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신은 태도가 아니라 인생을 탓하는가
고윤(페이서스 코리아) 지음 | 딥앤와이드
왜 당신은 태도가 아니라 인생을 탓하는가
고윤(페이서스 코리아) 지음
딥앤와이드 / 2025년 10월 / 224쪽 / 16,000원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_ 100년이 흘러도 절대 신뢰를 못 얻는 인간 유형“동물은 말한 곳으로 그냥 가지만, 사람은 말해놓고 꼭 다른 곳으로 간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말할 수 있다는 축복을 받았지만, 말을 지키는 사람이 극히 드문 종족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유행을 좇거나 외부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신이 처음 가고자 했던 길을 잃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상가 랄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동이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던 랄프 월도 에머슨은 ‘철학이 행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이 아닌 행동이야말로 철학의 증거라고 본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노예제, 산업화, 종교적 억압이 뒤엉킨 격변기였기에, 말과 행동이 얼마나 쉽게 괴리되는지를 절실히 체험한 그였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에 부합하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한 말을 그대로 다 지키며 살 수도 없고, 생각이 변할 때도 있다. 또한, 처음 세운 목표가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향이 바뀌는 것과 ‘본질’ 자체가 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빈번히 방향을 바꾸다 보니 처음 했던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적 성취를 위해 예술을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정’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그 예시이다. 이렇게 껍데기만 남는 순간, 말과 행동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명료하다. ‘끊임없는 자기 점검’이다. 본질을 잃지 않으려면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일을 왜 시작했는가? 지금, 이 선택은 나의 바람과 부합하는가? 반복되는 행동 뒤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가? 말과 행동의 괴리를 감지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본래의 궤도로 되돌릴 수 있다. 결국 삶의 본질은 말이 아닌 행동에 있다. 그 행동이 본질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행동이 곧 철학이 되어, 삶을 설계하는 기반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_ 잘 기억하는 일만큼 잘 잊는 일도 중요하다슈바이처는 ‘망각’을 삶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행복은 좋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일 뿐이다.” 슈바이처가 활동하던 시기는 전쟁과 사회적 혼란이 겹친 격동의 시대였다.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그는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며 ‘생명 경외 사상’을 전파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고통을 경감하는 것이 인류의 나아갈 길이라는 그의 신념은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과거의 상처에 갇힌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보살필 여유조차 잃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행복을 위해서는 잊어야 할 것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실제로 2006년 뇌과학 학술지 《뉴로케이스》에는 전 세계에서 80여 명만 보고된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의 사례가 실렸다. 한 환자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억해 냈다. 하지만 완벽한 기억력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기억은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를 계속 떠올리게 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이처럼 ‘망각’은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장치다.
실수한 일을 곱씹으며 괴로워하기보다,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사소한 말실수를 자책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풀거나 그냥 흘려보내는 편이 좋다. 과거에 묶이면 현재를 갉아먹지만, 털어내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찌꺼기를 ‘덜어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행복을 위한 망각이다.
물론, 망각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되풀이해서는 안 될 잘못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교훈마저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슈바이처가 강조한 것은,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분별하는 힘이다. 삶을 괴롭히는 과거의 상처를 끝까지 붙든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일을 향한 발걸음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망각은 책임을 피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준비다. 행복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 있지 않고, 기억과 망각 사이의 균형을 배우는 데 있다. 망각은 단순히 과거를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내일을 위한 여백이다. 여백이 없으면 새 그림을 그릴 수 없듯, 망각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시작되지 않는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_ 정작 갖고 나면 사라지는 욕망의 아이러니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가정이 있지만, 몰래 애인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애인은 그에게 늘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 아내와 끝내고, 애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모든 것을 알고 그를 떠났다. 이제 그가 애인과 함께할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갈망하던 애인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음에도, 어째서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된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해부하며,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의 욕망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이 심어준 환상인가?”
