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도전만이 희망이다

정훈기 지음 | 현재
제1부 새로운 도전예? 일본 연수요?훈기, 일본에 가다'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한 뇌성마비 장애인.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본.' 1994년 1월 화려하게 매스컴에 신고식을 치른 나는, 사실 그다지 화려한 삶을 살지 못했다. 현재 우리 나라 상황에서는 뇌성마비 장애인이 일반인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불리하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부지런하고 몇 배는 더 열심히 공부해도 다른 사람만큼 자리잡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특히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정말 두려웠다. 그 동안 나를 빛나게 했던 서울대학생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나는 또 다른 적(籍)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러나 학벌을 제외하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이제 간신히 학교 생활에 적응할 만하니까 졸업이란다. 게다가 지금은 IMF 아닌가?



아는 분의 도움으로 영한 번역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벤처기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행복했다. 서류 복사 등 잔심부름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깜깜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뇌성마비복지회로부터 일본행을 권유받았다. 내가 받아 든 지원서 타이틀은 'The 1st Duskin Leader Training in Japan'(제1회 더스킨 리더십 연수)'였고, 그 아래 '아태(亞太) 지역의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일본의 '더스킨'이라는 기업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장애인 다섯 명을 선발하여 지도자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연수 내용의 기본 틀은 지원자가 직접 짜게 되어 있었다. 영어로 된 지원서이다. 마침 제대하고 나서 정의감에 불타 있던 재수지기 성윤이가 내 지원서 만들기에 동참했다.



결국 1998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어느 날, 나는 1차 서류 합격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성윤이는 새로운 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아는 것만 확실히 쓰는 게 좋겠다면서 숙제도 내 가며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최종적으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공부 계획에 관한 짧은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커닝 자료였다. 갑자기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단어를 볼 요량이었다. 일본재활협회의 국제부장 및 정보부장을 맡고 있는 가와무라 씨를 만났다. 일본 사회복지법인 태양의 집의 아키타 씨 등 세 명의 면접관으로부터 면접을 치렀다.나는 지금 하찌오지로 이동 중이다. 린탕, 메이와 함께 휴먼케어 협회라는 자립생활 센터에서 일주일간 연수를 받기로 되어 있다. 휴먼케어 협회는 미국에서 시작된 자립생활운동을 십수년 전에 최초로 일본에 도입한 장애인 단체이다. 도쿄에서 만난 일본 장애인들은 거의 모두 자립생활운동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일본의 자립생활운동 자체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생각은 지난번 돗토리라는 곳에서 열렸던 전국장애인시민포럼에 갔다 온 다음부터 완전히 굳어졌다.



연수 첫날부터 그들은 나름대로 짜임새 있게 연수를 이끌어 갔다. 그들은 미국에서 자립생활운동이 생겨난 배경이나 일본 곳곳에 있는 자립생활센터의 운영, 서비스 등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자립생활운동 이야기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나라 같은 짠돌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일 것이다. 더군다나 IMF라는 좋은 핑계거리도 있지 않은가.

"잠시만요. '자립'은 경제적 독립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정부에서 받는 돈으로 살아간다면..." "물론 어떤 의미에서의 '자립'은 일이 필요할 지도 몰라요. 실제로 미국에서는 노동권에 바탕을 두고 장애인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여건이 안 되다 보니 이런 형태로 온 겁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시설에서 주는 밥 먹고 평생을 살아야 합니까? 늦잠 한번 못 자 보고요?" "우리가 말하는 자립생활은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가장 중요시해요. 자기 뜻과는 관계없이 부모나 전문가들에 의해 병원이나 시설 신세를 지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죠. 장애인 연금이나 정부 지원, 즉 훈기 씨가 말하는 금전적인 지원은 우리가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서 결국 얻어 낸 것이고요." 그는 일본 장애인 운동의 중심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뇌성마비 장애인들이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서울에 오자 나의 실업 문제는 현실로 나타났다. 집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갑갑하던 차에 마침 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형님이 컴퓨터를 샀다고 해서 놀러갔다. 그 형님은 40이 넘은 뇌성마비 프로 화가였다. 그 형님의 여동생이 컴퓨터로 자료를 가공하는 부업이 있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하루종일 컴퓨터에 매달려야 하는 일이었지만, 공부하는 셈치고 열심히 했다. 나는 공공근로를 하면서 6년째 쓰고 있던 90년형 14인치 중고 모니터를 내 손으로 17인치 평면 모니터로 바꾸었다. 가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용돈을 찔러 줄 여유도 생겼다.



