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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이는 건축

방명세 지음 | 나비의활주로


사람이 보이는 건축

방명세 지음

나비의활주로 / 2026년 6월 / 288쪽 / 23,000원





Root; 건축가의 뿌리



산동네에서 배운 공간 감각


1964년 초복을 앞둔 7월, 나는 성북동 산동네 중턱 양지바른 집에서 태어났다. 병원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산파 할머니의 도움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했을 때 부모님 두 분 다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산모를 살리려면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다. 주변에서도 모두 의사 말을 따르라고 했다.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기도하셨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나를 낳고, 산후에 다시 검사를 받았더니 폐결핵이 거의 완치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어머니가 의사의 권고를 따랐다면 나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자라면서, 막연하게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명세(明世)’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세상을 밝히는 사람.

성북동이라고 하면 북정마을이나 선잠로길 주변 고급 주택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홍익대 사대부중·고 옆 산동네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소방도로도 없는, 걸어서만 지날 수 있는 동네였다. 우리 집은 마당이 있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렸고, 이웃들이 오가며 쉬어가는 사랑방 같은 집이었다. 어머니는 마당에서 애호박을 따서 이웃과 나누었고, 담벼락 옆 앵두나무 열매가 익으면 플라스틱 바가지에 한가득 따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인심은 넉넉했다.

산동네 골목길은 구불구불했다. 길이 끝난 듯하다가도 다시 이어졌고, 이 골목은 저 골목으로 연결되어 미로 같았다. 호기심 많던 나는 그 골목들을 종일 누비고 다녔다. 좁고 반듯하지 않은 땅에 사람들은 각자 집을 지었다. 누가 설계한 것도 아니고, 도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땅의 생김에 맞춰 한 칸, 두 칸 올린 집들이었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산동네는 건축가 없는 건축이었다.

저녁이 되면 우리 집 마루는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TV가 귀하던 시절, 고구마나 옥수수를 손에 든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앉았다. 드라마가 끝나고 뉴스도 끝나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담장을 넘나들어도 개의치 않고,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거들던 사람들. 산동네는 큰 나무 같았다. 큰 줄기에서 작은 가지가 나고, 거기에 잎이 돋고 열매가 맺히듯, 큰 골목과 작은 골목이 연결되고 집들이 이어졌다. 나중에 지적도를 보니 정말 나무 한 그루를 닮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골목이 내가 처음 만난 건축이었다. 어떻게 공간을 만드는지, 사람과 길과 집이 어떻게 엮이는지, 교과서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배운 셈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그저 재미있어서 뛰어다녔을 뿐이다. 지금도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성북동 북정마을과 내가 자란 산동네를 걷는다. 그러면 다시 힘을 얻는다.

서로 다른 세 사람이 받쳐준 시간


성균관대 건축공학과는 수원 율전 캠퍼스에 있었다. 흑석동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에서 1호선 전철로 50분. 1983년 입학 동기는 130명이었다. 그림 동아리도 가입하고 건축과 계획반(건축 디자인을 공부하는 과내 동아리)도 가입했는데, 건축 탐구보다는 모여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스스로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느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1987년 6월 항쟁이 계속되던 시기에 제대했다. 나와 보니 군대를 가지 않은 동기들은 4학년 졸업 설계 막바지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동기들을 도우며 보조 역할을 했다. 2년 사이에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동기들을 보니, 잠자고 있던 건축 열정이 꿈틀거렸다.

사실 복학을 앞두고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사회에 나간 선배들은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마음 맞는 동기들과 작업 스튜디오를 만들어 함께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동기 유훈조(현 재마건축 대표)는 아직 제대 전이었다. 편지를 써서 취지를 알렸다. 이배원(현 플랜에이건축 대표)은 막 제대한 참이라 직접 만나 설명했다. 작업실을 같이 하면 시너지가 나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두 사람 모두 뜻을 같이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셋 다 작업실을 구하는 건 처음이라 발에 땀이 날 정도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노량진역에서 십여 분 거리, 장승배기 언덕 위 가내수공업 공장 터로 정했다. 작업실 이름은 ‘동바리’라고 지었다. 전통 한옥에서 동바리는 마루 밑 가로재의 받침기둥이다. 건축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돕고 받쳐주자는 의미였다. 세 명은 참 많이 달랐다. 성장 과정도 달랐고, 성품이 다르니 생활방식도 달랐다. 하지만 건축을 잘해보려는 마음과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은 같았다.

저녁이 되면 학교 설계 과제를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건축 계획에 시간을 들였다.

“설계를 재능으로 하는 줄 아냐? 엉덩이로 하는 거야!”

