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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저)문명의 공존

하랄트 뮐러 지음 | 푸른숲


문명의 공존

하랄트 뮐러 지음

푸른숲 / 2000년 2월 / 360쪽 / 14,000원



“문명 전쟁은 ‘역사의 자연법칙’이 아니며,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운명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파국적 국가 운영의 실책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 개연성일 뿐이다. 정치적 동맹과 경제적 협력, 비정부 부문의 강화와 인권의 진흥, 그리고 타문명에 대한 관용은 문명 전쟁을 문명 공존으로 바꾸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문명의 충돌인가? 아니면 문명의 공존인가? 21세기가 20세기처럼 피비린내를 풍길 것인가, 아니면 분쟁은 주변적 현상이 되고 세계가 협력의 질서를 이룩할 것인가. 이것은 ‘중국의 도전’이나 ‘일본 주식회사’, 이슬람 근본주의에 달린 문제라기보다 서구 사회에 달린 문제다.”

문명의 충돌인가? 아니면 문명의 공존인가? 서구는 문명의 순수화 전략을 고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치, 경제, 사회적 협력을 통해 문명의 상호 침투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가? 전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신쇄국주의론의 대안이 유효한가? 아니면 신개방주의론의 대안이 유효한가? 『문명의 공존』은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독자들에게는 헌팅턴이 오컴의 면도날을 휘두른 엉터리 면도사인지, 뮐러가 세계적 석학의 수준 높은 논의를 한 차원 격하시킨 지적 패러디스트(parodist)에 불과한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지적 논쟁의 재판관이 되는 행운도 주어질 것이다.



1부 비판




“이 책의 1부에는 헌팅턴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비판을 담았다.”



1. 헌팅턴의 세계


『문명의 충돌』은 야심만만한 기획이다. 헌팅턴은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문명을 중심으로 오늘과 내일의 세계가 ‘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헌팅턴은 세계의 문명을 서구 기독교 문명, 동방 정교 문명, 이슬람 문명, 아프리카 문명, 인도의 힌두 문명, 일본 문명, 유교 문명으로 나누며, 핵심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 간의 전쟁이 도래하였음을 예고한다.

그러나 헌팅턴의 이러한 세계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오류와 잘못된 인식이 드러나 있다. 이슬람의 피 묻은 경계선이란 명제와 이를 입증하기 위한 헌팅턴의 통계적 가설 입증, 이슬람-유교 동맹의 잔혹한 시나리오를 펼치기 위한 중국과 북한의 대 이슬람 국가 무기 판매에 대한 입장은 명백한 오류이며, 가톨릭, 정교, 이슬람의 갈등으로 보스니아 분쟁을 설명하려는 논의는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헌팅턴의 거대 이론은 주의가 요망된다. 그의 이론 즉 그의 안경은 현실을 왜곡시킨다. 이제 경고를 발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 배후에 있는 이론은 심각한, 아니 구제 불능의 결함을 안고 있다. 이 이론을 기반으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정립한다면 그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2. 단순한 세계 이론이 필요한가?


가장 적은 수의 단순한 기본 가설을 근거로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이론이 가장 이상적이다. 절약적 이론일수록 선호되며, 이러한 이론이 갖는 미덕을 근대 학문의 선구자인 위대한 후기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컴의 이름을 따서 ‘오컴의 면도날’로 부른다. 많은 미국의 학자들은 이러한 절약의 미덕을 너무 직설적으로 이해해 이론의 사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현실 이해에 꼭 필요한 부분마저 잘라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국제 정치를 국가들과의 충돌로 설명하는 현실주의에서 그 계승자 헌팅턴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치학의 거대이론가들은 오컴의 면도날의 미명하에 이론과 모델을 형편없이 축소하고 있다. 이들은 부지런히 오컴의 면도날을 휘둘렀지만, 비판적 합리주의가 요구하는 경험적 검증은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거대 이론의 수립, 단순한 모델의 완성에 치중한 대신 검증 과정을 게을리한 결과 엄격한 학문적 장치였던 ‘오컴의 면도날’은 어느새 유명 인사의 이름을 새기는 조각 공구로 변해 버렸다.

