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보는 기후 이야기
유성운 지음 | 메디치미디어
예술로 보는 기후 이야기
유성운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6년 4월 / 288쪽 / 20,000원
1장 적응과 번영의 풍경: 기후가 빚어낸 문화와 일상
사라진 코끼리가 남긴 문자 - 춘추춘추(春秋)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 300년가량 이어진 시기를 가리킵니다. 수백 개의 나라가 난립하는 혼란 속에서 공자와 노자 같은 사상가들이 나타난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시대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춘추’는 글자 그대로 ‘봄과 가을’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자가 이 시대를 다룬 역사책 제목이 『춘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춘추 시대가 됐습니다.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던 이 시대를 공자는 왜 ‘춘추’라고 이름 붙였을까요. 한나라 때 유학자 곡량적은 『춘추』를 해설한 『곡량전』을 쓰면서, “춘은 생장, 추는 수렴과 심판의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봄과 곡식을 수확하는 가을을 역사의 인과성에 빗대어 썼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유학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이런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고고학·기후학·문헌학 등이 발달하면서 학자들은 『춘추』라는 제목에 고대 기후의 ‘열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실마리는 ‘豫(예)’라는 한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豫(예)에 감춰진 고대 기후의 비밀: 중국에서는 각 성(省)을 한 글자로 줄여서 표기합니다. 豫(예)는 하남성(河南省, 허난성)을 일컫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이곳을 예주(豫州)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豫라는 한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豫는 象(코끼리 상)과 予(줄 여)가 결합한 한자로, ‘먼저’, ‘앞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미리 생각한다는 의미의 ‘예상(豫想)’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입니다. 코끼리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기에 행동하기 전 반드시 먼저 생각을 한다는 특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豫를 사람(子)이 코끼리(象)를 끌고 가는 모습에서 본뜬 글자라고도 합니다.
청동으로 만든 고대 코끼리 조각상: 하남성, 즉 예주 일대에 코끼리가 살았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 한자를 처음 만든 지역도 바로 하남성입니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이 1890년대 하남성 안양에서 처음 발견됐고, 이후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곳에 중국 고대 왕조 상(商)나라가 존재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은 이곳에서 뛰노는 코끼리들을 보면서 ‘象’이나 ‘豫’ 같은 한자를 만들었던 것이겠죠. 갑골문에서도 코끼리를 사냥했다는 기록들이 상당수 발견됐고, 실제로 코끼리 뼈가 많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하남성은 코끼리를 상징 동물로 지정했는데, 재밌는 점은 정작 지금 하남성에서는 코끼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많던 코끼리가 사라진 것은 인간의 남획도 요인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코끼리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되어서입니다. 코끼리가 서식하려면 일단 연평균 기온이 20℃ 이상의 아열대~열대 기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남성은 12~16℃ 사이를 오가는 온대 기후에 속하고, 겨울엔 때때로 영하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코끼리가 살기엔 ‘추운’ 곳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코끼리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오래전 하남성은 동남아시아 같은 아열대성 기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한랭화가 지속되면서 기온이 낮아졌고, 결국 코끼리도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죠. 이렇게 환경이 달라지면서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220) 시대에는 이미 중국에서 코끼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됐고, 중국인들은 과거 선조들이 이야기하던 코끼리라는 동물에 대해 그저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를 상상(想像)이라고 쓰게 됐습니다. 본 적이 없는 형상(像)을 생각(想)하는 것이죠.
