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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린다

요쉬카 피셔 지음 | 궁리
오늘도 아침 8시부터 밤늦게까지 여러 일정에 쫓겼다. 국빈을 맞고 각종 회의를 하고, 사무실에서 잡다한 협의와 인터뷰를 하고, 마지막에는 조그만 방에서 연방총리와 만나 의논하는 일 등, 밤 10시 반쯤이 되어서야 겨우 하루 일과가 끝났다. 이 시간이면 다른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나는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본의 거리를 1시간 가량 뛰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독일 외무장관으로서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계속 기진맥진한 상태이고,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몸이 너무 피곤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예전에는 술집을 가거나 단지 잠을 자는 것이 휴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정이 다 되었더라도 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을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약 1시간 정도 10킬로미터를 뛰고 나서 땀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과 피곤함이 완전히 사라진다. 골치 아픈 정치적인 문제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달리는 중에 때때로 머릿속에 놀라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1시간 정도 달리고 나면 지칠 대로 지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좋은 휴식이 될 수 있다. 최소한 나도 이런 것을 경험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했다. 달리기는 사실 힘든 일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몸 전체를 긴장시키는 일이다. 몸 속의 모든 내장기관들이 활발히 움직이게 되고 산소를 가장 말단의 모세혈관까지 보내주기 위해 허파와 심장은 더욱 심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럴 때 머리는 명상을 할 수 있는 평정 상태에 놓인다. 바로 이때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마치 스스로 기어 나오듯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1997년 2월과 3월 사이에 나는 나의 달리기 생활의 가장 어려운 장애물 하나를 극복했다. 고통의 단계가 끝난 것이다. 이제 달리기는 몇 개월 전처럼 힘을 소진하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달리기를 즐기기에 충분한 기본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는 동안 내 몸의 어느 부분도 고통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장거리 달리기라는 다른 차원을 열어 젖힐 수 있게 되었다. 내 몸 상태는 점점 더 좋아졌고 거리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나의 달리기 성과와 내가 설정한 제한 시간 이전에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을 나는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동시에 한 단계를 종결짓는 것이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라인 강이 나에게 답을 주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먼 곳을 새로운 도달 목표로 세운 것이다.



1997년 부활절 무렵, 「함부르크 일러스트」에서 연락이 왔다. 한 편집인이 나와 함께 달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건강 특집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아주 날씨 좋은 봄날 그 편집인과 함께 라인 강변을 달렸다. 사진기자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를 쫓아왔다.



달리기가 끝나자 기자는 예상했던 질문을 던졌다. "마라톤에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 있는가?" 나는 "못할 것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의 야심찬 달리기 목표는 기자를 증인으로 발표된 셈이 되었다. 이미 말한 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성급하게 말해버린 내 의도가 2주 후, 스포츠 잡지에 실렸기 때문이다. 그 스포츠 잡지는 다음 해에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라고 실었다.나는 요즘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내가 육체적으로 나 자신을 포기했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만약 일년 전에 누군가가 요쉬카 피셔는 50세 생일에 몸무게가 단지 75킬로그램밖에 안 될 것이고 마라톤 대회에 나갈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심하게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어떤가? 나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성공했다. 늪에서 혼자 힘으로 기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달리기는 살빼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다른 생활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달리기는 나의 생활에 있어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달리기는 또한 나의 새로운 생활에 분명한 틀을 만들어주었고 방향과 받침대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새로운 생활 리듬을 발견했고 이제 이러한 리듬을 깨는 그 어떤 것도 내 일상생활에 끼여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의 거의 완벽한 성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점점 위협적인 것이 되기 시작하였다. 나에 대해 자꾸만 병을 언급하는 것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자기방어가 숨어 있었다. 진지하게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급격한 육체의 변화가 계속 유지되고, 50살 먹은 정치가가 매일 스트레스 받는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면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만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나는 그렇게 살을 빼지 못할까?'라고.



