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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김상욱 지음

동아시아 / 2026년 6월 / 320쪽 / 18,000원





1부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기본 상수 _ 자연 법칙과 인간 본성에 관하여



우리는 왜 자꾸 남을 따라 할까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은 개, 악어, 개구리, 오징어, 바퀴벌레 등과 분자와 세포 차원에서 많은 것을 공유한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믿는다. 어디가 다른가? 최근 가장 주목받는 답은 유전자-문화 공진화론(gene-culture coevolution theory)이다. 기존 연구가 자연선택과 성선택으로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을 강조했다면, 이 이론은 차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 차이는 바로 문화이며, 문화가 인간의 생존과 문명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1970년대 에드워드 윌슨이 진화론을 인간에게 적용해 논란을 일으킨 데서 진화심리학, 인간 행동생태학,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 탄생했다. 진화심리학은 수렵채집 시기에 형성된 인간 심리로 현대 인류를 이해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20만~30만 년을 수렵채집으로 살고 불과 1만 2,000년 전 농경을 시작했기에, 현대인은 우아하게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수렵채집인의 마음을 지닌다. 수렵채집 시대 기아에 허덕이던 경험이 만든 심리 때문에 비만을 걱정하면서도 달콤한 디저트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그 예다. 여기서 문화는 유전자의 결과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한편 인간 행동생태학에서는 심리보다 인간의 행동에 주목한다. 특히 환경에 적응한 인간의 다양한 ‘행동’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영장류는 암컷이 홀로 양육하지만, 인간은 집단 내 많은 가족 구성원이 양육에 함께 참여한다. 그래서 아이의 생존율을 높이고 여성의 번식 터울을 줄여 빠른 속도로 번식할 수 있다. 결국 이런 행동으로 지구에서 지배적인 종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여기서 문화는 중요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반면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은 문화가 유전자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 지난 5만 년간 적응에 유리한 돌연변이가 3,000개, 곧 전체 유전자의 4분의 1에서 변이가 일어났다면 문화의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능이 높다지만 모든 면에서 그렇진 않다. 2007년 일본의 숫자 위치 기억 실험에서 침팬지가 인간을 이겼다. 19세기 극지 탐험대원들이 혹한에 얼어 죽는 동안 이누이트족은 평온했는데, 비슷한 지능을 가졌음에도 탐험대원이 죽은 것은 이누이트족만이 아는 얼음집·카약·사냥법 같은 기술, 곧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를 걷어 낸 인간은 종종 생존하기조차 힘들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지능보다 문화와 그것을 학습하는 능력이다. 침팬지는 이누이트와 함께 살아도 생존 기술을 익히지 못하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을 참조하고 모방하는 능력이 유별나게 뛰어나다. 모두가 왼쪽으로 가면 자신은 오른쪽이 옳다고 생각해도 따라가게 되고, 아기조차 어른의 반응을 살펴 태도를 바꾼다.

다만 인간은 아무나 모방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명망가를 참조한다. 명망은 폭력과 두려움에 기반한 권력과 달리, 뛰어나거나 성공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경험 많은 노인이 문화 전달자 역할을 했기에 인간이 오래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는 노인의 지식이 점점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더 많은 정보를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학습은 종종 입 닥치고 그냥 따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칠레의 마푸체족은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물에 끓일 때 재를 함께 넣는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냥 관습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 몸에 꼭 필요한 분자인 니코틴산(비타민 B3)이 결핍될 수 있다. 그래서 옥수수가 유럽에 처음 전해져 주식으로 자리 잡은 지역에서 니코틴산 결핍으로 발생하는 펠라그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옥수수에 염기성 물질인 재를 넣어주면 옥수수 안에 묶여 있던 니코틴산이 분해되어 빠져나온다. 마푸체족 사람들이 이런 과학적 사실을 알았을 리 없지만, 그냥 관습을 따른 덕분에 옥수수를 주식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적 행동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무조건 모방하는 인간의 본능은 문화적 학습에 유리하며 대개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문화는 생물학적 변화도 일으킨다. 인간은 소화의 일부를 몸 밖에서 수행한다. 음식을 자르고 빻고 조리하는 문화 덕분에 입과 위장, 대장이 다른 영장류보다 작고 짧아졌다. 모유에는 유당(젖당)이 들어 있는데 인간은 모유를 먹는 아기일 때만 유당을 소화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유당을 분해하여 소화되도록 하는 유당분해효소, 즉 락타아제 합성이 중단된다. 어른이 되면 모유를 먹을 일이 없을 테니 만들지 않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 젖을 먹는 문화를 발전시킨 북유럽인의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유당분해효소가 만들어진다. 북유럽인의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한편 동물 젖을 별로 먹지 않았던 동아시아인의 경우, 성인이 되어서도 유당분해효소를 보유한 사람은 많지 않다. 유당분해효소가 없는 사람이 우유를 마시면 유당불내증으로 고생할 수 있는데, 사실 동아시아인에게 유당불내증은 병이 아니라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처럼 문화는 유전자를 변화시킨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은 규범을 내면화하고 위반자를 처벌하려는 성향까지 지닌다. 3세의 아이들도 놀이에서 정해진 규범을 어기면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항의한다. 합리적인지가 아니라 규범을 따랐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즉, 이유도 없이 규범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또한 인간이 옳다고 믿는 일에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영악한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규범을 따르려는 성향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수 있다. 일단 규범을 따르는 것이 대개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나 독재도 생각보다 쉽게 나타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오랜 시간 스스로를 문화로 길들여 온, 가장 성공적으로 가축화된 동물인 셈이다. 가축이 야생에서 살 수 없듯 인간은 문화라는 울타리 밖에서 살 수 없다. 문화는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부 삶이라는 미지수, 최적의 해를 찾아서 _ 끝이 없는 최적화 과정에 관하여



