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향신료 세계사
장 마리 펠트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한 권으로 읽는 향신료 세계사
장 마리 펠트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10월 / 314쪽 / 19,500원
향신료에 홀려 역사를 새로 쓴 사람들 - 시바의 여왕에서 마르코 폴로까지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3세 궁전에서 277명의 요리사와 향신료만을 담당하는 많은 노예를 만난 알렉산드로스 대왕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재위 기원전 970~931년) 왕을 방문한 시바의 여왕이 향신료를 선물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왕이 솔로몬 왕께 금 4톤과 아주 많은 보석, 향신료를 선물로 드렸으니 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것처럼 많은 방향물질(芳香物質)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 그 방향물질은 시바의 여왕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여왕의 나라는 어디였을까? 그 왕국은 오늘날의 예멘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인은 그 왕국을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렀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방향물질’이라는 용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맛과 향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음식이나 음료에 첨가하는 모든 물질’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의 영양학자들이 방향물질에 대해 내린 일반적인 정의다. 1150년경 이전만 해도 프랑스어에 방향물질이나 향신료를 의미하는 어휘는 없었다(1150년경 발간된 『샤를마뉴의 원정길』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어로 향신료는 epice이다. 향신료 epice와 돈, 종류, 유형을 뜻하는 espece는 모두 라틴어 species에서 파생했다. 라틴어 species는 종류, 형태, 모습 등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상품, 약, 향신료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금과 향신료, 이 두 가지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값진 재물의 동의어로 자리 잡았다. 구약성경은 방향물질에 좀 더 폭넓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아가서 4장 13~14절은 귀한 방향물질에 대해 기술하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아가서에 언급된 계수는 육계나무로 기원전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었다. 시인 사포(고대 그리스 시인)의 문하생들은 레스보스섬에서 육계나무 껍질 향을 몸에 바르고 다녔다(여성의 동성애를 ‘사피즘’ 또는 레스보스섬과 관련지어 ‘레즈비어니즘’이라고 명명한 것은 여기서 유래했다). 사포의 시에는 또 다른 향신료 사프란에 관한 언급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사프란의 엷은 보랏빛 꽃과 붉은빛 도는 암술머리를 유용하게 사용했고, 와인 향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30년)의 궁전에서 277명의 요리사와 향신료를 담당하는 노예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재위 기원전 332~기원전 323년)를 알현했다. 기원전 330년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칭송받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을 통해 이 거대한 제국을 멸망시킨 직후의 일이다.
고대 로마제국 내에서 새로운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은 향신료, 후추원래 고대 로마에서 향신료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음식 재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각종 향신료 상점이 늘어선 비아 피페라티카(후추의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진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에는 다양한 향신료들이 진열돼 있었다. 로마인은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북부, 네덜란드 남부, 독일 라인강 유역, 스위스 대부분에 해당하는 지역)를 정복했을 때 그곳의 세련되지 못한 식습관을 목격했다. 로마인의 고유 요리법, 그중에서도 소두구·쿠민·박하와 후추로 향을 내는 ‘가룸 사용법’이 갈리아 지역에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후추는 새로운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아 갔다. 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외적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쿠스 1세(재위 395~410년)는 로마로 쳐들어가 후추 300리브르 어치를 공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410년에 발생한 로마 약탈 사건 이후의 일이다. 서로마제국의 바통을 이어받은 비잔틴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향신료 무역 중심지 지위를 차지했다. 이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의 향신료 무역이 중단되면서 그 나비효과로 전개된 상황이다. 메로베우스 왕조는 5세기 후반~8세기에 이르는 프랑크 왕국 전반기에 유럽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한데, 절묘하게도 이 왕조가 쇠퇴하는 시기와 때를 맞추어 각종 향신료가 다시 유럽 귀족과 부호의 식탁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풍조는 몇몇 수도원에도 급속히 퍼져 나갔다.
카롤링거 왕조의 법령과 행정 지침을 모아 놓은 『카피툴라리아』 중에서 유명한 ‘빌리스 법령’에는 황실 소유지에서 재배하는 식물 목록이 실려 있다. 그 목록에 외국산 향신료는 보이지 않지만 딜, 로즈마리, 박하, 파슬리 등은 포함된다. 예전의 로마인이 즐겨 먹던 굴은 이 시대에 이르러 자취를 감췄다. 그 무렵 이미 생선은 잡힌 곳에서 출발해 여러 지역으로 운송되었으며, 연어와 칠성장어는 정향, 생강, 각종 허브를 가미해 조리한 뒤 굳혀 젤리 상태로 먼 곳까지 보내졌다. 손님들은 부의 상징이 된 향신료를 보며 그 집 주인을 평가하곤 했다.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년)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장 드 오트빌(12세기 말 노르망디에서 활동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필리프 2세)는 양념 중에서 가장 비싼 것들을 선호한다. 비용이 요리의 가치와 식탁의 품격을 좌우하며 풍미를 돋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좀 더 맛있는 양념을 찾기 위해, 좀 더 훌륭한 향신료를 손에 넣기 위해 사람을 보내 전 세계를 누비며 탐험하게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시대 사람들은 왜 그토록 향신료에 열광했을까? 당시 서민은 완두콩, 잠두콩, 콩류, 뿌리를 주요 먹을거리로 삼았기에 그 밋밋한 음식 재료를 맛나게 해주는 향신료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냉장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고기류가 쉽게 상하곤 했는데, 향신료를 넣은 소스가 어느 정도 상한 맛을 감춰주었다. 그 시대에는 생강이,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육계나무 껍질과 사프란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정향이 주역을 맡았다. 소스뿐 아니라 잼, 과자, 콩소메(맑은 수프) 속에서도 활약하게 된 향신료는 다양한 요리 속으로 스며 들어가 매콤하고도 얼얼한 맛을 냈다.
