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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박진식 지음 | 시대의 창
제1부 내 어린 시절의 슬픔



건널 수 없는 강




"애기가 탐스럽기도 하지. 우량아 선발대회에 한 번 나가 보세요." 30년 전, 어머니가 날 들쳐업고 시장에 갈 때면 늘 듣던 말이다. 그토록 건강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일곱 살이 지나면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가 찾아들었다. 발병 초기에는 몸이 약해지면서 관절만 아주 조금씩 부자유스러워졌는데 발목과 무릎 관절이 특히 심했다. 아무리 똑바로 걸으려고 해도 절뚝거렸다. 쓸모 없는 석회물질이 관절에 엉겨붙어서 지체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지체장애인이 되어버린 고달픈 일상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도는 칼슘이 석회로 변해, 관절에 차곡차곡 엉겨붙었다. 일단 읍내의 작은 병원부터 찾았다. "대도시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으세요. 저로선 무슨 병인지조차 알 수가 없군요." 어쩌면 당연한 대답인지도 몰랐다. 산 사람이 돌로 변해 가는 병에 걸렸으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1980년 여름, 나는 전남 광주 기독교병원에 입원했다. 내 나이 만 열두 살 때였다. 병원에서는 나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을 할 때마저 망설였다. 충치를 뽑을 때도 피의 응고작용이 정상인지, 심장에는 영향이 없을 것인지, 쇼크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하는 모든 부작용을 세밀하게 검진한 후에야 뽑았다.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복잡한 검사를 거치고 나서 병의 정체를 알아내기는 했지만 치료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방법이라면, 축적된 석회석을 수술로 일일이 뜯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궁색한 방법도 이론이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근원적인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맞는 얘기였다. 스무 살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으려니와, 설령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거의 몸 전체로 퍼져서 굳어버린 돌멩이를 조각하듯 꺼내야 하는 수술을 항우장사라도 이겨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아드님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생사에 관계없이 아드님을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희귀한 질환에 걸린 아드님은 그 자체로 의학적 의미가 큽니다." "부모가 되어 갖고 자식한테 몹쓸 짓 하는 것만 같아서 차마 그리는 못 하겄소. 죽이더라도 부모 품에서 죽일라요."

나의 유년은 더없이 맑게 빛났다



나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지금껏 만 32년을 살고 있다. 어릴 적 순창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맑은 시내가 들판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산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고 시내는 계절마다 다른 음악을 연주했다. 산에 깃든 온갖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그 모든 것들과 벗삼아 놀았다. 넙적사슴벌레, 투구벌레, 풍뎅이, 하늘소... 나는 특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나 나비를 졸졸 따라 다니는 걸 좋아했다.

우리 집은 농사도 짓고 닭, 토끼, 개 같은 짐승도 여남은 마리씩 키웠다. 항상 토끼 먹이를 뜯어오는 건 내 몫이었지만 산이며 들로 나가는 것은 어쨌든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늘 누런 발발이 '케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토끼풀을 뜯다 말고 햇살이 쏟아지는 숲을 빙 둘러보며 숨을 고를 때면, 계곡을 휘감아오는 바람에 온몸이 두둥실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몸이 급격히 허약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철부지라서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산을 오르기가 벅차게 된 후 나는 주로 집 앞으로 흐르는 냇물에서 놀았다. 자연히 벗삼아 노는 곤충도 물방개로 바뀌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물고기나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다슬기 꽁무니를 이빨로 으깬 후 쏙쏙 빨아먹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해마다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다슬기를 잡았다. 물장구도 치고 돌팔매질도 하면서 다슬기를 잡다 보면 해지는 줄도 몰랐다.

"박씨 아제, 많이도 잡았네요. 저는 쬐까밖에 못 잡았는디..." "앗따 제가 잡기는 뭘 잡아라. 굼뜬 남자라 아짐(아줌마)보다 절반밖에 못 잡았어라." "엄살은, 아들꺼정 손이 너이라 솔찬히 잡았으면서 달라고 할까 봐 겁나요, 아제." "허어! 그런가. 에라 모르겄다. 아짐 한 주먹 받으쇼." "고것 주고 차용증 써 달라고..." "하하하!" "깔깔깔!" "허허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함박웃음이 노을 속으로 넉넉하게 울려 퍼졌다. 나의 유년은 그런 속에서 더없이 맑게 빛났다.

생사의 기로에서 치른 6년 전쟁 - 14살부터 20살까지의 비망록



쓰러진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참는 것,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결과였다. 분명 그것은 불행이었지만 불행이 아니었다. 절망도, 희망도 아니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이었다. 나의 일상이었다. 한 평도 못 되는 공간에 꼼짝 못하고 누워지냈지만 내 안에서는 사춘기, 꿈, 친구, 사랑 등 온갖 욕망이 아프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 모든 잡념과 씨름하면서 병마와 싸워야 했다.

