 구조대는 라이언 일병을 찾아내지만 그는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형제처럼 가까워진 동료 병사들, 오직 그들의 곁을 지킨다는 일념뿐이다. 라이언 일병을 찾기 위해 파견된 병사들 중 호바트 병장이 있었다. 그는 구조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모르긴 몰라도 한편으로는 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이런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 이거죠. 이 친구가 여기 있고 싶다면, 좋습니다. 여기 두고 우린 돌아가면 되죠.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생각도 듭니다. 만일 우리가 기적처럼 모두 여기에 함께 남아 마침내 이기고 돌아간다면 어떨까. 어느 날 우리는 이때를 돌아보며 말하겠지요. 라이언 일병을 구한 일이야말로 이 지옥 같은 전쟁에서 우리가 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선행이었다고.”
아메리카 온라인(AOL)은 이 영화가 재향군인은 물론 일반 관객들에게도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소감도 나누고 다른 관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예상대로 3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접속했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 모든 가족이 보아야 할 영화이다. 전쟁의 아픔과 고통과 끔찍한 참상을 영영 잊지 않도록 말이다. 누군가 잊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또 다른 세대의 젊은이들이 죽고 또 다른 흰 십자가의 숲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다른 AOL 가입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 경험을 한 번도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1992년 암으로 돌아가시기 나흘 전에야 입을 여셨다. 전쟁의 끔찍한 진상과 태평양전쟁의 경험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똑같이 상세히 들려주셨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께서 내가 베트남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친구 하나가 극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내가 화면에서 보았던 진실을 확인해 주는 내용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극장을 나서기 전,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제자리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이 든 두 남자가 극장 맨 뒤에 서서 화면에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A.W. 토저(Tozer)는 인생이란 놀이터가 아니라 싸움터라고 말한다. 적군이 점령하려는 영토는 인간의 마음이다. 전쟁은 날마다 벌어진다. 날마다 우리는 그 영토를 조금씩 얻거나 잃는다. 적은 총알을 장전한 채 참호에서 두 눈을 부릅뜨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바다 멀리서 사소한 일에 매달려 있는 한, 적은 기꺼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교두보에 올라서려는 순간, 적의 시선은 우리에게 고정되고 모든 화력으로 총공세를 가해 오는 것이다.
아마데우스 묵상
작가라면 누구나 이야기의 중심 갈등을 최소한의 단어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제목을 꿈꾼다. <아마데우스>가 바로 그런 제목이다. 한 단어로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을 추적하면 ‘아마(Ama)’란 ‘사랑받는다’는 뜻이요, ‘데우스(deus)'란 ’하나님‘을 뜻한다. 둘을 합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 그리고 그분이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질투를 그린 영화이다. 이 모든 주제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 모차르트 안에서 만난다. 질투의 주체를 펼쳐 보이는 인물은 모차르트와 동시대 인물이면서 모차르트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작곡가 살리에리이다.
영화는 모차르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리에리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황제 요제프 2세의 궁정 작곡가이다. 갈등은 모차르트가 연주차 황제의 궁중에 도착하던 1781년에 시작된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온 궁중이 깜짝 놀란다. 그날 살리에리는 자기가 그토록 오랜 세월 하나님께 구했던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에게 있어 모차르트의 재능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아니라 모차르트라는 증거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성격이 오만한 데다 신경질이며 방종과 음주와 성적 부도덕과 불경한 행위를 일삼는 자가 아니던가?. 살리에리는 거기서 신학적 질문에 봉착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이 합당한 사람에게는 재능을 거두시고 모차르트 같이 부당한 사람에게 재능을 주실 수 있단 말인가?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은 모차르트가 바란 적도 없고 구하지도 않은 재능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 재능에 감사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나님이 임의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재능을 주신다는 사실, 결국 그 것 때문에 살리에리는 정신을 잃고 급기야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영화 첫 장면에서 살리에리는 죄책감에 못 이겨 면도날로 자기 목을 자르다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얼마후 한 신부가 그에게 면회를 온다. 두 사람의 대화를 틀로 해서 영화의 중심 갈등이 전개된다.
