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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인비디아: 우리는 왜 부러워하는가?

김기남 지음 | 시그마북스


호모 인비디아: 우리는 왜 부러워하는가?

김기남 지음

시그마북스 / 2026년 8월 / 328쪽 / 18,000원





오델로의 비극 : 완벽한 당신을 무너뜨리는 마음의 균열



오델로 신드롬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델로』의 주인공 오델로는 아랍계 무어인이자 베네치아의 칭송받는 장군이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에 흑인이자 이방인인 그가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베네치아 귀족의 딸이자 아름다운 백인 여성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맞이했다. 부하들의 존경과 사랑까지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영웅인 셈이었다. 그러나 서사는 완벽해 보이는 오델로가 질투에 사로잡혀 아내를 살해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며 끝을 맺는다.

오델로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대상은 충직한 부관 카시오였다. 플로렌스 출신의 백인 청년 카시오는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인물이었다. 비극은 간교한 악역 이아고의 혀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아고는 부관 카시오와 데스데모나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덫을 놓았고, 오델로는 그 덫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걸리고 만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아고의 거짓말은 단지 불씨였을 뿐이지만, 오델로의 질투는 어떻게 이아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화염이 되어 자신을 집어삼키게 된 것일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평소 고상한 인품과 전장에서 보여주었던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오델로가, 왜 단 한 번의 합리적인 의심도 없이 광기에 휩싸였을까? 단순히 아내의 불륜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기에는 그의 반응이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그는 데스데모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카시오를 죽이려 들며 폭주한다. 그의 폭주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의심, 그 이면의 깊숙한 어떤 감정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다.

비극의 진짜 원인은 외부가 아닌 그의 내면, 바로 ‘열등감’이었다. 오델로는 흑인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콤플렉스를 백인인 데스데모나와 카시오에게 투영했다. 베네치아 최고의 영웅이었음에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이방인’으로, 카시오를 ‘주류 백인’으로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아내의 끊임없는 사랑과 부관의 충성심조차 그의 깊은 자격지심을 메꿀 수는 없었다. 이아고의 간계는 오델로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부러움에 기반한 열등감’이라는 버튼을 누른 것이고, 오델로는 그 감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명확한 증거 없이 배우자를 의심하는 질투형 망상장애를 ‘오델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이 병적인 의심의 뿌리는 사랑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이다. 작품 속 오델로가 자신의 혈통을 비하하며 인종차별적 혐오를 쏟아내는 장면은, 그가 가진 수많은 장점을 무력하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가지지 못한 단 하나’에 대한 부러움이 열등감으로 표출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부러움이 가진 파괴적인 힘이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된 부러움은 마치 마그마와 같아서, 마음의 작은 균열이라도 생기는 순간 그 틈을 비집고 폭발하듯 분출하여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엄친아 신드롬 : 완벽한 타인은 없다



만들어진 신화 _‘엄친아’는 실존하지 않는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2005년 웹툰 『골방환상곡』에서 처음 등장한 이 단어는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 되었다. 엄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는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심지어 효심까지 지극한 ‘육각형 인간’으로 항상 나 자신을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존재다.

‘엄친아’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그 웹툰은 짧은 몇 컷으로 경쟁적인 사회를 풍자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우월한 자’ 편에 등장하는,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사람을 ‘엄친아’로 표현한다. 이들의 존재 여부, 즉 팩트에 대한 의심과 상관없이 엄친아의 활약상은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엄마를 통해 직접 들어봤을 것이다. 엄마의 친구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인성과 효심도 뛰어난 데다 외모 또한 출중해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다.

소위 엄친아 신드롬으로 표현될 만큼 많은 사람들을 열등감의 굴레에 빠지게 만든 이 용어는 우리나라의 경쟁적인 사회 풍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다소 비극적인 현상을 상징한다. 그것은 엄친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마치 이 사회의 ‘루저’인 것처럼 만든다. 문제는 이 ‘엄친아’가 현실에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창 시절 우리의 엄마는 철수의 성적, 영희의 효심, 민수의 대기업 취업 성공기를 하나로 뭉쳐 가상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실존하지도 않는 이 완벽한 존재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진다. ‘엄친아 신드롬’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부러움에 빠진 부모들은 집에서 빈둥대는 자녀를 보며, 때로는 잘못 살았나 싶은 생각까지 가질 수도 있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내 주변의 다른 집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착하기만 한데, 왜 내 자식만 이러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당신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 있다.