나는 드디어 나의 50회 생일 일주일 후에 열리는 함부르크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트레이너는 반드시 훈련일지를 쓸 것을 강조했다. 나의 훈련일지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경험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997년 12월 15일, 나는 눈이 퍼붓는 날 밤에 빈의 프라터 공원을 달렸다. 16일에는 베른에서, 17일에는 취리히에서 눈 속을 달렸다. 12월 30일에는 10킬로미터 내 최고 기록인 53분을 기록했다. 1998년 2월 1일 일요일, 25킬로미터 장거리를 2시간 14분에 뛴 것으로 적혀 있다. 칼날같이 추운 바람, 혹독한 날씨, 영하 2도. 나는 이 날의 달리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98년 3월 1일, 나는 처음으로 달리기 대회에 참가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모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연습할 때의 페이스를 잃고 상당히 빠른 템포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너무 빨랐다. 나는 몇 백 미터도 못 가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나는 속도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주자들의 그룹을 찾았다. 그들과 함께 뛰면서 나의 템포를 찾고는 계속 그 그룹의 속도에 맞춰 뛰었다. 나의 첫 번째 하프 마라톤 기록은 1시간 37분 33초였다.



내가 마라톤이라는 큰 모험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나에게 천천히 어떤 좋지 못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셔, 너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이런 의문이 자꾸 들었다. '내가 그만한 거리를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만약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방법을 알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에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터는 장거리 달리기 중에 경호원 두 명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목표 지점에 질질 끌리듯 도착했다. 그것은 마라톤이 아니었다.



결승선에 기어 들어오거나 모든 기운이 빠진 듯 완전히 탈진한 마라톤 주자의 고통스런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고통의 장면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저 제대로 갈 수만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될 거야. 긴장을 풀어. 너는 지금까지 이번 마라톤 대회를 위해 아주 잘 준비해 왔어. 너는 네가 얼마나 힘들고 조심스럽게 훈련해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난 거야!'1998년 4월 하순, 드디어 함부르크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약간 초조한 상태였다. 오늘은 특히 중요한 날이다. 전자 칩과 번호(50번)를 받아 옷과 신발에 부착한 뒤 10시 정각에 출발했다. 긴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함부르크 서쪽 지역의 분위기는 정말 황홀했다. 지역 주민들이 멋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캠핑 의자에 앉아 샴페인을 곁들인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숨가쁘게 달리고 있는 주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즐겁게 응원하고 있었다. 첫 번째 마라톤에서는 주변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완전히 달리기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와 말을 걸었다. 나는 약간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방해를 받으며 달려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주 잘난 체하는 어떤 사람이 달리는 동안 내내 바로 앞에서 왔다갔다했다. 어떤 때는 뒤로 뛰면서 나에게 말을 걸곤 했다. 나는 그 사람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피곤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같이 뛰던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말이 적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다. 많은 주자들이 나와 함께 뛰려고 했다.



밤벡은 이미 하프 코스 마라톤 거리보다 더 먼 거리에 있다. 이제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은 거리라도 점점 더 길게 느껴졌다. 1킬로미터가 넘어갈 때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직 지치지 않았다. 단지 남은 21킬로미터를 달리면서부터는 고독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내 뒤에서 독일의 유명한 「불바르 신문」 기자가 뛰면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편집국에 핸드폰으로 약간 실망이 섞인 목소리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아니오, 그는 아직도 자신의 템포로 침착하게 뛰고 있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결승점에 도착할 것 같은데요." 「불바르 신문」의 젊은 기자는 이미 출발할 때부터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의 나의 상황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 신문사에서는 기자를 보내 나의 마라톤 레이스를 동행 취재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피로는 많이 쌓였지만 더 잘 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도 몸을 질질 끌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모든 신경을 주법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나는 환호와 응원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침내 결승점에 도착했다. 전자시계엔 42.195킬로미터와 넷 타임 3시간 41분 36초가 표시되었다. 결승점에 도달한 10,134명 중 나는 4,179위였다. 비교적 좋은 기록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마라톤을 해낸 것이다. 1996년 여름, 내 개인적인 위기를 겪은 지 1년 9개월 만에 그리고 나의 50년 생애에 도달하는 시기에 나의 첫 번째 마라톤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이다. 나는 2년 전의 불행했던 8월을 다시 생각했다. 살빼기에서 출발해 마라톤을 완주하다니!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완전히 다른 계획, 완전히 다른 생활 습관, 다른 목표, 다른 생활의 우선 순위, 그리고 흔들림 없는 훈련과 많은 인내, 그리고 계속할 수 있는 끈기, 이 모든 것들이 한 개인의 완전한 변화, 완전한 개혁을 이루어냈다. 직업적으로 느끼는 부담과 스트레스, 즉 내 삶의 전체적인 환경은 변화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빼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마라톤 완주라는 엄청난 일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해냈던 것이다.나의 첫 번째 마라톤1996년 여름, 나는 181센티미터의 키에 11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다녔다. 숨이 찬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난 후 저울은 75킬로그램을 가리켰다. 호흡도 편해졌다. 나는 그 사이 어떤 체중 감량 치료도 받지 않았고, 어떤 약물도 복용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식이요법이나 그밖에 날씬해지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는 데 돈을 쓰지 않았다.