미국학자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론은 대립하는 두 진영의 대립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마니교 정치학’이다. 빛과 어둠의 대결, ‘우리’와 ‘그들’의 대립은 미국 정치학의 주된 레퍼토리이다. 미국은 국초부터 미국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완고한 유럽과 정반대되는 사회 즉 악의 세계 한가운데 들어선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설정하였다. 정착민 대 원주민, 북부 대 남부, 자유로운 미국 대 보수적인 제국주의 권력,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미국 대 전제와 압제의 상징 소련 등 미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 대 그들’의 도식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대전에 개입하거나 세계 정치의 라이벌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려고 할 때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명분’이 필요했으며, 그 명분의 역할을 마니교적 구조(선과 악의 충돌)가 담당하였기 때문에 이런 유의 이론이 정치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니교 정치학은 이론적 ‘단순함’의 추구로 귀결된다. 헌팅턴은 “나의 이론만큼 단순하면서도 세계를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대안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세계 정치 현실의 커다란 부분을 무시하고 부정확하게 기술하거나 잘못 예언하는 이론은 경쟁력이 없다. 엉터리 면도사의 손에 들린 ‘오컴의 면도날’은 생명을 위협한다. 국제 정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구화의 과정들, 전 세계적 자본주의화의 과정, 국경을 초월한 통신의 증가, 국가, 국제기구 등의 정치기구의 형식, 다국적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의 중요 민간단체, 역사적 요소, 문명에 따른 가치 체계도 올바르게 고려되어야 한다.



2부 구상




“나의 구상은 2부에 담겨 있다. 2부의 첫 번째 장에서 나는 ‘문명’과 ’문화’의 개념을 밝히고 오늘날 문명의 발전을 추진하는 동력을 탐구했다. 두 번째 장에서는 문명과 정치를 연관시켜, ‘문명’이 어떤 상황에서 또 어떤 방식으로 정치화되는지 분석했다. 세 번째 장에서는 폭력 분규의 원인과 진행 과정을 탐구하며 현대의 전쟁이 헌팅턴의 진단을 입증해 주는지 점검했다.”

1. 문화, 문명, 국가, 사회


독일어권에서는 ‘문화’라는 단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해 영어권과 프랑스어권에서는 ‘문명’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전통적으로 독일이 문화의 개념을 사용한 것은 물질적인 것을 저열한 것으로 치부하여 보다 고귀한 정신적 가치에 귀속되려는 관념론의 영향 때문이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의 개념을 이러한 독일의 전통적인 ‘문화’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문명의 개념을 가치 체계, 그것도 종교가 결정적인 척도가 되는 가치 체계로 축소시켰다. 문명의 개념은 문화의 요소들(가치들과 지향성, 예술적 생산품과 종교)과 각 사회가 그 시대에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물질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모든 것을 종교공동체 소속에 따라 나누는 헌팅턴의 문명 및 문화 개념은 비생산적이며, 유치하고 편협하다. 헌팅턴은 가치 체계, 그리고 그것이 다른-역동적인-문명 요소와 갖는 상호작용을 간과한 채, 경직된 문명 개념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또한 오류이다. 문명의 정적 고찰은 변혁이 적절한 리듬을 타고 진행됐던 지나간 시대에 적합했다. 컴퓨터의 등장과 전 지구화의 물결은 전통 문명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다. 모든 문명이 고통스럽기까지 한 급속한 변화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명백하게 서구 문명권에 속하는지 의심스러운 독일과 일본의 경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근대화의 물결에서 전통 문명은 변화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근대화에의 적응을 통해 고유 문명의 성격은 시간적으로 변화해 왔고, 물론 유럽 사회와는 다르지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공통된 문명 특징을 갖게 된다. 세계 정치 무대에 새로 등장하며 열정적으로 경제의 민영화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컴퓨터 통신의 정보 및 토론 제의에 개방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도 수십 년 후면 중국 고유의 문명 색깔은 옅어지고 점차 서구의 문명 특질에 접근할 것이다. 헌팅턴은 문명을 정치의 행위자로 상정하지만, 문명은 정치의 행위자가 아니다. 문명은 세계 정치 무대에서 직접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의 충돌’은 은유에 불과할 뿐 가능한 정치 현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세계 정치의 지배 정치 형태이자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역시 ‘국가’이다. 포스트 모던 담론은 국가를 순수 구성체로 축소하려고 노력하지만 국가는 명확한 물질적 실체를 갖고 있고 현실 변화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실체성을 지닌다.