첫 번째 반전은 우리 주변에 흔해 빠진 것 같은 ‘지적 능력자’들의 실체다. 우리는 ‘엄친아’, ‘영재’, ‘수재’라는 이름의 성공 사례를 너무나 자주 접한다. 하지만 통계라는 차가운 거울에 비춰보면 현실은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 수험생 중 서울대에 입학하는 비율은 고작 0.06%가량이고, 소위 명문대를 다 합쳐도 1% 남짓이다. IQ 상위 2%라는 영재 역시 100명 중 2명에 불과하다. 지능과 학업 성적의 상관관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대상은 실상 천연기념물만큼이나 희귀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 주눅 들지 마라. 당신의 주변이 온통 천재들로 가득 차 보이는 건, 단지 착시일 뿐이다.



판단의 배신 : 당신의 부러움은 ‘착각’과‘ 오류’에서 시작된다



결핍의 안경 _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우리의 판단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감정적이거나 임의적이어서, 부러움이라는 감정 역시 이러한 나약한 판단의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배가 고픈 사람 눈에는 식당 간판만 보이고 임산부 눈에는 임산부석만 보이듯, 부러움 또한 당신이 현재 느끼는 결핍이 무엇이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쟁이와 같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면, 그 대상은 사실 최근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결핍의 한 조각을 채우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갖춘 듯 보이는 그 사람조차 행복에 이르기 위해 또 다른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결핍에 의해 생기는 부러움은 당신이 생각하는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지나온 과거를 생각할 때 똑같은 과거의 일들을 현재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다르게 떠올린다.

만약 결혼식 같은 파티에 참여한 뒤 시간이 지나 그 결혼식을 회상한다고 하자. 지금 당신이 기분 좋은 상태라면, 아마도 맛있는 음식,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의 반가운 대화, 아름다운 신혼부부를 보며 느꼈던 행복한 감정들이 떠오를 것이다. 반대로 현재 우울하거나 화가 난 상황이라면, 붐비는 식당에서의 불쾌감,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 아까웠던 축의금 등이 떠오를 것이다.

결핍은 지금 당신의 부러움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결핍에 따라 부러움의 대상은 임의적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결핍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돈, 연애, 일의 성공, 외모, 자존감, 사회적 소속감과 유대 관계를 비롯해 당신이 현재 속해 있는 집단에서 요구되는 자질 요인에 대한 결핍까지 다양하다. 아주 사소하게는 피곤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서서 갈 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으며, 크게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 부모로부터 큰 자산을 물려받은 소위 금수저들이 부럽다. 이러한 부러움은 종종 심각한 시기심을 유발하여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3년 서울 거여동에서 발생한 일가족 밀실 살인 사건은 결핍이 낳은 비극의 극단적인 예다. 피해자는 엄마와 두 딸이었다. 최종적으로 밝혀진 가해자는 엄마의 여고 동창생이었다. 살해 동기는 자기보다 훨씬 못났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가족의 화목이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살해 동기가 될 정도로 부러운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서 당신이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을 때, 세상에는 공교롭게도 그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것 같은 누군가가 등장한다. 돈이 부족하면 부자의 지갑만 보이고, 사랑이 부족하면 커플의 다정함만 보이는 식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작은 정보들을 토대로 나에게 없는 것을 모두 가진 완벽한 부러움의 대상을 조립해낸다.

하지만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대상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단지 나의 결핍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가상의 완전체’일 뿐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실제 그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도 또 다른 결핍과 고통이 있다는 부정적인 정보를 알게 되는 순간, 그토록 거대했던 부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묘한 우월감이나 안도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기억하자. 당신이 부러워하는 그 사람도, 실상은 나에게 없는 또 다른 결핍을 안고 힘겨워하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호모 인비디아, 우리는 부러워하도록 설계되었다



호모 인비디아, 남의 떡이 커 보이게 설계된 인간


왜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고통을 초래할까? 왜 ‘너는 너, 나는 나’로 살지 못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일까? 왜 우리는 항상 합리적일 수 없는가? 왜 우리는 끝없이 비교하며 스스로 고통을 초래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명료한 대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인간의 행태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 중 최대한 설득력 있는 내용들을 찾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진화심리학이 말해 주는 내용들은 꽤 흥미롭다.

