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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던컨 웰던 지음 | 윌북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던컨 웰던 지음

윌북 / 2026년 2월 / 360쪽 / 24,800원





칭기즈칸: 산업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세계화의 아버지 1162~1227


칭기즈칸은 일찍이 인류가 본 적 없는 거대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남긴 유산은 전쟁사나 정치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유라시아를 정치적·경제적으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세계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산업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몽골제국을 이해하려면 유라시아 대초원의 성격과 사회조직, 그에 따른 경제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유라시아 대초원은 다뉴브강 하구에서 태평양까지, 현재의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헝가리에서 중국까지 8,000킬로미터에 걸쳐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게 뻗은 초원으로, 초원의 토양과 기후는 대규모 농업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은 서쪽 끝의 유럽과 동쪽 끝의 중국, 남쪽의 중동에 몰려 있었다. 이 지역들은 농업 생산량을 높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에 유리했다. 서유라시아에서는 곡물의 대량 재배를, 동유라시아에서는 쌀농사를 기반으로 농업혁명이 일어났지만, 대초원에서는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정착민 공동체들은 크고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 그중 일부는 점차 도시로 발전해갔지만, 칭기즈칸이 태어날 무렵 대초원의 사회조직은 2000~300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유목 공동체를 이루어 사냥과 가축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렇듯 대초원은 서유라시아나 동유라시아와 생산 기반이 전혀 다른 만큼 사회조직의 형태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냥과 방목으로는 정착 농업만큼 많은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며, 잉여생산물이 적으면 유럽이나 중국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대규모 엘리트 집단이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대초원의 사회는 계층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엘리트 집단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물론 부족에는 지도자가 있었으며 그들은 평범한 유목민이나 사냥꾼보다는 나은 생활을 했지만 큰 차이가 없었다.

대초원 사회의 성격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외부와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초원의 부족들은 오랫동안 주변 지역과 교류해왔다. 경우에 따라서 무역의 형태로 유목민들은 동물의 고기와 가죽을 정착 농업 사회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나 공산품과 교환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필요한 것을 교환하기보다는 빼앗는 쪽을 택하기도 했다. 대초원의 부족들은 약탈을 통해서든 교환을 통해서든 간에 늘 주변의 정착 사회가 생산한 재화를 얻기를 원했다.

훗날 역사에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테무친은 1150년대 말이나 1160년대 초에 이와 같은 대초원의 세계에 태어났다. 테무친은 족장의 아들이자 존경받는 전쟁 지도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의 가족은 부족에서 쫓겨나 대초원에 버려졌다. 이후 20여 년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한동안 중국 금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1190년대 중반부터 뚜렷해진다. 이 무렵 테무친은 대초원으로 돌아와 전사 집단을 이끌었고 1200년대 초에는 대초원 동쪽 지역을 제패했으며, 1206년경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칭기즈칸은 몽골족을 통일한 지 불과 20년 만에 중국 북부를 정복했으며,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14세기 초에 이르러 칭기즈칸의 후계자들은 동서로는 오늘날의 중국과 헝가리, 남쪽으로는 이란과 이라크, 터키,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발트해 연안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물음을 던진다. 몽골 군대는 무슨 수로 그토록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을까?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은 어떻게 흩어져 있던 유목 부족들을 하나로 묶어 세계를 정복한 대제국을 세웠을까? 두 물음의 답은 사실상 하나다. 칭기즈칸과 후계자들은 유인을 활용하는 법을 잘 알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제도를 세워 발전시켜나갔다.

몽골족의 전쟁 기술과 대초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이었다. 몽골족은 어릴 적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며, 매일 수 시간씩 안장 위에서 생활했고 그들의 기마술은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났다. 게다가 몽골족이 보유한 말의 수 또한 어마어마했다. 1206년 테무친이 칭기즈칸으로 즉위할 당시, 그가 다스리던 영토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했으며, 말은 무려 500만 마리에 이르렀다. 1300년경 몽골제국이 보유한 말은 약 1,000만 마리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지구상에 있던 말의 절반 수준이었다.

뛰어난 기마술은 몽골군이 대체로 전장에서 전술상의 우위를 점하고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병사들이 언제든 새로운 말로 갈아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몽골 병사들은 한 사람당 많게는 20마리의 말을 데리고 다녔고, 그 덕분에 몽골군은 적들이 하루에 겨우 15킬로미터쯤 이동할 때 80~100킬로미터씩 진군할 수 있었다. 몽골군 병사 대다수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도 빠르고 정확하게 활을 쏘는 기마 궁수였다. 그들은 우월한 속도와 기동력으로 적이 우왕좌왕할 때까지 화살을 퍼부은 다음 적에게 돌격해 마무리를 지었다.

