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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아들러를 만났을 때

우뤄취안 지음 | 이든서재


석가모니가 아들러를 만났을 때

우뤄취안 지음

이든서재 / 2025년 11월 / 320쪽 / 18,800원





제1장. 고통을 끊어내다, 단사번뇌(斷捨煩惱)_『금강경』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의 과제들



타인과의 경계는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이뤄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도울 수 있다:
석가모니는 내가 ‘옳다’고 믿어 온 관성을 깨뜨릴 때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말한다. 조건 없는 사랑과 선행은 타인과 나 사이에 벽이 없을 때 행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타(利他)’를 사명처럼 받들며 행동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보면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했던 아들러의 의견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주장하는 개인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도 ‘이타’이다. 그는 상처받은 자아를 치료해 온전했던 상태로 돌아가야 헌신할 수 있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타인과의 경계’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정서적 자유를 누리는 것인데, 책임과 경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상대에게 공감하기 어려워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내 마음에 걸리는 결정을 할 필요는 없다. ‘과제의 분리(자신과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고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아들러의 이론)’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죄책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 안에서 진정한 ‘우리’가 탄생한다:
‘타인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과제의 분리’를 실천해도 왜 여전히 관계 때문에 고통 받을까? 그 이유는 ‘타인과의 경계’, ‘과제의 분리’가 내면의 공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경계’와 ‘분리’는 서로 존중할 것을 강조하지만 깊은 공감을 이끌지는 못하기 때문에 사랑과 자비의 경지까지 정진할 수 없다. 상대가 내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침범해도 영향 받지 않는 건 다른 차원의 자세다. 석가모니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구분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하며, 누군가를 도와줄 때 서로를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실제로 사람 사이에는 정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 사이에는 ‘실선’이 아닌 ‘점선’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강해질 때는 오히려 ‘자아’가 사라질 때이다. 모든 일에 ‘나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으면 이익이나 손실 따위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손해 보진 않을까 하는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나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생각하면 타인에게 이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것으로 내면의 근심과 공포를 뛰어넘어 진정한 나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


사람과 사건을 구분해서 생각하라:
‘그럴싸한 이야기’와 ‘실질적인 진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지혜는 그것을 분별할 때 얻을 수 있다. 소위 ‘영험함’을 앞세워 병을 고쳐 준다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단체들이 많다. 특히 신내림을 받았다며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神)’이 자기 몸에 환생했다고 말하면서 외모나 목소리를 꾸며 내고, 병든 사람들을 기만해 돈을 갈취하거나 성적 착취를 자행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신통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저 신의 말을 전달하는 매개일 뿐, 그 자신이 신이 될 수는 없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만일 색으로써 나를 보고자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헛된 도를 행하는 자로 여래를 볼 수 없다.” 『금강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구게(부처를 찬미하는 시가) 중 하나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진짜 가르침과 가짜 가르침을 분별하려면 겉모습뿐 아니라 본인의 내면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지, 배운 진리를 일상에 적용하며 잘 수행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을 없애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거짓에 속지 않고 평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들어올릴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내려놓을 용기가 생긴다


현재에 충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불교에서는 ‘현재에 충실하여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 반면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원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좌절하는 사람도 있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는 결과가 어떻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집착하면 할수록 번뇌만 더해질 뿐이다. 내려놓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누워 계셨던 그 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80세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 심장의 불편함을 호소해 구급차에 실려 갔고, 4개월 만에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해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돌봐야 했고, 생계도 유지해야 해서 병원과 집, 회사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친한 친구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야?” 친구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 집안의 ‘가장’이 된 나는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공로를 세우며 힘들게 보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라는 신념이 나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단 한치의 후회도 없을까?

‘내려놓음’으로 잘라내는 번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여 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지라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라는 것을. 밤마다 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만약 내가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자책과 비난, 그 사이를 오가는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남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어떻게 한들 후회는 남기 마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려놓지 못하고 그 순간을 붙들고 있는 사람에겐 정서적 채찍질이 더 심하다. 물론 내려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상황을 무마하고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헛된 망상이다. 불교에서는 ‘포기’가 아닌 ‘내려놓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내려놓음’은 번뇌와 고통을 끊어내는 것으로, 끝없는 수련과 연습을 통해 얻어지는 마음이다. 그러나 ‘포기’는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기대를 내려놓는 것으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는 상태다. ‘최선을 다했지만 남는 후회’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남는 후회’는 다르다. 전자의 아픔은 사랑과 애착에서 오지만, 후자의 아픔(혹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설령 세상 만물의 본연이 헛된 것이라고는 하나,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덤덤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며, 내 앞에 직면한 과제를 용기 있게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갖출 때 비로소 내려놓음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내려놓음’이란 처음부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포기와도 같다.