신부가 정신병원에 들어선다.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는 광분하는 환자들 무리를 헤치고 살리에리의 방을 찾아간다. 방에 들어가자 늙은 작곡가가 작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살리에리는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혼자 있고 싶소.” “외로운 영혼을 고통 속에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신부가 대답한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그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합니다.” 살리에리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답한다. “그런가요?” 그 질문 속에 냉소가 묻어난다. “저에게 죄를 고백하십시오.” 신부가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베풀어 드리겠습니다.”
살리에리가 화제를 바꾸어 말한다. “음악에 대해 잘 아시오?” “조금 압니다. 젊었을 때 배웠지요.” “어디서 배웠소?” “비엔나에서 배웠습니다.” “좋소.” 살리에리가 다시 피아노를 향해 앉는다. “그렇다면 이 곡을 아시겠군요.” 살리에리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자 신부가 미안해하며 말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곡이지요?” “아주 유명한 곡이오.” 살리에리는 그렇게 대답한 뒤 다시 다른 곡을 연주한다. “이 곡은 어떻소?” 그 음악과 함께 살리에리는 어느덧 궁정 작곡가로 일하던 영광의 시절로 되돌아가 있다.
연주를 마친 그는 박수갈채에 흠뻑 취해 있다. 그는 눈을 뜨고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신부를 바라본다. “어떻소?” “죄송하지만 귀에 익은 곡이 아닙니다.” “내 곡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이오? 나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였소. 나 혼자 쓴 오페라만도 40곡이나 되오. 그럼 이 곡은 어떻소?” 다시 연주가 시작된다. 잘 아는 곡이라는 듯 신부의 눈에 생기가 돈다. 신부는 입으로 곡을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살리에리가 연주를 마치자 신부가 감동에 차서 대답한다. “예, 압니다. 아주 멋진 곡이지요. 죄송하지만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곡인지 몰랐습니다.” “ 내가 아니오. 모차르트 곡이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비웃기라도 하듯 중간 이름에 힘이 들어간다.
어린 살리에리가 벽에 걸린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주님,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해주세요. 음악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칭송하게 해주시고 - 저도 칭송 받게 해주세요. 사랑의 하나님. 온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불멸의 작곡가가 되게 해 주세요. 제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제 음악을 사랑하며 영원히 제 이름을 말하게 해 주세요. 그 대가로 주님께 제 순결과 재물과 가장 깊은 겸손과 평생의 모든 날들을 바치겠습니다. 아멘.”
신부와의 만남은 살리에리에게 고통스런 만남이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그 앞에서 불멸의 작품으로 밝혀진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이다. 신부가 기억하는 것도 모차르트의 곡이요. 신부의 눈에 생기가 돌게 한 것도 모차르트의 음악이다.
영화 전체는 살리에리가 신부에게 털어놓는 고백이다. 그 속에 평생동안 그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차례로 펼쳐진다.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처럼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왜 음탕한 아이를 택해 도구로 쓰시는가?‘라는 그의 물음이 질문으로 들리기보다는 공격으로 들릴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졌다.
그는 십자가상을 손에 쥐고는 그것을 불 속에 던져버린다. 그때부터 살리에리는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모차르트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간다. 질투에는 불가피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질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빠져나와 으슥한 곳을 거닐며 복수의 순간을 노린다. 복수는 등을 찌르는 비난으로 찾아올 수도 있고 험담과 인신공격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찾아오든 질투의 목적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살리에리의 질투는 한때 그가 자신의 삶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죽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미워했고 모차르트를 미워했고 자기 자신마저 미워했다. 자신을 ‘범인(凡人)의 수호신’이라 부르는 영화의 끝 장면에서 살리에리의 자기 혐오를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질투를 내 삶의 이슈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에 질투를 느끼며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사람이 그저 마음이 동해 처음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는 물론이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작가의 성공을 곱게 보기가 너무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어렵다. 나에게 있어 글쓰기란 어느 하나 쉽게 이루어진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수업이 그랬다. 글쓰기 자체가 그랬다. 에이전트를 찾기가 그랬다. 출판사를 찾기가 그랬다. 내 책의 독자들을 찾기가 그랬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된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예컨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책 - 저자가 난생처음 쓴 책으로 베스트셀러는 물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 이 나오면 내 속에는 수많은 오래된 질문들과 거기 연루된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살리에리의 말이다. “내 평생 소원은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었소. 그분이 내게 그런 소원을 주셨소. 그러시고는 나를 벙어리로 만들어 놓으셨소. 왜? 이유를 말해 보시오. 음악으로 당신 자신을 찬양하게 하실 마음도 없으시면서 그런 소원은 왜 심어놓으셨단 말이오?”
