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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미술관

이현민 지음 | 새빛


휴머니즘 미술관

이현민 지음

새빛 / 2025년 11월 / 280쪽 / 22,000원





1장 소심한 은둔형 : 실존 고민이 많지만 힘내겠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반 고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아닙니다. 다만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이였습니다: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개척교회 목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엄마 뱃속에서 사산된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반 고흐의 아버지는 봉급은 작지만 목사였기에 그는 교회에서 제공한 집, 하녀, 요리사, 정원사, 마차가 있는 환경에서 불편함 없이 자랐습니다. 하지만 죽은 형을 그리워하는 엄격한 부모님과 4명의 동생이 연이어 태어나는 집안 환경 속에서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1860년 그의 나이 겨우 7세 때 고흐는 가족과 떨어져 기숙학교에 보내졌습니다. 이때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어, 영어, 불어와 독일어를 구사하는 상당한 독서광이었지만, 새로운 환경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고 1868년 3월에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그가 빈곤과 불우한 화가의 아이콘이 된 원초적인 문제는 이때부터 쌓인 떨구어버리지 못한 지독한 외로움, 예민함과 우울증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이후 반 고흐는 큰아버지의 소개로 당시의 유명 화랑에서 근무하면서, 한때는 목사인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며 일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숙집 딸 외제니와의 사랑이 실패한 후 사랑앓이를 아주 크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종교에 심취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목사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 고흐가 가난한 신도를 위해 하숙집을 내주고 본인은 오두막 짚단 위에서 자는 등의 행동에 대해서,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빈센트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마음보다는 형식과 겉치레를 중시하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나 봅니다. 그러다 고흐는 동생 테오의 제안으로 1880년 27세에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반 고흐의 관심은 화가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며 농부의 정직한 숭고함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27세에 시작한 화가의 길, 그림도 삶도 날씨처럼 어두웠던 네덜란드에서:
동생 테오의 권고와 지원으로 고흐는 브뤼셀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북유럽 날씨처럼 칙칙하고 어두운 화풍으로 네덜란드의 다른 화가들과 비슷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테오는 당시에 “파리에서 인기 있는 인상주의처럼 그림이 밝지 않아서 팔리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무역회사가 전 세계에서 가져온 진귀한 물건 중 일본 판화의 단순하면서도 울긋불긋 화려한 그림은, 19세기 반 고흐가 살던 당시 앞서가는 화가에게 인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루벤스의 채색과 목판화를 연구하며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비 오고 우중충한 날이 더 많은 네덜란드에서 살아온 반 고흐가 밝은색의 세상을 상상하며 인상주의처럼 그리는 것이 생각처럼 잘 되었을까요? 또한 그의 파격적인 그림은 정통을 중시하는 당시 미술학교 교수들과 갈등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래서 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폭음,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공의 색을 따라 프랑스로 갔지만 외로움의 연속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33세인 1886년에 반 고흐는 성공을 꿈꾸며 당시 최고의 예술 도시 파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파리에서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소개로 폴 고갱, 폴 시냑 등 인상주의 화가를 만났습니다. 고흐는 그동안의 어둡고 칙칙한 그림을 벗어나 세련된 근대도시 파리 화가들처럼 밝은색의 그림으로 변화하려 노력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린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듯 반 고흐의 그림은 밝게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1888년 2월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이 없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며 반 고흐는 지중해 근처 작은 도시 아를로 떠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파리에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온 따뜻하고 진실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반 고흐는 이 화려한 도시 파리가 차갑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빛과 햇살이 넘쳐나는 따뜻한 남프랑스에 위치한 아를로 이사했습니다.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귀를 자른 유명한 일화와 ‘별이 빛나는 밤’은 아를에서 탄생했습니다:
반 고흐가 아를에 머문 시간은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로, 단 15개월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열광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이곳 아를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반 고흐는 그토록 염원하던 빛과 밝은색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머물던 집과 방, 다니던 거리, 차 마시던 카페, 동네 사람, 자화상 등을 화폭에 끊임없이 담았습니다. 아를의 부서질 듯 강렬한 금빛 햇살과 빛나는 밤하늘 아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폭발할 듯한 감성을 담아 열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1888년 9월 초에는 ‘밤의 카페 테라스’가 탄생되고 이어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습니다. 또한 고흐가 아를에 머무르며 남긴 뛰어난 역작 가운데에는 많은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폴 고갱과 다투고 귀를 자른 사건 후에 그린,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고갱과 다툼으로 자신의 귀를 자른 끔찍한 일화도 이곳 아를에서 탄생했다는데, 이 아름다운 아를에서 왜 그랬을까요?

