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전하는 철학들
송정섭 지음 | 소용
식물이 전하는 철학들
송정섭 지음
소용 / 2026년 4월 / 240쪽 / 17,000원
1장. 식물의 성찰
스피노자처럼 인생의 싹을 틔우는 법꽃담원의 아침은 깊은 정적 속에서 시작된다.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정원 한구석에 앉아 파종을 준비할 때, 손바닥 위에 놓인 씨앗들은 마치 작은 돌멩이처럼 딱딱하고 무심하다. 이 작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장차 거대한 나무가 되고 화려한 꽃을 피울 생명의 설계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완강한 적막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묘한 경외심과 함께 의구심을 느낀다. 이 먼지보다 조금 큰 존재들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파종을 위해 흙을 고르는 나의 손길은 분주하지만, 정작 생명의 주인공인 씨앗은 아무런 기척이 없다.
나는 식물 연구자 시절, 우리 땅에서 자라는 자생식물의 씨앗을 수확해서 싹을 틔우는 종자 발아 실험을 수없이 반복했다. 당시에는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씨앗의 행위를 생존을 향한 치열한 본능이자, 죽음을 이겨내려는 위대한 의지라고 굳게 믿었다. 현미경 아래서 관찰되는 발아의 순간은 마치 한 편의 전쟁 드라마처럼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수백 번, 수천 번의 파종 실험을 거듭하며 데이터가 쌓일수록 마주한 진실은 달랐다. 씨앗은 결코 싹을 틔우겠노라고 스스로 결심하거나,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 밖으로 밀고 나오지 않았다.
식물학적으로 씨앗의 발아는 내부의 주관적인 의지가 아니라 외부 환경이 건네는 정중한 ‘허락’에 가깝다. 종자 내부에는 발아를 억제하는 호르몬인 앱시스산(ABA)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이 빗장을 풀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과 온도 그리고 산소라는 세 가지 조건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씨앗의 심장을 두드려야만 한다. 외부의 습기가 껍질을 적시고 적정한 온도가 세포를 깨울 때, 비로소 생명의 기제 호르몬이 활성화되며 잠들었던 배(Embryo)가 기지개를 켠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씨앗이 스스로 온 힘을 모아 싹을 틔우는 일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발아는 씨앗의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환경과 씨앗이 주고받는 정교한 화학적 응답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Conatus)’를 떠올린다. 스피노자는 모든 사물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관성을 지닌다고 말했지만, 그 관성은 결코 고립된 의지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씨앗의 코나투스는 토양과 태양이라는 타자(他者)와의 마주침 속에서만 비로소 기쁨의 상태, 즉 발아로 나아간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일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는 과정인 것이다. 만약 씨앗이 환경의 허락 없이 홀로 싹을 틔우려 고집을 부렸다면, 그것은 생존이 아니라 자살 행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하면 된다’라는 의지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살아왔다. 특히 인생 2막을 준비하거나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열정’과 ‘도전’을 강요한다. 내면에 불꽃만 있다면 사막 한가운데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무책임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정원을 가꾸며 배운 진리는 다르다. 열정은 생명을 순환시키는 에너지일 뿐 씨앗을 품어줄 토양이 아니다. 만약 당신의 삶에서 씨앗이 아직 발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지가 부족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아직 당신의 계절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이 싹을 틔우기에 부적절한 땅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씨앗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은 토양이 차가우면 깊이 잠들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묵묵히 기다린다. 발아는 내가 억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내가 정답게 마주할 때 비로소 당하는 경이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파종의 순간, 나는 내 손바닥 위의 씨앗들에게 속삭인다.
“서두르지 마라, 때가 되면 흙이 너를 부를 것이다.”
니체처럼 루틴을 사랑하는 법식물들은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규율가들이다. 매일 아침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잎을 그 방향으로 누이고, 서쪽으로 해가 지면 고요히 잎을 포개며 단잠을 청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지켜보며 나는 가끔 짓궂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너희는 이 지루한 일상이 지겹지도 않니?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지는 않니?”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원을 가득 채운 고요함뿐이다.
여름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반복의 숭고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배롱나무의 줄기들은 매년 허물을 벗듯 수피(나무껍질)가 뒤틀리며 떨어져 나간다.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와 가지가 조금씩 굵어지는 ‘부피 생장’을 하는데, 단단한 껍질이 이 팽창하는 생명력을 견디지 못해 갈라지고 뒤틀리며 스스로 몸을 낮춘다. 남들에겐 그저 매끈하고 아름다운 흰무늬로만 보이겠지만, 정원사의 눈에는 매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반복한 뒤틀림의 루틴이 보인다. 배롱나무는 지루하고도 치열하게 반복한 덕분에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나무로 거듭난다.