‘여름’과 ‘겨울’이 없던 시대: 고대 문명이 출발했을 무렵 전 세계는 지금보다 따뜻했다고 합니다. 중국 ‘문명’의 시작으로 보는 상나라도 기후의 축복을 듬뿍 받았습니다. 한자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상나라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거북이 등껍질에 갑골문을 새겨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엔 여름과 겨울에 관한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여름과 겨울을 명확하게 나누기 어려울 만큼 기후가 좋았던 것이겠죠. 봄 ― 따뜻한 봄 ― 가을 ― 약간 서늘한 가을 정도랄까요. 본래 ‘여름’과 ‘겨울’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니었던 ‘하(夏)’와 ‘동(冬)’은 주나라 시기부터 계절의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갑골문에는 오직 봄과 가을, ‘춘추’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춘추’라는 단어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듯 ‘봄과 가을’이 아니라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times’, ‘연대기’ 같은 의미랄까요. 따라서 공자가 역사책에 ‘춘추’라고 이름 붙인 것은 적절한 작명 같습니다. 『춘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역사를 기원전 722년부터 481년까지 간략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나라 정벌: 따뜻한 기후, 황하(黃河, 황허)라는 큰 강, 황토질 토양 등 상나라는 농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대 역사에서 잉여 식량을 확보하면, 사제와 군인 같은 전문직군이 만들어집니다. 갑골문을 보면 상나라는 전쟁과 제사에 국력을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였습니다. 그동안 진행된 고고학과 문헌학 등에 따르면 상나라는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도읍을 나타내는 ‘京(경)’도 처음 이 글자가 만들어졌을 때는 이민족이나 적의 시체를 가지고 쌓은 일종의 개선문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글자들은 과거 상나라 사람들이 강족의 머리를 쌓아 제물로 바쳤음을 보여줍니다.
상나라의 제사 희생물로 바쳐진 강족은 상나라 서쪽 고원에서 양을 치던 이들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후에 강족 일파에서 나온 주족(周族)이 세운 나라가 주나라이며, 이들은 상나라의 학정에 지친 이웃 나라들을 규합해 기원전 1046년 1월 목야 전투에서 상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주나라의 대업을 도운 일등 공신은 강태공으로, 강(姜)이라는 성은 강족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편 천하의 새 지도자가 된 주나라는 상나라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점을 쳐서 결정하거나 조상신을 숭상하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던 일들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한 것이죠. 이를 위해 주나라는 인간의 도덕과 의지, 예의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유교-성리학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삼았고,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주공(周公)을 군주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치켜세웠습니다.
중세 온난기가 쏘아 올린 건축 양식 - 노트르담 드 파리중세의 황금기는 대성당들이 열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캔터베리 대성당, 쾰른 대성당처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대형 성당들이 연이어 들어선 것이죠.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이에 뾰족뾰족한 첨탑과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채워진 고딕 양식의 성당들은 하늘(신)에 닿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을 보여주는 중세의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간 적이 있는데, 가장 먼저 놀란 것은 그 규모였습니다. 요즘 같은 중장비 기계도 없던 10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더군요.
숲 하나로 만든 대성당의 지붕: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대성당들은 중세의 자원을 총력으로 투입한 결과물입니다. 겉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엄청난 양의 돌이 쓰였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는 약 10만 톤가량의 석회암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돌만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런 대성당을 짓는 데는 그에 못지않은 많은 나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딕 건축의 특징인 뾰족한 지붕과 돌로 쌓아 올린 천장 구조물의 평평한 면 사이에는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공간이 숨어 있습니다. 이 공간을 지지해주는 뼈대를 루프 트러스(Roof Truss)라고 하는데 여기에만도 많은 목재가 투입됩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루프 트러스에는 1160~1170년대 벌목된 참나무 약 1,300그루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21헥타르(약 6만 평) 규모의 숲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하니, 이 대성당을 ‘숲’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게 납득이 갑니다. 2019년 화재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지붕이 전소되었을 때, 이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수백 년 된 수천 그루의 참나무를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전역의 국유림으로는 부족해 결국 사유림 소유주들로부터 기증을 받은 덕분에 간신히 복원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이 만든 고딕 건축물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대성당뿐 아니라 작은 교회와 수도원들까지 합치면 수천에서 수만 개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무렵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숲이 사라졌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목재를 가져다 쓸 수 있었던 것은 기후 덕분이었습니다. 중세를 흔히 ‘암흑 시대’라고 표현하지만, 기후만 놓고 보자면 정반대에 가까웠습니다. 3세기 들어 추워지던 유라시아가 중세의 시작과 함께 기온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세 후기(950~1250)는 ‘중세 온난기’라고 부를 만큼 인류가 활동하기에 이상적인 수준으로 따뜻해졌습니다.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던 북유럽 바이킹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따뜻해진 유럽: 온난한 기후는 풀과 나무의 생장을 촉진했고, 그 결과 중세 시대의 숲은 살아났습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빨간 모자> 같은 동화나 <로빈 후드> 같은 ‘역사 반, 허구 반’ 이야기에 늘 숲이 무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중세 시대의 숲은 너무나도 울창해 늑대와 마녀, 요정들이 공존하는 어둡고 위험하고 신비로운 공간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대신, 그런 덕분에 중세인들은 300~400년 이상 자란 키 크고 굵은 나무를 고딕 건물들에 걱정 없이 가져다 쓴 것이죠. 게다가 많은 고딕 성당이 도시의 중심지나 강가에 지어졌는데, 지반이 무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석조 건물이 땅에 가라앉지 않도록, 그 아래엔 수백~수천 개의 나무 말뚝을 박아 지반을 보강해야 했습니다. 역시 풍부한 목재 공급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공법입니다.