칭기즈칸은 분명 전쟁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전쟁보다도 조직을 만드는 일에 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거대한 제국을 정치적으로 통합시켰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확고한 능력주의자였다. 그가 세운 제국에서는 재능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한 누구나 출세할 수 있었다.

몽골에 정복당한 민족들은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꼭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야 했지만, 조공을 중단하지 않는 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조공을 바치는 동안 토착 군주와 주교들이 통치 권력을 유지했으며 종교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시기 몽골의 지배를 가리켜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부른다. 반면에 중국과 이란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제국이 통치했다.

몽골제국의 지배자들은 피지배 민족의 지식과 기술에 보기 드물 정도로 열려 있었으며, 이를 실용적인 방식으로 조합해낼 줄 알았다. 날짜를 정하는 것 같은 단순한 문제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8,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에는 달력 체계가 다른 수십 개의 민족이 살았으므로 제국은 행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각지에서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역법 연구 기관을 세우고 여러 달력의 날짜를 비교할 수 있는 대응표를 만든 다음, 중국의 인쇄 기술을 활용해 이를 대량으로 인쇄·배포했다.

그러나 몽골의 정복 과정과 이후의 통치는 때로 매우 잔혹했다. 13세기 초 몽골이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는 2,000만~4,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중국 인구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 몽골제국의 법전을 살펴보면 사형이 놀라우리만큼 자주 언급되며, 단순한 절도범조차 사형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향신료, 농산물, 귀금속 같은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도 전리품으로서 노예가 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장인, 의사, 천문학자, 수학자, 통역사 등 유용한 기술을 지닌 사람들을 붙잡아 제국 전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쿠빌라이 칸이 재위한 시기에 몽골제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흉작이나 자연재해에 대비한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명받았다. 이는 그가 살던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제도였다.

몽골의 지배는 분명 가혹했지만, 사회보장 제도 외에도 긍정적인 면은 또 있었다. 몽골제국의 통치자들은 공공질서와 치안을 중시했다. 그들은 무역로에 기마 순찰대를 배치하고 도난당한 물품을 돌려주도록 하는 법 조항을 마련하는가 하면, 실크로드를 오가는 교역품을 대상으로 일종의 분실물 보관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이 유라시아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결과, 이 지역의 경제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250년부터 1350년까지의 100여 년 동안은 중국과 유럽을 안전하게 오갈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도 부른다.

몽골제국은 제국 내의 소통을 원활히 하고 통치와 협력을 강화하고자 ‘얌’이라는 역참 제도를 도입해 제국 전역에 30~50킬로미터 간격마다 역참을 설치했다. 역참에는 늘 새 말이 준비되어 있어 전령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며 중간중간 말을 갈아탈 수 있었으며, 제국은 1300년대 무렵부터 상인들에게도 역참을 개방했다. 몽골은 제국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통 화폐도 발행했다. 이에 따라 제국에서는 중국식 지폐가 널리 쓰였고, 지폐를 거부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여기에 더해 몽골은 도량형을 표준화함으로써 무역을 더욱 촉진하고자 했다.

몽골제국은 치안과 기반 시설을 강화하고 무역을 장려함으로써 최초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다. 1340년대 초에 쓰인 피렌체의 한 무역 지침서는 크림반도에서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가 “밤이건 낮이건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다”고 평했다. 또한 몽골제국 말기에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현물이 아니라 은화로 조공을 바쳤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는 시골 마을들도 은화를 마련하기 위해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팍스 몽골리카의 혜택이 제국 구석구석까지 퍼졌음을 보여준다.

당시 2년에 달하는 시간을 들여 유럽과 중국을 오간 사람은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었다. 13~14세기에 장거리 무역으로 큰 부를 얻은 경험은 이후 유럽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거리 무역의 결과 유럽에서는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고, 그들이 가진 자본의 규모도 커졌다. 이 시기 몽골제국이 무역에 호황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훗날 바스쿠 다 가마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같은 인물들이 항해를 떠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무역로를 따라 유라시아를 오간 것은 상품만이 아니었다. 지식과 기술도 양방향으로 흘러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의사들은 중동에서 처음 실용화된 외과 수술 기법을 배웠고, 중동의 의사들은 중국에서 발전한 약리학을 배웠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도 이때 유럽으로 전해졌다.

