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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종말

움베르토 에코 지음 | 끌리오
제1부 2000년과 시간의 층위들/ 스티븐 제이굴드



우리는 왜 2000년의 '2000'이란 숫자에 종말이란 관념을 연상하고 두려워하는가? 이 대담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 질문에 대답해준다. 고생물학자라는 직업의 이름 때문에 굴드와의 대담이 딱딱한 자연과학 용어로 채워질 것이라고 미리 염려하지 않길 바란다. 여기서 그가 보여준 지식은 공식 같은 것이 아니며, 과학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교와 역사에 대한 전문가 못지 않은 해박한 지식과 특정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굴드는 2000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재미있게도, 서양의 책력 때문에 2000년은 특별한 해라고 말한다. 그는 이번 2000년은 400년 만의 윤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년은 4년마다 돌아오는 해가 아니던가?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주기는 365일 5시간 48분 45.96768... 초인데, 1년을 365일로 정한 서양의 책력에 따르면 4년마다 1일 정도가 모자라다. 그래서 율리우스 캐사르는 율리우스력을 새로 채택, 4년마다 하루를 더 첨가하도록 했다.

그 해가 바로 윤년이다. 이 윤년은 태양주기를 365. 25로 치고 계산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태양주기를 더 현실적인 근사치로 산정하면 365. 2422 정도이기 때문에 윤년을 계속 설정하다 보면 100년에 하루 정도의 시간이 남게 된다. 그래서 16세기 말 크리스토퍼 클라우스는 이러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100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소거하면서 400으로 나눌 수 있는 세기의 매 전환점에서는 윤년을 되살리기로 했고, 그러므로 00이 붙는 해에 윤년이 온 것은 1600년 이후 2000년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2000년은 서양 책력 덕분에 특이한 해로 기록되겠지만, 그 외에도 2000이란 숫자가 주는 심리학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천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의미다. 1000이란 숫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심리는 서양 문화에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서』의 〈베드로 후서〉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기독교 사상에서 파란을 가져온다. 이 '1000년 = 하루'의 등식이 〈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 설과 연관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천지창조와 천년왕국의 시작인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6000년이 걸린다.

왜냐하면 신은 천지를 6일 만에 창조했고 일곱째 날에 쉬었는데 그 하루를 천 년이라 계산하면 안식일, 즉 천년왕국은 6000년 만에 온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지도층에서는 천년왕국설과 같은 종말론의 확산을 막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금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은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말세론은 부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기 때문에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말론 운동은 일반적인 사회운동(33쪽)"이라는 것이다. 1000이라는 숫자에 불안을 느끼거나 동요하는 현대의 움직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세계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굴드가 전공한 고생물학에서는 세계의 역사, 특히 생명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45억 년 나이를 먹은 지구에 생명이 출현한 것은 37억 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지구 안의 생명의 역사는 조용한 진화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급격한 대량 멸종으로 점철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럽의 종말론은 지구가 이미 비극적인 종말을 몇 번 밟았다는 것을 몰랐던 셈이다. 또한 굴드는 생명의 진화는 이러한 급격한 대량 멸종뿐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사건들은 필연적인 것, 법칙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우연뿐이며, 생명의 역사 속에는 기원부터 일련의 우연들이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멸종 역시 어떤 필연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굴드는 핵 또는 온실 효과, 환경 조작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 달린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에도 생명 역사에서의 우연성이 통용된다고 말한다. 역사 발전도 어떤 법칙에 지배되지 않으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신중한 낙관론자라고 밝힌다. 역사가 우연이라면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열릴 수 있다. 어떤 문제의 해결은 인간이 하기에 달린 것이다. 그는 미래에 대해 비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컴퓨터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질문자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문화 유산을 보존할 수단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지식의 보존, 즉 우리의 정체성의 보존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제2부 '요한계시록'에 대한 재해석/ 장 들뤼모