끔찍한 일화는 이러합니다. 반 고흐는 ‘남부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어서 테오에게 부탁하여 파리에 있는 인상주의 화가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폴 고갱을 제외한 다른 화가들은 아무도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고갱이 처음 아를에 도착했을 때, 반 고흐와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습니다. 반 고흐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그의 방을 꾸미고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둘 정도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철학의 차이가 점점 드러났습니다. 반 고흐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으로 자연과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고갱은 상상과 철학을 중시하며 더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접근을 선호했습니다. 이로 인해 빈번히 충돌하다가 1888년 12월 23일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던 중, 반 고흐가 칼로 자신의 왼쪽 귀 일부를 자른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반 고흐는 귀를 자른 후 병원에 갔다고 합니다. 정신질환 증세가 잦아지자 1889년 5월 8일에 반 고흐는 아를에 있는 요양원 겸 정신병원에 제 발로 찾아가서 약 1년간 머물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병원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며 1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반 고흐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계를 극복하려 치열하게 노력했던 것입니다. 반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은 1889년 6월 이곳 병원에서 그려진 것입니다. 작품 속 소용돌이치는 하늘과 사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고요한 마을을 표현한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붓놀림은 그의 머리와 가슴이 기억하고 상상하는 살아있는, 살기 위한, 살아가고자 하는 밤하늘입니다. 정신적 고뇌 속에서도 참고 노력하며 놀라운 창작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영혼의 화가 탄생!:
하지만 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 자살 시도 후 며칠 뒤, 그의 나이 37세에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해 5월 테오의 주선으로 오베르쉬르와즈로 이주했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2개월 동안에도 약 70여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반 고흐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약 10년으로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900여 점의 회화와 1,100점의 스케치뿐만 아니라, 지인과 주고받은 903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생전 팔린 작품은 사망하기 2년 전에 그려진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1개뿐이었습니다. 고흐는 참으로 가난하고 외로웠던 불우한 화가였습니다.

고흐의 죽음 6개월 뒤, 34세의 동생 테오도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이들 형제는 살아생전 663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후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는 반 고흐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흐에 대한 관심은 경제대공황과 1차 세계대전 중 커지면서, 유럽에서 먼저 서서히 입소문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35년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에는 1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였습니다. 처음에 방문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림보다는 잘린 귀 이야기와 비운의 화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마주한 후,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의 작품 속 ‘생동감 넘치는 붓질과 선명한 색감으로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돈 맥클린은 1971년에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에 대한 책을 읽은 후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을 만들 당시에 돈 맥클린은 정신적으로 힘들 때였기에, 반 고흐가 정신 이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며 반 고흐는 미치지 않았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노래하였습니다. 반 고흐는 살아생전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 없는 외로움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를 열정 가득하게 했던 햇살 찬란한 아를도 결국 소심해진 그에게는 차디찬 동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는 붓터치는 그래도 참고 견디라고 외치는 듯하지 않나요?

2010년 영국 드라마 ‘Doctor who’에서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반 고흐는, 관객이 넘쳐나는 ‘반 고흐 전시’를 보고 놀라며 ‘빈센트는 최고의 화가’라는 평가를 듣고 감격하였습니다. 살아생전 불우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그에게, 이 시대는 ‘당신은 위대합니다’라는 찬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혼의 화가, 불멸의 화가’라고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전시, 책, 영화로 그를 만나고, 그의 고독과 고단함이 묻어나는 암스테르담, 아를, 오베르쉬르와즈에는 그의 발자취를 느끼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이제 빈센트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겠지요?