그러나 문명은 물리적 특성을 갖지 않고, 특정한 영토·종족과 결합되어 있지도 않으며 지역의 인간의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때만 존재한다. 그러나 헌팅턴은 문명에 영토적 실체와 세계 정치적 행동력을 부여했다. 헌팅턴은 핵심국이 문명을 대변하여 행위자 역할을 맡도록 구상하고 있지만, 핵심국이 같은 문명권 내 나머지 국가들을 지배할 수 없으며 ‘핵심국’이 억압과 폭력까지 동원하여 패권을 확보하려 하면 이에 맞선 동맹이 문명권 내에서 형성된다. 즉 ‘문명의 충돌’이 정치적 신빙성을 가지려면 지배적인 핵심국을 중심으로 문명적 패권 동맹이 형성되는 길밖에 없는데, 이러한 노력이 가시화될 경우 문명권의 경계를 초월한 동맹 관계가 형성될 개연성이 더 높다. 즉 국가세계에 내재한 역동적 법칙성이 ‘문명의 충돌’을 막을 것이다.

현대 정치 체계의 전형은 권력 국가가 아니라 교역 국가이다. 교역 국가는 정부가 경제계의 요구에 개방적이고, 외교 목표를 설정할 때 경제계를 위시한 이익 단체의 의견을 존중하며, 권력과 안보의 문제보다 경제 관계를 우선하고, 또 군비 지출을 최소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특징이 있다. 교역 국가는 협력을 강요받고 협상에 참여하는 등 국제기구가 활성화되고 국제 협력이 확대된다. 왜냐하면 지구화로 인한 국가 경제들 간의 상호 의존이 국가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사회의 가능성이 예측될 정도로 ‘사회’의 국제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헌팅턴과 문명의 독자성, 특별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거세게 저항하겠지만 CNN, 인터넷, 그린피스, 국제사면위원회 등 초국적 NGO의 발전이 각국 시민사회의 협력과 교류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들은 국가와 지역, 문명을 연결해 주는 특별한 종류의 교량이다. 전 지구화(제2의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의 자기주장 기회는 제한되고, 상호 의존은 문명 간의 교류를 집중적, 다층적으로 만들며, 문명 내부의 관계와 문명 간의 관계는 국제 관계의 역동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경제 세계의 역동성, 사회 세계의 역동성은 ‘낯선 것’과의 대결을 다층화하고 그로써 거부 본능을 자극하지만, 이와 동시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문명 간의 대화가 이루어질 기회를 생산한다.

2. 사회 위기와 통치력


헌팅턴의 문명의 차이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이론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 위기가 심각해질 때 문명의 가치는 중요한 정치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가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이때 문명에 따라 다섯 가지 위기 극복 반응 방식을 보이는데, 첫째 새것에 완전히 적응하는 경우, 둘째 새것과 전통의 합 명제로 타협안을 찾아내 이를 추구하는 것, 셋째 위기 극복 시도로 습득된 관행적 태도 방식과 근대화의 새로운 강요 그리고 그와 연결된 가치 변동에서 가능한 타협안을 찾는 시도, 넷째로 자신의 문명을 역사의 잿더미 위에 던져버리지 못하며 전래된 것을 확고히 세우는 방식, 다섯째 낯선 것을 공격적으로 소외시키는 태도이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와 인종 학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이러한 위기 극복 메커니즘의 일환으로 분출되었다. 이때 사용된 ‘소외’라는 방식은 국가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헌팅턴의 주장과는 달리 문명이 위기에 빠진 불안한 대중을 선동하는 유일한 주제가 아니고, 사회, 인종, 국가도 문명과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주제이며 때로는 효과가 더 크다는 점이다.