우리는 왜 2000년의 '2000'이란 숫자에 종말이란 관념을 연상하고 두려워하는가? 이 대담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 질문에 대답해준다. 고생물학자라는 직업의 이름 때문에 굴드와의 대담이 딱딱한 자연과학 용어로 채워질 것이라고 미리 염려하지 않길 바란다. 여기서 그가 보여준 지식은 공식 같은 것이 아니며, 과학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교와 역사에 대한 전문가 못지 않은 해박한 지식과 특정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굴드는 2000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재미있게도, 서양의 책력 때문에 2000년은 특별한 해라고 말한다. 그는 이번 2000년은 400년 만의 윤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년은 4년마다 돌아오는 해가 아니던가?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주기는 365일 5시간 48분 45.96768... 초인데, 1년을 365일로 정한 서양의 책력에 따르면 4년마다 1일 정도가 모자라다. 그래서 율리우스 캐사르는 율리우스력을 새로 채택, 4년마다 하루를 더 첨가하도록 했다.

그 해가 바로 윤년이다. 이 윤년은 태양주기를 365. 25로 치고 계산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태양주기를 더 현실적인 근사치로 산정하면 365. 2422 정도이기 때문에 윤년을 계속 설정하다 보면 100년에 하루 정도의 시간이 남게 된다. 그래서 16세기 말 크리스토퍼 클라우스는 이러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100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소거하면서 400으로 나눌 수 있는 세기의 매 전환점에서는 윤년을 되살리기로 했고, 그러므로 00이 붙는 해에 윤년이 온 것은 1600년 이후 2000년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2000년은 서양 책력 덕분에 특이한 해로 기록되겠지만, 그 외에도 2000이란 숫자가 주는 심리학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천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의미다. 1000이란 숫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심리는 서양 문화에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서』의 〈베드로 후서〉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1000년이 하루 같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기독교 사상에서 파란을 가져온다. 이 '1000년 = 하루'의 등식이 〈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 설과 연관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천지창조와 천년왕국의 시작인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6000년이 걸린다.

왜냐하면 신은 천지를 6일 만에 창조했고 일곱째 날에 쉬었는데 그 하루를 천 년이라 계산하면 안식일, 즉 천년왕국은 6000년 만에 온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지도층에서는 천년왕국설과 같은 종말론의 확산을 막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금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은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말세론은 부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기 때문에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말론 운동은 일반적인 사회운동(33쪽)"이라는 것이다. 1000이라는 숫자에 불안을 느끼거나 동요하는 현대의 움직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세계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굴드가 전공한 고생물학에서는 세계의 역사, 특히 생명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45억 년 나이를 먹은 지구에 생명이 출현한 것은 37억 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지구 안의 생명의 역사는 조용한 진화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급격한 대량 멸종으로 점철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럽의 종말론은 지구가 이미 비극적인 종말을 몇 번 밟았다는 것을 몰랐던 셈이다. 또한 굴드는 생명의 진화는 이러한 급격한 대량 멸종뿐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사건들은 필연적인 것, 법칙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우연뿐이며, 생명의 역사 속에는 기원부터 일련의 우연들이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멸종 역시 어떤 필연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굴드는 핵 또는 온실 효과, 환경 조작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 달린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에도 생명 역사에서의 우연성이 통용된다고 말한다. 역사 발전도 어떤 법칙에 지배되지 않으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신중한 낙관론자라고 밝힌다. 역사가 우연이라면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열릴 수 있다. 어떤 문제의 해결은 인간이 하기에 달린 것이다. 그는 미래에 대해 비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컴퓨터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질문자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문화 유산을 보존할 수단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지식의 보존, 즉 우리의 정체성의 보존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제3부 스핑크스의 문제/ 장 클로드 카리에르