사실 대성당 공사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공사는 최소 수십 년이 걸리는 데다, 여기 들어가는 석재, 목재 같은 재료비에 노동력까지 더하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중세 온난기는 경제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따뜻한 날씨 덕분에 작황이 좋았고, 농업 생산력도 비약적으로 증대했습니다. 노르웨이 중부 트론헤임(북위 63도) 일대에서 밀 농사를 지었을 정도로 경작 한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성장합니다. 도시의 성장은 유통과 금융을 이끌면서 경제성장을 촉진합니다. 중세가 그랬습니다. 게다가 인구 성장으로 농경지와 주거 공간이 확대되면서 개간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숲은 점점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이죠.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지네”: 그러나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온난기도 14세기부터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은 풍작으로 인한 잉여 자본이 고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추위와 잦은 비로 농작물이 썩으면서 대기근(1315년)이 닥쳤고, 면역력이 약해진 이들은 흑사병(1347년)의 먹잇감이 됐습니다. 대성당을 지을 돈도, 노동력도 사라졌습니다. 고딕 성당과 중세 시대는 이렇게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날씨가 추워지고 흑사병과 전쟁으로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거대 성당의 건축 열기는 기후만큼이나 차갑게 식었고, 왕과 귀족들은 춥고 칙칙한 성 내부를 따뜻하게 꾸미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따뜻한 기후의 은총을 상실한 유럽인들은 이제 신보다 인간에 더 관심을 두고,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됩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2막을 여는 극중곡 ‘피렌체’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학교의 책들이 성당을 허물고, 성경은 교회를, 인간들은 신을 무너뜨리리라. 대서양을 향해 배들은 떠났네. 인도에 닿기 위한 길을 찾으려고.”
2장 생존을 위한 대이동: 기후에 몰린 유랑의 역사
비를 좇아 이동한 최초의 기후난민 - 구약성서구약성서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선조가 살았던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75세로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펼치기에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심지어 그가 거주하던 갈데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문명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식량, 교육, 치안, 시장 등 모든 인프라를 따져볼 때 이곳을 능가하는 지역은 당시 세상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가장 안전하고 삶의 수준이 높은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그리고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왔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의 이주는 이후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줬습니다. 70대 고령임에도 익숙한 고향을 버리고 떠나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는 신의 언약대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나중에 거대한 부와 명예를 쥐게 됐습니다.
아늑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 그런데 신이 가라고 알려준 땅은 어디였을까요? 아쉽게도 『창세기』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처음 정착한 곳은 가나안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죠. 아브라함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즉,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나와 계속 서쪽으로 향하여 지금의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장막을 쳤습니다. 이 땅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죠.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다소 의아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의 구절입니다.“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당초 가나안땅에 정착하면 될 줄 알았지만, 아브라함의 이동은 계속됐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개월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수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창세기』는 “그 땅(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으므로”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요즘으로 치면 ‘기후 난민’이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가나안에서 애굽(이집트)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이집트의 환경은 가나안보다 더 나았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