이것만은 알고 있다. 모든 좋은 선물은 하나님의 후하신 손에서 온다는 사실. 그분은 그 선물을 당신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나누어주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반응은 감사로 받아 충실히 사용하는 것뿐이라는 사실. 이 모두 사실임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죽어 없어져야 할 살리에리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숨쉬며 살아있다.
엘리펀트 맨 묵상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엘리펀트 맨’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서커스의 한 구경거리였다. 이 전신 기형 인간은 검게 그을린 굴뚝이 사방에 치솟던 산업혁명 시대였던 1800년대 말, 영국에서 살았다. 그의 이름은 존 메릭이다.그는 전신에 종양이 자라는 특이한 병을 앓고 있었다. 종양은 피부 밑과 신경 주위는 물론 뼈 속까지 퍼져 있었다. 결국 메릭은 2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후 그의 몸은 석고상으로 떠졌고 그의 골격은 추후 연구를 위해 보존되었다. 영화 속의 모습은 그의 실제 모습이었다. 외과 의사 프레데릭 트리브스 박사는 그를 치료하다 그의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엘리펀트 맨과 기타 회고담』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영화는 감동의 경험이었다. 내게 그 감동의 장면은 트리브스 박사가 엘리펀트 맨에게 음식 접시를 가져다주려고 복도를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엘리펀트 맨을 병원 시계탑 옆 작은 다락방에 숨겨두었다. 병원장 카곰이 트리브스를 세우고 묻는다. 환자가 정식 입원 절차를 밟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를 격리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병은 전염성이 있는 것인가? 이어 정곡을 찌르는 마지막 질문. 그의 병은 불치병인가?
트리브스가 그렇다고 말하자 카곰은 불치병 환자들이 수용되는 시설들이 따로 있으며 이 병원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오금을 박는다. 트리브스는 안다. 엘리펀트 맨을 병원에 계속 있게 하려면 원장에게 그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얼마 후 환자와 함께 자리한 트리브스는 처음으로 심각하게 대화를 시도한다. “당신이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을 줄 압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아주 천천히 ‘예’라고 말해 보십시오. 메릭은 가까스로 비슷한 소리를 낸다. “말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안녕하세요?” 메릭이 안간힘을 쓴다. “제 이름은...” “존 메릭입니다.” “존 메릭입니다.”
진보가 있자 트리브스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원장이 메릭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트리브스는 그에게 연습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며칠 후에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원장은 내일 2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메릭에게 가르칠 것은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트리브스는 우선 메릭에게 시편 23편 몇 소절을 외우게 한다. 이어 원장이 물어 볼 만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연습한다. “내가 당신을 소개하거든 지금까지 배운 대로 말하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존 메릭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2시가 되자 카곰이 메릭을 만나러 온다. 트리브스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존, 카곰 원장님을 소개합니다. 원장님, 이 사람이 존 메릭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존 메릭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몸이 좀 어떻습니까?” 카곰이 묻는다. “한결 나아졌습니다.” “여기가 편합니까?” ”모두들 아주 친절합니다.“ ”기관지염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메릭은 말문이 막힌다. 대답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트리브스 박사를 쳐다본다. 트리브스 박사는 미리 연습했던 질문을 던져 그를 곤경에서 구해 준다. ”메릭 씨는 이곳 음식이 마음에 든답니다. 그렇지요?“ "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 구타당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카곰이 말한다. “지금은 훨씬 좋습니다.” “트리브스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교사로서 말이오.” 메릭이 할 말을 찾는다. “아주 친절합니다.” 여기서 카곰은 두 사람에게 따져 묻는다. “당신과 트리브스 씨는 이 면담을 얼마나 오랜 동안 준비했소? ” “아주 친절합니다.” 메릭이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만다. “물론 그렇겠지요. 나도 압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메릭 씨 안녕히 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