결혼과 사랑의 불안한 동행


인간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은 대개 결혼 제도에 기반한다. 하지만 근래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이혼이 흔해지며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왜 생겼고, 왜 자주 문제가 되는지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보자.

많은 동물이 양성생식으로 번식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는 것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최선의 번식이란 유전적으로 최고의 상대를 구해 최대한 많은 자식을 남기고, 그 자식도 번식에 성공하는 것이리라. 동물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인간에게 적용하면 논란이 인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고, 인간의 유전자도 이기적이니, 결혼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면 인간도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장류를 포함한 포유동물에서 일부일처형은 드물고 자식을 돌보는 수컷도 거의 없지만, 새들은 일부일처 성향이 있고 수컷이 육아하는 경우도 흔하다. 결혼에 관한 한 인간은 영장류보다 조류에 가까운 셈이다. 현대 인간의 결혼은 대개 장기적 일부일처제인데, 이것이 어떻게 표준이 되었는지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없다.

결혼 이전과 선사시대:
크리스토퍼 라이언과 카실다 제타는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에서 인간의 성생활이 원래 난혼이었다고 주장한다. 해부학적 증거를 보면, 일부다처제에서 수컷은 경쟁자를 물리칠 육체적 힘이 중요하지만 난혼에서는 암컷 몸속 정자들 사이의 ‘정자 경쟁’에서 이기는 생식적 힘이 더 중요하다. 보노보와 침팬지는 고릴라보다 몸무게는 4분의 1이지만 음경은 2.5배 크고 고환은 4~5배 무거우며 정액량도 4배 가까이 많은데, 인간은 해부학적으로 일부다처제의 고릴라보다 난혼의 침팬지와 보노보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많다.

한편 다수의 연구자는 수렵채집 시대 가족이 군혼을 맺었다고 추측한다. 이후 근친혼이 금지되면서 족외혼이 불가피해졌고, 늘 이동하며 물자를 저장할 수 없고 사냥감·식수 정보가 필요했던 수렵채집 집단은 다른 집단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사시대와 다름없이 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다른 부족과 결혼 동맹을 맺어 안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서 보듯, 결혼은 낯선 외부 집단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농업과 가부장제:
농업이 시작되자 인간은 정착했고, 인구가 늘며 잉여 산물이 사유재산이 되었다. 일하지 않아도 사는 계급, 주로 무력을 가진 남성이 탄생하고 가부장적 사회가 자리 잡았다. 가부장 남성은 사유재산을 자기 자식에게 남기길 원했는데, 여성은 자식이 자기 자식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지만 남성은 그렇지 못하다. 진짜 자기 자식이 아니라면 이기적 유전자 입장에서 도울 이유가 없으므로, 여성의 성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정절을 강요해 다른 남자의 자식을 임신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 이렇게 결혼은 상류계급의 지위 세습과 부의 상속에 필수적인 사회적·경제적 계약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농업에 필요한 막대한 노동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부부간 생산 분업이 필요했고, 가부장제이므로 재산은 합법적 아내의 합법적 자식에게 상속되었다. 일부일처제는 합법적 자식을 결정하는 데 유리했다. 첩을 여럿 두어도 정식 아내의 자식만 상속받았다.

이처럼 전근대 시대에 결혼은 사회적, 경제적 계약에 가까웠던 터라 부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결혼은 남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두 집안의 결합, 정확히는 사회적, 경제적 결합이었다. 이런 형태의 결혼 제도는 생물학적 번식 본능을 뛰어넘는 인간만의 특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부부간의 사랑보다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자매 사이의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 아니, 부부간의 지나친 사랑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었다. 서구에서도 부부간의 사랑은 부차적 요소일 뿐이었다. 실제로 전근대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결혼 제도 바깥에서 진짜 사랑을 찾고 아이를 낳았다.