제2장.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삶, 무아도생(無我度生)_나와 타인, 우리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전부 신뢰하지 말지니


우리의 모든 생각은 과거의 경험에 제한받는다:
끊임없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신뢰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그 모든 것은 덧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걱정은 머릿속에서 나온다. 그런데 걱정의 대부분은 과거에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이뤄진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이어져 근심을 만들어낸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은 과거 경험과 편견을 기반으로 하기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 문제는 그 생각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근심을 끊어내면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지혜와 통찰은 평정심과 직관에서 기인한다. 『금강경』의 완전한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다. 여기에서의 ‘반야(般若)’는 번뇌가 사라진 궁극의 지혜를 가리킨다. ‘바라밀(波羅密)’은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彼岸)으로, 즉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조금씩 번뇌를 지워 냄으로 해탈에 이르다:
『금강경』의 명칭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다르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논쟁을 예견한 듯 이 경전의 제목을 삼단논법으로 설명한다.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이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풀이하면 ‘단지 이 경전을 잘 읽고 실천할 수 있도록 제목을 ‘반야바라밀’로 지은 것일 뿐, ‘깨달음과 지혜는 스스로 얻는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목은 그저 제목일 뿐이니 제목에 집착하지 말고 만물의 본성이 본래 비어 있음을 깨닫기를 권면한다.

내가 허용하지 않는 한, 나를 능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쉽게 모욕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
누군가와 갈등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존중받아야 할 대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양보하든가,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갈등이 생겼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자기 입장을 상대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네가 화났다는 거 알지만 오해하고 있는 것도 많아.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 물론 현실에서는 ‘약한 쪽’이 상대방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에 당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능욕의 현장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를 모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고, 참고 있을 이유도 없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대립을 없애는 방법은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되어 버리면 애초에 충돌이 일어날 계기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모욕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욕을 통해 나에게서 해탈하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다.

참을 때 비로소 강해지는 놀라운 이치:
모욕을 견디는 것은 불교에서 중요한 수행 방식 중 하나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내’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나를 비워내는 것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인내’의 목적은 타인의 감정을 수용함으로써 나의 심신을 안정시켜 서로 간의 번뇌와 걱정을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일에 먼저 ‘인내’하는 사람은 강인해질 수밖에 없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겸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전세(前世)에 군주 가리왕에게 사지를 절단당했음에도 원한을 품지 않았던 이유는 ‘사상(四相, 나에게 집착하는 것, 동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 자신과 부처를 구분해 스스로 낮추는 것,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모욕에 반응하지 않는다. 상처는 나를 내려놓는 순간 치유된다. 상처는 모욕감, 수치심에서 비롯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그 수치심이 상대가 나를 존중해 주지 않았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라면 나와 상대방에 대한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너와 나, 타인의 존재 혹은 그 사이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으면 모욕감은 발생하지 않으므로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항상 내가 맞다고 느낀다면 꼭 생각해 봐야 할 것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금강경』에서는 세상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자성(無自性)’과 모든 일은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개념을 강조한다. “여래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니라.” 풀이하면 이 ‘세계’라는 것은 모두 인연에 따라 때에 맞게 만들어져 나온 현상으로, 독립적이거나 고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영원히 불변하는 실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세상은 근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空)’의 것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의 형태는 언제나 변한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증발하여 수증기의 형태로 있다가 구름을 만들고 다시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한쪽 입장에만 서서 어떠한 일에 관한 시비를 가리려고만 하면 전체적인 면모를 볼 수 없다. 보통 우리는 어떤 대상을 쉽게 지칭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거나 기준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로 존재하는 것일 뿐, 영원토록 변함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석가모니는 ‘정·반·합(正反合)’의 논리에 근거해 하나의 주장(正)을 펼친 뒤, 그에 모순되는 주장인 반(反)을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의 통합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 이유는 모든 물질과 현상은 결국 ‘공’이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내 안의 집착을 내려놓아야만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이다. 특정한 관점에만 갇혀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만물은 인연에 따라 변하는 특징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면 무엇이 맞고 틀린 지 논쟁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사람들과 척지고 살아갈 일도 없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일을 대하면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내가 악인이라고 느꼈던 사람이나 나쁜 일이라고 여겼던 사건에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그 사건, 혹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단련되어 더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쁜 일도 그렇게 바라보게 되거늘,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고 아껴 준 사람들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상대방의 헌신에 감사할 줄 알아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가족 간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다투지 않으려고 서로의 의사를 온전히 존중해 주면 가족 관계는 편안하다. 화목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를 배려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양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특히나 행복한 가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가족 간의 화목함을 일의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이 최고였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울 때, 사실은 그것이 다른 가족들의 희생과 양보 덕분이라는 걸 인식한다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면 자기 의사를 포기하고 양보한 다른 가족들도 고마움을 느끼고, 서로를 아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가정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자기만의 고집을 주장하지 않고 누가 옳은지 시비를 따지는 데 연연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무아’의 훈련이자 수행이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토론했을 때 내가 한 말이 시간이 지난 뒤 틀린 경우가 많았다면, 나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깊이 감사해야 한다.



제3장.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베푸는 삶, 무상보시(無相布施)_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한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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