사람에게 생체리듬이 있듯이, 식물에게도 일주기 리듬이 있다. 일주기 리듬은 24시간 주기로 나타나는 생체 시계이다. 어떤 연구자가 밝힌 흥미로운 실험 중 하나는,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완전히 폐쇄된 암흑 창고에 식물을 가두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식물은 외부의 빛이 전혀 없음에도 제시간이 되면 정확히 잎을 벌리고 닫으며 반응했다. 이것은 단순히 몸에 밴 습관이 아닌 생존을 위해 수억 년간 각인된 치열한 생존의 리듬이다. 에너지를 언제 비축하고 언제 폭발적으로 쏟아낼지 결정하는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식물은 성장하는 법을 잊고 급격히 시들어버리고 만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가혹하면서도 장엄한 개념을 우리 앞에 던졌다. 만약 당신의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 삶을 기꺼이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냐는 뼈아픈 질문이다.
인간은 반복을 성장의 정체나 창의성을 가로막는 굴레로 여기는 반면, 식물은 반복을 존재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뼈대로 여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는 힘, 그 권태로워 보이는 질서를 정직하게 통과한 식물만이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꽃을 피워낼 자격을 얻는다. 식물에게 루틴은 감옥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개화를 준비하는 기초 체력인 셈이다.
우리는 늘 새로운 자극과 파격적인 변화를 갈구하며,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하찮게 여기거나 지루해하곤 한다. 하지만 일상의 리듬을 잃어버린 영혼은 작은 시련에도 유리처럼 쉽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특히 은퇴자들이 마주하는 극심한 공허함이 대표적이다. 자신을 지탱하던 ‘사회적 시계’가 갑자기 멈췄을 때 극심한 상실감을 경험한다. 하지만 식물처럼 자기 안에 자율적인 생체 시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해진 출근 시간과 업무라는 타율적인 질서가 사라졌을 때 쓰러지지 않는다. 또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작은 반복들이 모여 거대한 삶의 밀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식물의 아침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어제와 다름없이 잎을 펼치는 성실한 반복으로 시작된다. 그 지루한 싸움에서 승리한 나무만이 폭풍우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우뚝 선다.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은 파격적인 순간이 아니라 당신이 매일 정성스럽게 반복하는 그 사소한 동작들 속에 숨어 있다.
2장. 식물의 조화
프로스트처럼 경계를 존중하는 법정원을 일구며 내가 가장 먼저 공을 들인 일은 간단한 담장을 세우고 안과 밖의 경계를 짓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정원’이라고 하면 사방으로 탁 트인 무한한 자유의 공간을 떠올리지만, 사실 정원을 정원답게 만드는 본질은 그 안에 심긴 화려한 꽃들이 아니라 외부의 소란으로부터 생명을 분리해 내는 단호한 ‘선(Line)’에 있다. 바로, 담장이다. 담장은 안쪽의 연약한 생명들을 지켜내는 든든한 울타리인 동시에 그 안의 식물들이 제멋대로 영역을 이탈하지 못하게 다스리는 구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이중적인 성격이야말로 정원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우리 정원의 이름인 ‘꽃담원’에는 내가 평생을 바쳐 길어올린 세 가지 뜻이 서려 있다. 첫째는 ‘꽃과 말하다(談)’라는 의미의 꽃담이다. 이곳은 단순히 식물을 구경하는 장소가 아닌 꽃의 생애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을 찾아내고 대화하는 담화(談話)의 장이다. 둘째는 ‘꽃을 담은 정원’이라는 뜻이다. 꽃담원은 자연에서 있어야 할 300여 종의 귀한 생명들을 품고 있는 작은 그릇이다. 마지막으로는 실제 입구에 자리한 고아한 담벼락이나 꽃으로 엮은 울타리처럼 꽃이 있는 담장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꽃담원은 소통이자 그릇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경계인 셈이다.
식물들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경계를 지키려는 소리 없는 경쟁은 상상 이상으로 처절하다. 식물들은 뿌리 끝에서 특수한 화학 물질을 내뿜어 자신의 영역을 무단 침범하는 이웃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거나 씨앗의 발아를 막는 ‘타감작용(Allelopathy)’을 펼친다. 언뜻 보기엔 타자를 배척하는 이기적인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가 서로의 적절한 거리를 지켜줌으로써 각자의 고유한 형태와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최소한의 생태적 예의다. 경계가 무너진 숲은 정원이 아니라 무법천지인 정글이 되고, 칡덩굴 같은 무법자들의 천지가 되어 어느 식물도 온전한 제 모양대로 자라날 수 없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시 <담장을 고치며>에서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고 나직이 읊조렸다. 이웃 간의 진정한 우애란 무조건 담을 허무는 사이가 아닌 서로의 독립된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선을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통찰이다. 동양의 성인 공자 역시 ‘예(禮)’의 핵심을 ‘경(敬)’, 즉 상대를 귀하게 여기되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적절한 거리를 두는 태도에서 찾았다.
우리 삶의 불행은 대개 서로가 너무 멀어서가 아니라 경계를 잃고 사랑이나 친밀함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내면을 함부로 짓밟는 ‘무례’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아무런 구속이 없는 절대적 자유를 갈구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나를 억압하는 무거운 굴레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타인과의 부딪힘도 없는 진공상태에서는, 존재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져버린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은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건강한 마찰, 보이지 않는 경계선 위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정의된다. 특히 나이를 먹고 사회적 관계망이 급격히 재편되는 시기에 느껴야 할 감정은 상실감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나다운 삶을 정의해줄 ‘새로운 담장’을 내 손으로 직접 설계할 황금 같은 기회다.
