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 윌북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윌북 / 2026년 5월 / 332쪽 / 22,000원
식물
흙에서 시작되는 생명아버지, 마무샤(폴란드어로 엄마), 여동생 마리안네와 나는 2차 세계대전 직후 6년 동안 독일 북부 깊은 숲속 단칸 오두막에 살았다. 그때 나는 살짝 내린 눈에 봄비가 내려 검게 변한 땅에서 새싹이 나오면서 하루하루 작은 땅뙈기가 밝은 녹색으로 변하는 신기한 현상을 알아차렸다. 마법처럼 퍼져나가는 초록빛 풀잎 원에 완전히 빠져들었는데,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경이로운 순간이다. 발밑 풀이 늘 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한 조각 땅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는 모습은 마법과 신비와 환희의 순간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오두막과 학교 사이 모래밭 숲길에서는 반들반들한 녹색 딱정벌레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걸 모래딱정벌레라 불렀는데 나중에야 길앞잡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비록 날진 못해도 그 멋진 친구와 나란히 달릴 수 있었다. 길앞잡이는 먼지벌레(라우프캐퍼)와 친척인데, 생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이 딱정벌레에 매료되어 잡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영국 점령군이 벌채하고 남겨둔 나무 그루터기를 캐내셨다. 이 목재를 팔면 몇 페니히를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루터기를 파낸 구덩이를 생쥐와 땃쥐를 잡는 덫으로도 활용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건 원래도 신나는 일이었지만 먼지벌레가 이 구덩이에 빠지기까지 하니 더욱 신이 났다. 아버지는 먼지벌레 박제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나는 다른 아이들이 우표를 모으듯 곤충을 수집했다. 아버지는 곤충을 식별할 수 있도록 휴대용 도감도 한 권 주셨다. 나는 곧 크고 검은 카라부스 코리아케우스와 그 밖의 곤충들 이름까지 익혔다. 조각처럼 정교한 딱정벌레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걷다가 땅을 훑어보기만 해도 찾을 수 있어서 좋았고 잡을 수까지 있으니 더 즐거웠다.
얼마 전엔 옥외 변소로 쓸 구덩이를 파다가 흙 속에서 카라부스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향수에 젖어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딱정벌레들을 떠올렸다. 녀석이 땅속에서 무얼 했는지는 몰라도, 어느 경우든 달팽이를 먹고 살았을 것이고 달팽이는 풀을, 그 풀은 내 배설물을 처리하려 파낸 토양에서 돋아난 것이었다. 이 수용력 높은 토양은 언젠가 내 몸도 받아들여 나를 풀·나무·꽃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나는 구덩이 판 흙으로 텃밭을 만들어 감자를 심었는데, 몇 알 던져놨을 뿐인데 순식간에 알찬 유콘 골드 감자가 주렁주렁 달렸다. 내 파트너 린도 마법을 보았고 우리는 홀린 듯 화단을 늘려 콩·완두·케일·당근·상추를 길렀다. 거무스름한 흙에 막 나타난 녹색 점이 새싹으로 바뀌는 광경을 열렬히 응원하며 지켜보았고 8월이면 겨울 감자를 수확할 준비에 들어갔다.
흙에서 얻는 건 음식 말고도 더 있다. 거의 200년 전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이걸 알았다. 헨리는 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콩밭 1만 제곱미터를 매일 새벽 5시부터 정오까지 김매고 괭이질했다. 그는 콩을 사랑하고 소중히 돌보며 흙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거인 안타이오스처럼 힘센 장사가 되었다고 썼다. 콩밭을 돌볼 때면 그는 산비둘기·솔개·갈색지빠귀의 노랫소리, 점박이 도롱뇽에 매료되었다. 결국 그가 콩을 재배한 건 먹고 싶어서도 이익을 남기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헨리의 낭만주의적 이상에 친밀감을 느낀다. 보스턴이나 로마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달리 일을 멈추고 괭이에 몸을 기대고 있으면 밭이랑 어디에서나 이런 광경과 소리가 다가왔고, 그것이야말로 시골에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무진장한 즐거움이었다고 쓴 대목은 특히 공감이 간다. 어쩌면 이 활력 넘치는 ‘게으름’이야말로 소로가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흙과 노동에 현실적이고 싶어 한다. 헨리도 노동을 경제적 수치로 열거했는데, 장부에 따르면 콩밭 전체 비용은 요즘 식으로 약 2만 2100원, 순이익은 약 1만 3100원이다. 현대인이 보기엔 고되게 일만 하고 별 이익을 못 남긴 듯하다. 돌투성이 들판을 린과 내가 화단으로 일군 것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헨리가 콩밭에서 얻은 것과 비슷한 기쁨을 텃밭에서 얻었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즐겼으니 이미 일거양득 이상을 누렸다.
