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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번은 오디세이아

샘 아크바 지음 | 부키


인생에 한번은 오디세이아

샘 아크바 지음

부키 / 2026년 7월 / 300쪽 / 19,500원





1장 항해의 시작 -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현실과 싸우지 말고 인정하라


힘겨운 상황에 제대로 반응하느냐 못 하느냐는 ‘심리적 유연성’에 달려 있다. 이는 도전을 헤쳐 나갈 때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삶의 목적을 붙드는 능력이다. 이 힘을 길러 낸 사람은 결국 ‘집’에 이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계속 길을 잃고 헤맨다. 아무런 고통 없는 성장이란, 머리 여섯 달린 뱀의 신화만큼이나 현실과 거리가 멀다. 때로는 진로를 바꾸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성장을 위해 힘든 여정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를 잃거나 잘 굴러간다고 믿었던 관계가 끝나는 등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여정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오디세이아가 요구하는 것은 삶의 도전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어이 견뎌 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이 제시한 ‘근본적 수용’ 개념은, 원치 않는 변화를 마주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젊은 시절 정신과 병동에서 겪었던 극심한 고통을 바탕으로, 리네한은 극단의 정서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고자 변증법적 행동치료를 개발했다. 변증법이란 상반된 생각을 함께 검토하고 논의하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이는 상충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해 준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화가 날 수 있다. / 불안하지만,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한다. / 지금 상황이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방향을 찾고 싶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으려면 근본적 수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근본적 수용은 어떤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고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문제의 뿌리는 기대와 가정에 있다. 우리는 삶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미리 그려 둔다. 몸은 건강하고, 일자리는 안정적이며, 관계는 오래 지속되고, 필요하거나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근본적 수용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왔던 미래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적 수용이란, 기대했던 삶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애도하는 일이다. 오디세우스 역시 트로이로 떠나기 전, 그 여정이 초래할 결과를 헤아리며 페넬로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무장한 그리스 군이 모두 트로이에서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트로이 군은 활과 창에 능한 전사들이고, 날쌘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서 전쟁의 흐름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고 들었소. 그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내가 어떤 신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올지, 아니면 트로이 땅 어딘가에서 포로로 잡힐지, 나는 알지 못하오.’ 『오디세이아』 18권 259~266행

그는 싸우다 죽을 수도 있고, 트로이에서 포로로 잡힐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게 있다. 실제로 벌어진 일, 즉 귀향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줄곧 고통에 시달린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삶은 그의 인생 각본에 없었다. 원치 않은 전쟁에 나서야 했고, 귀향길에 선원을 모두 잃었으며, 지하 세계까지 다녀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정체성을 바꿔야 했고, 구혼자들을 학살한 뒤 또다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그것만은 그가 바란 대로 이루어진 결말이었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유일한 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곱씹고 한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에 매달리면, 사소한 긍정적 결과조차 이뤄낼 수 없다. 그래서 근본적 수용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열어 준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맞서느라 에너지를 허비하던 것을 멈춘다. /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에 주의를 돌린다. / 현실 부정이 가려 놓은 기회를 새롭게 발견한다. / 저항이 초래하는 불필요한 고통을 내려놓는다.’

상황이 달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바람만으로는 제대로 회복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현실이 이렇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중요한 문제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회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좋다. 행동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다.



2장 내면의 뗏목 -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기술



낙원이 족쇄가 될 때


난파당한 채 홀로 남은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섬에 떠밀려 왔을 때 여신 칼립소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숨기는 자’를 뜻하는 이름의 칼립소는 그를 붙잡아 둔다. 훗날 페넬로페에게 자신의 여정을 들려줄 때, 오디세우스는 여신의 동굴에 갇혀 있었고 그녀가 자신을 남편으로 원했다고만 말한다. 그곳에서 일곱 해나 머물렀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또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떠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 말 속에는 초반엔 자기도 그 시간을 즐겼을 거라는 뉘앙스가 배어 있다. 오디세우스가 있던 동굴은 헤르메스조차 경탄할 만큼 눈부신 곳이다. 페넬로페에게 자기 곁에 있으라고 설득하면서, 칼립소는 한숨을 내쉰다.

