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 -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1. 꿈은 소원 성취다
전통적으로 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먼저 꿈은 일상의 굴레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창조적이고 자유분방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꿈에는 현실의 논리를 뛰어넘는 창조와 예언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꿈이 갖는 이런 마력과 생명력을 존중했다. 꿈에는 모종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꿈은 아무런 일관성도 객관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지리멸렬한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상당수의 의사들은 꿈의 심리적 활동을 사소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꿈의 심리적 능력을 경시하면서 신체적 자극이 꿈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꿈을 연구했다. 꿈을 꾸게 만드는 심리적 자극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꿈에 예언력이 있다는 말은 틀렸지만 꿈이 단편적인 두뇌 활동이며 무의미하다는 말도 거짓이다. 물질적이고 생리적인 원인과는 엄연히 다른 심리적 역할이 꿈에는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서는 꿈에는 의미가 있다고 예로부터 믿어온 대중들의 생각이 고루한 학자들의 견해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가령 ‘편지’는 ‘불쾌감’으로, ‘장례식’은 ‘약혼’ 등으로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해몽서’식의 꿈풀이는 보편성이 없다.
꿈은 많은 생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주자의 손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받고 제멋대로 울리는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하자면 소원의 성취다. 간단한 예로 젊은 시절 나는 늦게까지 일을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면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잠시 후에는 아직 잠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사이 조금 더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건 아이의 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배를 타고 아름다운 호수를 건넜는데 너무 아쉬워서 배에서 내리지 않으려던 내 딸아이는 다음날 어젯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리스 전설에 심취한 내 맏아들은 아킬레스와 함께 마차를 타는 꿈을 꿨다.
꿈이 소원의 성취라는 내 주장에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쫓기는 꿈, 처벌당하는 꿈, 고통을 겪는 꿈 등 편한 꿈보다는 불쾌한 꿈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른이 꾸는 꿈은 특히 그런 내용이 많다. 게다가 꿈은 두서없고 부조리하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일 때가 많다. 이런 꿈이 어떻게 소원 성취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꿈의 의미가 아니다. 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심층에 자리한 꿈의 사고를 은폐하고 있다. 꿈의 내용은 꿈의 사고가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은폐하는가? 왜 위장이 필요한가? 내부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꿈은 소원을 왜곡시킨다
꿈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겉으로 드러난 ‘꿈내용’이 있고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은폐된 ‘꿈사고’가 있다. 전문어로는 각각 ‘외현몽’과 ‘잠재몽’이라고 한다. 꿈사고는 본심이지만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꿈내용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만 우리는 꿈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은 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됐을까? 우리 마음 속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개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소원을 성취하려는 힘이 있고 또 한쪽에는 그것을 누르려는 힘이 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관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된다. 관리가 진실을 솔직하게 밝히면 권력자는 관리의 발언을 억압할 것이다. 관리는 검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연히 자신의 생각을 완화하고 왜곡한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암시와 위장과 은폐에 의존해야 한다. 검열이 엄격할수록 위장의 범위는 넓어지고 원래 말하려는 의미를 종잡기 어렵게 된다. 꿈은 두 힘의 타협의 산물이다. 자신을 위장해 검열을 통과한 꿈사고만이 꿈내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서 실제로 내가 꾼 간단한 꿈의 일부를 소개한다. ‘...친구 R이 내 삼촌이다. 나는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내 환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 배후에 뭔가 불쾌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내적 저항을 극복하고 분석을 시도했다. 내 삼촌은 중죄를 저질러 징역을 산 일이 있다. 아버지는 삼촌이 사람은 착하지만 생각이 모자란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R이 삼촌이라면 나는 R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R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나는 왜 R과 삼촌을 연관지었을까? 그때 며칠 전 다른 친구 N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R도 N도 나도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친구였지만 경쟁자였다. N은 나에게 자신의 교수 임용이 자꾸 지연되는 이유를 알아보니 예전에 어떤 여자한테 억울하게 고발당한 일 때문이었다며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으니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R과 N의 교수 임용이 지연되는 것이 유대계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나 역시 유대인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라면 나는 괜찮다. 꿈 속에서 삼촌은 내 두 친구를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나는 범죄자로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 사람의 유대인이라는 공통성이 소멸되고 나는 안심하고 교수 임용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애정을 느꼈을까? 나는 삼촌에게 한 번도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편 R을 좋아하긴 하지만 꿈 속의 애정은 분명 과장돼 있다.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꿈 속에서 내가 느낀 애정은 꿈사고를 은페하는 구실을 한다. 