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미술관
수지 호지 지음 | 현대지성
도둑맞은 미술관
수지 호지 지음
현대지성 / 2026년 8월 / 280쪽 / 17,500원
1부 LOST 잃어버린 미술품
나치의 예술품 대량 약탈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마자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독일계 유대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독일계 유대인 수집가들은 반 고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페르메이르, 렘브란트 등 저명 화가의 걸작들을 강탈당했다. 작품 중 일부는 나치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팔려나갔고, 일부는 히틀러가 계획한 독일 미술관을 위해 보관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파괴되었고, 나머지는 나치 관료들의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
나치가 조직적으로 약탈한 미술품을 독일어로 ‘라우프쿤스트’라 한다. 나치는 12년간 유럽 전역에서 65만여 점을 강탈했는데, 이는 유럽 대륙 전체 미술품의 20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결성한 연합국의 기념물·미술품·기록 보존 프로그램인 ‘모뉴먼츠 맨’(MFAA)을 통해 많은 작품이 회수되었지만, 3만여 점은 여전히 행방불명이거나 정당한 소유주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나치는 다른 나라들을 침공할 때도 정복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약탈했고, 그 때문에 미술품의 이동이 크게 늘었다. 나치당을 대표하는 독일인들은 유대인에게서 훔친 다량의 미술품을 유럽의 예술 중심지에서 판매했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프랑스의 어느 경매장에서 낙찰된 약탈 미술품만 100만 점이 넘었다. 원래 그 작품들은 히틀러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스트리아 린츠에 ‘총통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려고 계획했던 대형 박물관에 전시할 예정이었다. 전쟁 중에는 그 작품들을 바이에른의 노이슈반슈타인성과 오스트리아의 알타우세 소금 광산 같은 안전한 장소로 옮겨 보관했다.
퇴폐 미술: 히틀러는 실패한 예술가였다.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입학을 거부당한 뒤로 그는 당대의 성공한 화가들을 시기했다. 그의 미술 취향은 단조롭고 폭 좁은 구상화 양식에 국한되었다. 그런 미술 양식이 순수한 아리아인 혈통에 관한 자신의 이상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 미술과 추상 미술을 ‘퇴폐적’이라고 폄하했는데, 특히 유대인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혐오했다. 스스로 미술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그는 1933년 독일 총리가 되자 자신의 미적 이상을 강요하면서 독일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2만 점에 달하는 ‘퇴폐적’인 미술품을 모조리 팔아버리거나 파기하라고 요구했다. 1937년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같은 시기에 열린 ‘퇴폐미술전’에는 피카소, 고갱, 마티스 등의 작품 740점이 전시되어 조롱거리로 삼아졌다. 1939년에는 회화와 조각 수천 점이 불태워졌고,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약탈 작품 126점이 헐값에 경매로 팔려나갔다.
공공 소장품, 민간 소장품, 개인 소장품: 나치는 국가 박물관에 이어 민간 수집가의 소장품도 약탈했다. 오스트리아, 폴란드, 프랑스 등 점령국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됐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세의 초상’, 실레의 ‘발리 노이질의 초상’ 등이 압수당했고, 로스차일드·로젠버그 같은 유대인 명문가의 컬렉션도 몰수됐다. 폴란드에서는 예술 유산의 절반가량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고 추정된다. 나치가 빈에서 압수한 물품만 화물선 29척 분량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로스차일드 은행 가문의 궁전에 보관되어 있던 5,000점이 넘는 미술품 중 3,500여 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히틀러가 자신의 ‘총통 박물관’을 위해 선별해 가져갔다. 얀 페르메이르의 ‘천문학자’를 비롯해 반 다이크, 프라고나르, 라파엘로 같은 화가들의 수많은 걸작이 그렇게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다.
전후 후유증과 회복: 총통 박물관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그 박물관에 전시하려고 했던 수많은 미술 작품은 헤르만 괴링과 같은 나치 고위 간부들의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연합국이 약탈 미술품을 찾아 합법적인 소유주에게 돌려주기 위해 설립한 ‘모뉴먼츠 맨’이 활동을 개시했다. 유대인 후손들이 가문의 약탈당한 재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미술품 반환 작업은 이후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이런 노력이 성공해 회수된 미술품도 상당했지만, 아직도 엉뚱한 사람의 손에 있거나 행방불명 상태인 미술품이 수천 점에 이른다.
나치의 미술품 약탈은 단순히 부를 획득하거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적 정체성을 지우고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도난당한 미술품을 계속 추적하는 일은 단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각국의 문화 전통을 복원하고 인류 공통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뜻깊은 노력이다.
빈 액자가 걸린 미술관
난장판이 된 미술관: 1990년 3월 안개 낀 보스턴의 그날 밤, 가드너 미술관에서 근무 중이었던 두 경비원 중 1명이 직원 출입구의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갔다. 그가 마주한 2명의 경찰은 소란이 있어서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다고 했다. 경비원은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미술관 규정을 어긴 대처였다. 몇 분 뒤, 가짜 경찰들은 문을 열어준 경비원과 다른 경비원에게 총을 겨눠 미술관 지하실로 데려가 손을 묶고 재갈을 물렸다. 그러고는 13점의 미술품을 훔쳤다.
