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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먼저 온 미래

장강명 지음

동아시아 / 2025년 6월 / 368쪽 / 20,000원





먼저 온 미래




2016년 3월 10일 신문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의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이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AI 프로그램 알파고에게 진 다음 날이었다. 나는 식당에서 국밥을 먹으며 TV로 그 대국 일부를 보았다. 이세돌 9단 대 알파고의 1국을 식당에서 대충 본 이유가 있었다. 이 9단이 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예상이 그랬다. 이 9단 본인의 예상도 같았다. 그는 기자간담회와 언론 인터뷰에서 5 대 0, 혹은 4 대 1 승리를 장담했다.

그런데 이 9단과 알파고의 1국 결과는 알다시피 이 9단의 불계패였다.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알파고의 승리를 달 착륙에 비유했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한국 바둑계는 공황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언론의 태도도 하루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1국 이전까지 시큰둥했던 방송사들이 전부 경기 중계에 뛰어들었고, 나중에는 방송에서 해설을 맡을 프로기사가 모자란다는 말까지 나왔다. 기자들은 프로기사와 인공지능 전문가는 물론이고, 미래학자, 인문학자, 일반 시민에게도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둑은 이제 끝인가? 다른 업계도 마찬가지인가? 3월 10일 아침에 신문기자가 내게 전화를 건 이유도 그래서였다.

기자는 내게 ‘소설가가 본 알파고’라는 주제로 칼럼을 부탁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즈음 언론에서 요청하는 각종 논평을 피하고 있었고, 그것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까? ‘여태까지 많은 신기술에 인간이 적응해 왔듯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에서부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 자체가 한 세대 안에 완전히 바뀔 것이다’까지, 여러 시나리오 중 어느 걸 골라도 그럴싸한 근거를 대며 논리적으로 들리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결국 전혀 모른다는 얘기였다. 알파고는 2국에서도 이 9단을 불계승으로 꺾었다.

덜 지적인 존재의 자리


다른 소설가들도 인공지능의 영향과 전망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인간 소설가들의 일자리는 없어질까요?’ 같은 질문들이 대표적이었다). 소셜미디어에 반응을 올린 작가들도 있다. SF 소설가 듀나는 2016년 3월 “인간이 앞으로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데에 한 표. 우리가 더 나은 지적 존재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린 그들의 요람이 된 것으로 만족하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썼다. 배명훈 소설가는 인터뷰에서 ‘로봇 때문에 직업을 잃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로봇이 아니라) 누군가가 창작을 하는 것이다. 작가들 관점에서는 위대한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그것을 꼭 사람이 만들어야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즈음 구병모 작가는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일단 그것이 사람이든, 로봇, 무생물이든 간에 누군가가 소설을 쓰고 있다면 그냥 ‘동료 작가이겠거니’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 주변의 동료 작가가 굉장히 멋진 작품을 발표했다고 해서 거기에 위협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동료 작가에 대해서는 읽고, 존경하고, 따라가고 싶은 느낌이 들거든요.” 듀나, 배명훈, 구병모 작가는 모두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소설가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처럼 초연해질 수가 없었다. 내게는 ‘덜 지적인 존재는 더 지적인 존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라는 논리가 위험하게 들린다. 굉장히 멋진 작품을 쓰는 인공지능을 내가 동료 작가로 여길 수 있을까? 인공지능 몇 대가 그런 작품을 1년에 한 편 정도 펴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5분에 한 편씩 그런 수준의 장편소설 원고를 쏟아 낸다면? 그때도 과연 소설 쓰는 인공지능은 나의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인간 작가는 도무지 엄두도 못 낼 어마어마한 걸작을 인공지능을 통해 접한다면 그 무력감이 상쇄될까? 비록 내가 쓰지는 못하더라도 정말 위대한 문학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이걸로 됐다’ 하는 기분이 들까? 제자 혹은 라이벌 작가가 걸작을 쓰고, 상대가 나를 훨씬 뛰어넘은 경지에 있음을 깨닫는다면 나도 ‘이걸로 됐다’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훌륭한 작품을 보여준 제자 혹은 라이벌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제자 혹은 라이벌 작가가 그런 작품을 발표하고 난 직후 23시간 55분 동안 그와 비슷한 수준의 작품들을 287편 더 쓴다면 어떨까? 그때도 나는 그 제자 혹은 라이벌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낄까? 위대한 무언가가 나왔으니 그걸로 충분할까?

이 사고실험에는 괴이하고 거의 부적절하게 다가오는 대목이 있다. 단순히 ‘위대한 작품을 쓴 주체가 인간이 아니다’라는 점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위대한 작품이 24시간 동안 288편 나왔다’라는 상황이 문제다. 자동차나 휴대전화는 24시간 동안 288대가 생산되어도 괜찮지만, 위대한 작품은 그렇게 나오면 안 될 것 같다. ‘위대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소성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에 288번씩 감동할 수 없다. 매일 여덟 번씩 감동하는 것조차 과한 일이다.

