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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22000km

윤영선 지음 | 스타북스


유라시아 횡단, 22000km

윤영선 지음

스타북스 / 2025년 11월 / 480쪽 / 25,000원





Part 1. 대륙을 향한 첫날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라는 금언이 있다. 삶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학창 시절부터 꿈꾸었던 소망이 있다. 동양과 서양의 고대 교역로인 ‘실크로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자취, 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고원’ 등 아시아 대륙의 속살은 어떻게 생겼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결혼 40주년과 내 나이 70세 기념으로 오랜 꿈인 ‘시베리아, 실크로드’ 유라시아 대륙횡단 여행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2024년 7월 2일, 동해항에서 카페리호에 자동차를 싣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장맛비 속에 강릉으로 향하는 길, 함께 가는 아내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여행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스탄불까지 약 22,000킬로미터를 서쪽으로 가면서 오르내리는 장거리 여정으로, 오지·사막·고산지대를 직접 운전해서 가는 고행길이다. 통과 국가는 러시아, 몽골,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조지아, 튀르키예이며, 고비사막·타클라마칸사막·키질쿰사막과 몽골고원·파미르고원 등을 지나야 한다.

이 여정에 아내와 자녀, 친지들의 반대와 걱정이 컸다. 이번 여행을 결심하기까지 아내를 설득하는 데 한 달이 걸렸고, 아들과 가족들은 사고를 염려해 적극 반대했다. 출발 3일 전에는 가족들과 70세 생일 축하와 무사고 여행을 기원하는 식사를 했다. 참여를 결정한 뒤에는 실크로드 관련 영상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등 관련 서적을 꾸준히 읽으며 준비했다.

원래는 인천에서 중국 산둥반도로 가려 했으나, 중국이 자동차 여행 관련 국제협약 미가입국이라 승용차 반출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출발 며칠 전에 알게 되어, 러시아·몽골을 경유해 중국 내몽골로 우회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뱃길 700킬로미터, 운항 25시간이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항공편이 끊겨 배편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행은 여비를 분담하는 6명과 지원 인력 2명(길 안내자, 러시아어 통역 학생) 총 8명으로, 험로에 강한 SUV ‘모하비’ 3대로 이동했다. 일행 8명은 여수, 임실, 제천, 이천, 서울 등 출신 지역이 다양했고 동해항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장기간 여행에서 생길 갈등과 건강이 걱정됐지만,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도하며 차량마다 나눠 타고 교대로 운전하기로 했다.

25시간 항해 끝에 다음 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도착했다.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 그 이름에서 19세기 러시아 제국주의의 오만함이 느껴졌다. 하선에만 3시간이 걸렸고, 이후 출입국관리국과 세관을 통과해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 유적지 방문


7월 3일 저녁 늦게 연해주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항 세관에서 입국 절차를 마쳤다. ‘연해주’라는 단어는 19세기 조선 말기 함경북도 두만강을 건너서 러시아 땅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바다 옆에 붙어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부르면서 생겼다. 우리 일행은 여객선에서 가장 늦게 오후 7시경 하선했다. 다행히 공통 경비가 든 짐가방이 세관검사를 무사히 통과했다. 러시아는 신용카드 사용이 금지돼 달러를 가져갈 수밖에 없었는데, 세관 직원이 가방을 열어보라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10,000불 초과 달러 미신고로 곤욕을 치를 뻔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 통관이었다. 통관에 최소 5일이 걸린다고 해서, 그동안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한촌’ 지역에서는 “서울 거리”라는 문패를 발견했고, ‘신한촌 기념탑’도 찾아갔다. 이 기념탑은 1937년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조선인들을 기리는 곳이다. 19세기 말 함경도 주민들은 관리의 부패와 과도한 세금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고, 1937년 스탈린은 약 17만 명의 조선인을 7,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항의하는 사람은 처형됐고, 이들은 재산과 전답을 놔두고 떠나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독립운동 유적이 많다. 안중근 의사에게 거사 자금을 지원하고 유가족을 보살핀 최재형 선생의 생가도 찾았는데, 기념패에 이름이 ‘최재현’으로 잘못 표기돼 있어 아쉬웠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기념비에도 들러 헌화했다. 이 선생은 이후 연해주로 돌아가 평생 공산주의 운동을 했고, 공산주의 경력 때문에 건국훈장도 1995년에야 추서됐다.



