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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처럼 박물관 걷기

마일로 로시 지음 | 현대지성


도슨트처럼 박물관 걷기

마일로 로시 지음

현대지성 / 2026년 7월 / 352쪽 / 19,900원





제1 전시실 요람과 장난감



신석기 시대에도 젖병이 있었다고?


유럽에서 아기의 부장품에 주둥이 달린 토기가 포함된 것은 신석기인 약 7천 년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 토기의 용도는 오랫동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토기에 관한 수수께끼는 독일에서 비슷하게 생긴 청동기 시대 토기가 몇 점 더 발견되면서 풀리게 되었다. 분석 결과, 토기에는 3천 년 전에 담겼던 물질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고 그 결과, 반추동물의 젖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젖병이 존재했다는 것은 젖을 먹이는 엄마가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즉, 남성이나 수유하지 않는 여성도 아기를 돌볼 수 있다. 이는 세계가 농경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고 고대 인류가 유제품을 소화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육아를 공동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의 젖병들이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둥이가 달린 단순한 형태, 염소와 양 모양이 있는가 하면 네발짐승을 추상화한 모양도 있다. 이처럼 유쾌한 장식들은 기능적으로 불필요한데도 젖병을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저 아기를 웃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류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네 개의 발과 염소 머리가 달린 병을 치켜들고 ‘우리 아기가 무척 좋아하겠는걸?’ 하고 흐뭇해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수천 년 전 과거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고대인은 바퀴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고대의 미니어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800년대 후반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클로드 조제프 데지레 샤르네다. 샤르네는 멕시코의 활화산인 포포카테페틀산에서 점토로 만든 조그만 동물 모양의 유물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동물들의 발 부분에는 차축을 끼워 굴릴 수 있는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는 “아즈텍이나 마야 등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바퀴를 사용할 줄 몰랐다”라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멕시코 중부의 툴라 고고학 유적지 등에서 미니어처 모형이 계속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수백 점의 유물들은 고대(300~900년) 및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명 유적지 곳곳에 분포되어 있던 것들이다. 이 멋진 예술 작품들의 소재는 개와 사슴에서부터 재규어, 악어, 아르마딜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바퀴의 원리를 알면서도 왜 대형 수레를 쓰지 않은 것일까? 수레가 굴러가려면 두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바로 평평한 도로와 수레를 끌 대형 가축이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에는 대형 포유류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형 또한 험준한 산악과 정글 지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형들이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어떤 작품은 복잡하고 섬세한 수작업이 들어가 있는 한편, 어떤 작품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주조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용도에 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손에 바퀴 달린 동물을 들고 법석을 떠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제2 전시실 음식과 기쁨



배설물 화석에서 발견한 광부들의 영양 보충법


배설물 화석을 연구하면 고대인들이 살았던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분석(糞石)에 남아 있는 물리적 잔해를 통해 과거의 식단을 짐작할 수 있다. 분석은 귀중한 정보의 보고인 셈이다. 4천 년 가까이 묻혀 있던 고대 음식과 분석이 발견된 장소로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 지역의 할슈타트 계곡을 소개한다. 이 산맥에서 철제 무기와 청동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 시기 유럽 중부 전역에 퍼져 있는 공통적인 철기 문화를 할슈타트 문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할슈타트가 유럽의 중심지로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약 3천 5백 년 전에 존재했던 거대한 소금 광산 덕이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이 고대의 소금 광산 터널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소금의 천연 보존 능력 덕분에 터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물질을 잘 보존했다는 사실이었다. 치즈의 흔적이 묻은 나무 상자, 개암 껍질, 나무 숟가락, 조리 도구까지 남아 있었다. 많은 단서가 발견된 덕분에 고고학자들은 오래전 광부들이 먹었던 음식을 재현할 수 있었다. 또한 분석을 통해 할슈타트 시대 광부들이 보리와 누에콩, 짐승 발굽 같은 특이한 부위의 뼛조각을 먹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 음식들은 광부들이 일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그릇, 냄비, 숟가락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음식을 스튜 형태로 조리해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이 청동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는 광부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블루치즈를 만드는 곰팡이와 맥주 발효에 쓰이는 효모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발효식품이라는 서구 식문화의 정수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의! 이 벽돌을 물에 녹이지 마시오!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독하지만 쾌락을 선사하는 음료인 술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했고, 이 특별한 음료를 빼앗기면 분개했다. 대표적 사례는 미국의 금주법이다. 미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사건은 주류의 판매, 제조, 유통이 금지된 1920년에 시작해 1933년에 끝났다. 한순간에 술을 금지당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불행해졌다. 그러나 인간은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주류 밀매업자부터 밀수업자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금주령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재미난 이야기는 많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금주령이 시행되자 와인 제조업자들은 파산 위기에 놓였다. 밭에 널린 포도들을 썩혀 버려야 할 판이었다. 생산자들은 법의 테두리를 피해 갈 꼼수를 생각해냈다. 포도 농축액을 벽돌 모양으로 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특하게도 이 상품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가 적히게 되었다. ‘경고: 이 포도 농축액 벽돌을 물 1갤런에 녹인 후, 절대 옷장 속이나 어두운 지하실 같은 따뜻한 곳에 21일 동안 보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효모가 작용해 맛있는 와인으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가는가? 사람들은 ‘실수로’ 그 벽돌을 와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집에서 직접 주조한 주류’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포도 벽돌’ 제조사는 자신들의 벽돌이 브랜디처럼 다양한 맛을 낸다고 광고했다. 그 결과, 1917년에 약 2억 6,500만 리터였던 미국인의 와인 소비량은 1925년에 약 5억 6,700만 리터로 늘었다. 또한 주로 캘리포니아 농업지대에서 재배되었던 포도 수요도 무지막지하게 증가했다. 가격 또한 치솟아서 금주법 시행 이전에는 10달러 정도였던 포도 1톤의 가격이 350달러가 되었다. 와인 양조장들이 수정헌법 제18조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한 셈이다.