‘어쨌든 몸매는 내가 그녀보다 낫잖아요. 키도 더 크고. 아름다움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불멸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오디세이아』 5권 211~214행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제안을 꺼내 든다. 바로 불멸과 젊음이다. 그는 고통 없이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여신과 함께 근사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끝없는 만족만이 이어지는 삶이다. 이는 성취와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날의 사회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들과 다르지 않다. 가령 좋은 직업을 가지면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완벽한 관계를 만나면 온전해질 것이며, 이상적인 몸매를 갖추면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또 적절한 생산성 앱을 찾으면 인생이 정리되고, 최적의 웰니스 루틴을 따르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현대판 칼립소의 거래를 제안받고 있다. 위로와 쾌락을 줄 테니, 진짜 나 자신을 내놓으라는 제안이다.

이 과정은 서서히,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하게 진행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자신의 본모습에서, 또 중요한 것들에서 멀어진다. 나아가, 더 오래도록 행복을 안겨 줄지도 모를 수고로운 일들은 포기해 버린다. 삶의 애환을 겪으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 인간으로서 지닌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일들은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다. 그런데 여신과 함께하는 오디세우스는 즐겁지 않다. 겉으론 완벽한 삶을 손에 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본질과 단절되어 있던 그는 위험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여정을 선택한다. 이 모습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의 쳇바퀴’를 떠올리게 한다. 삶의 조건이 외적으로는 나아지는 듯 보여도, 우리의 핵심 가치나 관계와 어긋나 있다면 지속적인 만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립소 곁에 머문다는 것은 귀향의 여정을 포기한다는 뜻이고, 귀향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오디세우스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통이 없는, 어쩌면 의미도 없는 삶인가? 아니면 상실을 감수하더라도 진정한 연결과 사랑이 있는 삶인가? 어쩌면 바로 그 상실의 가능성 때문에 삶과 사랑이 소중해지는 것은 아닐까? ‘칼립소 효과’는 우리 삶에서도 일어난다. 벗어나기 어려운 제약 속에 적응한 나머지 더 나은 것을 향해 움직이려는 의지 자체를 잃어버릴 때 그렇다. 지금 하는 일에 흥미가 없지만 변화의 불확실성이 두려운 직장인,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에 매달리는 연인.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족쇄에 묶여 있다. 칼립소 효과에서 벗어나려면 당장의 안락함을 넘어서 더 깊은 가치와 연결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들, 즉 집과 가족과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붙들고 있었기에 무감각한 안락 속에 머무는 선택을 거부할 수 있었다. 지금 자리에 머무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점이 있다. 안정적인 수입, 주말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 실패를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이런 것들은 매력적인 유인책이다. 하지만 안전지대에 머물 때 초래될 장기적 결과 역시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든 지금과 같은 삶을 반복하든, 선택은 피할 수 없다.



3장 함께할 선원 - 나를 지탱해 줄 관계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여정의 방향을 좌우한다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관계를 맺도록 설계된 사회적 존재이며, 안전감과 정체성, 삶의 목적의식은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 정서적 지원: 사랑과 돌봄과 공감은 우리가 존중받고 이해받는다고 느끼도록 돕는다.

- 정보적 지원: 조언과 안내와 지식은 우리가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돕는다.

- 도구적 지원: 실질적 도움과 자원은 당장의 욕구를 해결해 준다.

- 평가적 지원: 피드백은 자신과 주변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돕는다.



『오디세이아』에서 선원들은 고난을 겪으며 정서적 지원을 주고받는다.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전장에서 축적된 경험을 공유하며(정보적 지원), 자원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한다(도구적 지원). 또한 선원들은 오디세우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이를 지적하고, 오디세우스 역시 그들에게 같은 역할을 한다(평가적 지원). 실제로 우리는 삶이라는 여정에 함께할 선원들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꾸릴 수 있다.

- 전문적 선원: 함께 일하면서 같은 도전과 목표를 공유하는 동료, 멘토, 협력자들.

