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다카시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토 다카시 지음 | 부키
사이토 다카시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토 다카시 지음
부키 / 2026년 9월 / 228쪽 / 18,800원
제1장 한 발의 화살이 되어라
초인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그대, 벗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한껏 아름답게 가꾸어도 결코 넘침이 없다.
그대는 벗에게 초인을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이어야 하리니.
깊은 동경이라는 열정을 품고,
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눈부신 화살이어야 한다.
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동경하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다: 읽기만 해도 기운이 샘솟는 문장이다! 나는 사인을 요청받으면 이름 옆에 ‘초인(超人)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되어라’라는 메시지를 덧붙인다. 이 문구는 니체의 말에서 발췌했다. 나는 “초인을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이란 표현을 내 교육의 기본이자 정신적 근간으로 삼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위버멘쉬, Ubermensch)’은 슈퍼맨처럼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 즉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지금의 자신을 넘어서고자 결의를 다지며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날아가는 사람, 또는 동경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흔히 사람들은 눈앞의 작은 목표를 이루고 나면 현실에 안주하며 성장을 멈추어버린다. 혹은 거대한 꿈을 품었을지라도 사소한 좌절 앞에 쉽게 발을 빼곤 한다. 아무리 비범한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열망을 멈추는 순간, 그는 초인이 될 수 없다.
니체는 적당히 타협하는 태도를 싫어했다. 그가 초인을 화살에 비유하며 ‘자신의 힘을 100퍼센트 발휘하라’고 거듭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의 이미지는 명확한 방향과 질량을 지닌 ‘벡터’를 닮았다. 화살의 궤적은 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을 향해 직진한다. 이때 화살이 지닌 질량은 동경을 향한 열정의 밀도와 같다.
현재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강인하고도 굳건한 의지의 집합체가 바로 니체였다. 본래 니체는 내면의 에너지가 과잉될 만큼 넘쳐나던 사상가였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자기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곤 했다. ‘초인을 향해 비상하는 거대한 벡터’ 그 자체였던 삶.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난이 빗발칠 때조차 그는 끝내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끊임없이 배우고 투쟁했던 니체가 남긴 업적은, 기독교와 당대까지의 철학적 전통을 완전히 뒤엎은 사상의 결정체였다. 그의 개인적 삶은 평탄하거나 행복했다고 할 수 없지만, 한결같이 고결한 이상을 갈망했던 삶의 태도만큼은 경이로울 정도다.
흔히 사람들은 동경하는 대상을 자신과 전혀 별개의 존재로 생각하곤 한다. 니체는 저서 『반시대적 고찰』에서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마음 깊이 존경해 온 대상을 눈앞에 펼쳐보라고 말이다. 내가 무엇을 동경하는지를 보면,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선명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동경의 화살’이 가리키는 과녁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라, 내 본질과 가장 가까운 지향점일 것이다. 나에게 니체란 곧 ‘동경의 화살’이자 내 사상의 근간이며, 나의 사유는 언제나 니체의 철학 안에서 뜨겁게 공명하고 있다.
르상티망으로부터 도망쳐라질투의 불꽃에 휩싸인 자는 최후에 이르러
전갈처럼 자기 자신을 향해 독침을 겨눈다.
……
인간이 복수심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다리이자,
기나긴 악천후 끝에 찾아오는 무지개다.