Part 2. 시베리아 대평원 횡단



고려인 강제 이주 ‘리즈돌노예’역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5일째인 7월 8일 오후, 자동차가 세관을 통과했다는 소식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숙소 근처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으며 무사고 완주를 다짐했고,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K 교수의 건배사에 모두 “가자, 이스탄불”을 외쳤다. 출발 전 근처 조지아 식당에서 킨칼리와 게살 풍선빵을 먹었는데, 물가는 서울의 약 60% 수준이었고, 마침 졸업 시즌이라 식당마다 졸업 축하 세리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날은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우수리스크까지 이동했다. 시베리아 평원은 바이칼호까지 약 3,7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고, 관광객은 거의 없이 화물차가 다니는 산업용 도로였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길은 1,500년 전 고구려의 변방이었고, 이후 발해의 영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들이 농사짓던 땅이었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중간에 ‘리즈돌노예’라는 폐역이 있었다. 1937년 8월 스탈린은 연해주 거주 고려인 약 17만 명을 3개월 이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고 지시했고, 이 역 뒤 주차장은 그 이송을 위한 집결 장소였다. 일본군 첩자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로 시작된 이 강제 이주는 가을 수확도 못 한 채 갑작스럽게 이뤄졌고, 반대하는 이들 수천 명이 처형됐다. 겨울철 황무지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움막을 지어 추위를 견뎠고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컸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도 강제 이주 대상에 포함돼 카자흐스탄에서 경비원으로 노후를 보냈다. 일행은 이곳에서 묵념했고, 성악과 출신인 K 교수가 위로 곡을 불렀다.

첫날 머무른 우수리스크의 여관 이름이 뜬금없이 ‘마르코폴로’였다. 이번 여정에 ‘마르코폴로’가 700여 년 전 통과한 파미르고원 ‘콜마 고개’를 갈 예정인데 좋은 징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근처 중국 식당에서 먹었는데, 러시아는 과도한 음주를 줄이기 위해 저녁 9시 이후 술 판매를 금지하고 식당의 주류 판매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위도가 높아 해가 늦게 져 저녁 식사 후 숙소에 돌아오니 밤 11시였고, 시베리아 여행 첫날 밤 무사고 여행을 기원하며 깊은 잠에 들었다.

아무르강의 ‘하바롭스크’


7월 9일 아침, 우수리스크의 마르코폴로 여관을 출발했다. 오늘 목적지 하바롭스크까지 680킬로미터, 시베리아 대평원 횡단 여행의 첫날이었다. 세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워키토키로 통신하며 이동했다. 우수리강 근처에는 헤이그 밀사 정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사망한 이 선생은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유해와 유품, 유고를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7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근대 한국 수학의 아버지로 불렸고, 20대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천재 학자였다.

시베리아 횡단 국도는 모스크바와 태평양을 잇는 간선도로임에도 편도 1차선의 협소한 길이었고, 포트홀이 많아 위험했다. 화물차를 추월할 때마다 중앙선을 넘어 시속 150~160킬로미터로 급가속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재정이 어려워지며 국방비가 GDP의 6.7%까지 늘었고, 세율도 인상됐다고 한다.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며 영원성과 유한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석양 무렵 하바롭스크의 러시아정교회 첨탑을 마주하며 첫날 680킬로미터를 무사히 마쳤다. 저녁은 고려인 식당에서 먹었는데, 하바롭스크에는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고려인 후손 8,000명이 산다고 한다.

시베리아 대평원 처녀림을 달리다


7월 10일, 하바롭스크는 아침 5시 일출, 밤 9시 일몰로 낮이 16시간이었다. 아침에 아무르강변을 산책했는데, 강 건너는 중국 영토였다. 17세기 청나라와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국경 전쟁을 벌일 때, 조선 효종은 청의 요청으로 두 차례(1654년, 1658년) 조선군을 파병해 승리했고, 조선실록은 이를 ‘나선정벌’로 기록했다.

