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을 여는 부모들의 이야기
민들레 편집실 지음 | 민들레
1. 학교, 낯설게 보기
엄마, 도대체 학교는 왜 다녀야 하는 거야?요즘 6학년이 된 큰애한테서 학교 얘기를 들으면 걱정도 되고 화도 나면서 심각해졌다가 결국 서글퍼진다. 도대체 우리네 학교는 언제쯤이나 좋아질까? 내가 학교를 다녔던 때보다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교실마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선생님 탁자에 전화가 연결되고 음악 칠판과 영어 칠판이 따로 있고 화장실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것은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아직도 준비물을 빠뜨리고 학교에 가 쩔쩔매는 꿈을 꾼다.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것들은 대학시험을 보고 한 달이 안 되어 깡그리 잊어먹었지만 머리 속은 늘 찌뿌등하고 우울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얼 배웠을까? 학교는 폭력과 비굴의 냄새가 난다. 아무리 교육개혁을 부르짖어도 지워지지 않는. 지금 내 아이가 맡고 있는 냄새도 이런 냄새다. 어느 날 큰애 해빈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휙 집어던지며 나에게 소리쳤다. "엄마, 도대체 학교는 왜 다녀야 하는 거야?"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해빈이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 듣는 애들은 다섯 명도 안되고, 애들이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서 선생님 목소리도 안 들린다며 불평했다. 선생님은 뭐 하시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혼자 원맨쇼 한다니까!" 그것도 모르냐는 말투다.
며칠이 지나자 해빈이는 또 화가 펄펄 나서 집으로 오더니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어." 한다. 태권도 선생님이 학부모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않다가 그 부모가 가고 나면 아이들 앞에서 흉을 본다는 거다. 아이들 역시 무서운 선생님께는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선생님이 가고 나면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욕을 한단다. 또 한번은 옆반 선생님한테 여자친구 둘이 불려가 맞고 돌아왔는데 한 아이는 얼굴에 위아래로 줄이 갔고 다른 아이는 코피가 터져 3교시에 난 코피가 5교시가 되도록 멎지 않았다고 한다. 해빈이는 코피 흘리는 아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는데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한동안 벌건 핏물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 했다며 끔찍해 했다.
이럴 때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하는 점이다. 해빈이는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눈이 생기고, 분노를 느낄 줄도 알고,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는 세상과 어른에 대해 몹시 화가 나는,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순수하고 개선 의지에 불타는 그런 시절을 맞이한 듯하다. 한창 많은 것을 느끼고,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데 이 사회는 그럴 만한 동기를 주지 못하고 그에 맞게 격려해주지도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른들이 성의가 없어." 해빈이가 소리치는 말에 나도 맞받아 되뇌었다. "맞아. 이 사회가 도대체 성의가 없는 사회야."
여름방학이 되자 아이들은 한가로이 아침을 맞고 책을 보거나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한가로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옛날에 같이 놀던 추억에 젖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간답게 지낸 여름방학이었다. 그러다 다시 개학을 맞으면서 아이들도 나도 그리 한가로울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다시 학과공부,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다시 엄습해 왔다. 좀더 자세하게 열거하자면 자기는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데 아이들은 전부 커닝을 하고, 그런 것을 선생님이 묵과하고, 선생님이 어떨 때는 야단을 치고 어떨 때는 야단을 치지 않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면박을 주고, 가르쳐주지도 않고 시험을 보는 등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스트레스였다.
이건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바보같이 참기만 하는 것이 한(限)이라는 정서인가? 착한 학생 콤플렉스도 또 다른 식민지 근성이다. 한 번도 민중혁명이 성공을 못한 나라의 백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좌절감과 구질구질한 피해의식. 나는 아직도 착한 학생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아이도 역사란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막연히 깨닫고 있다. 한바탕 흥분을 하고 나면 아이의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그늘이 져 있다.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마." "안 돼. 친구랑 놀아야 돼." "해빈아, 엄마는 너한테 넓은 들판을 마구 달리는 그런 자유를 주고 싶어. 아주 넓은 시야를 갖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랄 수 있게 돕고 싶어." 나는 아이가 좌절감을 물려받기 전에,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란 이 사회에 감염되기 전에 무언가 감행할 일이 있음을 느낀다.
