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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옵션 세대

민세진, 신자은 지음 | 생각의힘
결혼 옵션 세대

민세진, 신자은 지음

생각의힘 / 2026년 3월 / 264쪽 / 18,800원





1장 반세기의 굴곡




왜 커리어가 중요한가: 2000년대 중반까지 쓰인 커리어 우먼이라는 표현에는 사회에 진출한 소수 여성에 대한 긍정과 응원이 담겨 있었다. 커리어는 단순히 직업의 목록이 아니라 더 나은 직무를 향한 장기간의 발전 과정과 연속성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커리어는 자아실현을 넘어 경제적 자립을 통해 가족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매개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을 통계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부터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활동률이 급감했다가 다시 올라가는 M자형 커브를 그려왔다. 하지만 세대가 흐르며 교육 수준이 급격히 변했다. 1955년생 집단의 전문대학 이상 학력자는 12%였으나, 1985년생 집단에서는 84%까지 치솟았다. 이 책은 커리어 성취 기회가 가장 많았던 대졸 여성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은 항상 일하고 있다: 사실 여성은 태고 이래 항상 일해왔다. 다만 가사와 육아가 금전적으로 보상되지 않았을 뿐이다. 1920년대 등장한 직업 부인들도 가부장적 환경에서 이중고를 겪었다. 잡지 신여성의 1933년 1월호 좌담회 내용을 보면 당시의 인식을 잘 알 수 있다. 대담자들은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며, 가정이란 여자의 천직이고 완전한 가정은 주부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여성들에게 생생한 현실로 남아 있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 다르다: 저자들은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과 미혼율을 기준으로 세대를 네 집단으로 분류했다.

1집단 _ 소수의 각자도생 (1955~1964년생): 이 시기 대졸 여성에게 결혼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30대 초반이면 90%가 결혼한 상태였다. 대졸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0~40%대에 불과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후에도 일을 유지하는 여성은 100명 중 2~6명 수준이었다. 이들은 교사, 기자, 약사 등 제한된 직종에서 길을 찾았고, 금융권에서 드물게 임원이 되기도 했다. 이 소수의 여성이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딸의 일터를 지키기 위해 아이를 대신 키워준 친정어머니의 헌신이 있었다.

2집단 _ 커리어와 가정의 고단한 공존 (1965~1974년생): 1집단 이후의 2집단에게 결혼은 시기가 늦춰졌을 뿐 여전히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활동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활발해져 30대 후반에는 절반 이상이 일을 했다. 2005년에는 대리급 이상 관리직에서 여성 비율이 10%를 넘어섰으나 민간 기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이러한 차별적 환경 때문에 많은 여성이 기업보다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국가고시로 눈을 돌렸다. 이처럼 2집단 여성들에게 커리어는 가정과의 고단한 공존을 의미했다.

3집단 _ 경력 단절의 시작 (1975~1984년생): 3집단에서는 30대에 접어들며 경제활동 참가율이 떨어지는 경력 단절 현상이 명확해졌다. 2004년 국민은행 공채에서 여성 합격자가 남성을 앞지를 만큼 사회 진출은 화려했으나, 육아 문제로 일을 그만두는 M자형 커브가 대졸 여성 집단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8년 국책 연구기관에서 경력 단절 관련 보고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3집단의 경력 단절은 역설적으로 보육 시설은 늘어난 반면 조부모의 육아 도움이 감소한 환경에서 기인했다. 맞벌이 가구가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워졌고, 조부모의 연령대도 이전보다 높아져 황혼 육아가 쉽지 않았다. 고학력일수록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주양육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여성들은 결국 커리어를 포기하는 길을 선택했다.

4집단 _ 결혼은 옵션 (1985~1996년생): 4집단에게 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유년기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경제적 안정과 자기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삼게 되었다. 1990년대 전후의 극심한 남아 선호 사상으로 기형적인 출생 성비를 기록하며 태어났으나, 교육 과정에서는 남녀 격차가 사라져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추월했다. 1960년대생인 이들의 어머니들은 전업주부로서 시댁과 남편의 영향력 아래 살았던 자신의 삶과 달리, 딸들에게는 아들과 동등한 투자를 하며 당당하게 성장할 것을 주문했다. 어머니들은 딸에게 꼭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주며 본인과는 다른 독립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상징되는 서사는 4집단에게 결혼과 출산이 커리어의 위협이라는 불안감을 확산시켰다.