2장 금수저 반항형 : 아버지, 저는 화가의 길을 가겠습니다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


은행업 상속자인 저, 세잔은 일단 아버님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겠습니다:
지중해 근처 ‘엑상프로방스’는 반 고흐가 살았던 ‘아를’에서 94km 떨어진 곳입니다. 폴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서 1839년 1월, 모자 사업을 하던 당시 40세였던 아버지의 혼외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잔이 태어날 당시 어머니는 24세로 모자 공장의 노동자였고, 세잔이 5세 될 때 부모님은 정식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 후 세잔 아버지는 사업을 확장하여 은행을 공동 설립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은행업이 번창한 덕분에 나중에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세잔은 안정적으로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응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잔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은행을 상속하고자 세잔이 법대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세잔도 아버지를 위해 1859년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잔은 법학보다는 그림이 좋았습니다. 번창하는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마침 같은 해에 매입한 바로크 양식의 집과 커다란 정원은 그가 좋아하는 그림 소재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세잔은 2년 후, 1861년 법대를 그만두고 파리로 떠났습니다. 그림에 몰두하는 세잔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였지만 간절히 원하는 아들을 이기지는 못하고 대신 제대로 된 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한다는 조건을 걸어 세잔을 파리에 보내고 재정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후에도 세잔은 40만 프랑을 상속받으며 화가로서 안정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절대로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잔의 대표작 사과에 얽힌 절친 에밀 졸라 에피소드를 아시나요?:
세잔은 13세 때 중학생이 되면서 평생의 친구 에밀 졸라를 만났습니다. 세잔보다 1살 어린 에밀 졸라는 이탈리아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졸라가 3살 때 가족이 엑상프로방스로 이사했는데, 그는 5살 때 나이 많은 소년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2년 후 졸라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는 빈약한 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잔이 남루한 옷차림과 어눌한 말투로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졸라를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들은 단짝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시를 쓰고 예술을 논하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세잔의 도움으로 친구들의 괴롭힘에서 탈출한 다음 날 졸라는 감사의 표시로 사과 바구니를 세잔에게 선물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추억과 감사의 의미가 깃든 사과는 이후 세잔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그림 주제로 등장합니다. 세잔과 졸라는 성인이 된 후, 파리에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지냈습니다.

1861년 22세 때 세잔은 파리에 있는 에꼴데보자르드파리 국립미술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실패하여 고향 엑스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은행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다시 파리에 가서 샤를 스위스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의 명작을 보고 그림을 그리며 들라크루아, 푸생 등의 고전 표현기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등을 만나며 최신 유행하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 첫 번째 그룹 전시회에도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처참한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세잔은 1877년 전시회에 다시 출품하였습니다. 당시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 독특하게 생긴 머리, 낡은 부츠 색깔은 임산부에게 충격을 주고 뱃속 태아에게는 황열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악평을 했습니다. 이 세 번째 그룹 전시는 그가 인상주의와 함께한 마지막 전시였습니다. 이후 세잔은 생활고로 오랜 친구 에밀 졸라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파리와 프로방스를 오가며 생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886년 에밀 졸라가 쓴 소설을 본 후, 이 둘의 관계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세잔이 파리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졸라는 서서히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새로 쓴 소설에는 클로드라는 화가가 등장합니다. 소설 속 화가는 능력은 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잔은 클로드가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라 확신하고 그 후에 졸라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잔은 같은 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30년 지기 친구에게조차 실패한 화가로 무시당하는 현실이 참담하였습니다. 낙오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 후 세잔은 세상과 소통 없이 아틀리에에서 그림만 그렸다고 합니다.

세잔의 연구실험실, 사과와 산의 느낌을 아시나요?:
파리에서 마음을 크게 다친 세잔은 고향 엑스로 돌아온 후 자신의 작업실, 아틀리에에서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잔은 작업실에 앉아서 앞에 보이는 산, 사과, 물병 등을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그 당시 카메라가 등장한 이후에 화가들은 새로운 예술 표현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전의 그림방식인 소재의 겉모습을 똑같이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가 더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당시 화가들은 자신이 느낀 주관적 시선으로 일상을 그리는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며, 한계를 넘어 도약하였습니다. 세잔은 어떻게 느낌을 그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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