타고난 재능보다 은근과 끈기가 더 중요하다는 선배들 이야기가 많았다. 머리는 굳었지만 몸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밤새 스케치하고 새벽에 잠드는 일을 반복했다. 누가 하라고 했으면 이렇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학기를 마치고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설계와 계획 전 과목 A+, 전체 평점 4.1. 난생처음 성적우수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한 사람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건축은 없었다. 마루 밑 받침기둥이라는 동바리로 이름을 지을 때는 서로 받쳐주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이름이 내 건축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화려한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가 되는 대신 현장에서 사람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해왔다.

야전삽에서 시작된 36년


1989년 가을, 4학년 2학기. 학교는 취업 준비로 분주했다. 나는 여름방학 실습 때 마음을 정한 정림건축 공채에 도전하기로 했다.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었다. 건축 대전 대상 수상자도 있다고 했고, 명문대 출신과 유학파 지원자도 많았다.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실기시험에 들어갔다. 과제는 정림건축 부지 맞은편에 건축사사무소 사옥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지난 2년간 작업실 생활과 공모전 경험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었다. 1989년 12월 마지막 날, 마침내 정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 꿈꾸던 정림에 입사하는구나.

1990년, 정림건축은 100여 명 규모의 건축사사무소였다. 정림(正林)은 형제 김정철, 김정식 두 건축가가 세운 사무소였다. 대회의실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족자가 걸려 있었다.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아끼라는 뜻으로 알았는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신입 사원 때는 그 족자를 그냥 지나쳤다. 좋은 말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정림에서 30년을 보내고 나니, 경천애인이 정림이라는 회사의 바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을 아끼라는 말은 설계할 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현장에서 인부들을 대하는 태도, 준공 이후 그 공간을 쓰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습관까지 전부 그 말에서 나왔다. 물론 그런 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일이다. 1990년의 나는 그저 막내였다.

건축사무소에서는 스티로폼 모델을 커터기로 자르거나 뭔가 만드는 보조 작업이 늘 진행되었다. 그때마다 “막내 좀 와 보라고 해!” 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건축 스케치하는 선배들을 어깨너머로 보면 존경이 절로 나왔다. 정림에 건축 무림의 고수들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설계 2실 최태용 실장(전 이방건축 대표)이 어느 날 웃으며 말했다.“허허, 막내가 야전삽이야!”



군대 다녀온 사람이라면 야전삽이 무슨 용도인지 안다. 삽을 펼치면 온전한 삽이 되고, 90도로 접으면 곡괭이가 된다. 어디든 불려 가서 무슨 일이든 했으니, 야전삽이라는 별명이 딱 맞았다. 나는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불려 가는 곳마다 새로운 배움이 있었다. 선배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옆에서 보조를 하다 보면 그 무기를 하나씩 꺼내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닌 덕에, 건축이 설계 하나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다. 구조가 있고, 설비가 있고, 견적이 있고, 감리가 있고, 그 사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있다. 한자리에 앉아 도면만 그렸다면 그 전체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기획실로 발령이 났을 때, 설계실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렵지 않았던 건 야전삽의 시간 덕이었다. CM(Construction Management)으로 옮겼을 때도, 해외 현장에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계를 넘는 일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낯설지도 않았다. 이미 몸에 배어 있었으니까.

거절 못 하는 성격이 만든 길


1992년 10월, 나는 5년 가까이 사귀던 김성숙과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도 잠깐이었다. 결혼 후 3개월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이다. 주일 오후 예배 사회를 보시다가 단상 위에서 쓰러지신 것이다. 가까운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으로 이송하라는 말에, 동대문 이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이송 중 “아, 졸리다”고 하시다가 의식을 잃으셨다고 한다. 뇌졸중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조증상이 있었다. 보증 사고 이후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셨던 아버지는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말이 어눌해지셨다. 그때 이미 가벼운 뇌졸중이 있었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말 못 하고 가슴앓이만 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다. 조금만 섬세하게 살폈더라면 이런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정림건축은 동대문 이대병원에서 10분 거리인 이화동 사거리에 있었다. 나는 출근 전, 점심, 야근 전, 수시로 아버지를 뵈었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눈도 뜨고 계셨고 우리 말도 들으시는 듯했지만,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손을 잡고 기도하고 오는 것뿐이었다. 깨어나실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기약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말복을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마지막 가쁜 숨을 들이키시고 숨을 멈추셨다.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운구차로 집을 떠나 아버지가 섬기던 마포 성원교회에서 발인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뒷좌석에 김정철 회장과 김정식 사장, 형제 건축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셨다. 아직도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사원 방명세의 형편을 살피고 챙겨주셨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 착하게만 사신 아버지는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 하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이셨다. 청년기에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했다. 측은지심에 거절 못 하는 성격 탓에 집안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자라고 보니 닮아 있었다. 수첩을 쓰고 그리며 정리하는 습관, 세밀하게 살피는 태도가 아버지와 너무나 닮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닮은 건 거절 못 하는 성격이다.