제3 전시실 동물과 친구



비둘기는 어쩌다 하늘의 쥐가 되었을까?


세상에 비둘기보다 평판이 안 좋은 동물은 없을 것 같다. 비둘기는 질병의 매개체이며 수시로 ‘똥 테러’를 하는 동물로만 인식된다. 사람들은 비둘기가 쥐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날개 달린 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새가 어떻게 보스턴, 런던, 시드니 같은 대도시를 대표하는 동물이 되었을까? 놀랍게도 비둘기를 길들인 것은 인간이었다. 5천 년이나 된 설형문자 석판에는 비둘기를 가축으로 키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염소, 소, 고양이 같은 가축들을 기르기 시작한 시기는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비둘기 사육 역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초기에 식용으로 길러졌던 비둘기의 역할은 연락 수단, 반려동물 심지어 관상용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비둘기는 1600년대 초, 북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자 돼지, 소, 거위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조그만 발을 내디뎠다. 신생 국가인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접수하는 동안 비둘기도 인간을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가 되자 인간과 비둘기의 관계는 달라졌다. 공업 및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연락 수단이나 식량으로써의 비둘기 수요가 감소한 것이다. 게다가 대도시에서는 도망치거나 버려진 비둘기의 후손인 야생 비둘기가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뉴욕에서 비둘기 배설물의 곰팡이에 감염되어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비둘기는 혐오스러운 존재로 적대시되었다. 그러니까 1만 년에 걸쳐 비둘기를 사육하고 기술까지 가르쳤다가 겨우 3세기 만에 이 작은 새들을 내친 것이다. 포탄이 흩날리는 들판 위로 쪽지를 전달해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식량이 부족할 때는 먹이가 되었으며, 화려한 깃털과 호기심 많은 성격으로 찬사를 받았던 비둘기가 오늘날에는 해로운 동물로만 여겨진다. 부탁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내일 출근길에 용감한 전서구의 후손 한 마리와 마주친다면 부디 적대감을 내비치는 대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인류와 비둘기의 관계를 떠올려주기를.

아부티유, 이름으로 불린 최초의 개


개를 가축한 역사는 태곳적부터 시작되었지만, 주인이 이름을 지어준 사례 가운데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E 2250~BCE 2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 하버드 대학교·보스턴 미술관 합동 발굴단은 이집트의 쳅스 피라미드 근처에서 무덤 구조물인 마스타바의 잔해를 발견했다. 그 후 마스타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스폴리아(오래된 건물, 도로 등에 있는 건축자재를 떼어내어 새로운 건축물에 사용하는 기법) 기법이 들어간 석판을 찾아냈다. 석판에는 날씬하고 귀가 뾰족하며 목줄 같은 것이 채워진 개가 새겨져 있었다. 석판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할 수 있었는데, 개의 이름은 아부티유라고 쓰여 있었다. 또한 아부티유가 죽으면 파라오가 매장 절차를 책임졌으며 무덤에는 연고와 향을, 맞춤 제작된 관 안에는 리넨 수의를 넣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석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이런 정교한 의식을 행한 이유는 아부티유가 사후 세계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안내하는 아누비스신에게 축복과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술자가 무덤을 만들고 연고나 향, 맞춤 조각된 석판 같은 부장품을 함께 묻는 것은 엘리트나 왕족들에게만 허용된 사치였다. 모든 것이 아부티유의 카(Ka), 즉 그의 영혼이 저승에서 주인의 영혼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아부티유가 경비견 이상의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석판이 발견된 이후 아부티유의 품종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테셈이라는 가설이 유력하다. 고대 품종인 테셈은 사냥견 종으로 경비견으로도 활약했다. 길고 날씬한 몸통, 가느다란 꼬리, 뾰족한 귀를 지니고 있어 그레이하운드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아쉽게도 테셈은 살아 있는 개체가 없어 이집트 역사 기록인 미라로만 만나볼 수 있다.