시나리오 작가이자 극작가, 코미디언인 장 클로드 카리에르와의 대담은, 그의 다채로운 경력에서 기대할 수 있듯이 다방면에 걸친 문제를 시간이란 화두와 관련지어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작가라는 그의 경력 때문에 일상사에 관련된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만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철학, 과학, 종교, 신화, 언어 등 굵직한 문제와 씨름한다. 아마 이 책에 실린 4편의 대담 중 이 대담이 가장 길면서도 가장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양 사상을 아우르는 그의 폭넓은 사고는 다른 대담보다 더욱 독특하고 흥미있는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게 해준다. 독자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힌두교의 시간관을 가지고 현대를 생각하는 대담 초두부터 어떤 독특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힌두교도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칼리유가', 즉 '파괴의 시대'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칼리유가에선 문명이 점차 파괴적으로 쇠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이 칼리유가에서도 다르마(올바른 삶의 원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래야 파괴의 신 시바에 대항하는 삶의 신 비슈누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르마를 유지하면 칼리유가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슈누는 시바가 승리하게 되면 잠을 자게 되는데, 이때 꾸는 꿈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게 된다. 힌두교 신화에 의하면 문명이 파괴에 도달하더라도 모든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파괴의 시대 다음에는 다시 생명의 시대가 온다고 믿은 힌두교의 순환적 시간관과는 달리, 신적 존재의 도래가 시간의 완성이라는 생각은 그렇다면 유대 그리스도교의 시간관일 뿐이다. 동양의 시간관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까리에르로서는 시간의 완성이라는 유대-그리스도교적 발상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간의 완성이라는 테마를 부정하지 않고 현대 과학을 동원해 진지하게 재고해 본다. 그에 의하면, 물리학자들은 왜 시간은 하나의 방향이 있는가, 왜 모든 것은 늙는가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은 시간 속에 변형, 곧 진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변형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소립자다. 우리는 바로 이 소립자들의 시간을 시간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의 종말은,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정의한 인류의 시간들의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카리에르는 소립자들의 시간인 시간들의 종말, 그것은 시간의 승리입니다.(179쪽)"라고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시간이 자신으로부터 사라진다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소립자가 사멸하는 것, 물질이 소멸되어 버릴 때다. 이때 마침내 참된 무, 니르바나가 될 것이다. 카리에르는 결국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면 영원의 시간인 주관적인 시간으로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객관적인 영원의 시간, 즉 그리스도교적인 시간의 종말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시간의 범위 밖에 있는 신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사라질 세계 속에서 시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신이 인간의 공간을 파괴하기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신이 시간을 파괴할 것인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181쪽)"

우리가 카리에르의 힌두교식 시대 정의를 따라 칼리의 시대 속에 산다고 할 때, "그럼 이 시대의 파괴성은 어떤 특성을 지닌 파괴성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카리에르는 다른 대담자들과 마찬가지로 비관론자가 아니다. 그는 이 시대에 대해 완전히 희망적이거나 완전히 비관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 우리들 시대의 특성이 어떻기에? 그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들은 마치 테베의 입구에 있는 오이디푸스와 같습니다.(191쪽)" 그는 우리가 몇 가지 스핑크스(수수께끼)에 직면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지구의 사막화와 인구과밀, 고독과 의사소통, 그리고 지식의 발전과 무지의 확산이라는 역설적인 문제들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역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편에서는 기아로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불필요한 음식에 깔려 죽을 지경이고, 지식은 증가하면서도 베끼기와 재생산 모방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물질주의의 제국이 건설되었지만 새로운 종교형태들과 점성술 같은 비합리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발전된 과학적 지식은 신비로운 것으로 남으면서 그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오류를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TV나 인터넷도 역시 지식의 보급과 의사소통의 촉진이라는 목적을 두고 있지만, 무지와 나쁜 것을 더 전파시키고 있다.

카리에르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다시 유토피아를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유토피아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부 세계로부터 유토피아 세계를 방어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만약 우리가 공격받는다면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그러려면 군대와 같은 위계질서가 필요하고 이때 다시 우리가 비난했던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저급한 일을 누가 하는가의 문제이다. 카리에르는 유토피아적 희망이 없는 사회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회 참여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리에르는 우리의 사회 참여만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속도 제일주의의 시간에 대응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의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카리에르는 15-17세기부터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의 시간 개념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15~17세기 이후 이룩한 지리상의 발견과 교통수단의 발전은 결국 이전의 시간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공간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복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서구 문명은 시간 속에 정착하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역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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