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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박진식 지음 | 시대의 창
내 마음에 단비가 되어준 첫 번째 친구는 임주섭이다. 우리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라 어릴 적부터 같이 어울렸고, 초등학교도 같아서 마주칠 기회가 많았으나 병마는 그마저도 이별하게 했다. 그러다가 병석을 벗어나 운동을 하면서 주섭이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인 그는 어느덧 듬직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진식이 형..., 맞지." 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친동생을 보는 듯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주섭이도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아련한 바람이 스치듯 이루어진 십 수년 만의 재회는 내가 줄곧 걷는 운동을 하던 1994년 무렵부터 자연스런 만남으로 이어졌다.



주섭이가 자주 놀러 온다고 말했지만 난 그저 말없이 눈으로 답했다. 사실 난 기대하지 않았다. 동년배도 아닐뿐더러 그는 바쁜 사회인이라 내게 올 시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다. 오랫동안 왕래가 끊겼던 사이라 처음에는 상당히 서먹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내 버릇이 그와의 만남을 거북스럽게 만드는 한편 너무나 사람이 그리웠던 터라 마주보는 것이 도리어 고통이었다. 나의 외로움을 눈치 챈 그는 더욱 친밀하게 다가왔다. 밥도 같이 먹고 때로는 잠도 같이 잤다.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주섭이의 친구가 주섭이를 만나려고 우리 집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그와 이별을 했다. 주섭이가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난 것이다. 어차피 처음 만날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지만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후로 주섭이는 명절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한 번은 선물이라며 세 장의 헌혈증서를 내밀었다. "난 워낙 튼튼해서 필요 없으니까, 형 써. 나중에 또 갖다 줄게." 헌혈증서를 잡은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감격할 건 없고.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해. 수혈 받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란 말이야." 그리고는 주섭이가 갑자기 "형, 빨리 먹어. 노래방 가게." 하는 것이었다. 난 깜짝 놀랐다. "몸은 아프고 피곤하겠지만 형만 괜찮다면 내가 떠메고 갈게." 그는 너스레를 떨며 나를 데리고 노래방에 갔다.



노래방에서 경쾌한 멜로디가 계속 울려 퍼지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특히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사운드'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주섭이가 음료수를 쑥 내밀었다. "형, 뭐 부를 거야. 뽕짝 불러. 흥겨운 노래는 뽕짝이 최고야." 난 한참을 고민했다. 기다림에 지친 주섭이가 뽕짝을 부르기 시작했다. 반주와 함께 천장에 매달린 사이키 조명이 휘황찬란한 불을 뿜어대자 또 다시 충격을 받은 나는 덜덜 떨렸다. 주섭이가 노래를 끄고 "형, 괜찮아?" 묻자, "고래사냥." 자칫하다가는 주섭이에게 상처를 줄지 몰라 신청곡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조용하게 고래사냥을 불렀다. '나에게 이런 시간이 있을 줄이야...' 난 속으로 나의 뺨을 꼬집고 또 꼬집어야 했다.



주섭이는 광주, 부산, 수원, 서울 등을 돌며 객지생활을 했다. 거처를 이동하기 전에는 꼭 순창 집에 내려와 생활했다. 그가 하는 일이 여의치 않은 것 같아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그는 늘 씩씩했다. "형, 바람도 쐬고 운동도 하게 밖으로 나가자." 난 보폭이 짧고 보행 속도도 느려서 서너 살 꼬마와 걸어도 뒤쳐질 정도였지만 주섭이는 불평 한마디 없이 함께 걸어 주었다. 내가 지친 듯하면 날 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 혼자 운동할 때는 큰길이나 집 앞 골목이 전부였는데 주섭이 덕분에 오랫동안 가 보지 못했던 시냇가도 가볼 수 있었다. 주섭이는 늘 내 손을 꼭 잡고 어디든 거침없이 다녔다.

"형은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야. 고비를 매번 잘 넘기니. 형의 외모를 보면 그 심각성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정말 대단해. 내가 형에게 반한 건 바로 그 의지야. 나한테 십분의 일만 줘." 그렇게 말하곤 하던 주섭이가 일이 뜻대로 안 풀리자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난 심호흡을 수백 번 하고 나서 말했다. "주섭아, 우리 그만 만나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남자끼리의 이별이 어떤 것인지, 남자의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이 어떤 것인지... 그 후, 주섭이는 몇 년간 방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나 또한 정신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형! 나, 마음 잡았네." "나도 네게조차 말 못 할 고통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는 말없이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비록 산다는 것이 막막한 현실이지만 수동적인 타성에 젖어 있으면 자신의 문제점을 악화시키고 생각을 편협하게 하며, 주체성마저 퇴보시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을 잃고 헤매야 했을 때 저는 그걸 깨달았습니다.



