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종말
움베르토 에코 지음 | 끌리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역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편에서는 기아로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불필요한 음식에 깔려 죽을 지경이고, 지식은 증가하면서도 베끼기와 재생산 모방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물질주의의 제국이 건설되었지만 새로운 종교형태들과 점성술 같은 비합리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발전된 과학적 지식은 신비로운 것으로 남으면서 그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오류를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TV나 인터넷도 역시 지식의 보급과 의사소통의 촉진이라는 목적을 두고 있지만, 무지와 나쁜 것을 더 전파시키고 있다.
카리에르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다시 유토피아를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유토피아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부 세계로부터 유토피아 세계를 방어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만약 우리가 공격받는다면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그러려면 군대와 같은 위계질서가 필요하고 이때 다시 우리가 비난했던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저급한 일을 누가 하는가의 문제이다. 카리에르는 유토피아적 희망이 없는 사회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회 참여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리에르는 우리의 사회 참여만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속도 제일주의의 시간에 대응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의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카리에르는 15-17세기부터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의 시간 개념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15~17세기 이후 이룩한 지리상의 발견과 교통수단의 발전은 결국 이전의 시간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공간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복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서구 문명은 시간 속에 정착하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역사라고 불렀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매 순간 도박을 하며 살게 되었다. 마치 우리를 절멸시킬 수 있는 시간의 정지를 두려워하듯 시계의 시간에 맞추어 살게 된 것이다. 카리에르는 우리가 이러한 객관적인 시간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과 비례해 그 거리를 지키는 것이며 그 압박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방법은 개인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리듬을 강요하는 단체의 움직임을 경멸한다고 한다.)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카리에르의 시적인 표현을 보자. "시간,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 (그런데) 우리들은 시간의 집인 것이다.(239쪽)" 그런데 우리들은 주관적으로 동일한 시간 속에 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카리에르는 그 가능성 중의 하나로 꿈을 든다. 그는 꿈이 시간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승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시간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가벼운 마음을 가지도록 느끼는 것은 이 꿈에서라는 것이다.
삶 속의 꿈이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소설가 호세 베르가민의 글을 회상한다. "베르가민은 우리들의 생활은 시간의 당혹스럽고 황홀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원성의 순간들을 횡단하는 일련의 역사적 순간들입니다.(많은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형태의 시들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244쪽)" 관객들은 구경거리에 참가하면서 늙어 가는 것을 중단한다. 바로 시간의 멈춤 상태이다. 인간에게 이보다 더 높은 소망이 있겠느냐며 그는 찬탄한다. 그 시간은 순간을 잊게 하고 그의 오래된 노동을 유예시킨다. 시간을 피해 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시, 예술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바로 그의 희망-꿈이다.이런 논의의 맥락에서 에코는 20세기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문명에서 형성되어야 할 윤리학을 생각한다. 20세기의 위대한 발명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위대한 발견은 대부분 19세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에코가 말하는 금세기의 대혁명은-사람들이 이상하게 간과하고 있지만-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는 풍습이나 남녀관계, 부자관계,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이전보다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는 도덕 의식이 분출한 세기이다. 가령, 잔인성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과거에는 회개하는 것 없이 직접적인 잔인함이 요구되었으나 현대의 잔인성은 학살에 서명을 하고 나서 자신은 그것의 결과를 잘 몰랐다고 하는 비겁한 잔인성이다. 즉, 위선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선은 현대가 과거보다 더 많은 도덕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도덕의식과 도덕적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는 날카롭게 묻는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과거의 범죄에 대한 심사숙고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위협에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 아닐까?
에코는 20세기의 윤리를 넘는 21세기의 윤리로서 '타협'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타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적 금기나 언어 사용도 타협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도 타협의 윤리로서 다가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환경 파괴 과정은 불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세계를 왜곡시키고 천천히 파괴해 온 역사이다.
그러나 인간도 하나의 지구이다. 그래서 에코는 인간의 제거를 이야기하는 과격한 환경운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그는 지구와 우리는 타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끼리도 역시 타협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명은 아무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가령, 새로이 진보된 정보 때문에 정기적으로 쓸모 없어지는 컴퓨터에 적용하는 단기의 원칙이 녹음기에도 적용되어 금방 망가지는 라디오를 업체들은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는 현재의 경향이 지속되는 것은 숙명이 아니며, 우리는 비용이 덜 드는 문명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스로 비극적 낙관주의자라고 부른다. 그 낙관주의는 작은 개선을 계속 실천하면서 세상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인간 공동체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낙관주의이다. 그래서 그는 비그리스도교인도 그리스도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원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윤리적 원칙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긍정에서 성립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인류의 일부가, 인간을 만들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신을 창조할 만큼 충분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312쪽)"라는 물음, 인류는 "이런 것을 창조할 줄도 알았다."는 긍정 말이다.그런데 그의 논의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그가 숙고하고 있는 동양식 사고와 현대 물리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현대사회가 역설의 사회라고 지적했는데 사회의 외양과 그 뒷면의 정반대의 면모를 꿰뚫어볼 수 있는 유연하고 날카로운 사고는 아마도 그가 서양 문명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동양적 사고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양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부류는 아니다. 그는 유토피아의 복원을 말하고 불교는 좌파적이라고 선언한다. 그 유토피아는 19세기식, 20세기식의 유토피아는 아닌 듯하다.
카리에르는 객관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에서 거리를 두어야 이 현대 세계의 속도의 시간에 휘말리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9-20세기의 유토피아는 바로 이 속도의 시간을 가속화하려 하지 않았을까? 자본주의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주의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는 그와는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불명료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이다.
