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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

콜린 솔터 지음 | 현대지성


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

콜린 솔터 지음

현대지성 / 2025년 11월 / 440쪽 / 25,000원





기원전 44년 3월 22일 _ 카이사르의 암살범들이 미래 행보를 정하기 위해 서신을 주고받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주고받은 서신 27통이 다양한 소장품 속에서 발견되었다. 2,000년도 더 전에 쓰인 이 편지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숙련된 정치인이었다. 독불장군이었던 카이사르는 윗선의 허가 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정치인이 된 후에는 로마 공화국을 독재정치로 이끌며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이 통치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의 지위를 인정한 원로도 있었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우려하는 원로도 있었다. 원로원파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그의 처남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이 독재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극장 밖 인도에서 칼에 스물세 번이나 찔렸다.

암살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 전부터 공모자들은 서로의 집에 자주 모였다. 당연히 이때는 많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큰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고, 브루투스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카시우스에게 다급하게 편지를 보냈다. 암살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암살자들이 아직 붙잡히거나 처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카이사르의 암살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당시 상황을 잘 드러낸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만 죽이고, 그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살려두었다. 음모자들의 목표는 정권 교체가 아니라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협정을 맺어 로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총독직을 요청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내가 다스리는 지역을 너에게 내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브루투스는 “저는 저와 다른 친구들을 위해 명예 대사직을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로마를 떠날 그럴듯한 명분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겁니다.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계속 망명 생활을 해야겠죠”라며 체념하는 모습도 보였다.

안토니우스가 만약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면,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이미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고, 로마는 다시 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로운 로마제국이 탄생하고 황제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첫 번째 행보는 공모자들을 살인자로 선언한 것이었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는 무리와 그 반대자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그리스로 도망쳐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필리피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에게 패배해 두 사람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보낸 편지

… 이런 곤경에 처해 있으므로 저는 저와 다른 친구들을 위해 명예 대사직을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로마를 떠날 그럴듯한 명분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히르티우스(로마공화정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 무례한 데다가, 계속 우리를 박해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도 가까운 시일에 우리가 공공의 적이 되거나 범법자로 추방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라고 물으시겠죠? 음, 우리는 불운에 굴복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도스섬이든 다른 어디로든 일단 떠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겁니다.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계속 망명 생활을 해야겠죠. 최악의 경우, 우리 자신을 방어할 마지막 수단까지 동원해야 할 테고요. 왜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마지막 수단을 준비하느냐고 물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제외하면 우리 편에 구심점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폼페이우스와 바수스는 카이사르의 소식을 들으면 더 확고하게 결집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힘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나서 합류해도 시간이 충분할 겁니다. 저는 여러분을 대신해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약속이라도 할 것입니다. 사실 히르티우스가 제게 요구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두 분 모두 가능한 한 빠르게 제 편지에 답장해주세요. 히르티우스가 제게 네 번째 시간(오전 9시) 전에 이 문제에 대해 알려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도 알려주세요. …



1610년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처음 목격한 사건을 설명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종 현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과학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지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1610년 1월 갈릴레오는 자신의 최근 천문학적인 발견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7세기 초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파도바대학교에서 기하학, 천문학, 역학을 가르쳤다. 1609년,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의 새로운 발명품인 초기 망원경을 보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초기 망원경의 원리를 즉시 이해하고 더 나은 망원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갈릴레오는 베네치아공화국의 도제(정치 지도자)인 레오나르도 도나토에게 편지를 보냈다. 베네치아는 네덜란드처럼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강력한 국가였다. 갈릴레오는 초기 망원경을 대폭 개선한 자신의 망원경에 도제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 망원경은 맨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했을 때 적의 함선을 두 시간 먼저 발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갈릴레오가 설명한 것처럼 이 망원경은 미리 적의 전력을 평가하고 “추격하거나 싸우거나 도망칠 준비를 하는 데”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탁 트인 공간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고, 어떤 움직임이라도 식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망원경을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분명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새로운 장치에 훨씬 더 큰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 망원경으로 지상의 지평선까지만 봐야 할까? 갈릴레오는 하늘을 볼 때도 이미 망원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도제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목성의 위성 네 개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편지를 쓰기 며칠 전 그 위성들을 발견했고, 날이 흐렸던 1월 14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밤 바뀌는 위성의 위치를 추적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 관찰을 통해 그것들이 별이 아니라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임을 깨달았다. 그는 태양계에서 지구 외에 다른 행성의 위성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네 위성, 즉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 그리고 가장 큰 위성인 가니메데는 ‘갈릴레오 위성’이라고 불린다. 이 위성들은 현재 목성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들 중 가장 큰 위성이며, 이 발견은 우주의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의혹을 제기했다. 갈릴레오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주장을 파고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발견은 기존의 세계관을 크게 흔들었다. 1633년 갈릴레오는 그의 가설을 철회하라고 강요받으며, 남은 인생을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했듯 결국 갈릴레이의 말이 옳았다. 1989년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은 그의 이름을 딴 갈릴레오 우주탐사선을 발사해 목성과 목성의 위성을 가까이서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2003년 임무를 마친 탐사선은 목성 표면에 불시착한 후 데이터를 보냈다. 그 데이터 덕분에 우리는 1609년 갈릴레오가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처음 연구한 우주 물체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의 도제 레오나르도 도나토에게 보낸 편지

총독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폐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의를 표하며, 파도바(이탈리아 동북부의 도시)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데 관련된 사안들을 충실히 이행할 뿐 아니라, 해상 및 육상 사업에 큰 도움이 될 망원경 ‘오키알레’를 전하께 바치기로 결심했음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 새로운 발명을 철저히 비밀로 유지하며, 오직 폐하께만 이를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망원경은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망원경은 맨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했을 때 적의 함선을 두 시간 먼저 발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선의 수와 특징, 전투력을 식별하고 추격하거나 싸우거나 도망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탁 트인 공간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고, 어떤 움직임이라도 식별할 수 있습니다.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의 우선순위를 설명하다