먼저 렘브란트의 큰 그림 몇 점부터 떼어내려고 했다. 손을 대자마자 미술관의 감지기가 날카로운 경보음을 울려댔으나, 도둑들은 이내 감지기를 발로 차서 꺼버렸다. 그들은 렘브란트의 1633년 작품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벽에서 떼어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렸다고 알려진 유일한 바다 풍경화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격렬한 폭풍우와 싸우는 장면이다. 도둑들은 액자째로 가져가지 않고 그 귀중한 캔버스를 틀에서 잘라냈다. 이어 같은 해에 제작된 렘브란트의 또 다른 작품 ‘검은 옷을 입은 남녀’를 틀에서 잘라냈다. 캔버스 조각과 얇은 물감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변의 작은 탁자 위에는 페르메이르의 ‘음악회’라는 작품이 놓여 있었는데, 도둑들은 그 작품을 받침대에서 거칠게 들어 올렸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진품으로 확인된 단 36점의 회화 중 하나다.
도둑들은 생각보다 예술 작품을 훔치기가 쉽다는 사실을 알고는 극도로 흥분했다. 그들은 렘브란트의 또 다른 작품인 작은 자화상과 고베르트 플링크의 1638년 작품 ‘오벨리스크가 있는 풍경’, 그리고 기원전 1200년경의 중국 상나라 시대의 청동 술잔을 훔쳤다. 조반니 벨리니, 라파엘로, 루벤스의 그림은 그냥 놓아두고 에드가 드가의 스케치 5점을 비롯해 가치가 낮은 작품들을 가져간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훔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도둑들은 가까운 벽에 걸려 있던 미켈란젤로의 훨씬 값비싼 드로잉 작품들도 가져가지 않았다.
이어서 그들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몇 점을 뜯어냈는데, 쉽사리 떼어내지지 않자 화가 났는지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아버렸다. 나폴레옹 군기가 담긴 유리 진열장도 열리지 않자 그들은 화풀이로 진열장 꼭대기의 독수리 모양 장식을 부러뜨렸다. 1층으로 돌아와서는 에두아르 마네의 ‘토르토니에서’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도둑들은 경비과장 사무실 문을 발로 차서 열고 비디오 녹화 장치를 뜯어낸 다음, 그들의 얼굴이나 움직임이 기록된 모든 영상을 삭제했다. 최후의 악의적인 행동은 마네 그림이 들어 있던 빈 액자를 경비과장의 의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것은 박물관을 운영하는 모든 책임자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 대한 모욕이었고, 절도에 성공했다는 오만함의 표출이었다.
단 81분 만에 두 남자는 박물관을 떠났다. 건물에서 나온 그들은 훔친 미술품 13점을 가지고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차는 빠르게 거리를 빠져나갔다. 도둑맞은 미술품과 유물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순간이다.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뉴욕 출신의 미술계 거장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1840-1924)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뉴욕과 유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유럽·중동·아시아 등 곳곳을 여행했다. 부부는 2,500점이 넘는 유물과 미술품을 수집했다. 이 컬렉션에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라파엘로, 마네, 보티첼리, 마티스, 첼리니를 비롯한 역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이저벨라는 남편과 함께 사립 미술관 건립을 계획했지만, 남편은 61세에 사망했다. 이후 이저벨라의 감독 아래, 르네상스 양식의 베네치아 궁전이 보스턴에 들어섰다. 1901년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저벨라가 1년간 전시를 기획한 뒤, 1903년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저벨라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 건물의 4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가드너 박물관은 보스턴시에 기증되어 공공기관이 되었다. 단, 미술품 컬렉션은 정확히 그녀가 정한 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어떤 것도 추가하거나 없애거나 배치를 바꿀 수 없다.
용의자들: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경찰 수사는 난항을 겪었고,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4년 뒤, 가드너 박물관 관장에게 작품들의 몸값으로 260만 달러를 요구하는 연락이 왔다. 작품들의 가치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었기에 미술관 운영자들은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범인의 지시를 따랐다. 요구받은 대로 《보스턴 글로브》에 암호 메시지를 실었지만, 그 이후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도둑들이 값비싼 작품을 별생각 없이 무작위로 훔친 정황상, 의뢰를 받았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코르시카 마피아, IRA 등 여러 설이 제기됐지만 체포된 사람은 없다.