정림에 입사하고 설계실에서 기획실로 가라고 했을 때, 모질게 거절하지 못하고 갔다. 그 덕에 건축을 바깥에서 보는 시야가 생겼다. 주거본부를 맡으라 할 때도, CM에서 1본부로 가라, 3본부로 가라 할 때도 속으로는 힘들었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하고 맡은 역할을 하나씩 해내다 보니, 위기의 시간에도 좌절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얻게 된 별명이 맨땅에 헤딩인 ‘맨딩’이다. 듣기에 싫지 않았다. 거절 못 하는 성격은 아버지와 같았지만, 그 성격이 다양한 곳에서 쓰이면서 통합형 건축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Field; 현장의 기록



광양, 처음으로 사람이 보이다


2000년 신년 초, 김정철 회장께서 나를 부르셨다. 기획실장을 회장이 직접 부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뵈었다. 한국해비타트에서 구상 중인 집 짓기 프로젝트를 도우라는 말씀이었다. 설계 업무라면 설계 부서에서 하면 되는데, 이건 사회공헌 사업이었다. 기부를 전제로 설계와 현장 감독에 참여하는 일이라 실무 부서가 아닌 적임자를 찾다가, 당시 신우회(사내 기독교인 모임) 회장이던 나를 지명하신 것이다.“한번 해 보라우.”



프로젝트를 정식 등재했다. 번호는 No. 0001. 새천년 첫 사업이 무주택 서민의 집을 짓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정림의 미션은 ‘건강한 공간 환경을 만들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미리 예정되고 준비된 일처럼 여겨졌다. 해비타트를 방문해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하니 해야 할 일이 예상보다 많았다. 설계도면 몇 장 그려주면 되는 일이 아니라 설계 전 과정과 현장 감독까지 맡아야 했다. 회장께 보고를 드렸다.“일이 많구만!” 하시고는 “잘 해보라우.” 하실 뿐이었다.



사내 게시판을 통해 설계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당시 설계사무소는 야근과 특근이 일상이었다. 해 지기 전에 집에 가는 날이 드문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보일지 의문이었다. 기우였다. 자원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오히려 일을 배분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나눔의 취지에 적극 공감한 직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었다.

전남 광양 ‘평화를 여는 마을’. 8개 동 32세대. 업무 외 시간에 릴레이로 설계를 진행하고, 단지 모형까지 제작해 해비타트에 전달했다. 모형은 홍보 효과가 커서 기부금 모집에 유용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영문 보고서도 작성되어 미국 본사의 국제 모금에도 도움이 되었다. 본 행사인 블리츠(Blitz; 번개)는 8월 첫째 주 5일간 진행되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집을 짓는 행사다. 나는 담당 건축가로 현장에 있었고, 권도웅 고문(전 정림건축 사장, 현 해비타트 감사)의 헌신적인 기술 지도 아래 설계는 완성도 높게 진행되고 있었다. 감리부의 경험 많은 단장들도 현장 감독을 위해 합류했다.

폭염 속에서 자원봉사자들과 땀을 흘렸다. 그동안 봉사는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다.그게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 광양에서 알게 되었다. 봉사가 아니라 나눔 축제에 참여한 것이었다. 1,400명의 자원봉사자들은 함께 땀을 흘리며 회복과 치유를 체험했다. 건축가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김정철 회장님의 ‘한번 해 보라우’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건축가는 삶을 담는 공간의 구현을 통해 사람과 사회와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사람이 보이는 건축가가 되고 있었다.



Essence; 사유의 기준



겨울을 견딘 사람만 아는 것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고도성장의 그늘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뉴스를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림은 그때 신사옥을 짓고 있었다. 이화동 사거리의 구사옥은 늘어나는 직원을 감당하지 못했고, 바로 인근에 새 건물을 올리는 중이었다. 설계를 업으로 하는 사무소가 자기 사옥을 직접 설계하고 짓는 일이니, 사기도 높았고 기대도 컸다.

그런데 착공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신사옥 부지에 인접한 효제식당의 필지 일부가 정림 부지 안에 걸쳐 있었다. 20년 넘게 점유해 온 땅이라 강제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효제식당 부지 전체를 매입해서 설계를 변경하자는 방향으로 갔는데, 땅주인이 시가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행정소송이 시작되었다. 정림은 결국 승소했지만, 1년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그 1년이 치명적이었다. IMF 전에 마칠 수 있었던 공사가, 준공을 1년 남겨놓은 채 위기를 정면으로 맞았다. 어떻게 이런 타이밍이 가능한가. 돌이켜 생각해도 잔인했다.

1990년 내가 입사했을 때 정림은 100여 명이었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1997년에는 300명이 넘었다. 그 300명이 일하던 사무소에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설계실 등 사업 부서에서 50%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기계, 전기, 조경 설계팀은 아웃소싱 형태로 별도 회사를 만들어 정림과 협력 설계를 하도록 했다. 남은 직원은 150명 정도였다. 숫자로 쓰면 한 줄이지만, 그 과정은 한 줄로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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