이 난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이름을 다시 지어볼 필요가 있다. 호모 인비디아(homo invidia), 즉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사람(Homo)’과 ‘부러움(Invidia)’을 결합한 이 용어는, 부러움이 단순하게 불편하고 불필요한 감정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인류를 존속시킨 가장 강력하지만 또한 고통스러운 ‘생존 무기’였음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이다.

사람은 부러워하도록 진화되어왔다. 이를 통해 우리의 질투가 비난의 대상이라거나 죄가 아닌 이유를 알아보자. 진화심리학을 통해 부러움을 인간의 진화론적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부러움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결핍을 탐지하도록 부여된 감정이다. 불행하게도 현대 사회에서 이 탐지 기능은 24시간 작동을 하며 꿈속에서조차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이 탐지 기능을 끄는 효과적인 스위치도 존재한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 심리의 근원을 이해하는 방법은 생존과 성장, 성적 행동, 양육, 유사한 유전적 대상에 대한 보호 등의 본능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적인 생존 방식을 인간의 여러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해석한다. 찰스 다윈(1872)은 그의 책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인간의 감정 표현의 기원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질투와 부러움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감정으로 해석했다.

부러움은 주로 자신이 아직 확보하지 못한 자원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갖지 못한 자원을 다른 누군가가 가졌을 때 그 사람을 이상화하는 것으로부터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질투의 감정은 대상을 모방하거나 뛰어넘도록 자극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과거에는 질투와 같은 감정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현대 사회에 이르면 그 대상은 집, 배우자,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확대된다. 질투라는 감정의 부정적인 발현이 시기심일 것이며, 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질투와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진화론적으로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유전자에 각인된 감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원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주목하여 그를 따라 하거나 경쟁을 함으로써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때 그러한 노력의 동력이 부러움으로부터 발현된다. 따라서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본능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시기심이나 질투로 발달하여 때론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모와 행복의 거리



외모에 대한 시대 불변의 질투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계모인 왕비는 벽에 걸린 거울에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우냐?”

거울은 답한다.

“왕비여, 그대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 내용은 그림형제 동화집 『백설공주』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왕비는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백설공주가 자라면서 외모의 순위가 한 계단 밀려난다. 백설공주의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외모가 왕비보다 아름답다는 이유다. 왕비는 백설공주를 죽이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무리는 왕비의 비극이고 백설공주에게는 행복한 결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왕비의 외모는 아무리 백설공주 다음이라 하더라도 동화의 내용을 통해 추론해 보건대 그 나라에서 두 번째로 아름답다. 무려 한 나라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데다가 왕비라는 강한 권력과 부,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여러 기술과 능력을 가졌다. 단지 외모가 백설공주 다음일 뿐이다. 왕비는 외모가 그 나라에서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점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아마 백설공주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존경을 받으며 오래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난쟁이들과 함께 지내며 누더기를 걸친 채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던 백설공주였음에도 왕비는 그녀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왕비는 붉게 달궈진 철로 만든 신발을 신고 춤을 추며 죽어가야 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 역시 외모에 대한 질투의 극적인 결과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기록된 것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불화를 의미하는 여신 에리스는 사람들의 본능을 이용하여 다툼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존재다. 그런 에리스가 그리스의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에 반감을 가지고 결혼식에 선물로 황금사과를 보낸다.

문제는 황금사과의 선물과 함께 전해진 메시지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것이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이 황금사과를 두고 자존심을 건 다툼을 벌인다. 이에 제우스는 인간들 중 가장 잘생긴 트로이의 둘째 왕자 파리스에게 판결을 맡긴다. 경쟁자인 3명의 여신은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약속하는데,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맺어주기로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넘긴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보낸다. 문제는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리스 연합군이 결성되어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이처럼 매우 인간적인 성향을 지녔다.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신이다. 만약 그녀들 중 한 명을 지목하여 이 황금사과를 선물했다면, 선물을 받은 이는 황금사과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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