미라가 된 파라오도 향신료 없이는 눕지 못했다 - 고대 향신료 이동로의 비밀
한때 몰약 가게를 경영하며 향신료 비즈니스에 몰두했던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아랍 상인으로 이루어진 대상들은 지중해 세계와 아시아 대륙 사이 경계 지역을 안전하게 만든 후 중동의 길을 종횡무진 누볐다. 이슬람교 탄생과 급속한 성장은 그들의 활동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570~632년)는 어려서는 대상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엔 첫 부인 하디자의 대상 무역을 관리하며 향신료와 접촉면을 넓혔다. 그는 아랍인이 서로 경쟁하듯 손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던 향신료 이동의 비밀을 꿰고 있었다. 이슬람교가 인도 서해안에 뿌리내리자 교역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페르시아와의 관계 역시 강화되었다. 이슬람의 제2대 칼리프 우마르(재위 634~644년)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샤트알아랍 연안에 바스라라는 항구도시를 세웠다. 이는 대 예언자 무함마드가 타계한 지 4년 후인 636년의 일이다.
‘아라비안나이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일야화』에는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빼곡하다. 그중에는 선원 신드바드의 모험을 다룬 일곱 번의 아시아 여행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아랍인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어떻게 무역을 해왔는지 보여준다. 당시는 아바스 왕조의 다섯 번째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년) 통치 시기로, 8세기 말~9세기 초 무렵이었다. 부유한 신드바드는 바그다드에 머물며 한동안 사치와 향락의 삶을 살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삶을 향한 동경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배에 올랐다. 바그다드의 부유한 상인이 벌인 무역 활동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고, 그 물건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했다. 또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마주치는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실제로 상인들은 여행길에 머무는 항구마다 무엇을 어디에 가져다 팔아야 하고, 또 어디서 무엇을 사 와야 하는지 파악했다. 이런 식으로 수집된 정보는 귀중했기에 바스라의 정보 수집상은 그 정보를 잘 메모해 두었다가 팔기도 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사고팔았던 상품들은 다음과 같다. 알로에 나무, 백단나무, 장뇌, 육두구, 정향, 소두구, 육계나무 껍질, 쿠베바, 생강, 다이아몬드, 나르드(감송향), 후추, 사탕수수,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코코넛(야자 열매), 코모로 제도(모잠비크 해협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에서 나는 알로에, 진주, 수정, 히아신스, 사향 등. 직물, 보석류, 귀한 장식품 같은 가공품도 빠질 수 없었는데, 바그다드의 공방들은 이런 물건들을 정성껏 모방하고 제작하여 이슬람 세계 전역에 저렴한 가격으로 유통시키는 데 힘썼다.
아시아에서 출발한 비단과 향신료가 유럽에 도착했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가격에 팔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아랍인은 이집트를 정복한 뒤 새로운 도시를 건립했다. 969년의 일이다. 이 도시명은 카이로로, ‘승리자’라는 의미다. 흔히 ‘살라딘’이라고 불리는 술탄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서유럽 대도시와의 향신료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카이로에 유럽 상인에게 개방된 새 구역을 조성했다. 이는 카이로가 세워진 지 약 두 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다. 아랍 세계는 향신료를 약으로도 대량 소비했다. 차츰 동쪽으로 전파된 이슬람교는 실크로드, 즉 ‘비단길’을 따라 세력을 넓혀 갔다. 당시의 비단길은 이미 몇 세기 전 중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중국은 비단 무역을 독점한 뒤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여러 대상로를 통해 팔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의 상황이다. 실크로드는 중국 북서쪽 시안을 출발점으로 하여 여러 갈래 길로 나뉜다. 지도를 보며 실크로드를 따라가보자.
