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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금 이야기

레베카 조라크, 마이클 W. 필립스 주니어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금 이야기

레베카 조라크 외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5월 / 336쪽 / 19,500원





GOLD 1_ 별의 죽음에서 태어난 금, 인류의 욕망을 깨우다



★ 별이 죽어야 금이 태어난다?!


금은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그 먼 옛날부터 인류를 매혹해왔다. 금속 가운데 가장 연성(延性)이 뛰어나고 빛나는 광채를 지닌 물질인 금은 인류사의 이른 시기부터 정교한 형태로 가공되었다. 비교적 순수한 상태로 땅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 복잡한 제련 기술도 필요 없었다. 무른 성질 탓에 도구 재료로는 쓸모가 없었지만(현대 과학이 금의 다양한 쓰임새를 개척하기 전까지는), 바로 그 ‘무름’ 덕분에 인류는 금의 장식 용도를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금의 ‘무용성(無用性)’.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금이 화폐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금과 가치의 관계, 즉 ‘왜 금이 그토록 오랜 세월 화폐의 매체로 높이 평가받아왔는가’ 하는 질문은 어쩌면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고대 인류는 금에서 발견한 어떤 특질 때문에 그것을 화폐로 사용했을까. 아니면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오랜 관행을 따라 금에 귀한 특질을 귀속시키고 있을 따름일까.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역사를 통틀어 금은 찬탄의 대상이었던 만큼이나 탐욕과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진정한 가치의 대척점을 상징하는 데도 빈번히 쓰여왔다는 사실이다. 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가치 그 자체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핵심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금은 원소이자 중금속이다. 원자번호 79번. 더 가벼운 원소들과 달리 금은 별 내부의 핵융합으로는 생성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금이 중성자별(초신성 폭발 후 남은 고밀도 천체)의 충돌과 합병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구가 형성될 당시 금의 대부분(1,600조 톤에 달하는 양)은 행성의 핵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후 지표에 퇴적된 금은 운석이 가져다준 것이다.

그 운석 충돌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다. 남아프리카 비트바테르스란트 금광지구에서 지금까지 채굴된 금의 40퍼센트가 나온 광상(鑛床)은 무려 30억 년 전의 것이다. 지구 나이보다 15억 년이나 젊다. 이런 사건들과 비교하면 인간과 금의 만남은 지극히 최근의 일인 셈이다. 그렇기는 해도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줄곧 금을 사용해왔다.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는 금은 선사 시대 인류가 채굴하고 사용한 최초의 금속 가운데 하나였다.

★ 엘도라도, 황금 도시가 아니라 금가루를 뒤집어쓴 추장의 이름이었다?!


엘도라도(El Dorado)는 애초에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금을 뒤집어쓴 남자’였다. 해마다 종교 축제 때면 콜롬비아 무이스카족 지파의 왕은 천연 접착제를 온몸에 바르고 금가루를 뒤집어쓴 채 보고타 인근의 과타비타 호수에 뛰어들었다. 이는 무이스카 지파 사람들이 오랜 세월 지내온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다. 후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금으로 뒤덮인 왕은 막대한 양의 금을 호수에 던져 넣어 자신들이 신이자 주인으로 섬기는 존재에게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 정복자)들은 이 솔깃한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었다. 에스파냐가 1539년 무이스카를 정복했을 때 콩키스타도르들은 금을 뒤집어쓴 왕도 화려한 보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전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엘도라도는 이제 사람이 아니라 도시가 되었고, 정복된 원주민들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기꺼이 말해주었다. “그렇소, 저 정글 깊숙이 더 들어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의 땅이 있소”라고.