일본에서 나는 분명 더 성숙해져서 돌아왔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맞설 수 있는 힘도 생겼고, 당당히 공공근로를 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하지만 늘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장애인계를 위한 활동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많이 배우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지만, 장애인운동과 관련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자립생활운동을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비록 자립생활운동이 국내에 새로 소개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할지라도, 몇 주일 귀동냥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내가 자립생활운동에 대해 운을 띄우면서 특히 장애인 연금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던 중, 정립회관에서 일하는 김동호 씨에게서 메일이 왔다. 그 역시 목발을 짚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98년도인가, 미국에서 있었던 자립생활 세미나에 참가했었는데, 장애인이 복지 정책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닌 복지 서비스의 소비자로서 복지 정책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서비스를 받는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카니시 씨도 그 세미나에서 만났고." 나카니시라면 휴먼케어협회를 세우고 일본에서 자립생활운동을 처음 보급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자립생활연구회라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비록 아직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 회원은 없지만, 척수 손상, 소아마비, 뇌성마비 등 여러 부류의 지체장애인들이 모였다. 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부연구기관, 심지어는 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는 장애인도 있었다. 물론 비장애인들도 모임에 참가한다. 아직 일본처럼 눈에 띄게 중증 장애인들은 없지만, 우리 나라에도 자립생활을 생각하는 모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홀가분했다.



회원 중에는 지난 5월에 일본의 휴먼케어협회에 가서 열흘간 자립생활을 직접 체험하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손까지 불편해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1급 장애인인데,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열성적인 자립생활운동가가 되고 난 후였다. 모두가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지쳐 가던 7월, 그는 큰일을 내고 말았다. "여러분, 주위의 많은 분들과 일본 휴먼케어협회의 도움으로 제가 우리 나라 제1호 자립생활센터인 피노키오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많이 와 주시고요,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오, 훈기 씨. 오늘은 알아봤죠? 하하하." 휴먼케어협회 사무국장으로 있는 나카하라 씨가 어제 나를 못 알아본 것을 만회하려고 그러는지 특유의 아줌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손 정도만 움직일 수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장애임에도, 한국에서 일주일째 자립생활세미나 전국 투어를 강행하고 있었다. 일본의 자립생활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잘하면 걸을 수 있다', '잘만 재활훈련을 하면 비장애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한 마디에 전적으로 의지한 채 몇 년씩 어마어마한 돈과 노력을 퍼붓지 말고, 자기의 장애를 똑바로 인식하고 주위의 장애 요소들을 자기한테 맞게 바꾸어서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었다.태양의 집다시 시작이다제2부 다섯 명의 낯선 외국인여기는 일본이다안녕, 벳부두 달 후, 우리는 입양되는 보육원생처럼 하나 둘씩 도야마 선라이즈를 떠났다. 린탕은 오사카 근처 니시노미야에 있는 메인스트림협회로 갔다.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자립생활 운동에 대해 배울 예정이다. 봔도 후지사와에 있는 광우회라는 장애인 시설로 갔다. 그곳에서 컴퓨터로 작곡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무니브는 이곳 도야마 선라이즈에 계속 머물 예정이고, 메이는 연수지가 결정 나지 않아 당분간 무니브와 함께 있기로 했다. 나는 오이타에 있는 태양의 집으로 떠났다.