지젝이 말하는 욕망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아니다. 욕망은 결핍과 장애물,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사회적 판타지에 의해 유지된다. 남자가 애인을 갈망한 것도 애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라는 장벽이 존재했기에, 그 금지가 욕망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욕망은 증발했다. 결국 그가 원한 것은 애인이 아니라, ‘가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롯된 판타지였던 셈이다.
이 통찰은 사회 전반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명품을 욕망하지만, 실은 가방 자체가 아닌 가방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위치’를 욕망하고 있다. SNS 속 타인의 삶을 선망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여행지나 음식 자체보다,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갈망한다. 우리가 원하는 직장, 집, 연인조차 사회적 서사 속에서 각본처럼 주어진 것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이야기와 결핍감이다. 그리고 막이 걷히는 순간, 욕망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젝은 욕망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욕망의 가면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당신의 욕망은 진짜 당신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냉혹하지만, 동시에 해방의 가능성을 품는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은 갈망이 사실은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제는 그것을 벗어던지고 욕망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자유는 욕망을 좇지 않고 스스로 재정의하는 데서 비롯된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들을 적어보라. 그중 무엇이 타인의 시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무엇이 진짜 당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해 보라. 그 순간 당신은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욕망의 설계자가 된다. 삶은 타인의 무대가 아닌, 당신의 무대에서 다시 시작된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_ 3초의 분노가 30년 신뢰를 무너뜨린다누군가와 다툴 때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순간, 상대는 물론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게 된다. 그때 가장 간과되는 것이 이성의 힘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이러한 믿음을 평생 실천하며 글로써 증명했다. 특히 그의 저서 《분노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을 준다. “분노는 가장 혐오스러운 종류의 단기적인 광기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을 감정의 노예가 아닌, 이성으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보았고, 세네카 역시 같은 믿음을 가졌다. 특히 그는 분노에 대해 깊이 통찰했다. 황제 네로의 가정교사로서 권력의 광기와 인간 감정의 폭력성을 가까이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광기’란 이성이 잠식되고 감정이 지배하는 상태를 뜻한다. 분노에 휩싸인 사람은 이성을 잃은 듯, 후회할 행동을 자행한다. 한 마디 말과 순간적인 행동으로 관계를 허물고, 평생 쌓아온 신뢰를 잃기도 한다. 세네카는 이를 자기 내면의 이성을 저버린 자가 초래한 비극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 해법일까? 세네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스토아 철학이 추구한 ‘아파테이아(apatheia)’는 이성으로 감정을 조율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분노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평온한 힘을 앉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
저 자기 자신을 지배해야 한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이해’였다. 분노의 근원이 무지와 성급한 판단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감정은 힘을 잃게 된다. 결국, 감정은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화가 치밀 때 즉각 반박하기보다 한 호흡 멈추고, “왜 이 말이 내게 크게 다가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해하려는 태도가 감정의 불길을 잠재운다. 짧은 멈춤 하나가 격앙된 싸움을 이성적인 대화로 바꿀 수 있다.
분노는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칼날과 같다. 타인을 벌주기 위해 품은 분노의 불길에 가장 먼저 타들어 가는 것은 자신의 평온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분노를 이해하고 이성을 되찾으려는 용기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이성을 지키는 사람이다. 분노는 짧지만, 결과는 길다. 이성은 순간적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결국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건 감정의 불꽃이 아니라, 이성의 등불임을 잊지 말라.
존 듀이(John Dewey)_ 경험은 많은데 미성숙한 사람들이 간과한 ‘이것’중소벤처기업부의 조사에 따르면, 처음 창업한 스타트업의 3년 생존율은 44.6%에 불과했지만, 폐업 후 재도전한 기업의 생존율은 84.6%에 달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강해진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15.4%는 두 번째 도전에서도 무너졌다. 같은 실패를 겪었는데,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겪어봤으니 알 것이다”라는 가정이 얼마나 허약한 착각인지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교육철학자 존 듀이(1859~1952)는 이 문제를 탐구했다. 그는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에 대한 성찰로부터 배운다.”