3. 현대의 전쟁과 갈등


역사상에 나타난 전쟁의 원인은 영토, 부족한 자원, 탐나는 시장, 종교적 열정, 이데올로기의 차이, 인종·국가 간의 경쟁, 안보 딜레마, 비민주적 국가 지도부의 통치욕 등이었다. 헌팅턴은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의 50% 정도가 문명 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폭력 분쟁의 통계를 작성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갈등 연구소의 집계에 의하면 1996년 27건의 폭력 위기 중 단 9건만이 헌팅턴이 그은 ‘문명의 단층선’에서 일어나고 17건은 인종을 둘러싼 동일한 문명권 내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인종 공동체는 정체성의 핵이자 갈등 단위로서 헌팅턴의 문명 공동체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의 차이가 갈등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집단 간에 일어나는 폭력 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갈등 연구의 대가 로버트 거르와 바바라 하프가 지적하듯 정치, 경제적 차별 대우는 생태학적 스트레스를 유발, 폭력 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때 공통의 종교는 이들 집단을 결속시키는 ‘사회적 시멘트’ 역할을 하지만, 오늘날 종교적 차이가 집단 간 갈등의 우선적 원인이 되는 사회는 매우 드물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걸프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 중앙아프리카의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파키스탄과 인도의 갈등 등은 동일 문명권 내의 인종 차이, 정치적?경제적 차별 대우, 국가 안보의 딜레마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변하면 변할수록 똑같아진다는 프랑스 속담처럼 폭력 분쟁의 모티브는 헌팅턴의 문명처럼 20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것들이 아니라 옛날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이처럼 분쟁 원인의 복잡성을 올바로 이해할 때만이 폭력을 종결지어줄, 가능한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3부 분석




“3부에서는 세계 정치 지역을 서구, 아시아, 이슬람 지역, 러시아와 그 주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 크게 다섯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이들 5개 장에서 나는 경제, 사회 상황과 국가 간의 관계를 고찰하며 정치 발전의 동향을 진단하고-오만의 과오를 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전망을 시도했다.”

1. 서구 문명의 정체성


서구 문명은 인권, 시장경제, 현대적 기술, 대의 민주주의, 시민권, 정교 분리, 자유주의와 관용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이러한 특징들은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지난한 역사를 통해 싸워온 결과이며, 현재에도 투쟁을 통해 계속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산물들이지 가만히 있어도 지켜지는 철옹성은 아니다. 뉴에이지, 사이언톨로지 교회의 성장은 서구 문명에서도 비합리성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서구 사회를 다른 사회와 확연히 구별시켜 준다는 주관적 개인주의도 개성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시대와 히틀러의 국가주의적 선동이 난무했던 시대에는 숨을 죽여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누가 서구에 속하는가 하는 문명지리학적 물음에 대해 독일과 남부 유럽이 서구인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볼 수 있는 문명지리학의 지리적 경계 구분도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문명은 불변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의 전근대적 뿌리 그리고 현재의 성취가 얼마나 최근의 일인가를 생각하면, 변혁의 시기에 전근대가 다시 돌출될 수 있으며 서구 문명의 위기가 후퇴 및 해체 현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 최근 서구 문명의 위기감은 대적을 상실한 자본주의의 개선 행진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연대감의 상실에서 증폭된다. 관용과 연대는 민주주의, 인간의 품위, 인권의 보루로써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정서인데, 지금 서구 문명의 전제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가 국제 정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구 문명은 타문명에 비해 비교적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롭고 협력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초국적 비정부기구 등 국제관계의 평화로운 발전을 위해 가장 희망적인 도구를 마련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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