이날은 벨로고르스크까지 670킬로미터를 달렸다. 러시아 영토는 남한의 170배로, 16세기 몽골 지배에서 벗어난 후 모피를 구하러 동진하다 세계 최대 영토 국가가 됐다. 구글맵과 GPS 덕분에 초행길도 불안감이 적었지만, 산속에서는 인터넷이 자주 끊겼다. 하바롭스크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싱안령산맥을 넘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이 산맥을 경계로 동쪽은 만주 평야, 서쪽은 몽골초원이 시작된다. 오후에는 러시아의 9개 표준시간대 중 하나를 지나며 시계를 한 시간 늦췄다.

목적지 200킬로미터를 남기고 차의 터보 연결 부분이 빠지는 고장이 났다. 계기판 경고등이 켜지고 시커먼 배기가스가 나오자 자동차학과 출신인 L 실장이 도로 갓길에서 응급 조치를 했다. 화물차용 디젤의 낮은 품질과 급가속이 원인이었다. 밤늦게야 인구 5만 명의 벨로고르스크에 도착했다. 화물차 기사용 허름한 여관에서 한 방에 3명씩 묵었고, 아내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저녁으로 40도 보드카를 마신 아내는 몇 잔 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이날 거의 700킬로미터의 험한 도로를 달렸다.

벨로고르스크, 독립군 ‘자유시 참변’


아침 9시, 벨로고르스크 정비소에서 어제 고장 난 L 실장 차의 터보를 수리해야 해서 출발이 늦어졌다. 여관에서 아침을 안 줘 컵라면으로 때우고 아내와 시내 공원을 산책했다.

정비소 기술자는 한국 차를 몰라 더 큰 도시로 가라고 했고, 계기판 경고등이 계속 켜진 채로 불안한 이동을 이어갔다.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비극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스보보드니가 있다. 1921년 봄, 만주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온 독립군 부대가 도착 직후 러시아 적군과 고려공산당 군대에 학살당해 600여 명이 사망하고 900여 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청산리전투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사전에 낌새를 눈치채고 빠져나와 화를 면했다. 스보보드니는 스탈린 치하 정치범 수용소로도 유명해 최대 19만 명이 수용됐다고 한다.

정비소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고 늦게 북위 54도 스코보로디노로 출발했다. 이날 이동 거리는 550킬로미터였다. 3일간 2,000여 킬로미터를 지나오며 원시적인 자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시베리아 산림은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이고, 경작해도 판로가 없어 많은 초지가 비어 있었다. 마을에는 폐가도 많았는데,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떠나고 부모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빈집이 된다고 한다. 아스팔트 길의 포트홀과 바운딩이 심해 아내는 허리 복대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러 초원에 잠시 들어갔다가 정체불명의 곤충에 물려 1주일 넘게 붓고 가려워 고생했는데, 한국에서 가져간 약이 전혀 듣지 않았다. 기름지고 짠 음식과 불규칙한 식사로 벌써 소화불량과 설사가 나타나 정로환과 소화제를 챙겨 먹었고, 준비해 온 약이 모자랄까 걱정될 정도였다.

전투 같은 시베리아 횡단


오늘은 출발한 지 10일째(7월 12일)이다. 서울의 아들 손자 등과 안부 전화를 했다. 아내는 손자들과 수다를 떨며 생기가 넘친다. 시베리아는 관광객이 없기 때문에 숲 옆 주유소에서 휴게소, 식당, 여관, 편의점 등을 한 곳에서 한다. 주차장에는 화물차들이 밤을 보낸다.

매일 아침 출발 전 작은 낙(樂)은 서울에서 가져온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이다. 간식으로 가져온 과자와 사탕을 차 안에서 먹으며 지루함을 즐긴다. 평소에 안 먹는 사탕을 자주 먹는다. 출발하면서 작은 주유소에서 기름 20리터 소량을 넣고 출발했다. 도중에 큰 주유소를 만나면 좋은 디젤을 가득 넣기로 했는데 이것이 오후 내내 우리 일행을 가슴 졸이게 만들 줄은 몰랐다. 자동차 앞 유리창은 초원에 사는 나방, 곤충들이 날아와서 부딪쳐 피범벅이 되었다. 카메이트 L 실장은 매일 새벽마다 세척용 물비누를 사서 출발 전 자동차 앞 유리를 깔끔이 닦았다. 그래도 한두 시간만 달리면 앞 유리가 벌레들의 핏자국으로 빨갛게 염색되어 앞이 잘 안 보였다.

