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 북라인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북라인 / 2000년 6월 / 228쪽 / 7,000원
사랑과 우정사랑과 우정을 비교해 보면 처음에는 사랑이 우세한 듯하다. 사랑의 정열에 비하면, 우정 관계는 가볍고, 싱겁고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사랑은 수천 년 동안 연극이나 시, 소설을 통해 찬양되어 왔다. 그래서 양자를 비교하면 우정이 빈약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이 우정의 면전에서 누려온 이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특질들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상호성이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우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우정을 느낄 수 없다.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경우가 아니면,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랑은 서로 나눌 수 없다는 불행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한 사랑은 비극과 소설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시인은 말한다. “나는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받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행복할 텐데.” 슬프게도,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경우는 드물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는 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 친구가 당신을 천박하게 여기는 행동을 했다면, 그는 이미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경멸은 우정을 죽여 버린다. 반면에 사랑의 격정은 사랑하는 대상의 어리석음, 비겁함, 천박함 따위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고? 때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탐욕, 욕심 등의 가장 나쁜 단점들 때문에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추잡한 것을 먹고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서구 문명은 사랑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고 있다. 이 덧없는 열정 위에다 어떻게 감히 한 생애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라 브뤼예르는 일찍이 “우정은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지지만, 사랑은 점점 약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시간은 사랑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옛날에 결혼은 사회적, 종교적, 물질적 편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러한 첫 번째 조건들이 충족되고 나면, 서로 사랑하는 일만 남게 된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번개에 얻어맞은 것 같은 경험”으로 집약된다. 그런 다음에는 이혼하는 일만 남아 있다. 성실한 사랑마저도 이 일시적인 현기증의 영향을 받는다. 브리지트 바르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남자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만큼은 언제나 그에게 성실했다.” 그리고 난 다음엔? 쥘 로맹은 사랑은 “훗날 우정이 놓여질 자리를 향기롭게 해줄 뿐”이라고 썼다.
만일 행복한 결혼이라는 게 있다면, 그 결혼은 동반과 사랑의 조건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정의 조건들을 반영하려고 애쓴다. _몽테뉴
고양이와 개고양이와 개는 가장 가정적인 동물, 즉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가장 잘 통합되어 있는 동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집에 통합되어 있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고양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집 안에 있는 호랑이, 조그만 야생동물이라고 말한다. 고양이가 개처럼 사람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고양이는 ‘가축’이라기보다는 ‘길들여진 야생 동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가축과 길들여진 야생 동물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가축은 집 안에서 태어난다. 길들여진 야생 동물은 자연에서 태어난 뒤, 나중에야 집 안에 들여놓아진다. 그런데 암고양이는 집 밖에서 새끼를 낳아 가지고는 한 놈씩 한 놈씩 사람이 사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고양이가 독립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고양이의 독립적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고양이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배우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 콕토는 자기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경찰 고양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양치기 고양이라든지, 사냥 고양이, 장님 길잡이 고양이, 서커스 고양이, 썰매 끄는 고양이도 없다. 고양이는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가 집 안에서 개보다 못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고양이는 장식이며 사치이다.
고양이는 또한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개가 열심히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데 반해서 고양이는 동족들한테서도 도망친다. 개는 사람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강제로 비천한 일을 시키는 주인 때문에 품위를 잃기도 한다. 때로는 그보다 더 나쁜 경우를 당하기도 하는데 개 사육사들은 더 추악하고 더 괴물 같은 개 종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온갖 유전 과학의 기술을 동원하는 것 같다.
테켈 - 짧은 다리 때문에 거의 뱀처럼 보이는 - 과 불독 - 헉헉거려야 겨우 숨을 쉬는 - 을 만들어 낸 이후에도, 사람들은 엉덩이 부분이 축 처진 독일 셰퍼드와 언제나 달달 떨리는 몸 때문에 힘들어하는 암컷 그레이하운드, 털 없는 개 등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개들의 불구성은 주인의 동정심과 걱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주인으로 하여금 개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고양이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의 성정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사람들은 개에게 문을 열고 바깥을 정복하러 떠나는 충동을 기대한다. 사람이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가 사람의 산책을 이끈다. 사람은 개가 자기를 대신해서 거리나, 집 주위에 있는 들판이나 숲의 모든 구석구석을 탐험해 주기를 바란다. 개의 후각 - 고양이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 은 멀리에서도 수색을 할 수 있는 도구이다. 사람은 그 후각을 가로채고 싶어 한다.