나는 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급격한 신체변화를 숨길 수가 없었다. 나의 신체 변화는 대중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나는 언론의 관심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비만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질문과 편지를 받았다. "피셔 씨, 당신의 다이어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떤 비결도 없다. 요쉬카 피셔의 기적과 같은 다이어트 비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1996년 나는 갑자기 개인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거의 파국 상태라고 느낄 정도였다. 나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파멸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결혼 생활이 깨진 것 말고도, 개인적인 생활태도, 나의 외모, 생각까지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나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50살의 문턱에서 나는 나의 삶 전체를 변화시켜야만 했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런 결심을 하고 실천하자 생활이 제대로 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놀랄 정도로 말이다.



전문가들과 전문 지식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거치면서 관심을 갖게 된 후에야 도움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내 자신의 의지가 이런 길을 실행하고 끝까지 어떤 결실을 볼 수 있게 만든 근본 힘이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조언이나 충고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다. 필요 이상의 몸무게로 겪는 고통만으로는 그런 결심을 하기에 충분치 않다. 더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다.내 몸무게가 결정적으로 빠르게 늘어나는 쪽으로 자리잡은 것은 1985년 12월 헤센 주의 환경부 장관으로 공직에 처음 취임하면서부터다. 내가 1985년 환경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을 때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녹색당은 정권 참여 문제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반면 연립정권 파트너였던 사민당은 산업과 노동정책에 대해 거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1986년 4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핵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연립정권은 의견 충돌을 심하게 일으키고 난 후 상호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당시 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녹색당 출신 환경부 장관이었다. 녹색당은 반핵 정당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적인 관점에서나 당의 입장에서도 핵구름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방사능으로부터의 보호는 사민당의 사회부 장관 소관이었고, 핵 감시와 에너지정책 역시 경제부 장관 소관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권한이 없었다. 나는 생태학 관련 전문성 때문에 당원들이 환경부 장관으로 선출한 것이 아니라 녹색당이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한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나온 정치적 포스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 끊이질 않았다. 문제 해결에 대한 압박감은 계속 커지고, 책임감도 점점 무거워졌다. 스트레스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쌓이고, 어디에도 탈출구는 보이질 않았다. 도망갈 비상구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공격하는 여러 요소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장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정신과 육체를 위해 항상 팽팽하게 불룩해진 배를 지닌 모습을 한 철갑 옷을 입게 되었다.



나의 살찐 시절의 끝 무렵, 나는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개인적으로 자포자기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식과 폭식을 오가는 사이 몸무게가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는 요요 현상이 일어났다. 굶을 때는 몸무게가 천천히 빠지지만 고통에 찬 단식의 기간이 끝난 후에는 항상 그래 왔듯이 급격하게 다시 살이 찐다. 금식을 했다가 중단했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내 몸무게의 최고치는 매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내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내가 나와의 결혼 생활 13년을 청산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마른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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