그의 관점에서 ‘경험’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학생이 수학 문제를 수십 번 풀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고력이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습관을 되풀이하면 오류를 굳혀버릴 수도 있다. 경험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방향을 가진다. 그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가 곧 교육이고, 철학이며, 성장이다. 경험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지나간 사건일 뿐이다. 사건을 붙잡고 “왜 그랬을까?”, “나는 어떻게 반응했나?”, “다음에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경험은 비로소 배움이 되고, 실력으로 전환된다.
듀이는 이 과정을 ‘경험?성찰?행동’의 순환으로 설명했다. 경험은 원재료와 같고, 성찰은 그것을 숙성시키는 과정과 같다. 그리고 행동은 숙성된 의미를 삶 속에서 다시 검증하는 실천이다. 이 순환이 반복될수록 삶의 밀도는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성찰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경험을 내면화해 의도적인 행동 변화를 만드는 사고 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까? 실패했을 때, 곧바로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나는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묻는 것. 성취했을 때, 기쁨에 그치지 않고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를 곱씹는 것. 아무 일 없는 하루에도 “오늘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스스로 묻는 것. 이 작은 훈련이 쌓일 때, 경험은 기억을 넘어 삶의 기술로 변한다. 결국 듀이의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겪은 만큼 살아온 것이 아니라, 되짚은 만큼 살아온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_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심리학자의 원칙: 흘려보내라뛰어난 사람이란 단순히 박학다식하거나 만능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선택과 집중의 기준을 갖춘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존재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러한 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현명해지는 기술이란, 무엇을 간과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제임스는 19세기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인간의 정신 구조와 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며 현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우리가 겪는 복잡한 선택과 갈등의 핵심을 ‘집중력’과 ‘선택’에서 찾았다. 수많은 연구와 사례 검토 끝에, 제임스는 “주의는 곧 의식의 방향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고 간과하느냐가 삶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간과할 것인가?”는 한정된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쏟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흘려보내는 ‘집중의 기술’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걸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마치 수행 능력이 곧 개인의 역량을 증명하는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정말 다 해야 하는 일인가?” 높은 수행 능력이 현명한 판단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의도적인 무시가 더 큰 성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진정 능숙한 것은 모든 걸 다 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간과해야 하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감정적인 말, 판단, 편견, 지시 등을 무의미한 잡음처럼 흘려보내는 것. 누군가의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나이·직위·경력이 그 판단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관계 속 잡음을 무시할 줄 아는 태도가 우리를 지켜낸다.
결국 제임스가 강조한 올바른 지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아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할 건 과감하게 포기하고, 내게 진짜 필요한 것만 남겨두는 것. 삶의 무게는 이렇게 가벼워진다.
결국, 삶에서 우리가 길러야 할 역량은 세 가지다. 첫째, 해야 할 일을 알아보는 판단력. 둘째,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는 기준. 셋째, 불필요한 것을 흘려보내는 태도.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가지 적는다. ‘해도 되는 일’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여 목록을 만든다. 하루가 끝날 때 ‘무시해서 잘한 일’을 떠올려 본다.’ 이 단순한 훈련은 나만의 선택 기준을 만들어주고, 외부의 기준에 덜 흔들리게 한다. 완벽을 향한 헛된 시도 대신, 소중한 것에 집중하는 의식적인 선택. 그것이야말로 ‘현명해지는 기술’이다.
공자(Confucius)_ 세상의 모든 관계를 자신을 연마하는 장으로 만들어라타인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숙한 이는 타인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고, 미숙한 이는 타인을 함부로 단정 짓는다.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굳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다듬어야 하는가?” 그러나 이 물음에 정직하게 맞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성장의 문턱에 다다른다.
이 묵은 화두를 꿰뚫어 본 철학자가 바로 공자(BC 551~479)이다. 혼란과 분열의 춘추 시대 속에서 그는 예(禮)와 도덕(道德)을 숭상하며 인간이 살아갈 길을 모색했다. 그의 가르침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는 지혜였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처럼 되기를 생각하고, 좋지 않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약점을 돌아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