반면에 고양이는 집 안에 남아서 난롯가나 등잔 아래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꾸벅꾸벅 졸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이다. 고양이가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기 때문이다. 개가 일차적 동물이라면, 고양이는 이차적 동물이다.
물과 불물과 불은 모두 생명과 밀접하고 아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생명이 물에서 왔다는 것 - 과학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 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포유동물은 바다에서 발생했고, 인간은 양수에서 태어난다. 늪에도 무수한 생명체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불꽃은 영혼의 현존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를 매혹시킨다. 생명은 물에서 태어났지만, 불은 그 열과 빛, 그리고 연약함 때문에 바로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낸다. 늪의 검은 물 위에서 꺼질 듯 팔락거리는 춤추는 도깨비불은 살아 있는 영혼이 전하는 감동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잔인한 동기, 또는 퇴폐적인 동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물과 불이라는 두 적수를 접근시켜 보려고 애를 쓴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냄비 속에 물을 넣고 불로 끓이는 것만 가지고는 직성이 안 풀려서, 불씨 위에 양동이 물을 부어서 저녁의 캠프파이어 불을 꺼 버린다. 그도 모자라서, 히드라와 용의 전쟁을 주재하는 소방수는 불이 발생하는 지점에다 창을 던져 넣는다. 이 점에 관해, 우리는 너무나 비관론적인 스페인 속담을 상기해야만 한다. “물과 불이 싸우면, 언제나 불이 지게 되어 있다.” 이 속담은 비관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불은 열정, 젊은 정신, 대담한 열정을, 그리고 물은 슬프고 실망스러운 현실에의 종속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천재성은 물과 불을 대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물과 불을 하나의 원소 속에다 통합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때로 “불의 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술이다. 술은 물이며 동시에 불이다. 그러나 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과 불이라는 두 개의 얼굴 중에서 하나의 얼굴만을 보여주기도 한다.
『불의 정신분석』을 저술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분석에 따르면, E. T. A 호프만과 에드거 포우는 두 사람 모두 알코올 중독자로 술잔에서 영감을 길어 올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호프만의 술은 불타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남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우의 술은 낮게 가라앉게 만들며, 망각과 죽음을 가져오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의 아주 여성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드거 포우의 천재성은 ‘어셔 가 저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연못 속에 잠자고 있는 물, 죽은 물에 연관되어 있다.
환경과 유전하나의 생명체는 어떤 환경과 어떤 생의 시간에 몸을 담고 있는 어떤 유전적 현상이다. 유전 형식은 각기 다른 별개의 유전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선조들의 피라미드에 의하여 형성된 방대한 규모의 취사선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 선조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 세대씩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그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열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2,048명의 선조를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유전은 격세 유전의 법칙을 따른다. 한 사람의 유전적 특질은 그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선조 전체로부터 유전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특질은 수세기 전에 살았던 조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형질들은 다른 형질들보다 더 끈질겨서 다른 형질들을 억압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전 형질을 우리는 우성 인자라고 부른다. 다른 형질들은 열성 인자이다. 이처럼 부모 중 한 사람의 까만 눈은 다른 사람의 푸른 눈에 대해 우성 인자이다. 그러나 푸른 눈은 점점 더 그 수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격세 유전 법칙에 따라 언제나 이런저런 후손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환경은 또 환경대로 더 필요하거나 덜 필요한, 또 때로는 필수 불가결한 적응을 생명체에게 강요함으로써 생명체의 형태를 주조한다. 획득된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류의 발전을 무망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것을 배우지만, 아이들은 계속해서 말할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채 태어나는 것이다.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자연 도태 이론은 종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이론은 유전 형질이 돌연변이에 의해 등장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 형질의 소유자는 생존에 있어 남들보다 더 불리하거나, 또는 더 유리하다. 그 형질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그 형질들이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달려 있다.