얘야, 날개를 달고 맘껏 날렴1972년 3월 5일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입학식을 했다. 그때 이 세상에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늘 말씀하셨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초등학교 일 학년 시절 나에게 선생님은 전지전능한, 절대 복종해야 할 위대한 존재였다. 선생님에 대한 그 경외감과 동경은 나도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확고한 희망으로 이어졌고 결국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손을 잡아주셨던 나의 은사님들 같은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교사가 되고 나니 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위대한 선생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가르치고, 학교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제때 지시사항 전달하고 필요한 것들을 걷는 일뿐이었다. 모든 기준이 '공부'였고 목적도 '공부'였다. 학생이니까. 나는 교사니까. 공부를 시키는 것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 맹신했다. 자율학습 시간에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엄하게 야단을 쳤고, 그러면 아이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 공부를 했다. 적어도 외견상은.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옳은 일을 했다고 내심 흐뭇해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 삶의 깊이 만큼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던 내게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정말 마음 뜨겁게 공부했고 내 꿈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나는 공부만이 학생의 전부이고,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술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사람마다 삶의 길이 다를 수 있다고,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부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가르칠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과연 가르치면 배우기는 하는 것인지.
내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열네 살, 겨우 중학교 1학년, 적어도 고등학교 과정은 마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요건이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아이는 학교가 싫다고 했다. 친구들과 경쟁을 해야만 해서.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어린 학생이라고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선생님' 아닌 '직장인'들이 싫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자기 필요에 맞지 않아서.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순응해야만 하는 일방적인 힘의 구조가 싫어서...
나는 견뎌내라고 했다. 경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발전의 원동력일 수 있다고. 시험을 위한 공부라 해도 결국은 지식으로 머리에 남는다고. 선생님들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고,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라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평생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많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혼란이 오기 쉽다고. 또, 세상 살다보면 벗어나고 싶은 상황, 싫은 사람은 만나기 마련이니, 그런 상황을 견뎌내는 것도 교육이라고 했다.
아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웃음도 잃은 채 혼자 있으려는 시간이 많아졌다. 학교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에게 더 이상 학교에 남아 있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 나이의 아이가 있어야 할 곳은 학교라는, 학교만이 정상적인 장소라는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로 학교를 비판하고, 확고한 자기 삶의 목표와 계획을 마련한, 그래서 더욱 학교는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절규하는 아이에게 그곳만이 있을 자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이의 행복해질 권리를 유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둔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서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고, 책도 읽고, 컴퓨터를 통해 세상과 대화도 하고, 자고 싶으면 자고, 산책하고 싶으면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잘하고 있다. '탈학교 모임'에서 활동하며 책에 글도 쓰고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의견에 응답도 보내고, 그러는 가운데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대견스럽다. 내 아이가 자랑스럽다. 아이는 그랬다. '학교 그만두더니 겨우 그렇게밖에 되지 못했느냐?'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내 아이의 선택이, 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학교교육 부정론자는 아니다. 분명 학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아이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거기서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우리가 흔히 '문제아' 또는 '부적응아'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꽤 있다. 이는 학교란 아이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고,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그 안에 적응해야 한다는 요지부동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동안 우리에게 학교는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의심하지 말아야 할 너무나도 당연한 권위 중 하나였다. 그 안에서 숨막혀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런 아이들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주자. 학교만이 정상이라는 편견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지 말자.
관습에서 벗어나기난 어렸을 때부터 공교육을 보완하기 위해서 홈스쿨링을 했다. 우리 가족은 나의 배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덕택에 학교와는 뿌리부터 다른 배움의 철학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역사를 공부할 때는 교과서가 아닌 다른 책을 보았다. 『미국 민중의 역사』 같은 책 말이다. 이 책은 미국 원주민의 시각으로 콜럼버스 중심의 세계관에 맞서고 있다. 가족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니 난 운이 좋았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정답은 아니다. 가정에선 이런 것 말고도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오히려 제도교육의 대안 형태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일찍이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섰고,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며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나는 존 개토의 실험학교에서 모험을 시작했다. 도시계획 평가로 생계를 꾸리고, 전통적인 교육을 비관적으로 검토하는 일, 이런 모험들이 바로 오늘날 이 자리까지 이어져 왔다. 실험학교를 나온 뒤에도 거길 다녔다는 사실이 늘 고마웠다. 한편으론 다시금 학업 곧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계속해야 했을 때, 날 부적응자로 만든 존 개토 선생님이 정말 밉긴 했지만.
뉴욕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고등학교를 4년 동안 다녔다. 그 4년은, 13살 때 도시를 조사하며 보냈던 1년보다도 삶에 도움이 안 됐던 시간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문을 박차고 나오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를 그만두고는 혼자 집을 얻어 살면서 일자리를 잡아 하루종일 일했다. 학교는 그 해 끝 무렵 열린 졸업식에만 참석했다.