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질투는 습관이 된다: 질투는 니체가 생전에 가장 깊이 경계했던 마음의 병이다. 안타깝게도 이 질투심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은 유독 까다롭고도 지난하다. 나보다 조금 더 성공하거나 세상의 인정을 받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고 기분이 상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내 안의 질투심이 보내오는 신호다. 질투에 눈이 멀기 시작하면 내면의 긍정적인 불꽃이 꺼지고 영혼이 피폐해진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인데, 이 질투심이란 것은 우리를 어제의 자신보다 못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이 마음속 질투의 싹을 도려내는 것이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은 이 르상티망(Ressentiment; 억눌린 원한과 시기, 적개심)이라는 음침한 심리를 영혼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깨끗이 청산해버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부처를 일컬어, 인간의 영혼을 르상티망으로부터 온전히 해방시킨 위대한 ‘영혼의 의사’라고 평가했다. 불교가 말하는 진정한 가르침 역시 다름 아닌 이 지독한 질투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대단한 일을 성취해내는 이들 중에는, 내면의 콤플렉스나 일종의 한(恨)을 뜨거운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런데 열등감이란 마치 ‘핵연료’와도 같아서, 단숨에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키지만 그만큼 제어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위험하다.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을 사회를 향한 불만이나 복수심에서 끌어오는 이들은 늘 자신과 눈앞의 상대를 비교하며 소모적인 대결을 벌이곤 한다. 영혼이 이미 뒤틀려버려, 내면에 불평불만의 씨앗이 없으면 살아갈 힘조차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감히 무시하다니,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라며 복수의 칼날을 갈거나, ‘타인의 위에 서서 군림하고 싶다’는 권력욕을 키우며 오직 부정적인 에너지로 제 삶의 동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진짜 에너지의 원천은 타인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해야만 한다. 다만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나 끔찍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식의 자기 경멸이나 반발에서 시작하는 것은 니체의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무작정 돌파한다고 해서 이상에 가 닿을 수는 없다.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 변화는 결국 지금의 나로부터 달아나려는 시도에 머물기 쉽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 극복은 자신을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가능성을 더 멀리 밀고 나가는 일이다.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향상심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결국 내 안에서 삶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 자신을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넘쳤던 니체마저도 가슴을 치며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억하라는 명령은 결코 당장, 오늘내일 사이에 달성할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연마할 수 있는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교묘하며, 섬세한 요령과 깊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최종적인 기술’이다.” 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면의 근원적인 생명력이 꺼지지 않도록 유지해나가는 것은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핵심은 삶의 에너지원이 어디에 뿌리내렸느냐에 달렸다고 믿는다. 내 영혼 안에 선명한 비전과 고고한 정신이 살아 있어야, 동경하는 삶을 성취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르상티망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아직 세상이 낯설고 서툰 20대까지는,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나 시샘이 역설적인 삶의 동기가 되어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타인을 향한 시기와 원망을 품고 사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어쩐지 서늘한 소름이 돋곤 한다. 그것은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럽혀진 정신이 맑아질 일 없이 그대로 늙어가는 일이란 참으로 서글픈 풍경이다. 그러니 부디, 서른의 문턱을 넘어섰다면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의미 없이 남과 비교하는 습관은 멀리하기를 권한다.
제2장 이 순간을 살아라
눈부신 이 순간을 살라지금, 이 눈부신 순간을 똑똑히 보아라.
……
이 순간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문으로부터,
하나의 길고 긴 영겁의 길이 저 아득한 과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들의 발뒤꿈치 밑에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영원이 가만히 놓여 있다는 뜻이다.
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은 필연이다: 이제부터는 니체 철학의 정점인 ‘순간과 영원의 신비로운 관계’에 대해 사유해보려 한다. 니체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하나의 거대한 ‘문(門)’으로 표현했다. 그 문을 기점으로 앞과 뒤에는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이름의 끝없는 영겁의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득한 과거와 미지의 미래가 손을 맞잡은 지점, 그곳이 바로 ‘현재’라는 기적이다. 우리가 통과하는 이 순간은 결코 가볍게 흘려보낼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시작된 이래 쌓여온 모든 과거의 결과물이자, 다가올 모든 미래를 결정짓는 필연인 셈이다.
‘어쩌다 보니 그저 그렇게 되었다’는 식의 우연을 니체는 거부한다. 어제라는 과거가 오늘의 원인이 되었듯,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의 발걸음이 씨앗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엄숙한 인과의 사슬은 영원히 되풀이되며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의 세계관 안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마주하는 모든 사건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삶이란 필연의 궤도를 달리는 여정이다.
가령 ‘그 옛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필 그 장소에서, 그런 알 수 없는 우연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나라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인연의 실타래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지나온 수많은 찰나의 우연들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져 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이 반복은 또한 우리의 미래를 창조해간다.