미래와 희망: 20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하락하던 출산율은 2024년 하반기부터 반등하기 시작했다. 이 반전의 배경에는 코로나19 이후 미뤄졌던 결혼이 성사된 기저 효과, 일-가정 양립을 지원한 정책 효과, 그리고 베이비부머의 자녀 세대인 M세대가 부모가 되는 인구 파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인구 파도의 영향은 2030년대 중반까지 반등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2020년대 중반은 인구 정책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이제 국가가 인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출산을 독려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반세기가 일과 육아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좁은 길이었다면, 앞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 맞는 최선의 조합을 고를 수 있는 넓은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청년들의 선택을 온전히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의 전환만이 인구 위기의 상황을 진정으로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2장 소수의 각자도생: 1집단(1955~1964년생)



대한민국 여성 지위가 도약을 시작한 1948년 전후에 태어난 1집단(1955~1964년생)은 우리 사회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급변한 시기를 관통한 전환기적 세대다. 참정권 부여와 남녀평등 원칙을 담은 헌법 제정은 여성의 일이 생계를 위한 의무에서 자아실현을 위한 커리어로 거듭나는 법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남성 가구주들이 부재했던 현실은 여성이 실질적으로 가계를 책임지게 했으며, 이는 모성 보호와 차별 금지를 명시한 근로기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국가적 경제 복구 과정에서 여성은 경공업 분야의 핵심 노동력으로 자리 잡았고, 1950년대 후반 가족법 개정을 통해 가정 내 지위도 확립되기 시작했다.

대학교, 소수의 특권: 당시 어머니들은 본인이 누리지 못한 경제적 독립과 자존감 있는 삶을 딸에게 투영하며 교육을 독려했다. 1집단은 베이비부머 1세대로서 치열한 입시 경쟁과 2부제 수업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대학 전공 선택에서는 곱게 키워 시집보내기 적합한 가정대에 대한 선호가 여전히 높았으나, 주도적으로 전공을 선택하는 흐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커리어를 쌓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20대 전반에 결혼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1집단 여성들에게 결혼은 피할 수 없는 기본값이었기에, 자신의 사회활동을 지지해줄 배우자를 찾는 것이 커리어의 성패를 좌우했다. 당시 30대 중반을 넘기면 결혼 시장에서 재혼 대상으로 분류될 만큼 결혼 압박이 거셌으나, 커리어 의지가 강한 이들은 공부를 마칠 때까지 결혼을 미루거나 자신의 일을 수용할 태도를 갖춘 배우자를 선택했다.

선례 없는 길을 가다: 사회 진출 이후에도 선례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고난은 계속되었다. 일반 기업은 군필자 위주로 채용하여 여성의 진입이 사실상 차단되었고, 여성들은 주로 교사나 언론사 시험으로 몰렸다. M세대의 어머니인 이들은 가부장적인 환경 속에서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분투했다. 당시 육아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보조적인 도움에 그쳤으며, 1집단 여성들은 친정이나 시댁의 헌신적인 도움 혹은 개인적인 초인적 노력을 통해 비로소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책의 큰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여성정책에 큰 변화가 왔다. 여성특별위원회와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 할당제가 도입되었다. 이인실 박사는 당시 한국경제연구원에 근무했는데, 여성 경제학 박사가 드문 환경에서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공적 영역에서 활동한 덕분에 2003년 국회예산정책처 경제분석실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 내 유일한 여성으로서 겪는 고충은 컸다. 항상 과도하게 주목받았고 사소한 잘못도 소문이 나고 약점이 되었다. 여자라서 기회를 얻었다는 남자들의 질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여성이 적다 보니 개인의 언행이 여성 전체의 특성으로 해석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만연했다.

미래 세대를 위해 바라다: 자녀 세대가 직면한 경제적 현실도 큰 문제다. 한 인터뷰이는 자신의 첫 월급이 18만 원일 때 전세 보증금이 600만 원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보증금이 월급의 30배 정도면 적금 부어 집을 살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전세 2억 원을 구하려 해도 월급이 600만 원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살 곳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생각하겠느냐는 탄식이다. 육아 문제 역시 육아휴직보다는 유연근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1년 넘게 쉬고 돌아오면 업무를 따라가기 어렵고 승진에서도 불이익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아실현 욕구가 강하고 공정한 평가를 원하는 자녀 세대에게는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인프라와 문화가 절실하다. 1집단 여성들은 자녀의 선택을 응원하며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3장 커리어와 가정의 고단한 공존: 2집단(1965~1974년생)



학력의 도약: 1985년 시작된 중학교 의무교육은 전반적인 학력 수준을 끌어올렸다. 특히 1970년대 초반 출생 여성들은 전문대학 이상 진학자가 고졸 이하 학력자를 추월하는 골든 크로스를 이뤄냈다. 소설가 김별아는 당시 비평준화 지역인 강릉여고 분위기를 전하며,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산업체 여상으로 향하던 풍경이 각인되어 있다고 회상했다. 서울에서도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이 인문계 대신 커트라인 높은 여상을 선택해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일이 흔했다.