내 방은 '이꼬이노이에'라는 숙소의 가장 끝방이었다. 장애인 복지 시설이 아닌 장애인들의 공장, 태양의 집은 역시 엄격했다. 나의 첫 연수는 아침 8시부터 진행되었다. 첫주는 오리엔테이션으로, 여러 간부급 직원들한테서 강의를 듣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견학을 시작했다. 첫날 연수가 끝나고 조촐하게 환영파티가 있었다. 이카타 씨는 출장중이라서 참석하지 못했지만, 도쿄의 재활협회에서 나를 담당하던 노무라 씨가 오셔서 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인터넷 기술을 배우게 될 미쓰비시태양주식회사 사람들도 나를 환영해 주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연수 첫날,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평소에는 잘 바르지 않는 로션까지 바르고 숙소를 나섰다. 계획표상으로는 오늘부터 스포츠 연수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훈련과로 찾아가서 내 소개를 했더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카타 씨가 와서 얘기하자 훈련과장은 연락을 못 받았다면서 행사 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오전 시간이 일주일같이 느껴졌다. 오후가 되자 그는 나에게 공예과로 가라고 했다.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공예과에서는 헤드폰 선을 묶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매듭이 있어야 선이 빠지거나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얼떨결에 매듭을 묶었다. 30분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등에서 땀이 흘렀다. 손톱과 목이 굉장히 아팠지만,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공예과는 태양의 집 1,2년차 장애인이나 중증 장애인이 일하는 곳으로, 일을 통한 재활치료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하기 쉬운 여러 가지 스포츠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었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수영을 배우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수영을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다. 훈련과 직원 6명이 시간대 별로 20여 명 되는 공예과 사람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가끔 옆에서 시범이나 보여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일본에서 꼭 수영을 배워 돌아가리라 벼르고 온 내가 아닌가. 나는 매일 저녁 한 시간씩 혼자서 수영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과장이 내가 수영하는 것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내 옆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구만. 무리야, 무리."나는 메일을 확인해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연수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합격통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KBS(수요기획)에서 촬영 제의가 들어왔다. 혈혈단신으로 가는 것보다는 든든한 통역관과 보디가드가 함께 가 주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어서 승낙했다. 5월 10일, 드디어 출국하는 날이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짐을 챙겼다. 기본적인 옷가지가 한 박스,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한 박스다. 책 욕심이 많다 보니, 책도 한 박스가 넘었다. "이것도 가져가야 되는데..." 어머니는 직접 담그신 것이라며 슬그머니 고추장을 꺼내 놓으셨다. "어휴, 늦는 줄 알고 혼났네. 여기 명함!" 며칠 전 일본에 관한 책자에서 일본의 명함 문화를 보고, 부탁을 드렸더니 뇌성마비복지회에서 담당하는 분이 나오셨다.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비행기 탑승구로 향했다. 어머니는 벌써 눈물을 보이셨고, 아버지와 동생도 눈이 빨개졌다. 1년간 가족들과 헤어져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점점 현실로 느껴졌다. 다른 나라에서 대표로 뽑혀 올 연수생들은 영어를 잘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왕따라도 당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조마조마했다. '나이스 미츄. 마이 네임 이즈...' 속으로 자기소개 연습을 했다.일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재활협회 사람들은 일어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영어로 덧붙여 주었다. 하지만 영어는 더 알아듣기 힘들다. 그러니까 나는 영어 설명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이해해야 했다. 나는 사람들과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켜고 다큐멘터리부터 쇼 프로까지 장르 구분 없이 섭렵했다. NHK에서 하는 다큐멘터리나 뉴스는 자막이 딸려 나오기 때문에 올바른 일본어를 배울 수 있다. 오락 프로를 보면 일본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속어나 말투를 흉내낼 수 있다. 특히 100명 가까운 외국인이 나와서, 원조교제 같은 일본의 문제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오락 프로그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청각 자료였다. 외국인의 다소 느릿한 일본어를 들으면서 자막과 맞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인들과의 대화를 많이 시도했다. 전날의 뉴스를 화제 삼기도 하고, 한국 전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농담만큼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초급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이 무슨 대단한 농담을 하겠는가. 고작해야 말장난이다. 하루는 방과 후 생활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생 후지 씨가 자기 친구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이 친구는 한국에서 온 훈기인데, 정말 재미있는 친구지. 특히 오야지 개그가 아주 압권이야." '오야지?' 처음 듣는 말이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 '오야'나 '오야봉'이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까 '최고 수준의 개그'란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미없는 썰렁한 개그라는 뜻이었다. 어느 날, 세미나 뒷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말했다. "오야지 훈기, 오야지 개그를 할 정도면 일본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제3부 그리운 사람, 사람들"다음은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온 정훈기 씨의 연수 보고가 있겠습니다." 내가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자 사회자인 가와무라 씨는 내 컴퓨터 배경화면에 깔려 있는 연수생들의 단체사진을 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동안 신세졌던 많은 사람들과 일본에서 사귄 친구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지난 1년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번 발표를 준비하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태양의 집 연수에서도, 도쿄 연수에서도 획기적이거나 특별하게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민했던 것들을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담아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태양의 집처럼 장애인에게 일을 주는 곳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일해 봤는데, 굉장히 힘든 육체노동이었습니다. 태양의 집은 지금 저임금, 저능률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요즘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자립생활운동은 저 같은 사람마저 일할 의무 없이 정부 지원으로 살아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70년대 밤낮으로 일했던 여러분의 오야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부자 나라 일본도 있는 것 아닙니까?" 웃어야 할 대목이지만 모두 웃지 않는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일을 하든, 자립생활을 하든,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좋은 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올바른 자기 선택, 자기 결정을 하기 위해서라도 머리의 역할을 키워야 합니다. 저는 장애인들이 장애에 관계없이 머리를 키울 수 있도록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발표는 차츰 결론에 다다랐다. "저는 저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풀려고 일본에 왔습니다. 하지만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