진짜 쌍둥이들(즉 같은 난자에서 태어난 동종 접합자나 일란성 쌍둥이)은 한 개인에게 유전과 환경이 어느 정도의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데 아주 좋은 연구 자료가 된다. 동일한 유전 인자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들 사이에 생겨나는 차이점이 환경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인간 조건, 즉 환경은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유의 몫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되어 버릴 테니까.
그런데 일란성 쌍둥이들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한 결과, 이와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그들은 실제로 점점 더 달라졌다. 같은 환경에서 같이 자라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개성의 형성에 있어서 유전과 환경이 아닌 제3의 요인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는 이 제3의 요인을 자유 결정, 또는 아주 단순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이 살아가는 쌍둥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의존하기도 하지만 서로 구별되기 위해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 주는 쌍둥이 형제와 멀리 떨어져서 따로 성장했을 때보다도 더 달라지는 경우까지 생겨난다.
쾌락과 기쁨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이 신이라는 분에 대해서, 인간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바로 창조주 자신이라는 사실을 뺀다면 말이다. 따라서 창조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명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창조가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삶에는 창조라고 하는 신의 불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불꽃은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창조를 이르는 것인가? 가장 거창한 것부터 가장 소박한 것에 이르기까지 창조의 방법은 무수히 많다. 자기 방의 페인트를 새로 칠할 수도 있고, 꽃을 심는가 하면 그림을 그리고, 코러스가 들어간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국가를 건설할 수도 있다.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아이를 기를 수도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창조이지만, 가장 위험한 창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창조에 수반되는 감정은 기쁨이다. 그것은 창조적 행동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면모이다. 창조적인 일이 가져다주는 다른 보상 - 돈, 명예 - 은 비본질적이며 우연적인 것이다. 기쁨만이 창조의 고유한 속성이다. 창세기를 보면, 천지 창조가 이루어지는 7일 동안 매일의 창조가 “야훼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쾌락은 이와 전혀 다르다. 기쁨이 창조를 물들이고 있는 감정이라면, 쾌락은 파괴의 한 가지 형태인 소비에 동반되는 감정이다. 과자를 만드는 법을 고안해서 그 요리법으로 과자를 만드는 제과공은 기쁨을 느낀다. 배가 고파서 과자를 먹으면,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과자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다.도덕주의자들이 쾌락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가장 최선의 경우에 쾌락은 동물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자연의 수단이다. 고통이 동물로 하여금 파괴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게 해주듯이 말이다. 그러나 쾌락은 쉽게 변질되기도 하고,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살인적인 습관을 수반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쾌락에 대한 혐오는 - 어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 생명에 대한 증오를 많이 닮아 있으며, 마약 중독 못지않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고행, 단식 등)의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기쁨과 쾌락이 분리시킬 수 없는 형태로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바로 관능이다. 기쁨과 쾌락이 뒤섞여 있다는 점이 관능의 특색이다. 왜냐하면 성적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며,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식인 충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살과 냄새와 체액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분명히 식인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섹스가 이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곧 사디즘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관능이라는 이 파괴적 열망은 창조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적 쾌락은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하는 삶 속에서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하여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생활은 두 사람의 자질을 단순히 한데 더해 높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아름다움 안에는 균형과 안전성이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평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완벽함이 있다. 예술은 이처럼 아름다움의 신인 태양신 아폴로와 이성과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만남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프레데릭 니체는 『비극의 탄생』(1871)에서 이 냉담한 남신과 여신의 짝에 환희와 도취, 그리고 죽음의 신인 말썽쟁이 디오니소스를 힘차게 대비시킨다. 낭만주의적 신들의 판테온에 새로 진입한 이 새로운 신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1790)에서 아름다움의 범주에 대치시켰던 숭고함의 카테고리를 의인화하고 있다. 칸트에 앞서서 장 자크 루소와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 그리고 샤토브리앙은 산과 바다와 사막을 찬양한 바 있다. 이 세 가지의 자연 무대 장치는 그때까지는 여행자들과 예술가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