나는 인간으로서 실리적 목적 그 이상을 위해 콩을 재배한다. 모든 생명의 연결고리인 흙에 대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앞서간 헨리와 연대하는 마음이다. 농사는 보잘것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게 생명을 향한 관심을 처음 불러일으킨 그 풀잎처럼 우리가 다른 생명과 맺는 관계를 본능적으로, 때로는 황홀하게 일깨워주는 활동임이 분명하다.
곤충
꿀벌의 벌집 지키기무더운 날 일벌은 태양의 열기뿐 아니라 몸 안의 난로와도 씨름해야 한다. 날개를 움직이려 가슴의 비행 근육을 초당 약 200회씩 수축시키면 엄청난 열이 발생해 체내 온도가 50도 가까이에 이르는데, 이는 치명적 수준이라 비행 중 공기 흐름으로 열 발산이 안 된다면 2분 만에 꿀벌의 몸은 튀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생리적·행동적 적응 덕분에 꿀벌은 뜨거운 사막에서도 생존하고 번성한다.
대부분의 대형 비행 곤충은 비행 근육을 순환하는 혈액이 가슴에서 배로 열을 전달해 식히는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자동차 냉각수가 방열기를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꿀벌은 특이한 구조 때문에 이 방식이 불가능하다. 배에서 가슴으로 혈액을 운반하는 관이 배자루마디에서 단단한 코일 형태로 말려 있어, 가슴을 떠난 뜨거운 혈액이 코일 주변으로 흐르며 배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혈액을 데우기 때문에 배로 열이 거의 빠져나가지 않는다. 배를 냉각 장치로 못 쓰는 게 불리해 보이지만, 냉각 장치는 대류에 의존해 몸이 주변 공기보다 뜨거울 때만 작동하는 한계가 있다. 주변 공기보다 체온을 낮추는 유일한 방법은 열을 증발시키는 것뿐인데, 꿀벌은 이 증발 냉각 시스템을 진화시킨 덕분에 배의 냉각 장치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
기온이 높아 머리 온도를 45도 밑으로 유지하기 역부족이면 머리의 열 센서가 작동해 꿀주머니에서 혀로 꿀을 역류시킨다. 혀 위 꿀의 수분이 증발하면 머리가 식고 인접한 가슴의 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꿀벌은 혀를 좌우로 흔들고 다리로 액체를 앞가슴에 문질러 증발 속도를 높인다. 수분을 증발시키면 체온을 낮추는 동시에 운반하는 물의 무게를 줄여 에너지를 절약하고, 여유 공간이 생겨 꿀을 더 많이 실어 나르며 농축 작업도 일찍 시작된다.
집에 돌아온 벌은 아직 뜨거운 상태에서 동료들의 신진대사 열에 노출되므로, 접수 담당 일벌에게 재빨리 꿀을 넘기고 다시 밖으로 나선다. 날씨가 더우면 접수 담당 일벌들이 꿀을 넘겨받아 입과 벌집에 내려놓은 꿀 방울에서 증발이 일어나게 해 체온과 벌집 온도를 낮춘다. 꿀을 토해 자신의 입과 벌집에 내려놓은 작은 꿀 방울에서 증발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습도가 올라가면 벌집 입구를 부채질해 건조한 공기를 들여 증발이 계속 일어나게 한다. 추울 때는 묽은 꿀을 가져오는 채집벌의 짐을 덜어주지 않고 농축된 먹이를 가져오는 채집벌만 받아, 기온에 따라 벌집에 들어오는 묽은 꿀·농축 꿀·물의 양을 조절한다.