중세 유럽은 무역의 발전으로 이익을 보았지만, 쉽게 정복당할 만큼 가깝지는 않았기에 제국의 조공 체제에 편입되지 않았다. 몽골군은 1220~1240년대에 유럽으로 진격했고 오늘날의 독일 지역까지 소규모 정찰 부대를 파견했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몽골제국은 유럽인들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유럽 전체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유럽은 몽골제국의 중심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헝가리에서 전투를 벌인 군대는 이미 보급선의 끝자락에 있었으며, 그보다 더 서쪽으로 가면 기마 전술에 불리한 지형이 펼쳐졌다.

팍스 몽골리카가 지역마다 다르게 미친 영향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유라시아 서쪽, 특히 유럽은 해외에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한 덕분에 경제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바깥 세계에 열린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반면에 중국은 몽골의 지배로 국력이 쇠퇴했으며, 자연스럽게 외부 세력을 향한 경계심이 강해졌다.

칭기즈칸은 최초로 세계화 시대를 열었고, 이후 수백 년간 유럽과 중국 경제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게다가 칭기즈칸은 세계 경제가 도약을 이룬 결정적 사건인 산업혁명에도 뜻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유라시아를 오간 것은 상품과 사람, 지식과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는 질병도 섞여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흑사병이라 부르는 전염병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서 크림반도로 퍼졌고, 이곳에서 제노바의 배를 타고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1348년부터 1351년까지 전체 인구 8,000만 명 중 2,500만 명가량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유럽 사회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면서 유럽 전역이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협상력이 강해지고 임금이 높아졌으며, 유럽인들은 인건비 상승에 대응하고자 자본으로 노동력을 대체할 방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몇백 년 뒤 우리가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신대륙 정복: 황금이 국가를 가난하게 만든다? 1492~1598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다스렸다고 말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1556년 스페인 국왕의 자리에 올랐고, 동시에 포르투갈, 나폴리, 시칠리아의 국왕이었으며, 1554년부터 1558년까지는 메리 1세와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의 왕좌에도 앉았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 왕이 되기 전부터 밀라노공국과 네덜란드의 17개 주를 통치하고 있었다. 또한 펠리페는 선왕이 시작한 중앙아메리카 정복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또 스페인군은 1565년 멕시코에서 원정을 떠나 태평양 너머에 있는 한 군도를 정복했는데, 그들은 펠리페 2세를 기리고자 이곳에 펠리피나스(Felipinas; 오늘날의 필리핀)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몇몇 식민지까지 더하면 펠리페 2세는 5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통치한 셈이었다.

이 제국의 상당 부분은 유럽 왕실에서 일어난 우연으로 만들어졌다. 펠리페의 아버지 카를은 몇 가지 예기치 못한 사건과 다른 상속자들의 때 이른 죽음 덕분에 친가와 외가 양쪽으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훗날 카를 5세로 불린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러 분파가 다스리던 유럽의 영토를 하나로 통합했다. 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물려받아 신생 통일 국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었으며, 동시에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다. 16세기 전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처럼 탄탄한 지위를 바탕으로 유럽의 패권을 노렸고, 그 시도는 펠리페 2세 시대까지 이어졌다.

1550년대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며,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은 펠리페 2세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스페인의 1인당 소득은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보다 높았다. 1550년대가 한 세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펠리페 2세가 유럽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번영한 지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 너머의 새로운 영토와 그곳에서 발견된 은광들까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스페인 왕실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신대륙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는 1492년에 신대륙을 ‘발견’했으며, 스페인은 이듬해인 1493년부터 곧장 신대륙 정복에 나섰다. 1490년대부터 1500년대 초까지 스페인은 카리브해의 섬들을 정복했는데, 정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만큼 별다른 이득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로 진출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스페인인들은 카리브제도에 흩어져 있던 부족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마주했다. 바로 아즈텍과 잉카의 제국과 도시들이었다. 이들을 상대로 한 전쟁은 정복 초기 20년 동안 벌어진 전투보다 훨씬 규모가 컸지만, 정복 방식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스페인의 소규모 병력은 다른 원주민 집단과 동맹을 맺고 현지의 지배 세력에 맞섰다.

스페인의 정복 과정은 분명 경이롭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들은 고작 3,000여 명의 병력으로 1519년부터 1521년까지 2년 만에 이론상 3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아즈텍왕국을 정복했다. 10년 뒤에는 또 다른 스페인 병사 3,000명이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잉카제국을 정복했다. 하지만 화약 무기는 이 과정에서 생각만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의 화기는 장전 속도가 느리고 명중률이 형편없었으며, 기껏해야 큰 소리와 연기로 적을 놀라게 하는 데에나 효과가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구식 무기인 쇠뇌와, 원주민의 무기로는 뚫기 힘들었던 강철 갑옷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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