일단 실크로드는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몽골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고비 사막을 지나야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친 사막 중 하나인 타클라마칸의 남쪽 혹은 북쪽을 에둘러 지나간다. 두 길은 중국의 가장 서쪽에 자리한 곳이자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인 카슈가르(오늘날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카스가얼)에서 다시 서로 만난다. 이후 비단길은 현재 독립공화국인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연이어 통과하여 교역지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 이른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화려한 이슬람 건축양식을 과시하며, 이곳의 이슬람 사원은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실크로드 코스는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방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여름은 찌는 듯 더워서 식물군은 빈약하나 겨울에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매섭게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 중위도의 내륙 지역인 탓에 열대성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역은 버드나무와 포플러나무가 많아 하천과 강가를 진녹색으로 장식한다. 사마르칸트를 기점으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중 하나의 길은 카스피해를 북쪽으로 우회하고, 다른 하나의 길은 남쪽으로 우회한다. 남쪽 길은 엘부르즈산맥을 통과하여 테헤란과 바그다드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다시 이라크와 시리아의 사막을 가로질러 알레포(시리아 북부의 지중해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도시로, 옛날부터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을 이루었다)와 지중해에 다다른다. 그리고 북쪽 길은 캅카스산맥을 지나 튀르키예를 통과하면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지중해 연안의 대항구에 다다른다.
그 긴 노선은 중국을 지중해로 연결한다. 여기에 동남아시아를 따라 좀 더 남쪽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덧붙여진다. 그 길은 바로 인도 동부의 콜카타, 갠지스강 유역, 인도 북부, 카이바르 고개와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이란의 마슈하드(이란 북동부 호라산주의 주도, 이란 제2의 도시)까지 이르는 길이다. 이 노선이 바로 본래 의미의 비단길, 즉 실크로드 노선이다. 이 노선을 통해 아시아산 향신료가 유입되었다. 비단과 향신료는 서구 유럽 세계로 들어가면서 천정부지로 값이 뛰었다. 이들 품목이 통과하는 지역 영주에 의해 징수된 통행료와 몇 가지 입시세(入市稅)가 붙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상인에서 저 상인으로 거쳐 간 비단과 향신료는 결국 동부 지중해 대항구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 아시아에서 출발해 오랜 시간을 거쳐 서구 유럽에 도착한 비단과 향신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갔다.
베네치아를 몰락시키고 리스본을 세계 중심으로 만든 향신료 전쟁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콜럼버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합리적인 이유포르투갈 엔히크 왕자의 항해사가 흑인들의 왕국, 기니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엔히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큰 기쁨을 느꼈다. 그때까지 세상은 아프리카대륙의 향신료에 관해 두 가지밖에 몰랐다. ‘꼭지 달린 후추’ 쿠베바와 ‘낙원의 씨앗’ 마니게트다. 포르투갈의 왕에게 탐험의 목적은 단지 아프리카대륙 발견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목적은 향신료의 본향인 인도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 발견이었다. 1473년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적도를 넘었고, 15년 뒤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년)가 아프리카대륙 최남단으로 여겨지는 곳에 도달했다. 포르투갈 왕은 그곳에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도로 향하는 직선 항로를 발견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디아스의 고국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대륙 서부 해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제노바 공화국 출신 선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는 아시아 항해 루트를 개척하고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재위 1481~1495년)를 설득했다. 당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당당하게 리스본으로 귀환하려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아프리카대륙 탐험 쪽으로 마음이 기운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르코 폴로의 정보를 토대로 한 신비의 섬 지팡구(오늘날의 일본)에 대한 콜럼버스의 직관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매몰차게 거절당하자 망설임 없이 에스파냐 왕을 찾아갔다. 당시 그라나다에 거주하던 무어인과의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은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 탓에 콜럼버스는 간청과 기다림을 반복했고, 1492년 어느 날, 마침내 그 인내심이 보상받는 시간이 다가왔다.
콜럼버스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시아에 다다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확신했다(그가 발을 디딘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대륙이었다). 그러나 첫 항해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의 쾌속 범선이 금과 향신료를 싣지 못한 채 팔로스 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후의 아메리카대륙 탐험 역시 향신료에 관한 한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금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적지 않은 양의 금을 탐험대가 배에 싣고 돌아온 덕분이다.
카를 5세가 어렵게 얻은 말루쿠 제도를 포기하고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포르투갈에 넘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절박한 이유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 원정대가 인도 항로 개척에 성공하고 돌아오면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열강의 균형이 회복되었다. 이후 이베리아반도의 두 강대국은 세계를 두부 자르듯 잘라 나눠 가졌다. 머지않아 페루의 금이 에스파냐로 쏟아져 들어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게 해줄 것이고,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 독점권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 1세는 인도 항로를 개척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바스쿠 다가마가 리스본으로 돌아오고 여섯 달쯤 지난 뒤 왕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지휘하는 13척의 함대를 다시 캘리컷으로 파견했다. 이 원정에는 병사 1,500명과 선교사 17명이 참여했다. 왕권과 교권의 결합으로 먼 곳에 있는 인도에 가톨릭 교리를 전파할 계획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