★ 금의 지도, 유럽보다 아프리카가 먼저였다


아메리카 대륙은 화려한 황금 도시에 얽힌 숱한 이야기들의 원천이었다. 물론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처럼 실제로 화려한 도시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 부의 극치를 단 한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 아타우알파(재위 1532~1533)를 들 수 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2년 그를 생포했을 때 왕은 전례 없는 몸값을 제안했다. 약 85세제곱미터에 달하는 방을 금으로 가득 채워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사로는 금을 손에 넣자마자 잉카 아홉 개의 용광로를 가동하여 거의 한 달에 걸쳐 그 보물들을 녹여버렸다. 잉카 장인들의 정교한 솜씨가 담긴 걸작들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몸값도 소용이 없었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금과 은의 규모는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으로 유입된 귀금속의 양은 그 이전 수백 년간 유럽이 보유하던 양을 훌쩍 넘어섰다. 그 결과는 단순한 부의 증가가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 불리는 경제적 격변이 몰아쳤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물가는 서너 배 치솟았다. 고정된 지대(地代)에 의존하던 봉건 귀족층은 실질 소득이 급감하며 몰락해갔다. 반면 상인 계층은 가격 상승의 수혜를 입으며 급속히 성장했다. 자본이 축적되고 상업이 팽창했으며 임금 노동이 확산되었다. 유럽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태동은 그 필연적 귀결이었다. 정복자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부(富)였다. 그러나 그들이 일으킨 파장은 문명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금을 향한 탐구에는 뿌리 깊은 통념과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 묻힌 보물, 즉 올바른 고지도만 손에 넣으면 찾을 수 있는 해적의 전리품이라는 상상이다. 그러나 어떤 해적도 암호 지도 위에 커다란 × 표시를 해두었다는 증거는 없다. 상상 속 보물 지도의 대중화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1883년 출간한 소설 『보물섬』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보물 지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기원후 1세기의 동판 두루마리(사해 문서 중 하나)는 거대한 금과 은의 은닉처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시 사항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아 보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더 오래된 지도로는 기원전 1150년경 이집트에서 제작된 토리노 파피루스가 있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질 지도로, 나일강 동쪽 동부 사막의 금광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전설적인 황금 도시를 탐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이미 아프리카의 금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앞서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그 꿈을 꾸었다.

이집트 금의 대부분은 누비아(Nubia)에서 나왔다. 현재의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이름은 금을 뜻하는 이집트어 ‘눕(nub)’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 누비아에서 금 채굴은 경제의 핵심이었다. 수천 년에 걸친 누비아의 역사는 북쪽의 이웃 국가 이집트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다. 오랜 세월 이집트와 누비아는 교역하고, 전쟁을 벌이고, 외교를 펼쳤다.

대항해 시대를 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인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1394~1460)는 씀씀이가 크고 언제나 빚에 시달렸다. 1415년 지브롤터 건너편의 세우타를 함락시킨 이후 엔히크 휘하의 포르투갈인들은 서아프리카를 탐험하고 정착지를 세우며 아프리카 교역에서 아랍의 독점을 깨뜨렸다. 한때 포르투갈을 세계 최부국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그 결실이었다. 1482년에는 훗날 골드 코스트로 불리게 될 지역(지금의 가나)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다. 결국 그들은 수익성 높은 보물의 원천을 찾아냈다. 포르투갈의 신세계 식민지들이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부족한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다. 그들이 아프리카에 마련한 발판이 잔혹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왕자 엔히크의 전기 작가 P. E. 러셀의 말처럼 곧 ‘검은 금(노예)’이 기니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화물임이 밝혀졌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진출은 금을 향한 욕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귀결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 중 하나였다.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에 걸쳐 1,2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아메리카 대륙에 팔려갔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 전체가 이 대서양 노예무역에 가담했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 구조와 사회 질서를 뿌리째 흔들었다. 수백만 명의 젊은이를 잃은 공동체들은 분열되고 약화되었다. 그것이 훗날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한 조건이 되었다. ‘검은 금’이라는 냉혹한 표현이 암시하듯 금을 향한 욕망은 마침내 인간 그 자체를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이렇듯 금의 역사는 찬란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GOLD 2_ 황금을 몸에 두른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 ‘착용하는 금’이 만든 6,000년 문명사

★ 트랙터 운전사가 신발 상자에 담아온 것이 인류 최초의 황금 문명이었다고?


1972년 10월, 라이초 마리노프는 불가리아 동부 도시 바르나 근교에서 트랙터로 공사용 도랑을 파던 중 예사롭지 않은 금속 물체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중 몇 점을 집어 신발 상자에 담아두었다가 일주일 뒤 예전 역사 선생님에게 가져갔고, 그제야 흙을 털어내며 그 물체들이 순금임을 알아챘다. 우연한 ‘매장 보물’ 발견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극적인 순간이었다.

마리노프가 흙을 털어내고 마주한 것은 로마 시대 보물보다도 5,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는 훗날 ‘바르나 네크로폴리스(Varna Necropolis)’로 알려지게 될 동석기(銅石器) 시대 묘역이었다. 이 무덤군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나만큼이나 이른 시기에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에서도 금 제품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만큼 금 유물은 다른 유적지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하지만 바르나는 인류의 금세공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금 유물 중 가장 크고 정교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바르나는 인간이 사후에도, 즉 죽음을 넘어서까지 몸을 치장하기 위해 금을 착용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증거를 제시한다.