피와 섞여 온몸을 돌아다니던 석회는 말랑말랑한 젤리 상태가 되어 손톱과 잇몸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젤리가 된 석회는 점점 굳어갔다. 내 몸은 살려달라면서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석회가 빠질 때면 뼈 위에서부터 피부까지 홍시처럼 헐었다. 멀쩡하던 생살이 그 지경이 되니, 칼로 뼛속까지 긁어내는 듯했다. 뼈마저 군데군데 하얗게 드러났다. 특정 부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신에서 그러다 보니 아예 지겨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석회는 이물질이라 체내에서 물리적 자극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전신에서 부기를 동반한 환부가 발생하였다. 일종의 체내 욕창이었다. 석회화가 심화될수록 그 증상도 심해져서 환부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목과 몸통에 부종이 집중되었다. 그것은 생명이 더욱 위험해지고 있다는 경고였지만 태연해지려고 애썼다. 전신이 뻥! 터지는 듯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깨어날 때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터져 있었다.

슬픔이 강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내 뱃속에서 큰돌이 만져졌다. 내 몸 안에 있던 돌들이 전신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이 사방 팔방에서 나를 옥죄어 왔다. 근육이나 살 중 일부만 돌이 된 곳은 그래도 돌을 빼내기가 수월했다. 뼈에서 피부까지 모두 돌로 변한 곳은 어머니가 쇠꼬챙이로 긁어내야 했다. 돌이 어찌나 단단한지 긁어낼 때마다 쇠꼬챙이가 휘었고 살이 뒤엉킨 곳은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점이 튀었다. 나는 꽃다운 청소년기를 그렇게 병마와의 잔인한 전쟁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몸에서 돌이 나왔다고 해서 병세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몸 안에 가득 찬 돌이 남아돌아 몸 밖으로 삐어져 나온 것에 불과했다.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서 장난하듯 석회석을 망치로 깨보았다. 몇 번을 치자 돌가루가 하얗게 튀었다. '이런 돌들이 내 몸 안에 가득하다니. 돌, 돌, 돌...' 난 늘 돌의 악령에게 시달렸다. 잠잘 때만이라도 평안하기를 바랐지만 악령은 꿈속까지 쫓아다녔다. 잠들기도 두렵고 잠깨기도 두려웠다.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단련 받아온 내 의지는 '인간의 영혼'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그렇게 꺼져 가는 영혼을 위로하는 눈길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눈앞에서 자식이 병마에게 그렇게 파 먹혀도 그것뿐이었다. 자식도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리 죽음의 사신이 와서 애간장을 녹이는 진혼곡이 울려 퍼져도 침묵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2부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승부, 그리고 장엄한 승리




1991년, 정월 초하룻날 오른쪽 가슴을 압사 당하는 듯한 통증이 내리쳤다. 마치 누군가 폐와 허파를 발로 꾹꾹 밟아대는 것 같았다. 허파와 폐에 찬 석회에서 공기가 빠지며 돌이 되고 있는 소리였다. 그 터널을 견뎌낸 1년 후, 정확히 1992년 정월 초하루에 왼쪽 가슴의 고통이 재현되었다. 똑같은 증상이었으나 심장이 있는 곳이라 통증이 더욱 심했다. 양쪽 가슴의 석회화는 확연하게 내 숨통을 조여갔다. 심장도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평소 100~120회를 오가던 맥박이 80에서 50으로 곤두박질쳤다.

의사 선생님은 만일의 사태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심장에 부정맥이 생겼습니다. 심장에 석회화가 진행되고 있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심장마비를 대비해야겠습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마지막 보류인 심장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곤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번 가빠진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더니 점점 악화되어 간헐적으로 숨이 막히는 무호흡 상태가 되곤 했다. 무호흡 상태까지 겪게 되자 죽음의 한기가 서늘하게 덮쳐왔다. 나는 이제 전기의자 앞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어 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더 심화된다면 나는 자가호흡을 할 수 없겠지.' 나는 그 순간, 죽음에 대한 준비를 거부하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멍하니 죽을 순 없다. 일단 폐활량을 길러야 한다. 그렇다면 수년 전처럼 밤 운동이 제격이다.' 사실 밤에 걷는다는 건 나에게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의지대로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밤거리로 나왔으나 한동안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오자마자 들어갔다. 심하게 아플 때면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넘을 수 없는 벽을 조금씩 헐었다. 지팡이 한 개와 정신력에 의지해 텅 빈 밤거리를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온갖 시름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비록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그지없이 편안했다. 언제부턴가 불면증도 달아나고 누우면 금세 잠들 수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단잠이었다. 나는 더욱 열심히 밤거리를 활보했다. 사력을 다해 다섯 시간을 걸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걷히며 장엄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어느새 폐활량이 늘었는지 호흡곤란도 누그러졌다. 부정맥도 완화되었다.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운동으로 심장 기능이 활발해지자 심장을 공격하던 석회가 피와 함께 다른 곳으로 보내져 심장이 화를 면한 것 같았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몸을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진식아~! 장하다, 진식아~!" 마치 산 정상에 올라 땀을 훔치며 함성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은 이미 하늘을 날고, 내 다리는 산을 오르고, 내 두 팔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제3부 내 영혼의 연가