커리어를 위한 선택: 전공 선택은 점차 커리어를 염두에 둔 주도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김재련 변호사는 여기자가 경찰서에 가면 재수 없다고 소금을 뿌린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법조인이 되면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법대를 선택했다. 강은주 씨는 점수가 아까워 국문과 대신 경영학과를 택하며 취업을 고민했다. 당시에는 여학생 이과 1등이 의대 대신 약대를 선택할 만큼 안정성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그러나 대학 내 여성 교수는 극히 적었고, 임신한 지원자를 면접에서 탈락시키는 등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놈의 유니폼: 취업 시장은 여전히 좁았다. 2집단 여성 대졸자 상당수가 교직으로 향했는데, 일반 기업의 채용 문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는 여행원 제도로 여성의 급여와 승진을 차별했다. 이인경 CFO는 대졸 여성도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국내 금융기관의 관행에 자존심이 상해 외국계 회사를 목표로 삼았다. 한 대기업에서는 박사 학위를 가진 여성 사원에게 유니폼을 입힐지를 두고 관리직들이 한 달간 회의를 벌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전히 결혼과 출산은 필수: 결혼과 출산은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박정숙 씨는 서른이 되기 전까지 직장에서 결혼 언제 하느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육아 환경은 열악했다. 박정숙 씨는 직장 어린이집의 필요성을 노조에 제안했으나, 아이를 직장에 데려올 수 없다는 차가운 반응만 돌아왔다. 신한미 판사는 임신한 배석판사를 자기 재판부에 받지 않으려는 부장판사들이 큰소리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사내 부부 중 여성에게 먼저 퇴사를 종용하는 등 여성은 구조조정의 우선 타깃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단한 줄타기 속에서도 2집단 여성들은 어렵게 들어온 직장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고단한 줄타기: 신한미 판사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에 만족했지만, 자영업자였던 김재련 변호사는 출산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김 변호사는 유학을 계획하던 중 세쌍둥이를 임신했는데, 남편만 유학을 떠난 상태에서 홀로 아이들을 낳았다. 퇴원비도 직접 지불했고, 아이들이 인큐베이터에 있어 산후조리원 입소마저 거절당하자 일주일 만에 사무실로 복귀했다. 임신 중 줄어든 수입과 사무실 운영비, 남편의 생활비로 늘어난 빚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공무원 생활도 했으나 아이들 학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택시로 질주해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자기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개업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김별아 작가 역시 무명 프리랜서 시절 생계를 위해 대필 등 온갖 글쓰기를 하며 아이를 키웠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음에도, 어린 시절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느꼈던 결핍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딱 18개월간 커리어를 중단하고 아이를 직접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단함 속에서도 커리어는 사회적 가치를 실감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은행원 강은주는 주말에 텃밭을 가꾸면 아줌마로 불리지만 주중에는 팀장님으로 불리는 점에 만족감을 표했다. 김재련 변호사는 남성들이 휴가나 명절에 책을 읽고 소셜 미디어에 올릴 때, 여성들은 아이들의 수영복을 빨고 모래를 터느라 여유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경제적 독립이 가정 내 권력관계와 이혼 결정에 핵심적인 자유를 준다고 강조했다.

예순 즈음에: 현재 50대에 접어든 이들 2집단은 은퇴를 앞두고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부양하는 낀 세대의 고충을 겪고 있다. 국민연금 등 노후 대비는 미흡하고 정년 연장 논의는 자녀 세대와의 이해관계 충돌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녀가 있는 부모이기에 미래 세대의 입장을 함께 고민하며 정치적 양보를 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으로서 길을 개척해 온 이들의 에너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장 경력 단절의 시작: 3집단(1975~1984년생)



IMF 외환위기가 전공 선택에 미친 영향: 1975년생을 필두로 한 3집단은 스스로를 저주받은 세대라 부른다.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바뀌고 방위 제도가 폐지된 것에 이어, 졸업을 앞두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에게 외환위기가 성차별적 경험이었다면, 3집단에게는 전공 선택과 진로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들은 졸업 후 취직이 잘 되는 전공을 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과학고를 다니며 과학자를 꿈꿨던 문여정 전무의 사례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과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외환위기 여파로 동료들이 정리해고되고 연구비가 삭감되는 것을 지켜본 뒤, 딸에게 공대 대신 전문직인 의대 진학을 강권했다. 당시 과학고에서 의대 진학은 매우 이례적이었으나, 문 전무의 동기 90명 중 12명이 의대에 갔고 이후 의전원 등을 합치면 33명에 달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리교육학을 전공한 장은영 씨 역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사범대학의 인기가 급상승했던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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