바르나 네크로폴리스의 가장 오래된 무덤들에서는 옷에 꿰매거나 몸에 직접 착용할 수 있는 두드려 만든 금 장신구들이 나왔다. 흉판, 팔찌, 손가락 반지, 귀걸이, 구슬, 이마에 두르는 디아뎀(diadem: 왕관 형태 머리 장식), 의복에 부착하는 아플리케 등 다양한 형태의 장신구들이 빛나는 자태를 드러냈다. 기하학 문양과 동물 형상으로 장식된 이 유물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선을 새기는 선각 기법과 금판 뒷면을 두드려 앞면에 돋을새김을 만들어내는 타출(打出) 기법이 구사되어 있어 당대 장인들의 탁월한 솜씨를 오늘에 전한다. 그리고 장신구에 활용한 금은 땅속에서 채굴한 것이 아니라 주변 지표 퇴적물이나 강바닥에서 채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는 금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왔는데, 그중 가장 주를 이루며 꾸준히 지속된 두 가지 용도는 화폐와 장신구다. 바르나를 비롯한 여러 고고학 기록은 장신구로서의 용도가 먼저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현재 새로 채굴되는 금의 전 세계 소비량은 보석과 금융 투자 목적으로 거의 균등하게 양분되며, 치과용을 포함한 산업 용도는 전체의 10퍼센트 안팎에 머문다.



GOLD 3_ 황금 송아지를 부순 자들이 황금 성전을 지었다 - 금과 신앙의 6,000년 역설

★ 죽은 자의 혀 위에 금화를 올린 그리스인, 황금 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인


그리스에서는 ‘카론의 오볼(Charon’s obol: 고대 그리스의 장례 관행으로, 망자가 저승의 강 스틱스를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에게 삯을 지불할 수 있도록 시신의 혀 위에 동전(오볼)을 함께 두었다)’이라 하여 금박 동전을 시신의 혀 위에 얹거나 곁에 두고 매장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구약성서로 알려진 히브리 성서는 예배에서의 금 사용에 관한 가장 생생한 기록들을 담고 있다. 금은 먼저 부정적인 빛 아래 등장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증거판을 받는 동안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신들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한다. 백성들은 금귀걸이를 빼내어 아론에게 건네고, 아론은 그것을 받아 황금 송아지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금이 종교 안에서 차지하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자리의 출발점이다. 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제기하는 물음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금이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권력, 욕망과 비판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을 녹여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다. 도구로 빚어낸 그 형상 앞에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 (출애굽기 32:2~4)

황금 송아지를 만든 행위는 계명 여럿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첫 번째 선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금령,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어겨졌다. ‘아직 전달받지도 못한 계명을 어겼다고 하여 처벌을 받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물음은 제기될 만하다. 그러나 우상 제작에 깃든 의도라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훗날 유럽 종교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우상 숭배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은 아론이 송아지를 만들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모세가 나중에 아론에게 경위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백성이 금을 내게 주기에 내가 불 속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습니다.”

아론이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부끄러워 숨기려 한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은 수세기에 걸쳐 되풀이되는 하나의 우려를 반영한다. 인간은 종교적 형상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임을 이내 잊거나 외면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빚어낸 사물에 신적 존재를 부여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핵심이다.

금은 성서의 우상 숭배 논의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이라는 표현은 「시편」과 「호세아서」, 「이사야서」에 등장한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이 오랜 진술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신적 존재가 금이나 은이나 돌, 곧 인간의 고안과 기술로 만든 형상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그러면서도 성서는 금을 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여지를 남겨놓기도 한다. 금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천상의 것을 표상하는 데 특별히 탁월한 방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GOLD 4_ 황금을 쥔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 주화에서 금본위제까지, 금이 만들어낸 세계 경제 5,000년

★ 금화를 발명한 세계 최고의 부자 왕 크로이소스는 왜 비참하게 몰락했나?


지금의 튀르키예 서부에 해당하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가히 전설적인 부자였던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다”라는 관용구로 전해 내려온다. 이 명성은 상당 부분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덕분이다. 크로이소스 사후 100년 뒤에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는 ‘돈으로 행복을 사지는 못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이 왕의 사치를 자세히 기술했다. 헤로도토스는 리디아인들이 델포이 신탁에 바친 어마어마한 봉헌물을 기록한다. 순금으로 만든 10달란트(227킬로그램 이상) 무게의 사자상이 그 한 예다. 그는 또한 크로이소스가 아테네 철학자 솔론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도 전한다. 이때 솔론은 무명의 아테네인 망자(亡者)의 이름을 댔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리라 기대했던 부유한 왕은 경악했다. 솔론은 이렇게 설명했다.“어떤 필멸의 존재도 죽기 전에는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끔찍한 일이 닥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크로이소스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는 먼저 사냥 사고로 후계자인 아들을 잃었고, 이어 페르시아에 의해 제국 전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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