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주 미술 여행
오그림 지음 | 크레타
세계 일주 미술 여행
오그림 지음
크레타 / 2025년 12월 / 416쪽 / 22,000원
Trip 1 가장 오래된, 가장 위대한 도시_카이로 & 룩소르
파라오에 대한 믿음, 기자 피라미드 & 스핑크스이집트 문명은 크게 ‘선왕조, 초기 왕조,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 후기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나뉩니다. 이제 이집트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고왕조, 신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중심으로 첫 번째 여행지의 문화와 예술을 살펴보겠습니다.
고왕조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피라미드입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즉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이집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방송에서 보게 되는 건 카이로 근교 기자(Giza)의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정치·종교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파라오의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왕이자 신이라 믿었고, 사후 세계에서도 현생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왕이자 신인 그들의 신체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사후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미라를 만들었습니다. 또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현생에서 사용하던 물건들도 넣어 주었죠.
이집트에는 정말 많은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3,000년 동안 30개가 넘는 왕조가 존재했던 나라답게 엄청난 수의 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형태는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기자 피라미드입니다. 기자 피라미드는 무게 2.5톤, 높이 150센티미터의 돌 230만 개를 사용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오늘날까지도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석조 건축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피라미드 앞에는 나무배를 묻어 둔 흔적이 있습니다. 파라오가 사후 세계에 배를 타고 올라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배와 함께 피라미드 앞에 놓였던 것이 바로 스핑크스입니다. 우리나라의 장승 같은 존재로, 파라오의 무덤 앞에서 그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죠.
하지만 이토록 번성했던 피라미드 건설은 고왕조 시대, 제5왕조에 접어들면서 점점 줄어듭니다. 이어진 제6왕조 시기에는 이전 파라오들이 이뤄놓은 번영에 안주해 이집트의 국력이 쇠락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이 들어 나일강 유역의 기근이 500년 정도 지속됐습니다. 결국 고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죠.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국력을 되찾은 이집트는 카이로에서 룩소르로 천도하며 신왕조 시대를 맞이합니다.
이집트 왕조의 클래스, 카르나크 신전: 신왕조 시대에 접어든 이집트는 나일강 하류의 카이로에서 나일강 상류의 룩소르로 천도합니다. 두 도시는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입니다. 룩소르는 서안과 동안으로 나뉩니다. 녹지와 사막이 죽음을 상징하듯 동안에는 파라오가 생전에 지내던 신전이, 서안에는 죽은 그를 위한 무덤이 있는데, 먼저 동안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지금으로부터 3,000~4,000년 전, 실제로 파라오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당시 이집트인들이 숭배했던 신들의 신 아몬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죠. 또 이곳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집트 왕조가 태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 만든 탑, 오벨리스크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신전 입구에는 신전을 지키는 수십 개의 커다란 기둥이 있습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기둥은 둘레만 18미터에 이릅니다. 그렇기에 왕의 신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이집트 왕조의 규모와 막강한 국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Trip 2 한 시대가 남긴 가장 우아한 흔적, 예술이 유산이 된 도시_피렌체
도시 역사의 산증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중심가를 걸어가다 보면 아주 커다란 건축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세례당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이곳은 우리에게 ‘피렌체 두오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두오모는 이탈리아어로 대성당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두오모 앞의 세례당은 피렌체 도심에 자리한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편에 속합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부조가 새겨진 북문, 동문, 남문의 세 청동문입니다. 1400년대에 예술적 르네상스가 본격화되었는데, 이 문은 그 시작점이었던 대표적인 공공 프로젝트의 중요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최초로 시행된 근대적 의미의 미술 공모제를 통해 제작된 청동문 조각인 것입니다.