꽃담원의 담장은 닫혀 있으나 열려 있고, 가로막고 있으나 소통하고 있다. 담장이 있기에 꽃은 안심하고 피어나고, 담장이 있기에 우리는 그 너머의 그리움을 배운다. 당신의 영혼을 지켜줄 당신만의 담장은 지금 안녕한지 묻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마음의 평화를 살피는 법정원에서 시들어가는 식물을 마주할 때, 정원사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그 꽃을 가엽게 여기는 감상적인 마음이 아니다. 잎이 말라가는 장미에게 “조금만 더 힘내, 곧 다시 피어날 거야”라는 응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련한 정원사는 다정한 말 대신 즉시 식물에 물을 듬뿍 주고, 따가운 햇볕을 가릴 그늘을 만들어주며, 흙 속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주변을 살핀다. 식물의 시듦은 결코 생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물을 둘러싼 ‘환경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신속하게 조건을 바꿔주면, 금세 죽을 것 같던 잎사귀들은 놀라운 속도로 생기를 되찾으며 다시 꼿꼿이 일어선다.
환경이 생명을 어떻게 극적으로 뒤바꾸는지 꽃담원의 ‘백리향(百里香)’을 보며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다. 백리향은 향기가 백 리를 간다고 할 만큼 진하고, 바닥을 초록 융단처럼 덮으며 벌들을 불러 모아 정원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보배로운 존재다. 처음 정원을 일굴 때, 온실 건너편 동쪽 측백나무 앞 허브 정원에 백리향 서른 포기를 정성껏 심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만 겨우 지키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저 ‘이 땅의 기운이 여기까지인가?’ 하고 넘겼다.
하지만 아내가 백리향 몇 포기를 떼어 거실 앞, 온종일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는 곳으로 옮기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 작은 포기들이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가 지금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군락을 이루었고, 매년 4월 말이면 그 보랏빛 꽃들의 향연이 장관을 이룬다. 식물에게 환경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새삼 깊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식물은 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오직 조건에 의해서만 이토록 정직하게 반응할까? 그 해답은 식물의 세포를 지탱하는 물리적 힘에 있다. 식물학적으로 식물이 고개를 단단히 들고 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은 ‘팽압’이라 불리는 압력이다. 팽압은 세포 속에 물이 가득 차올라 안에서 밖으로 세포벽을 밀어내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이 충분해야만 줄기는 비로소 형체를 유지할 수 있다. 토양에 물이 부족해져 팽압이 낮아지면 식물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것은 식물의 나태함이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존재를 지탱하는 꼿꼿함은 내면의 숭고한 결심보다 나를 채우고 나를 둘러싼 물리적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적절한 압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생명체의 원리는 인간의 고결한 정신을 논하는 철학의 영역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Eudaimonia)’을 논하며 외적인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무리 고결한 정신을 갖춘 성인이라 할지라도, 극심한 가난이나 고독 또는 신체적인 고통 속에 놓여 있다면 결코 온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역시 인간의 불행을 개인의 심리적인 나약함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풍토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개인을 옥죄는 불행의 근원인 구조적 조건을 먼저 개선하지 않은 채 마음의 평화만을 강조한다면 기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가 타인의 아픔이나 자신의 무력감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훈련’이 아니라 ‘환경의 재건’이다. 우리는 우울함의 늪에 빠졌거나 무력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너무나 쉽게 “마음을 좀 더 강하게 먹어라”, “의지로 이겨내라”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는 물기 하나 없는 마른 흙에 뿌리를 내린 식물에게 제힘으로 꼿꼿이 서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행동과 다름없다.
내가 머무는 방의 쾌적한 온도,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말씨, 내가 딛고 선 견고한 경제적 토양이야말로 나를 바로 세운다. 추상적인 의지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복은 나를 무너뜨린 생존의 조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설계하는 치열한 과정이다.
꽃담원의 백리향이 햇볕과 바람을 만나 비로소 만개했듯, 우리 역시 나를 숨 쉬게 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야 한다. 자책하기 전에 내가 서 있는 흙이 너무 메마르지는 않았는지, 나를 가린 그늘이 너무 짙지는 않은지 먼저 주변 환경을 잘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3장. 식물의 균형
장자처럼 균형을 이루는 법연구자 시절, 나는 통제된 실험실의 온실 안에서 특정 식물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성장치를 정교하게 측정하곤 했다. 영양분이 넘쳐나고 경쟁자가 거세된 조건에서 식물들은 기형이라 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정원을 가꾸면서부터는 식물에게 전혀 다른 배움을 얻었다. 야생의 거친 흙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식물은 가장 크고 강한 존재가 아니라, 그 땅의 습도와 바람의 방향에 가장 적합하게 자신의 몸을 낮춘 존재였다. 이러한 생존의 묘미는 정원의 양분 관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