제4 전시실 놀이와 여가



그림자가 만든 살아 움직이는 벽화


동굴벽화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보존 상태가 완벽에 가까운 유럽의 동굴벽화는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과 쇼베 동굴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이유도 약 3만 년 전 세상을 누비던 야생동물의 면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굴벽화를 통해 고고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의 예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동굴벽화에 모닥불을 갖다 대 빛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끊임없이 변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마치 동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깜빡이는 불빛에 따라 들소는 벽을 가로질러 달렸다. 게다가 고대인들은 벽화 속 동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일부러 울퉁불퉁한 표면에 그림을 그렸고, 동물의 다리를 여러 개 겹쳐 그려 움직이는 잔상을 표현하기도 했다. 빛 한 점 없는 깊은 동굴은 완벽한 상영관이었으며, 횃불의 타닥거리는 소리는 훌륭한 효과음이었다. 말 그대로 인류 최초의 영화로서의 역할을 한 셈이다. 단순히 사냥법을 알려주거나 지루함을 깨뜨리기 위한 낙서로 여겨졌던 동굴벽화가 예술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다. 최초의 필름이 만들어지고 현대 영화가 등장하기 수만 년 전에도 인류는 영화를 즐기고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테트리스


이 게임은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아주 최근에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게임보다 큰 성공을 거뒀다. 바로 테트리스 게임이다. 최초의 테트리스 게임은 1984년경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의 컴퓨터 과학자 알렉세이 파지트노프가 ‘일렉트로니카 60’이라는 16비트 미니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하던 퍼즐 게임 펜토미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일렉트로니카 60에는 그래픽 기능이 거의 없어서 지금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블록을 문자 기호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었다.

테트리스의 인기를 숫자로 환산한다면 얼마일까? 1980년대 이후의 콘솔·PC·휴대용 게임기·휴대전화 버전을 합산했을 때 테트리스는 전 세계에서 약 5억 5천만 개가 팔렸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게임인 마인크래프트의 판매량은 테트리스 판매량의 절반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책에 비디오게임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는 것을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게임 하나가 오락 산업의 경로를 바꾸어놓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테트리스 덕분에 닌텐도의 게임보이는 3천 5백만 대가 판매되었다. 집에서 뚝딱 만든 게임이었던 테트리스가 전 세계로 보급되면서 자기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또한 많은 역사학자들은 테트리스를 “냉전 시기에 탄생해 자본주의 시장에서 세계적 성공을 거둔 소련 문화상품”의 대표 사례로 보기도 한다. 이 단순한 게임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상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제5 전시실 의식과 의례



호주 원주민의 짧은 도보 여행


호주 원주민의 통과의례 중에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나중에 그 대륙에 자리 잡은 비토착민들에 의해 광범위한 오해를 받은 것이 하나 있다. ‘워크어바웃(Walkabout)’으로 알려진 일종의 성인식이다. 본래의 의미와 달리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성향이라는 의미가 강화되어 현대에는 일시적 이동이라는 표현 대신 쓰곤 한다.

호주 원주민 문화는 남자아이가 청소년기에 이르면 자아를 발견하는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것으로 간주한다. 청소년이 된 아이는 마을을 떠나 몇 달간 오지를 탐험한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땅에서 얻은 것으로 생활해야 한다. 험난한 여행길이 될 것이 자명해서, 아이가 떠날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공동체의 원로들이 판단한다. 준비 과정에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모험을 떠날 아이에게 사냥, 약초 감별법, 항해술 등 생존에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친다.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판단되는 청소년들만이 실제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도보 여행의 전통은 단순히 생존 능력과 건강을 시험하는 것을 넘어 자기 발견의 여정이었다. 모험을 떠나는 청소년은 대개 몸에 피어싱을 하거나 치아를 하나 뽑는 등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의식도 치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마주하며 자기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성인식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몇 달이라는 시간을 혼자 보내고 돌아온 청소년들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셔츠 뒷자락을 자르는 이유


민족 공동체 같은 집단 속에서만 의례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직업의 세계에서도 통과의례는 있다. 대표적인 것이 셔츠테일 커팅(Shirt-tail Cutting) 또는 솔로 셔츠테일(Solo Shirt-tail)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종사 훈련생에게 첫 단독 비행은 교관 없이 혼자서 비행기를 이륙시키고 상공을 비행한 뒤 착륙시키는 긴장되는 순간이다. 이 비행을 마치면 비로소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진짜 조종사가 되었다”라는 것을 축하하고 인정하는 의미로 동료와 교관들이 셔츠 뒷자락을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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