당시 청동문 프로젝트 공모전 내용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 이야기를 주제로 시안을 만들어 제출해야 했습니다. 이는 이삭이 신의 계획과 뜻에 따라 구원받았듯 피렌체에도 극적인 구원이 찾아오길 바랐던 시민들의 바람이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흑사병으로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구원을 향한 갈망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공모전에는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참여했습니다. 기베르티의 작업이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라면 브루넬레스키의 작업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였습니다. 공모전에 당선된 기베르티는 북문을 만드는 데에는 22년을, 동문을 만드는 데에는 무려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쏟아부었고, 총 49년에 걸쳐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기베르티가 세례당 청동문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공모전에서 떨어진 브루넬레스키는 두오모 성당의 돔 설계에 응모했습니다. 두오모 성당은 당시 피렌체의 번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1418년에 열린 대성당 돔 설계 공모전 상금은 200피오리노였습니다. 그 시절 웬만한 고급 기술자의 수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번 공모전의 당선자는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피렌체 두오모는 12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436년에야 비로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돔을 쌓고 그 꼭대기에 랜턴을 올리고, 또 그 위에 청동 성물함까지 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해 공사를 시작했던 피렌체 두오모는 조토를 거쳐 브루넬레스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되었고, 공사에만 1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피렌체 두오모는 건축 설계부터 완공까지의 과정 그 자체로 피렌체 도시 역사의 산증인인 셈입니다.
그리고 19세기 초, 두오모 세례당 앞에 작은 광장이 만들어지며 대성당의 원형을 설계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두 건축가의 조각상이 세워졌습니다. 피렌체 두오모는 건축 후 7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훗날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두오모 지하에 영면하며 자신이 설계한 돔과 영원히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세례당 공모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고 두오모에 재도전했기에 브루넬레스키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삶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Trip 3 아름다움이 혁명이 되는 도시_파리
혁명이 남긴 위대한 유산, 루브르 박물관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필리프 2세가 세운 요새였습니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프랑스 국왕들의 거처로 사용되다가 1793년 프랑스 혁명 직후, 예술품을 왕권이 아닌 ‘국민의 소유’로 선언하며 대중에 개방되었습니다. 루브르에는 당대의 귀중품은 물론이고 전리품들도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에 박물관으로 활용할 최적의 조건이 이미 갖춰진 상태였죠.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나폴레옹 시대에 유럽 원정으로 들여온 수많은 유물과 선사시대부터 1800년대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 귀족의 유품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는 루브르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격변하는 프랑스를 기록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루브르에는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 외에도 봐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근대 초기 프랑스의 역사화로 봐도 무방할 만큼 시대를 그림으로 기록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은 놓쳐서는 안 될 것 중 하나입니다. 그는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황제로 정권을 잡기까지, 그 격변의 시대를 그림으로 남긴 화가입니다. 오늘날 신고전주의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아주 야심만만하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루브르 왕립 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세 번의 고배를 마시고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로 낙담했지만 1774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대상을 수상합니다.
사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로코코 시대에 루이 왕조의 편에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혁명 정부의 편에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황제의 편에서 그림을 그렸죠.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남긴 그는 신고전주의로 분류됩니다. 신고전주의는 로마 건국사를 토대로 당시 시대상에 맞춘 정치적 메시지와 사회적 의미가 있는 그림을 그려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사조였습니다.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기록’의 가치가 조금 더 두드러졌던 사조라고 할 수 있죠.
1789년 6월 29일, 루이 16세의 권위주의와 재정난에 분노한 제3신분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국민의회 해산을 거부하며 헌법 제정을 위한 서약을 결의했습니다. 이른바 ‘테니스 코트 서약’이죠. 여기에 자유주의 성향의 성직자들과 일부 진보 귀족들도 합류하며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장면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는 역사화로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혁명 정부의 일원으로 직접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로마 유학 시절 루이 16세의 간접적인 후원을 받았음에도 그는 혁명 과정에서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더 이상 구체제에 속하는 예술가가 아닌, 새 시대를 기록하는 ‘혁명의 화가’로 입장을 전환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그가 혁명 정부에서 예술과 문화를 총괄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속에는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에서 망토를 휘날리며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자크는 자신을 영웅적으로 연출하는 데 능했던 나폴레옹을 더욱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마치 그를 전쟁의 선봉장과 같은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작은 키를 숨기기 위해 백마 탄 포즈를 고안해 내기까지 했죠. 그런데 사실 백마는 겁이 많아 알프스처럼 험한 산맥은 오르지 못합니다. 황제인 나폴레옹조차 알프스를 지날 때는 노새를 타야 했지만, 자크는 노새 대신 백마를 그렸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5점을 그리게 해 유럽 곳곳에 선물했습니다.