그 후의 이야기: 2013년 FBI는 배후를 알아냈다며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진전은 없었다. 이후 FBI는 도둑들의 신원을 확보했으나 둘 다 사망했고 조력자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품이 숨겨진 장소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지금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
대낮에 사라진 반 고흐의 그림2010년 8월, 모하메드 마흐무드 칼릴 박물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1887년 작품이자 ‘양귀비꽃’ 또는 ‘꽃과 꽃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이 액자만 남겨진 채 도난당했다. 당시 이 그림은 5,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모하메드 마흐무드 칼릴 박물관은 이집트의 정치인 모하메드 마흐무드 칼릴 파샤와 그의 아내 에밀린 록을 위해 1920년 기자에 건설된 궁전이다. 그들 부부의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소장한 이 궁전은 1962년 7월 23일 부부를 기리는 의미에서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1971년부터 1993년까지 이 건물은 정부 청사로 사용되었지만, 이후 복원되어 다시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폴 고갱,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오귀스트 로댕, 빈센트 반 고흐 등 19세기 유럽의 위대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체포당한 직원들: 2010년 도난 사건이 발생한 뒤, 이집트에서는 모센 샬란 문화부 차관을 포함한 문화부 직원 12명이 직무 유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그들이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거나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12명 전원이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 계류 중에 보석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기소된 모든 직원에게는 곧바로 출국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1977년에도 같은 그림이 도난당한 적이 있었는데, 10년 뒤 쿠웨이트에서 회수했다. 그 도난 사건의 세부 사항은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첫 도난 사건 이후 그림을 되찾았을 때, 이집트의 내무장관은 3명의 이집트인을 경찰이 구금했으며 그들이 캔버스가 숨겨진 곳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그 3명이 기소되었거나 재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첫 사건과 달리 2010년에 일어난 도난 사건 이후로는 그림이 목격된 적도 없고 소재가 밝혀진 바도 없다. 토요일 한낮에 그림이 도난당했을 때, 박물관에는 온종일 관람객이 10명밖에 없었다. 직원들이 맨 처음 의심한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목격된 젊은 이탈리아 관광객 둘이었다. 두 남자는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려다가 저지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몸과 가방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을 방문한 단체 관광객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기소당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다.
보안 시스템의 결함: 2023년, 이집트의 억만장자 나기브 사위리스는 도둑맞은 그림의 반환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보받는 데 17만 5,0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도난 사건 수사에서는 박물관 보안에 ‘명백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안 카메라는 총 43대 가운데 단 7대만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모든 그림에는 경보 장치가 달려 있었지만 반 고흐 그림이 도난당했을 때는 경보가 전혀 울리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경보기와 카메라는 꽤 오랫동안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도난의 미스터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사건은 미해결 상태이고, 반 고흐의 화려한 그림은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다.
반 고흐와 몽티셀리: 크기는 작지만 색이 화려한 반 고흐의 그림 ‘양귀비꽃’은 프랑스 화가 아돌프 몽티셀리(1824-1886)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반 고흐는 1886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몽티셀리의 그림을 봤는데, 그해는 몽티셀리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했다. 몽티셀리는 개성적인 낭만주의 화풍을 구사했고,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질감과 광택을 살리는 데 탁월했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 폴 세잔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몽티셀리의 그림을 본 뒤, 반 고흐는 자신의 화풍을 어두운 색채에서 훨씬 밝은 색채로 바꿨으며, 물감을 이전보다 더 두껍고 굵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몽티셀리에 관해 “때로는 내가 정말로 그분의 작업을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이야기했다.
난로 속으로 사라진 모네와 피카소2012년 10월 16일 새벽,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쿤스트할 미술관에서 유명 화가 6명의 극히 중요한 작품 7점이 도난당했다. 이 사건은 세계 각국의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처음에는 전문 절도범들의 정교한 범행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미술품을 훔친 경험도 없고 미술품 절도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루마니아 범죄자 몇 명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특기는 주택가를 터는 것이었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가의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술품 판매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도둑맞은 그림은 피카소, 마티스, 고갱, 프로이트, 모네, 마이어 드 한의 작품이었다. 미술 전문가들은 쿤스트할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미술품의 가치가 수천만 파운드에 이른다고 평가했다. 한 보안 전문가는 쿤스트할 미술관을 ‘보안의 악몽’이라고 부르며, 도둑들이 범죄를 저지르기에 앞서 몇 달 동안 복잡한 계획을 세웠으리라고 추측했다.
유명한 그림들: 도둑맞은 그림들은 19-20세기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었다. 파블로 피카소의 ‘할리퀸의 머리’는 두꺼운 갈색 물결무늬 종이에 검은 잉크 펜과 붓, 색연필, 파스텔을 사용한 그림이다. 앙리 마티스의 ‘흰색과 노란색 옷을 입고 독서하는 소녀’는 판에 부착된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클로드 모네의 ‘런던, 워털루 다리’는 갈색 물결무늬 종이에, ‘런던, 채링 크로스 다리’는 회색과 갈색 물결무늬 종이에 파스텔로 그렸다. 그 밖에 폴 고갱의 ‘열린 창문 앞의 소녀’, 마이어 드 한의 ‘자화상’, 루시언 프로이트의 ‘눈 감은 여성 에밀리 번’은 모두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다 합쳐서 5,000만에서 1억 유로의 가치를 지닌다고 추정되는 이 그림들은 쿤스트할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에서 선보이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