근대의 결혼 혁명:
근대에 들어서 결혼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사랑이 결혼의 전제가 된 것이다. 르네상스로 ‘개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인쇄술로 로맨스 책이 대중화되었으며 17~18세기에 낭만적 사랑의 이상이 퍼졌다. 다만 사랑만으로 결혼하려면 경제적 독립이 필요했는데, 산업혁명과 임금노동·도시화 덕분에 친족 도움 없이 부부의 힘만으로 자립하는 핵가족이 탄생했고, 계몽주의는 자발적 결혼을 옹호했다. 결혼에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서양에서는 200여 년, 한국은 100여 년밖에 안 된 아주 최근의 것이다. 근대인은 낭만적 사랑·안정된 가정·정열적 섹스를 모두 결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럼에도 낭만적 사랑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은 데는, 자본주의가 그 꿈을 끊임없이 부추긴 탓도 있다. 낭만적 사랑을 하는 데는 종종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본래 사랑은 도파민에 의한 단기 흥분과 이어지는 권태·질투·의심·슬픔을 포함하는 복잡한 현상인데, 낭만적 사랑은 긍정적인 면만 부각해 우리를 기만한다.

전근대 사람들은 결혼에서 사랑을 기대하지 않았다. 결혼은 주로 사회적, 경제적 문제였다. 따라서 사랑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근대인에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다. 지금 우리도 결혼에서 사랑을 찾는다. 여기서 현대 결혼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부부 사이에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결혼 제도와 사랑을 조화시킬 최고의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에게 일부다처제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추측되지만(논란은 있다), 대부분의 현대 문화권에서는 일부일처제가 표준이다. 여기에는 경제적 계약 말고도 아직 모르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일부일처제가 아니라면 짝을 구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아 사회가 불안정해지는데, 대규모 협력이 필요한 인간 사회에서 이런 불안정성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농업혁명 이후 가부장제를 지탱하던 남성의 무력은 현대에서 더 이상 생존에 유리한 능력이 아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며 가부장제는 빛바랜 신화로 잊혀가고, 장자상속도 무너지며, 사랑에 기반한 근대 결혼의 이상도 도전받고 있다. 이제 이혼은 놀랍지 않고 비혼도 늘어간다. 결혼은 원래 사랑과 관련 없는 제도였다가 로맨틱한 사랑이 결합해 결혼 혁명이 일어났고, 그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류 죽음 극복 프로젝트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고 죽는다. 어차피 죽을 텐데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수욕장에서 아이들이 쌓는 모래성은 아무리 멋지게 만들어도 밀물이 들어오면 사라진다. 모래성을 지금 허무는 것과 밀물이 없애기를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다를까?

죽음은 중요한 주제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의미와 가치가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세상이 금으로 가득하다면 금은 가치가 없듯, 삶이 무한정 이어진다면 좋은 인생을 정의할 수 있을까. 삶은 유한하기에 우리는 잠시나마 좋은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이야기로 답했다. 시시포스가 언덕 위로 돌을 굴려 올리면 돌은 정상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고, 시시포스는 언덕을 걸어 내려가 돌을 다시 굴려 올려야 한다. 이런 무의미한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시시포스가 받은 벌의 진정한 고통이다. 하지만 카뮈는 시시포스가 행복하게 돌을 굴려 올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한하고 덧없는 삶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뜻일까?

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에 따르면 죽음이야말로 모든 인간 활동의 주된 원동력이다.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과 달리 죽음을 인지하며, 생존 본능 탓에 죽음은 극도의 공포를 부른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공포를 극복한다. 압도적 공포를 무의식 깊이 묻어두고 마치 죽음이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사후 세계를 믿었다. 그들은 죽은 자가 ‘아누비스’라는 신의 안내를 받아 심판장에 들어가 심장 무게로 죄의 양을 재고, 지은 죄가 무거우면, ‘암무트’라는 괴물이 심장을 먹어버려 ‘무(無)’의 상태로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반면 죄가 가벼우면 부활해 내세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부활하려면 영혼의 일종인 ‘카’가 온전해야 하고 그러려면 시신이 보존되어야 했기에 미라를 만들었다.

죽음은 사후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극복되지 않았기에,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를 만들고 거기에 인생의 목표를 둔다. 영원불멸의 신을 창조해 그를 쫓아 영원히 살려 하고, 영웅을 만들어 그 일에 영속적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동참한다. 세계를 정복하고 피라미드와 성전을 짓고 위대한 책을 쓰고 권력과 부를 쌓는 일이 그것이며, 그 대가로 가짜 불멸을 얻는다. 대개의 종교도 어떤 형태로든 불멸 개념을 담아 죽음에 답한다. 죽음 극복 프로젝트가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지만, 신에게는 악마가, 영웅에게는 악당이 필요하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의 영웅은 이슬람의 악당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각 진영이 불멸의 영예를 얻으려 할수록 더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때로 더 많은 사람들의 때 이른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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