자크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나폴레옹이 황후가 될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교황이 이를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대관식은 국왕이 왕관을 머리에 얹어 그가 왕위에 올랐음을 공표하는 의식입니다. 보통은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는데 나폴레옹은 교황을 파리로 오게 했습니다. 또 원래대로라면 나폴레옹이 교황 앞에 머리를 숙여 왕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림 속에서 교황은 뒤에서 손짓으로 나폴레옹을 축복하고, 나폴레옹은 교황에게서 월계관을 받아 자기 머리에 직접 쓴 후에 자신 앞에 무릎 꿇은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줍니다. 이는 유럽의 정신적 지주였던 교황보다 자신의 권위가 더 높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그림은 무려 3년에 걸쳐 그려졌습니다. 가로 9미터가 넘는 이 그림에는 총 204명의 사람이 각각 다른 포즈로 등장합니다. 인물들이 입은 옷감은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크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여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참석자들을 실제 자신의 작업실에 불러 모델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프랑스 왕정의 전환기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기 재능을 당시 권력자의 파급력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내는 정치 선전 도구로 활용했던 예술 정치의 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교활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줄타기를 능숙하게 해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시대의 예술가였는지도 모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모나리자: 루브르 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볼 작품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왜 이렇게 유명해진 것일까요? 우선 회화 기법에서 그 비밀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열세 구의 시신을 해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스푸마토 기법을 활용해 윤곽선을 거의 지우다시피 하며 인물의 얼굴을 부드럽고 입체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또한 배경에는 원근법을 적용해 인물과 배경의 깊이를 효과적으로 조절했죠. 덕분에 관람자는 실제 살아 있는 인물을 마주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 또한 여전히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미소는 정말 웃고 있는 걸까?’,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거지?’ 하고 수많은 해석이 이어지고 있지만, 모나리자의 미소는 여전히 해답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쯤은 의아하게 여겼을 법한 부분이 바로 모나리자의 눈썹입니다. 눈썹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존재하죠. 다빈치가 애초에 눈썹을 그리지 않았다는 설, 완성되기 전에 그림을 안고 이탈리아를 떠났다는 설, 시간이 지나며 보존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까지 모두가 미완의 걸작에 얽힌 다빈치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루브르에서의 여정은 명작을 감상하는 시간을 넘어, 인류의 위대한 정신과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와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대 문명의 유산부터 근대 혁명의 흔적까지, 이 박물관은 그 자체로 세계사의 생생한 교과서이자 예술을 통한 시간 여행지라 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아름다움과 권력,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이 층층이 쌓인 이 공간에서 우리는 예술이 어떻게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Trip 4 일본에서 만난 파리, 예술 백년지대계의 도시_도쿄
서양 미술사가 한눈에 보이는 상설전, 국립 서양 미술관도쿄 미술관 투어 콘셉트는 ‘도쿄에서 만나는 파리’입니다. ‘도쿄에서 웬 파리?’ 하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보다 보면 ‘이게 왜 여기에서 나와?’ 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일본에 어떻게 수많은 프랑스 예술품이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은 1880년대 후반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1855년부터 193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여덟 차례 개최되었으며, 유럽,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전 세계 수십 개국이 참여했습니다. 에펠탑의 탄생으로 유명한 1889년 4회차 박람회에는 무려 3,2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렸을 정도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행사였죠. 당시 메이지 유신 시대였던 일본은 ‘우리가 유럽인들에게 극동의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훌륭한 문화유산과 역사가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리자’는 목적으로 만국박람회에 꾸준히 참가하며 자국의 문화 예술 알리기에 힘썼습니다.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구권 사람들이 일본의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럽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이 자국의 주요 예술 종목으로 내세웠던 도자기였습니다. 이미 1600년대부터 중국의 도자기가 본차이나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진출해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일본 특유의 감성이 담긴 도자기의 매력에 푹 빠져 하나둘 소장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