후회뿐인 의무교육 기간을 일단 마치고 나자 수많은 길이 열려 있었다. 배움의 지평을 창조적으로 열어갈 수 있는 길들이었다. 파나마와 케냐에서 대학을 다니고 일자리를 얻었다.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의 구석진 곳까지 돌아다니며 살았다. 파나마에선 한 달 동안 정글에 캠프를 치고, 타마린 원숭이 - 원숭이들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 를 연구했다. 케냐에선 석 달 동안 텐트에서 먹고 자며 야생동물 보호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때 마사이족 목동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와이에선 정부기관인 '수생·야생 생물국'에서 일했다.
마지막으로 몸담은 곳은 대학이었다. 대학에선 객관성을 쌓아나가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사상과 세계관에 깊이를 더해가면서 인간적인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배우는 자세로 참여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기금을 모아서 브라질에 있는 아마존으로 갔다. 개발 계획이 지역 환경과 주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게 초점이었다. 석 달 동안 아마존을 탐험했다. 때론 배를 타고, 때론 버스를 타고, 또 때론 간이 침대가 딸린 트럭을 타고 밧줄에 묶인 황소를 벗삼아.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조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이 일은 학문적, 철학적, 사회 참여적 관심을 삶의 문제로 가져오려 했던 오랜 세월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리고 오늘도 난 여전히 이런 자세로 살고 있다.
내가 오늘날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건, 창조적이고도 도전적인 교육 환경(내겐 매사추세츠 암허스트에 있는 햄프셔 칼리지가 그랬다.)을 성공적으로 찾아낸 덕택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엔 처음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대학에서 시작한 아마존 연구에 관한 책이다. 이 일은 내 성장과정 가운데 한 시기의 결정체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적인 배움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아주 새롭고 훨씬 풍부한 시기를 여는 서막이었다.
브라질에서, 우리 교육제도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부류의 교사들을 만났으니까. 내 스승들은 영세농, 인디언 추장, 고무 채취자, 농촌 지도자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교육을 못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석 달 동안 가르쳐준 건, 학교교육 16년 동안 얻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인 파이아칸 카이아포(카이아포 인디언 마을의 정치 지도자)는 내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체포되었다. 인디언 영토 개발 문제와 관련해 정부정책을 바꿨다는 혐의였다. 카이아포 같은 이의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정부 기관원들은 나까지 브라질에서 추방했다.
2. 학교 보내지 않고 아이 키우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조용한 광릉 숲에 가서 누워 자다 오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랑 오빠는 시간이 어떤지 불어보자꾸나." 이번 봄에 우리 가족이 함께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광릉수목원에 가기 위해 예약하고,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것은 내 몫이다. 열 살짜리 막내는 그때부터 무엇을 가져갈지, 간식거리로 뭘 준비할 지를 메모한다. 큰 아이들은 광릉은 어떤 곳인지 조사하고 빨리 갈 수 있는 길과 가서 주의 깊게 볼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때에 따라 카메라와 읽을 거리도 챙긴다.
96년 막내의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좋지 않고 그것을 대변이라도 하듯 학교에서 '왕따' 제일순위가 장애아이라는 얘기까지 듣고는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관할 교육청 장학사와 해당 학교의 교감 선생님과 전화로 상담을 했다. 수원에서 어느 장애아이가 따돌림과 놀림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한 일이 생긴 직후였다. "몸은 장애가 있지만 지능은 정상이고 자존심도 강한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며 놀림과 모욕을 받게 되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겁니다.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까?" 선생님은 대책이 없다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막내의 가정학교는 한가하기 그지없는 놀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박물관에 가서 옛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알게 된 엘리자의 급하고 처절한 도망길을 지도로 찾아가기도 했다. 4월 들면서부터는 봄에 관한 동시를 매일 한 편씩 받아쓰고 외워서 감상하며 눈이 녹는 촉촉한 진흙 길을 자박자박 걷고 있는 짚신 신은 나무꾼이 되어 보기도 한다. 자신이 필요를 느끼면 초등학교의 전 교육과정은 금방 해낼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걱정한다. 아이들의 사회성은 어떡하느냐고, 또래집단과 어울려야 하는데 집에 끼고만 있어서 될 일이냐고 한다. 그러나 자기만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남의 생각을 인정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문제가 생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을 섬기는 마음은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는 가정에서 더욱 잘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는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캠프도 가고 환경오염 문제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오히려 나이를 초월해서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장점을 알기나 하는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귀하고 소중하며, 그 사람들을 평생 섬기고 돕기 위해서는 실력과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