[남북전쟁 당시 《뉴욕트리뷴》의 투쟁적인 창립자이자 편집장인 노예제 폐지론자 호레이스 그릴리가 링컨을 강하게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자, 링컨 대통령은 이에 답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릴리가 1861년 8월 19일에 자신이 쓴 서한을 《뉴욕트리뷴》에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1862년부터 남북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부 연방군은 초기의 연이은 패배 이후 점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고, 지지자들은 승리 이후 국가의 미래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릴리는 오랫동안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해왔다. 그는 남북전쟁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링컨은 그 목표에 충분히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릴리는 ‘2천만 명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뉴욕트리뷴》에 글을 게재했다. “친애하는 각하, 당신의 당선을 축하했던 사람 상당수가 반란군의 노예 정책으로 깊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편지 서두에서부터 ‘Mr President(친애하는 대통령님)’가 아니라 ‘Dear Sir(친애하는 각하)’이라고 쓴 것은 의도적인 조롱이었다. 편지의 어조는 점점 더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릴리는 링컨을 향해 새로운 법을 집행하라고 요구했다. 1862년에 통과된 이 법은 반란군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노예해방을 합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우리는 당신이 법을 실제로 집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신이 새로운 몰수법의 해방 조항에 관한 직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조항들은 자유를 지키고 노예제도와 싸우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8월 22일 자 《뉴욕트리뷴》에 링컨의 답변이 실렸고, 다음 날 다른 신문에서도 이를 반복해서 보도했다. 링컨은 공화당과 연방의 대의를 지지해준 소중한 인물인 그릴리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피했다. 링컨은 그릴리를 부드럽게 나무라며 “당신의 공개서한에 성급하고 독단적인 어조가 느껴진다 해도, 저는 항상 마음이 바르다고 여겨왔던 오랜 친구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것을 애써 넘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동기를 명확하게 밝히려고 애썼다.

남부의 몇몇 주가 분리된 이유는 노예제도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미국 대통령을 화나게 만든 것은 노예제도가 아니라 그들이 연방에서 탈퇴한 일이었다. “이 투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구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해야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또한 일부 노예를 해방하고 다른 일부는 그대로 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링컨의 편지는 이런 기조로 계속 이어지며 대통령으로서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혔다. 링컨은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드러냈다. “저는 여기에서 공적인 직무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것이며,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자유롭기를 바라는 저의 개인적인 소망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 편지를 쓸 당시, 이미 노예해방 선언문을 초안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선언문은 남부 연합 주에 있는 모든 노예를 자유인으로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링컨은 1862년 9월 앤티텀전투에서 연방군이 승리한 후에야 이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 선언이 계속되는 패배로 인한 그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이 선언은 전쟁 중에 남부의 주에만 적용되었고, 북부의 주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350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이 조치는 전쟁 후 13차 수정헌법이 통과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아돌프 히틀러가 보낸 편지에서 반유대주의 성향이 드러나다


[독일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체되었고, 승전국인 연합군은 패배한 국가에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부과했다. 이런 조치는 독일 국민의 빈곤과 분노,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귀환 군인들 사이에서 그 원한이 증오가 되어 타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무너졌고, 아돌프 히틀러 같은 참전 보병들의 미래는 암울해졌다. 경제는 붕괴했고, 군도 해체되었다. 이런 불확실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일부 전직 군인들은 극단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준군사 조직을 결성했다.

히틀러는 뮌헨에 있는 정보부대 책임자 카를 마이어에게 고용되었다. 동원 해제를 기다리는 군인 중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마이어는 우익 정치 노선을 걸으며, 러시아혁명 전후 유럽 전역에서 번지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마이어는 히틀러를 이른바 ‘민족 사상’ 교육에 참여시켰고, 새로 결성된 독일 노동자당(DAP) 회의에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적이고 반공산주의적일 뿐 아니라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독일 노동자당의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당 회의에서 연설을 자주 했는데, 교리 선전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이 덕분에 당의 창립자인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1919년 9월 12일에 독일 노동자당의 당원이 되었다. 히틀러의 말솜씨를 눈여겨본 마이어는 또 다른 군인인 아돌프 게믈리히가 보낸 독일 노동자당 정책에 대한 문의 편지에 답하는 일을 히틀러에게 위임했다. 게믈리히는 “유대인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고향을 잃은 유대인들은 어디에 정착하든 늘 외부인으로 여겨졌으며, 오늘날 이민자나 난민이 그렇듯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희생양을 찾는 사람들에게 쉬운 표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종종 훌륭한 사업가이자 금융가로서 경제의 요직에서 활동했다. ‘유대인 문제’라는 표현은 18세기부터 유대인의 존재와 성공에 반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사용한 완곡한 어법이었다.

히틀러는 게믈리히에게 보낼 답장을 열정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믈리히에게 유대인은 인종, 종교, 부 그리고 “수천 년에 걸친 근친혼”을 통해 자신들을 다른 민족과 분리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이에 독일인이 아닌 이방인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라며, “(유대인은) 인종적 특성을 희생하거나 감정, 사고, 노력을 부정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원하는 것은 오직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이 황금 송아지 주위에서 추는 춤은 우리가 지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소유물을 향한 무자비한 투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면서 모든 것을 잃은 히틀러와 게믈리히 같은 독일인은 이러한 생각을 반겼다.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를 풀 합리적인 해결책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가진 특권을 체계적인 법으로 대응하고 제거하는 것 …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유대인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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