꿈해석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내 꿈사고는 R을 어리석다고 비방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애정이 이입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불쾌한 꿈들이 모두 소원 성취라는 사실도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명쾌히 설명된다. 많은 환자들이 자 이래도 꿈이 소원 성취라고 우기겠느냐면서 나에게 들려준 꿈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마다 패소하는 꿈을 꾸는 변호사,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꿈을 꾸는 며느리의 꿈에서 나는 내 말이 틀리기를 원하는 그들의 강한 소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그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꿈이 소원 성취라는 말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사람은 부모나 형제가 죽어서 슬퍼하는 꿈을 꾼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로 가족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소원은 반드시 그 사람이 지금 품은 소원이 아니어도 된다. 어린 시절에 적어도 한 번은 품었던 소원이기만 하면 된다. 소원은 망각될 수는 있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상심할 사람이 옛날에 나쁜 소원을 품었던 적이 있으면 이 소원이 꿈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지낸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아이는 동생이 태어나면 십중팔구 질투한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예상되는 불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안다.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가 죽는 꿈을 꿀 때는 대개 자기와 성이 같은 쪽이 죽는 꿈을 꾼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는 꿈을 꾸고 딸은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이것은 어린 시절 경쟁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불가피한 운명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모든 남자아이가 한번쯤 꿈꿔본 모습이다. 반면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끌리며 엄마를 경쟁자로 여긴다.
혈연이 죽는 꿈은 어떻게 검열을 피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부모가 죽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검열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법에 아버지 살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어서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것이다. 둘째 낮에 소중한 사람을 염려했을 수 있다. 이 염려는 앞서 말한 소원을 등에 업고 꿈에 들어오며, 한편 소원은 염려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낮에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 걱정의 연장선에서 밤에도 꿈을 꾼 거라고 여긴다.
3. 꿈은 어디서 재료를 가져오나
꿈을 분석하는 실마리는 예외없이 그 날 겪었던 일, 만났던 사람, 나눴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 가치를 거의 갖지 않는 사소한 요소들이다. 그럼 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사소한 요소가 꿈에 등장하는 것일까? 이것은 검열 때문이다. 우리 무의식 속에는 강한 소원을 담고 있는 체험들이 들어 있다. 이 소원은 겉으로 표출되고 싶어하지만 원래의 체험과 함께 나타나면 검열에 걸린다. 그래서 낮에 경험한 사소한 사건과 결합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 억눌린 소원은 어린 시절에서 유래하는 것이 많다. 친구 R에 대한 꿈으로 돌아가자.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교수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얻기 위해 환장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꿈에 등장한 내 공명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태어났을 때 이웃집 할머니가 큰 인물이 태어났다고 축하해줬다는 얘기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다. 어렸을 때 내 주위에는 유대인이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장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의대로 진학하기 전까지는 법학을 전공할 작정이었다. 내 좌절된 야심은 꿈 속에서 그런 공명심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꿈은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된 정신 현상이 아니라 생리적 자극의 결과라고 말한다. 소화 불량이나 갈증, 성기의 흥분 같은 내부 자극이나 신체 외부로부터 수면 중에 끊임없이 받는 자극이 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슈트륌펠 같은 생리학자는 자극과 꿈내용의 관계를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의 무지막지한 연주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쉐르너 같은 연구자는 신체 자극을 상징화한 것이 꿈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숨을 쉬는 폐는 활활 타오르는 난로, 심장은 빈 상자와 바구니, 방광은 주머니 모양의 물건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꿈의 의미를 단편적으로만 해석하는 꿈해몽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똑같은 자극이 왜 다른 꿈을 만드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신체 자극이 꿈에 전혀 영향을 안 미치는 건 아니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는 꿈을 꾸고 오줌이 마려우면 소변 보는 꿈을 꾼다. 하지만 신체 자극과 꿈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수면 중에도 사람은 자극을 얼마든지 정확히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수면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소원과 가장 잘 부합되는 방향으로 자극을 해석한다. 꿈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어느 날 나는 ‘교황이 죽은’ 꿈을 꿨다. 나는 이 꿈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아내가 오늘 새벽 그 끔찍한 교회 종소리 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꿈은 내 잠을 깨우려는 소음에 대해 내 수면 소원이 나타낸 반응이었다. 나는 교황이 죽는 꿈내용을 가지고 종을 친 교인들에게 복수했으며 종소리와는 무관하게 잠을 계속 잘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대학생은 하숙집 주인이 병원에 가라고 깨우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꿈을 꾸고는 계속 잤다. 잠을 계속 자고 싶다는 소원만큼 강한 소원도 드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꾸는 꿈을 ‘편의꿈’이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꿈은 편의꿈인 셈이다. 꿈은 자극으로부터 수면을 지켜준다. 꿈은 잠의 훼방꾼이 아니라 파수꾼이다.