벌집이나 벌떼 중심부에 있는 벌들은 그리 높지 않은 기온에도 몸이 과열되어 위험해질 수 있다. 제일 바깥쪽 벌들은 견딜 수 있는 최저 기온인 15도까지 체온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외부 기온이 떨어지더라도 무리의 중심부 온도는 상승한다. 중심부 벌들은 자체적으로 조절해서 필요에 따라 열을 많게 혹은 적게 만들어내니, 오랫동안 연구자들은 바깥쪽 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중심부 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여러 실험으로도 의사소통 방법을 입증할 수 없었다. 대신 추가 연구를 거쳐 중심부 벌들의 높은 온도가 오로지 안정 상태일 때의 신진대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중심부 벌들은 어째서 외부 기온이 낮아져도 오히려 몸이 뜨거워지는 걸까? 정답은 외벽, 즉 바깥쪽 벌들이 중심 온도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있을 때 바깥쪽 벌들은 체온이 넓은 범위로 오르내리게 수동적으로 맡겨두지만, 단독 활동 벌들은 언제든 날아오르도록 몸을 떨어 33도 정도의 가슴 온도를 유지한다. 체온이 떨어질 때 외벽 벌들의 첫 방어 수단은 몸을 떠는 게 아니라 중심부로 더 기어드는 것이다. 바짝 모여 머리를 안쪽, 배를 바깥쪽으로 내밀면 열 손실이 최소화되고, 규모가 크면 수만 마리의 신진대사만으로도 중심부 온도가 치명적 범위로 치솟을 수 있다. 이때 과열된 중심부 벌들도 가만있지 않고 시원한 주변부로 기어가 공간과 틈을 만들어 열을 방출한다. 이 두 반응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 평소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 최종 결과물만 드러난다. 특별한 움직임은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 때만 눈에 띈다. 실내 온도의 벌떼를 갑자기 영하로 옮기면 바깥쪽 벌들이 즉시 뭉쳐 중심부 온도가 급상승하고, 반대로 영하의 벌떼를 따뜻한 곳으로 옮기면 대열이 흩어져 중심부 온도가 급강하한다.
외벽 벌들이 중심부 온도에 미치는 위력은 아시아 꿀벌이 말벌에 맞서는 방어 반응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과 일본의 재래꿀벌은 자신들을 잡아먹는 크고 중무장한 털보말벌에 맞서 싸운다. 아무리 매서운 말벌이라도 꿀벌의 치명적 발열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서너 마리 병정벌이 말벌에 달라붙고 200~300마리가 공격자를 촘촘히 에워싼 채 높은 체온으로 공처럼 둘러싸고 계속 몸을 떨면, 공의 중심부 온도가 46도까지 치솟는다. 작은 차이지만 꿀벌은 말벌보다 높은 온도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침입자는 목숨을 잃는다.
조류
새대가리라는 말은 이제 그만고대 바이킹족은 큰까마귀를 신의 전령으로 숭배했고, 북태평양 연안 아메리카 원주민 신화에서 큰까마귀는 은혜를 베푸는 존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아일랜드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을 ‘큰까마귀 같다’고 표현한다. 큰까마귀는 정말 총명한 걸까?
동물의 지능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측정하며 본능이나 학습된 행동과 어떻게 구분할까? 지능적 행동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수행 결과가 아닌 의식이기 때문에 직접 테스트가 거의 불가능하다. 동물학 교수 도널드 R. 그리핀은 ‘의도’라는 관점에서 의식을 정의했는데, 머릿속에 미래 사건의 이미지가 존재하고 동물이 그걸 이용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한다면 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이외 동물에게 의식적 통찰이 있음을 처음 증명하려 한 과학자 중 하나가 볼프강 쾰러다. 1917년 그는 배고픈 침팬지 방에 나무 상자를 두고 높은 곳에 바나나를 걸었는데, 한 마리가 물러서서 상자를 갖다 놓고 올라가 바나나를 얻었다. 이건 우연일까, 본능이나 학습일까, 아니면 통찰의 증거일까?
내가 이야기하려는 새는 큰까마귀다. 나는 큰까마귀와 까마귀를 사랑하지만, 그 행동이 통찰·학습·진화적 프로그래밍 중 무엇에서 나온 것이든 내 애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지능이 있다는 공식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최근 한 학술지에는 사막 절벽 둥지에 기어오르는 연구자들에게 큰까마귀 한 쌍이 돌을 떨어뜨렸다는 내용이 실렸는데, 이는 계산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더 단순한 설명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큰까마귀가 팀을 이뤄 작업한다는 사례도 자주 보고된다. 늑대나 여우 뒤에서 큰까마귀 한 마리가 꼬리를 쪼아 주의를 끄는 사이 다른 한 마리가 먹이를 가로채는 식인데, 이는 예지력과 지능의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하지만 큰까마귀와 까마귀는 먹잇감이 없어도 개나 포식자를 비슷하게 괴롭히므로, 반드시 의식적 선견지명이 있어야 협업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행동은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의식적 통찰의 영향을 시험하기 위해 일련의 실험을 고안했다. 첫 번째 실험은 사람 손에 자란 미국까마귀 두 마리였다. 60센티미터 끈으로 횃대에 고기를 매달았는데, 고기를 얻으려면 횃대 위에 앉아서 부리를 아래로 내려 끈을 끌어 올리고 실을 밟아 고정한 다음, 부리를 떼고 고개를 숙여 다시 실을 끌어 올리는 행동을 스무 번 이상 반복해야 했다. 사전에 직접 질문하며 조사해본 결과, 꽤 많은 어린이가 해결 방법을 쉽게 떠올렸다. 따라서 통찰력만 있다면 쉽게 통과할 미션이었다. 하지만 끈이 먹이에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 없거나 먹이에 연결된 끈을 이용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면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질 터였다.