악마로부터 지켜낸 내 영혼의 연가




지난 20년간의 고통이 급기야는 정신병까지 안겨주었다. 1997년 내 나이 스물 아홉, 나는 이제 정신병과도 싸워야 했다. 병마의 수많은 강펀치를 얻어 맞아온 나는 이미 폐쇄공포증, 광장 공포증 등을 앓는 정신질환자였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리 분별력을 잃게 한다. 완전히 백지상태로 돌아가 무의식 속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한마디로 '자아'를 상실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가슴과 목을 쥐어뜯었다. 피가 나고 붉게 헐어버린 피부가 벗겨져도 자해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잠을 자면서도 가슴을 후벼팠다. 피가 줄줄 흐르며 화끈거리는 그 상처에 냉찜질을 해주고, 약을 발라주던 어머니는 "손을 묶자, 묶어. 몸뚱이가 안 아픈 곳이 없으면서 1년이 넘도록 가슴을 쥐어뜯으니 엄마는 어쩌라고 그러냐. 엄마 손부터 자르고 니 손도 콱, 잘라버리든지 하자." 어머니의 절규가 내 가슴을 때려도 이미 난 통제불능 상태였다. 그나마 내 손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여서 더 큰 자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난 나에게 꿈에서도 끌려 다녔다. 답은 없고 폭주하는 생각뿐인 시간 속에서 신경은 바늘 끝처럼 예민해졌다. 온몸을 쥐가 갉아먹는 것 같았다. 일단 정신이 황폐해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것과 같았다. 돌아가고 싶어도 타고 돌아갈 배가 없었다. 날은 저물어 캄캄한데 푸르스름한 달빛과 밤벌레 소리만 음산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극한의 공포로 미쳐가던 나는 두려움마저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먹여주면 먹고, 씻겨주면 씻고, 깨워주면 일어나다가 급기야 정신분열을 겪게 되었다. 내 속에 귀신이 차고 들어와 나를 밀어내고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정신질환은 병원균으로 생기는 병이 아니므로 그걸 치유하는 약물이 없었다. 신경안정제 같은 건 불안정한 정신으로 초죽음이 된 육체를 일시적으로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보조제일 뿐이다. 정신병을 치료하려면 활발한 대인관계, 긍정적 사고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의 처방은 너무 막연했기 때문에 좀더 확실한 치료법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밤을 지새고, 또 지새웠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앓기만 하던 병자의 발작이었다. 내가 살아서 내 영혼의 환영을 본 것도 바로 그런 시간의 틈새에서였다.

정신병을 유발하는 병마인 실직, 상처,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을 병원균이라고 한다면 그걸 병적으로 수용한 마음가짐 자체가 병원체이다. 따라서 치료법은, 마음가짐을 항상 바르게 하도록 노력하면서 어떠한 고통이라도 담담하게 여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회복하려는 의지를 스스로 다질 때 비로소 정신병을 조금씩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탈출구가 보이자, 아무리 외적인 영향이 원인이었다고 해도 정신병은 걸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스스로 일으킨다는 걸 깨달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길 수 있다"는 격언대로 정신병의 실체와 나의 병든 자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되자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내 방식대로 정신병에 대한 내성을 길러나갔다. 나 자신이야 내가 정신병자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마치 악마가 달콤한 유혹으로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정신병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라 해도 정신의 유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때 나는 정신병은 아무리 훌륭한 치료를 받아도 결국 당사자가 치료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로소 어머니를 알았다. 모든 진리보다 앞서는 존재, 자식에게 영원히 안식이 되는 존재, 내 목숨보다 소중한 어머니가 바로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왜 존재하지? 죽음이란 뭘까? 모두 덧없는 허무가 아닌지? 인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정답도 없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에라, 모르겠다. 그런 게 뭐 대순가. 신 김치에 라면이나 한 봉지 끓여먹고 TV나 보자. 참, 인터넷 게임도 한 판 때려야지... 살다보면 길이 생기겠지.' 식의 가볍고 장난스런 태도를 갖는 것이 정신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종 코믹한 만화를 보며 낄낄거리는 것도, 새우깡을 입에 물고 TV 오락 프로를 보며 빈둥거리는 것도 인생의 보약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제4부 그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내 마음의 단비, 임주섭




내 마음에 단비가 되어준 첫 번째 친구는 임주섭이다. 우리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라 어릴 적부터 같이 어울렸고, 초등학교도 같아서 마주칠 기회가 많았으나 병마는 그마저도 이별하게 했다. 그러다가 병석을 벗어나 운동을 하면서 주섭이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인 그는 어느덧 듬직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진식이 형..., 맞지." 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친동생을 보는 듯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주섭이도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아련한 바람이 스치듯 이루어진 십 수년 만의 재회는 내가 줄곧 걷는 운동을 하던 1994년 무렵부터 자연스런 만남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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