4. 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꿈은 이중 구조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은폐된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규명해야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형되는지 물어야 한다.
첫째로, 꿈은 ‘압축’된다. 꿈사고는 풍부하고 복잡하지만 꿈내용은 짧고 간결하며 빈약하다. 꿈사고 중에서 대부분은 생략되고 최소한의 내용이 꿈내용으로 등장한다. 꿈내용에 등장하는 요소는 다의적이다. 하나의 꿈요소는 여러 개의 꿈사고와 연결되고 하나의 꿈사고는 여러 개의 꿈요소와 연결된다. 꿈사고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바로 꿈요소다. 그래서 꿈내용에 등장하는 꿈요소들은 여러 개의 꿈사고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성분이다.
앞에서 소개한 삼촌의 꿈에서 내가 본 얼굴은 친구 R의 얼굴이면서 동시에 삼촌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가족의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이 하나의 판으로 여러 얼굴을 찍었던 것과 비슷하다. 공통되는 특징은 부각되고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상쇄돼 흐릿해진다. 꿈에서 나는 A가 내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데 B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 않고 A와 B의 혼합 인물을 만들어내거나 B다운 행동을 하는 A를 묘사한다. 양측의 사소한 특성들로 이뤄진 이런 혼합 인물은 검열에 걸리지 않고 거뜬히 꿈내용에 수용된다. 꿈에서 두 인물의 사소한 공통점이 묘사되는 것은 검열 때문에 묘사할 수 없었던 은폐된 다른 공통점을 찾으라는 암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낯선 복합어가 꿈에 곧잘 나오는데 이것은 압축의 가장 명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꿈에 나오는 내용을 하나의 상징과 일 대 일로 대응시키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이런 압축 작업 때문이다.
둘째로, 꿈은 ‘전위’된다. 꿈사고가 정말로 겨냥하는 대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엉뚱한 대상이 등장한다. 꿈사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꿈내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등장한다. 꿈을 이루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꿈사고에서와는 다르게 처리된다. 하나의 생각이나 경험과 관련된 감정이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나와 다른 생각이나 경험에 붙어버린다.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발로 걷어차는 것은 직장에서 표현될 수 없었던 분노가 엉뚱한 대상을 향해 표출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할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 사건과 분리되는 것이다. 어떤 아가씨는 꿈에서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도 아무런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분석 결과 예전에 장례식에서 본 뒤로 짝사랑을 하게 된 남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원이 그런 꿈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이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결합한다. 그 아가씨는 조카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은폐하기 위해 슬픔을 느낄 필요가 없다. 대신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 뒤에 남자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달라붙는 것이다. 두 인물의 중요한 성격상의 공통점이 아니라 사소한 외모상의 공통점이 엉뚱하게 부각되는 예에서 우리는 ‘전위’가 ‘압축’과 곧잘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로, 꿈은 ‘시각적 묘사’를 선호한다. 같은 값이면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논문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겠다는 내 생각은 내가 나무 토막을 대패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제에 관한 사고의 끈을 놓쳐버렸다는 내 생각은 마지막 몇 줄이 빠져 있는 조판으로 나타난다. 한 여자는 15개월 터울의 두 어린 딸과 길을 걷는 꿈을 꾼다. 이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충격적인 두 사건이 15개월 간격을 두고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구체적 언어는 단선적 논리에 의존해야 하는 추상적 언어보다 풍부한 결합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꿈작업에서 선호되는 듯하다. 마치 시인이 복잡한 사고를 구체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처럼.
물론 많은 사람들의 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상징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공통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는 부모를 상징하고 왕자와 공주가 꿈꾸는 사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동굴이나 난로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면 뱀이나 지팡이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것은 인류의 아득한 원시적 심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내용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꿈꾼 사람이 떠올리는 복잡한 연상들의 그물망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상징 해석은 이것을 보완하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정형화된 상징들만 가지고는 복잡한 꿈작업의 전모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