에코는 2000년을 맞이하면서 나타나는 종말론 담론에 대해, 거대 이데올로기의 몰락에 따른 이념적 공백에 의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은 위의 논자들의 접근과는 차별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에코의 이 역사적 접근에 동의하는 편이다. 사실, 어떤 현상에 대해 인류라든가 역사라든가 종교 등을 동원하여 너무 거창하게 접근하게 되면 안보이게 되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에코는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바로 지금의 현상은 저 요한계시록 문구의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몇천 년을 넘나들면서 해명한다기보다는 바로 10년 전의 사회주의 몰락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훨씬 많을지도 모은다. 하지만 그런 논의는 역시 큰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른 논자들의 이야기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에코 역시 들뤼모처럼 종말론이 19세기 유토피아 사상의 연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에코의 논의에서 숙고하게 되는 것은 인간은 이데올로기 없이 살 수 없으며, 종말론 같은 사교도 그러기에 성행하는 것이란 그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란 것은 없다. 우리는 어떻든 어떤 마음의 지주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은 이념의 지주는 무엇일까. 그런데 에코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몰락한 후 그 집단적 이념이 사라지고 사적으로 변하는데 우려하고 잇다. 결국 앞으로 나만 믿는 광신자들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의 우려는 나에게 피부에 닿는 현실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에도 불구하고 에코가 내세운 현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타협의 윤리는 공허해 보인다. 우리 문명에 있어서 긍정적인 일들은 점잖은 타협으로 이루어졌던 것일까? 싸움과 실수, 광기도 현 문명의 어두운 곳에서 많은 일들을 하지 않았겠는가?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현 문명의 밝은 곳에 있지 않은가? 타협의 윤리는 사실 서양 민주주의의 기간이 되는 사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결과는 과연 옳기만 하였던가? 이런 질문들이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그러자 이 책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제기하게 만드는 책이란 것을 깨달았다. 희망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독자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들을 펼쳐 놓은 것이리라. 카리에르가 말했듯이 시간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면, 저자들의 생각에 거리를 두면서 나 자신의 생각으로 나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달성된 것이고, 나 역시 독서의 열매를 다 먹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인 금세기의 석학 에코의 종말론과 현대 문명관은 어떠할까. 그는 2000년의 2000이란 숫자의 문제성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대중들은 별 관심이 없는데 언론에서 강박관념을 조장하려고 한다고 꼬집는다. 세계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다. 편집광적 해석자들이 지금 종말에 대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런 현상은 2000년과 관계가 없고 위대한 이데올로기가 산산조각 부서진 이후 벌어진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 건설에 참여를 한 위대한 이데올로기가 몰락한 지금 젊은이들은 방황하면서 종교에 회귀, 집단 모험심을 되찾으려 한다. 그런데 종교가 계율을 따르는 것을 우리들의 책임 아래 내버려두는 데 반하여 사교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지도자의 의지에 복종케 한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종교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할 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종말론 같은 사교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는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생각은 인간은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주에 적용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우리의 경험을 우주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논리적 오류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종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에코는 말한다.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고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지상의 역사, 즉 직선적 시간이라는 화살을 만든 것은 유대-그리스도교 사상, <요한계시록>의 메세지이다. 그런데 그는 종말론의 역사적 의의는 중대하다고 이야기한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성 요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숭상된 진보의 개념 역시 이 종말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는 진보가 축적적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진보는 상승국면과 이면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기에 와서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에코는 진보의 개념을 규정하는 지식의 끊임없는 축적이라는 생각은 넌센스라고 지적한다. 사실 문명의 역사는 지식이 사라지는 깊은 구렁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에코의 말에 따르면, 사회 문화적 기억은 모든 것을 간직하는 기능이 아니라 거르는 기능에 있다. 물론 기억이 없으면 생존이란 없다. 기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상한다는 것은 골라낸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보르헤스 작품의 퓨네스처럼, 기억으로 인해 행동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에코는 인터넷이나 웹을 이 거대한 퓨네스에 비유한다. 이 컴퓨터 공간에서는 누가 무엇을 거를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전자 두뇌는 여과할 능력, 즉 차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여과에 관해서는 아직 새로운 매개 변수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279쪽)"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코가 이데올로기적 검열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검열이 아닌, 사람들의 선별능력에 따라 여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념에 따라 우선적인 선택이 존재한 데 반해, 지금은 정보를 선택하는 방법이 모두 제각각이 되었다고 한다. 지구상의 50억 인구는 50억 개의 이데올로기적 여과장치를 갖고 있어서, 그 결과 집단의 조정이 없는 사회가 될 위험마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단기억이라는 여과장치를 제안한다. 즉, 어떤 일관성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전달하는 정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가이드북 코멘트테크노피아의 세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견되는 21세기의 벽두에 왜 시간의 종말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종말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살아가야 하나? 하지만, 이 책의 기획자들은 시간의 종말이라는 서양인들의 뿌리깊은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켜 화젯거리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차분히 되살펴보고, 종말의 가능성을 통해 문명의 행로를 반성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도 죽음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반성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문명에 대한 반성을 직업 분야가 서로 다르고 이념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다채로운 사유들을 접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고생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력의 역사라든지 1,000이란 숫자가 종말론의 역사에서 갖는 의의 등을 드러내서 독자를 매우 흥미롭게 한다. 이번 윤년이 400년 만에 오는 윤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굴드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대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생물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상대화시키는 부분이다. 생물의 역사는 급격한 멸종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고, 생명은 어떻게든 살아나갔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의 시야를 좀더 넓게 만든다. 어느새 우리는 인류의 멸망을 세계의 멸망으로 치환시키지 않았는가.
에코가 지적한대로 종말론은 인간의 죽음을 세계에 치환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박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