새벽부터 땅속에서 발생한 토탄 불로 인해 사방이 연기와 매연으로 자욱했다. 목적지 ‘우탄’까지 하늘을 덮고 있는 토탄 연기가 600여 킬로미터를 갈 때까지 자욱했다.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햇빛을 하루 종일 못 보고 있다. 어떤 곳은 토탄층 불로 나무가 죽어가고, 오래전 불이 난 지역에서는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까지 약 800킬로미터 거리가 토탄 연기로 덮여있다. 정말로 광대한 땅이다. 다행히 활활 타는 불꽃은 없어서 화물차 등은 계속 다닌다.

어디까지 ‘시베리아’인지 검색해 보니 우랄산맥 동쪽부터 태평양 오호츠크해까지 9,000킬로미터를 지리학상 시베리아라고 부른다고 한다. 원주민 언어로 시베리아의 뜻은 ‘잠자는 땅’이란다. 휴게소를 조금만 벗어나면 인터넷이 끊긴다. 구글맵과 GPS가 안 되니 현재 있는 곳의 위치정보, 해발고도, 위도, 경도 등 나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인터넷이 단절된 오지는 ‘시간이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곡선으로 간다.’ 문명과 단절은 우리에게 시간의 느림, 멈춤을 느끼게 만든다. 느림은 나그네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세상과 단절이 주는 아름다운 고독이다. 서울에서 머리를 가득 채우던 복잡한 생각도 잠시 멈춤이다.

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곳의 모든 강은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해로 흘러가기 때문에 인간의 경제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이 강물이 남쪽의 몽골 지방으로 흐른다면 몽골은 매우 살기 좋은 비옥한 나라가 될 것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 중간에 점심을 먹으며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울 생각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 지나왔는데 중간에 휴게소와 주유소가 없었다. 점심은 서울에서 가져온 과자 몇 개를 나누어서 먹었다. 계기판에 주행거리가 50킬로미터 남았다는 경고등이 켜졌다. 모두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만일 길에서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멈춘다면 시베리아 숲속에 고립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거의 기름이 고갈될 즈음에 시골길을 돌고 돌아서 2차 세계대전 때나 썼을 법한 초미니 주유소를 발견했다. 주유기 하나가 들판에 덜렁 서 있었다. 전화를 하니 주유소 주인이 나타나서 정말 어렵게 기름을 넣었다. 아내는 점심을 못 먹어 배고픈 것보다 기름이 없어서 차가 멈추는 것이 더 무섭다고 말한다. 속된 말로 일행 모두 똥줄이 타는 하루를 보냈다. 매일매일 긴급 상황이 한 가지씩 생겼다. 그래도 다행히 구글이 연결되는 지역의 주유소를 찾은 것이었다. 구글 맵 서비스가 없다면 오지의 여행은 참으로 힘들 것이다.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밤 9시 반에 도로 옆 위치한 여관 겸 휴게소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니 밤 11시다. 샤워 중에 여관의 전기가 나가고 물이 끊겨서 생수를 가지고 이를 닦았다. 시베리아의 야생 문화에 적응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불편한 침대지만, 하루 종일 피곤함이 숙면을 불렀다. 오늘도 하루 종일 ‘낭만적 여행’이 아닌 ‘전투적 여행’을 했다.

청정 호수 “바이칼호”에서의 휴식


오늘 목적지 바이칼호에 도착하면 3,700킬로미터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려온 셈이다. 고장 난 O 사장 차와 L 실장 차를 수리하기 위해 바이칼호 근처 140킬로미터 떨어진 울란우데 정비소를 일요일임에도 예약했다. 이 지역은 브랴트 몽골족이 사는 북부 몽골초원으로, 1727년 카흐타 조약 이후 300년간 러시아 지배를 받아오며 몽골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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