- 관심사로 맺어진 가족: 달리기 모임, 자원봉사 단체처럼 열정이나 취미,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가족: 응급 상황이나 인생의 큰 전환기, 트라우마 시기에 의지하게 되는 사람들. 조건 없이 곁에 머물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이들.- 성장을 돕는 가족: 우리가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도록 자극하는 사람들. 치료사나 코치, 종교 모임, 솔직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친구들.- 기쁨을 나누는 가족: 우리의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좋은 소식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이들.

『오디세이아』는 사람들 간의 연결에서 비롯되는 지속적 힘을 이야기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에 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여정의 방향을 좌우한다. 크게 도약하는 순간이든 바닥까지 가라앉는 시기든, 당신 곁에도 당신을 끝까지 버티게 해 준 선원들이 있었다. 힘겨운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선원들과 함께 삶의 굴곡을 헤쳐 간다면, 당신은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



4장 인생 서사 쓰기 -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힘이 된다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 내면 보이는 것들


알키노오스 왕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아』는 그전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즉, 트로이를 떠난 뒤로 칼립소의 섬에 이르기까지 오디세우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저자인 호메로스가 아니라 오디세우스 자신이 직접 말한다. 그가 이야기꾼이 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한 인간에게 일어난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오디세우스는 영웅의 지위와 영광을 모두 잃고, 가족과 동료들마저 곁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뜻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오디세우스 자신은 어떻게 이해할까? 이 험난한 모험에서 어떤 의미를 건져 올릴까?

인간은 본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다. 신화와 소설, 영화와 연극은 모두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방식들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또 서로 연결된다. 자기 경험의 화자가 되는 데에는 깊은 힘이 있다.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순간, 삶의 주도권이 우리 손으로 돌아온다. 이야기가 우리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를 통제한다. 현대의 트라우마 치료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내러티브 노출 치료 혹은 서사적 노출 요법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자기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게 한다. 거기엔 긍정적 사건도 있고, 부정적 사건도 있다. 이 치료법의 목적은 트라우마가 삶의 흐름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이해하고, 그 사건을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 맥락 속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역시 시간 흐름에 따라 서술된다. 그는 트로이를 떠난 순간부터 시작해 일련의 사건들을 따라가며, 마침내 파이아키아인들과 함께 있는 현재 지점에 이른다. 사건을 시간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일은 트라우마 기억을 다루는 데 중요한 과정이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사건을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느끼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를 시간 흐름에 따라 정리해 나가면, 때와 맥락도 없이 불쑥 끼어드는 파편적 기억들에 휩쓸리지 않고, 흩어져 있던 사건들을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정리된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이 지난 지금, 나는 여기서 안전하게 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전까지 안 보이던 패턴과 사건 간의 연결, 그리고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오디세우스 역시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깨닫는다. 자신의 오만이 어떻게 포세이돈의 분노를 불러왔는지, 또 온갖 시련이 어떻게 그를 감정적으로 한 단계씩 변화시켰는지를. 오디세우스의 성장은 예측 가능한 궤적을 따르지 않는다. 번쩍이는 자각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에 어리석음의 순간이 끼어든다. 핵심은 그 모든 순간을 지나,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배울 수 있다.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것인지 돌아볼 수 있다. 당신은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부모의 오랜 병환, 갑작스러운 실직을 어떤 말로 풀어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벌어진 일을 차분히 돌아보고, 그 안에 담긴 힘든 감정과 마주하며, 그 감정을 이해해서 마음속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 마치 지하실 상자 같은 곳에 쑤셔 넣곤 한다. 그러다 방심한 순간, 준비가 안 된 채로 불쑥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그 상자를 꺼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핀 뒤, 다시 정돈해 제자리에 놓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과거를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본질적으로, 오디세우스가 자기 이야기를 자기 언어로 들려주며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언제까지 남 탓을 할 것인가


오디세우스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호메로스는 그를 ‘폴리메티스’라고 묘사한다. 꾀 많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야기를 꾸며 내는 데에도 익숙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오디세우스는 사소한 거짓말쯤은 불편해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게 거짓말은 검이나 방패처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전략이다. 오디세우스가 파이아키아인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기 직전에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과장하고 있는 걸까? 그의 모험은 정말 그가 말한 그대로 벌어졌을까? 우리가 기댈 것은 이 노련한 책략가의 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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