과연 이 까마귀들이 학습 과정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두 까마귀는 즉각 먹이에 관심을 보여 끈을 쪼고 당겼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리고 15분이 지나자 포기하고 고기를 무시했고, 30일 뒤에도 미끼는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고기를 횃대에 올려주면 낚아채려다 끈이 당겨져 고기가 빠지자, 여러 번 시도 후엔 그 자리에서 먹이를 먹어치웠다. 결국 부리에서 먹이가 안 빠지게 하는 법은 배웠지만 끈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결론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길들인 큰까마귀 다섯 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테스트를 했다. 녀석들은 고기에 관심을 보이며 탐구하듯 힐끗거렸고, 여섯 시간쯤 흐르자 한 마리가 모든 단계를 순서대로 완료해 고기를 획득했다. 여섯 시간 내내 지켜봤으니 따로 연습했을 리 없었다. 녀석을 횟대에서 쫓아내자 고기를 떨어뜨렸지만 돌아와 다시 끌어 올렸고, 이후로도 쫓아낼 때마다 고기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끌어 올렸다. 이는 녀석들이 끈을 당기는 행동은 우연이 아니라 방법을 원래 알고 있다는 객관적 증거였다. 다른 세 마리도 과제를 해냈는데, 첫 번째 녀석은 제자리에서 당겼지만 나머지는 옆걸음질하며 당긴 것으로 보아 단순 모방은 아니었다. 내가 실험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자면, 큰까마귀들은 인간과 유사한 정신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했으며 머릿속으로 원리를 상상한 후 실전에서 통찰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녀석들이 알고 행동하는 것인지 확신을 얻기 위해 이번에는 까마귀를 속여 보기로 했다.
세 번째 실험에서 나는 횃대에 3~4센티미터 간격으로 끈 두 개를 건 후, 한 끈에는 고기 한 점을 매달았고, 다른 끈에는 똑같은 무게의 돌멩이를 매달았다. 만약 끈을 당겨 올리면 바라던 먹이가 눈앞에 나타난다는 걸 통찰력 없이 학습했을 뿐이라면 두 끈을 거의 비슷한 빈도로 당겨 올릴 거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하지만 100번이 넘는 시도 가운데 녀석들은 단 한 번도 돌멩이를 끌어 올리지 않았다. 물론 종종 엉뚱한 끈을 쪼거나 살짝 당길 때는 있었지만 한번 당겨보는 것만으로도 다음 단계를 계속할지 말지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녀석들은 끈을 살짝 당겼을 때 고기가 움직이는 게 보이면 올바른 끈을 찾았다는 걸 알아차렸고, 돌멩이가 움직이면 즉시 실수를 바로잡았다. 결국 큰까마귀들은 끈을 당겨보기 전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걸 학습했다. 여기까지 오니 나는 녀석들이 무엇을 찾고 무엇을 확인하는 건지 좀 더 구체적으로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네 번째 실험에서 나는 두 개의 끈이 직선이 아니라 중간에서 엇갈리도록 만들었다. 처음엔 두 마리가 계속해서 잘못된 끈을 잡아당겼고 같은 실수를 연달아 스무 번이나 저질렀다. 하지만 나중에는 올바른 끈만 골라 당겨 올렸다. 이건 잘못된 통찰을 극복하려면 올바른 사실을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였다.
그런데 또 다른 두 마리는 아예 처음부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똑같이 행동해도 ‘먹이 위의 끈을 당긴다’와 ‘먹이와 연결된 끈을 당긴다’라는 두 개의 다른 내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던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큰까마귀들이 접해본 건 사이잘삼 노끈이 전부였다. 하지만 끈만 당긴다고 고기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고기가 연결되어 있는 끈을 당겨야 먹이를 얻을 수 있다. 녀석들에게 고기를 매단 녹색 노끈과 돌멩이를 매단 사이잘삼 노끈을 보여주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녹색 노끈만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이들은 시행착오를 거친 학습 없이도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