내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엄연한 필연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나를 스쳐 간 모든 무수한 우연의 축적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섭리였음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니체 철학의 위대한 정수인 ‘생(生)의 눈부신 긍정’이 탄생한다. 생의 긍정이라는 말이 언뜻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로 부드럽게 풀어낸다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온 영혼을 집중하여 뜨겁게 살라는 권유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비판을 퍼부었던 기독교의 태도와 비교해보자. 기독교는 현세의 삶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사후에야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나라에서 영원한 낙을 누리며 행복해질 것’이라 속삭인다. 이 사상에 지나치게 심취하면 행복을 먼 미래로 유예하면서, 막상 내 앞에 놓인 소중한 순간을 등한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사후 세계의 환상에 기대어 다가오지도 않은 지옥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는 “오직 지금 그대에게 허락된 그 뜨거운 육체를 온전히 살아내라”라고 힘주어 외친다. 영혼의 구원만을 핑계로 삼아 현실을 부정하는 나약함을 그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 순간에 잘 웃고,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을 영원처럼 사는 길이다.
이것이 인생이었나, 자, 다시 한번!이것이 진정 인생이었던가.
……
자! 그렇다면 기꺼이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눈부신 기쁨은 영원하고자 한다.
……
그리하여 가장 깊고도 깊은 영원을 갈망한다!
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회귀, 순간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 우리가 살면서 겪은 온갖 시련과 일들이 이미 아득한 과거에 벌어졌던 일의 지루한 반복이고, 우주의 모든 것이 영원히 윤회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그저 과거의 데칼코마니에 불과하여 그 어떤 새로운 가치도 창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아아, 구역질, 구역질, 구역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 이 구절은 그 영원한 되풀이에 대한 고통스러운 외침이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공포를 뼈저리게 깨달은 차라투스트라는, 그럼에도 그 운명의 무게를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위대한 자신이 되라고, 단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말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내세의 가짜 낙원이나 먼 미래의 구원 따위를 바라지 않고, 반복의 굴레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라는 찰나의 순간에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우며 살아가라고 역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정수인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밑바닥에는, 삶의 여정에서 아무리 처참하게 실패하고 패배할지라도 용기 있게 운명에 맞서라는 뜨거운 응원이 깔려 있다. 인간의 삶이란 어차피 거대한 도박판이니,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다 부질없다”라며 넋 놓고 있지 말라는 얘기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떠올려보라. 이 이야기는 “이 지독한 인생이란 과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실존적 명제를 세상에 던진다. 신들의 분노를 산 시지프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가파른 산 정상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그 바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정상에 올려놓은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무정한 중력에 이끌려 다시 밑바닥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지고 만다. 누가 보아도 비참한 노역을 견디면서도 시지프는 결코 절망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는 굴러떨어진 돌을 가만히 응시한 뒤, 다시금 묵묵히 산기슭을 향해 걸어 내려간다. 돌을 산 위까지 밀어 올리는 의미 없는 작업을 하염없이 반복할 뿐이다.
시지프는 그 작업이 자신에게 부정적인지 혹은 긍정적인지 따위를 계산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잔인한 운명을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의 무의미함을 과정에 전력을 다했다는 실존적 의미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하찮은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이건 완전히 무의미한 짓이라고’라며 삶을 팽개치지 않고, 주어진 매 순간의 과정에 영혼을 전력으로 쏟아붓는 바로 그 장엄한 태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법이다.
가령 부모님을 향해 ‘그 시절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풍족하고 여유 있게 살고 있었을 텐데’ 혹은 ‘그때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내 유년 시절이 참 행복했을 텐데’라며 과거의 부정적인 상처에만 집착하며 원망 가득한 늪에 빠져 있는 이가 있다고 하자. 현재의 내가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오지도 않을 ‘만약’이라는 기만적인 가정을 해보았자 영혼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런 고단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았기에 비로소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단독자로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진실이다.
제3장 육체의 소리를 들어라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