절망을 단기간에 극복하는 길은 없습니다. 25년에 걸친 투병 기간 동안 제게는 오직 스스로를 견디는 삶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견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불행한 삶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이 무료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 인간은 나약해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견딜 수 있는 의지를 기르는 것이 그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강해진다는 것도 너무나 잔혹하더군요. 저는 저의 기막힌 현실을 당연히 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그 숱한 절망과 혼수상태를 이겨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견뎌내면서도 내일을 견뎌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내일 일이고 우선 오늘을 견뎌내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오늘이 있어야 내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아무리 힘겨운 현실이라도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제 자신만 초라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저주스러운 운명과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저를 그토록 모질게 괴롭히던 '죽음의 악령'도 제가 그처럼 죽기살기로 덤벼드니까 결국 꼬리를 내리더군요.



저는 끊임없이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위험한 고비를 하나씩 넘기고,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지만 저는 정신병마저 헤쳐나온 제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 어떤 상황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석회가 급기야 혈관까지 침범하게 되면 저는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의지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32년을 싸워온 저로서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내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현실을 운명이라고 체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 운명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사랑합니다. 비록 아픔뿐인 삶이지만 그것이 바로 제 삶이기에 제가 보듬어 안아야겠지요. 마음은 분주한데 생명의 시계가 제게 얼마나 여유를 줄지 모르겠군요.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또 다시 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지금의 운명으로 환생하고 싶습니다. 지금껏 맞선 경험으로 병마와 운명을 단숨에 물리쳐 버리고 싶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푸쉬킨의 이 시는, 산다는 것 앞에서 저를 숙연하게 합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끝끝내 지켜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저 같은 인생도 이렇게 32년을 살아내고 있습니다.제2부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승부, 그리고 장엄한 승리제3부 내 영혼의 연가



악마로부터 지켜낸 내 영혼의 연가나의 유년은 더없이 맑게 빛났다제4부 그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내 마음의 단비, 임주섭제5부 장애인도 다같은 삶의 구성원이다



세상의 모든 불치병자들에게제6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어머니 전상서"애기가 탐스럽기도 하지. 우량아 선발대회에 한 번 나가 보세요." 30년 전, 어머니가 날 들쳐업고 시장에 갈 때면 늘 듣던 말이다. 그토록 건강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일곱 살이 지나면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가 찾아들었다. 발병 초기에는 몸이 약해지면서 관절만 아주 조금씩 부자유스러워졌는데 발목과 무릎 관절이 특히 심했다. 아무리 똑바로 걸으려고 해도 절뚝거렸다. 쓸모 없는 석회물질이 관절에 엉겨붙어서 지체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지체장애인이 되어버린 고달픈 일상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도는 칼슘이 석회로 변해, 관절에 차곡차곡 엉겨붙었다. 일단 읍내의 작은 병원부터 찾았다. "대도시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으세요. 저로선 무슨 병인지조차 알 수가 없군요." 어쩌면 당연한 대답인지도 몰랐다. 산 사람이 돌로 변해 가는 병에 걸렸으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1980년 여름, 나는 전남 광주 기독교병원에 입원했다. 내 나이 만 열두 살 때였다. 병원에서는 나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을 할 때마저 망설였다. 충치를 뽑을 때도 피의 응고작용이 정상인지, 심장에는 영향이 없을 것인지, 쇼크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하는 모든 부작용을 세밀하게 검진한 후에야 뽑았다.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복잡한 검사를 거치고 나서 병의 정체를 알아내기는 했지만 치료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방법이라면, 축적된 석회석을 수술로 일일이 뜯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궁색한 방법도 이론이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근원적인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맞는 얘기였다. 스무 살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으려니와, 설령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거의 몸 전체로 퍼져서 굳어버린 돌멩이를 조각하듯 꺼내야 하는 수술을 항우장사라도 이겨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아드님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생사에 관계없이 아드님을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희귀한 질환에 걸린 아드님은 그 자체로 의학적 의미가 큽니다." "부모가 되어 갖고 자식한테 몹쓸 짓 하는 것만 같아서 차마 그리는 못 하겄소. 죽이더라도 부모 품에서 죽일라요."나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지금껏 만 32년을 살고 있다. 어릴 적 순창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맑은 시내가 들판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산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고 시내는 계절마다 다른 음악을 연주했다. 산에 깃든 온갖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그 모든 것들과 벗삼아 놀았다. 넙적사슴벌레, 투구벌레, 풍뎅이, 하늘소... 나는 특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나 나비를 졸졸 따라 다니는 걸 좋아했다.



우리 집은 농사도 짓고 닭, 토끼, 개 같은 짐승도 여남은 마리씩 키웠다. 항상 토끼 먹이를 뜯어오는 건 내 몫이었지만 산이며 들로 나가는 것은 어쨌든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늘 누런 발발이 '케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토끼풀을 뜯다 말고 햇살이 쏟아지는 숲을 빙 둘러보며 숨을 고를 때면, 계곡을 휘감아오는 바람에 온몸이 두둥실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몸이 급격히 허약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철부지라서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산을 오르기가 벅차게 된 후 나는 주로 집 앞으로 흐르는 냇물에서 놀았다. 자연히 벗삼아 노는 곤충도 물방개로 바뀌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물고기나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다슬기 꽁무니를 이빨로 으깬 후 쏙쏙 빨아먹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해마다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다슬기를 잡았다. 물장구도 치고 돌팔매질도 하면서 다슬기를 잡다 보면 해지는 줄도 몰랐다.



"박씨 아제, 많이도 잡았네요. 저는 쬐까밖에 못 잡았는디..." "앗따 제가 잡기는 뭘 잡아라. 굼뜬 남자라 아짐(아줌마)보다 절반밖에 못 잡았어라." "엄살은, 아들꺼정 손이 너이라 솔찬히 잡았으면서 달라고 할까 봐 겁나요, 아제." "허어! 그런가. 에라 모르겄다. 아짐 한 주먹 받으쇼." "고것 주고 차용증 써 달라고..." "하하하!" "깔깔깔!" "허허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함박웃음이 노을 속으로 넉넉하게 울려 퍼졌다. 나의 유년은 그런 속에서 더없이 맑게 빛났다.쓰러진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참는 것,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결과였다. 분명 그것은 불행이었지만 불행이 아니었다. 절망도, 희망도 아니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이었다. 나의 일상이었다. 한 평도 못 되는 공간에 꼼짝 못하고 누워지냈지만 내 안에서는 사춘기, 꿈, 친구, 사랑 등 온갖 욕망이 아프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 모든 잡념과 씨름하면서 병마와 싸워야 했다.



피와 섞여 온몸을 돌아다니던 석회는 말랑말랑한 젤리 상태가 되어 손톱과 잇몸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젤리가 된 석회는 점점 굳어갔다. 내 몸은 살려달라면서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석회가 빠질 때면 뼈 위에서부터 피부까지 홍시처럼 헐었다. 멀쩡하던 생살이 그 지경이 되니, 칼로 뼛속까지 긁어내는 듯했다. 뼈마저 군데군데 하얗게 드러났다. 특정 부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신에서 그러다 보니 아예 지겨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석회는 이물질이라 체내에서 물리적 자극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전신에서 부기를 동반한 환부가 발생하였다. 일종의 체내 욕창이었다. 석회화가 심화될수록 그 증상도 심해져서 환부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목과 몸통에 부종이 집중되었다. 그것은 생명이 더욱 위험해지고 있다는 경고였지만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전신이 뻥! 터지는 듯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깨어날 때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터져 있었다.



슬픔이 강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내 뱃속에서 큰돌이 만져졌다. 내 몸 안에 있던 돌들이 전신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이 사방 팔방에서 나를 옥죄어 왔다. 근육이나 살 중 일부만 돌이 된 곳은 그래도 돌을 빼내기가 수월했다. 뼈에서 피부까지 모두 돌로 변한 곳은 어머니가 쇠꼬챙이로 긁어내야 했다. 돌이 어찌나 단단한지 긁어낼 때마다 쇠꼬챙이가 휘었고 살이 뒤엉킨 곳은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점이 튀었다. 나는 꽃다운 청소년기를 그렇게 병마와의 잔인한 전쟁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몸에서 돌이 나왔다고 해서 병세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몸 안에 가득 찬 돌이 남아돌아 몸 밖으로 삐어져 나온 것에 불과했다.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서 장난하듯 석회석을 망치로 깨보았다. 몇 번을 치자 돌가루가 하얗게 튀었다. '이런 돌들이 내 몸 안에 가득하다니. 돌, 돌, 돌...' 난 늘 돌의 악령에게 시달렸다. 잠잘 때만이라도 평안하기를 바랐지만 악령은 꿈속까지 쫓아다녔다. 잠들기도 두렵고 잠깨기도 두려웠다.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단련 받아온 내 의지는 '인간의 영혼'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그렇게 꺼져 가는 영혼을 위로하는 눈길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눈앞에서 자식이 병마에게 그렇게 파 먹혀도 그것뿐이었다. 자식도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리 죽음의 사신이 와서 애간장을 녹이는 진혼곡이 울려 퍼져도 침묵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1991년, 정월 초하룻날 오른쪽 가슴을 압사 당하는 듯한 통증이 내리쳤다. 마치 누군가 폐와 허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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