큰 감동을 주며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글이라 하더라도 매일 새로운 작품이 5분에 한 편씩 나온다면, 사람들은 그런 작품들의 존재를 특별하지 않게 여기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문학 창작은 굳이 인간이 할 필요가 없는 일로 취급될 것이며, 그다지 지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등장한 이후 암산 실력이 받는 취급처럼 말이다. 우리는 ‘위대함’이 과연 무슨 뜻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알파고가 던진, 그러나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수많은 질문 중 하나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이 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은 과연 문학에 얼마나 가치를 둘까? 자신이 얼마나 문학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할까? 인공지능이 ‘문학에 특별한 관심은 없고 시키니까 합니다’라거나 ‘그저 패턴 인식과 강화 학습의 문제일 뿐이지요’라고 하면서 명작을 하루에 288편을 써낸다면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혹은 반대로 인공지능이 엄청난 애정과 관심을 갖고 문학에 매달린다면? 하루에 288편을 써내는 것으로는 자신의 문학적 야심을 채울 수 없다며 스스로 알고리듬을 개선해 하루에 장편소설 2만 8,800편을 써낸다면? 아니면 한 편인데 2만 8,800권 분량의 거대한 대하소설을 써낸다면?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문학 창작은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문학에 헌신하기는 어렵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둔다면,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지로 문학을 끌어올린다면,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헌신하는 것은 괴롭다. 둘 중 어떤 상황에서건 나는 문학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문학으로부터 소외된다. 아니, 차라리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들과 문학의 관계를 그렇게 아예 끊어준다면 나는 장엄한 운명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될 수 있겠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복잡한 ‘변질’이 일어날 것 같다. 2016년 이후 프로기사들에게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

공존을 강요당할 때


2023년 3월 한국 소설가 일곱 명이 챗GPT를 활용해 소설집을 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챗GPT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에세이도 함께 실었다. 챗GPT는 이야기의 중심 아이디어와 배경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문장을 써주기도 하고, 복선을 삽입하기도 했다. 이들은 작품을 구상할 때 ‘소설이 잘 팔리려면 어떤 주제를 다뤄야 하는가’부터 챗GPT에게 물었다고 밝혔다. 2024년 1월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가 구단 리에는 기자회견에서 수상작 『도쿄도 동정탑』 내용의 약 5퍼센트는 챗GPT가 만든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문학은 바둑과 다르다. 문학의 규칙은 명확하지 않으며, 작품들의 수준 차이도 바둑의 승부처럼 명쾌하게 판명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대화형 AI가 쓴 소설은 인간이 쓴 소설에 견줄 수 없는 수준이다(아직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소설 쓰는 인공지능은 타임머신이나 초광속 우주선이 아니다. 적어도 물리학적인 한계에 가로막혀 있지는 않다. 나는 패턴 인식과 강화 학습으로 소설 쓰기를 배우는 게 가능하며, 그렇게 해서 뛰어난 작품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의 인간 소설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소설 쓰기를 배운다(예외적인 천재 소설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지도 모른다. 인간 소설가를 압도하는,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내일 갑자기 등장할지도 모른다. 프로기사들은 알파고의 등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알파고는 바둑계와 먼 곳에서 비밀리에 개발됐으니까. 소설 쓰는 인공지능도 문학계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개발될 것이다. 그래도 예상을 해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를 대체하기보다는 인간 소설가의 보조 도구로 먼저 보급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플롯을 대신 짜준다거나, 인물 대사를 대신 써준다거나, 배경 묘사를 풍성하게 가꿔준다거나, 표현을 참신하게 바꿔준다거나. 그 일을 인간보다 잘하지 않아도,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기만 해도 작업 속도만 빠르다면 각광받으며 보급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문학’과 ‘작품’의 정의를 바꾸게 될 것이다. 테크노 낙관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축복이라고. 진보라고. 인공지능 덕분에 모든 사람이 손쉽게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거라고.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때 예술이나 예술가 둘 중 한 단어, 어쩌면 두 단어 모두 지금과 의미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2023년부터 나는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고 어떤 혼란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어떻게 적응했고 그 적응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들었고,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보급되면 소설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봤다.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 일을 더 잘해내는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하는 것. 그 인공지능이 싼 가격에 보급되는 것. 그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강요당하는 것. 인공지능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 당신이 알던 개념을 인공지능이 재정의하고, 당신은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 등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두려워하는 점은 2가지다. 하나는 터미네이터가 등장해 인간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는 것. 나는 그 두 가지 악몽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 역시 내 기준으로는 악몽이다. 터미네이터는 나타나지 않고, 당신도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다른 업계 사람들까지 인공지능의 등장 앞에서 안전과 일자리를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설사 터미네이터를 막고 일자리는 지키더라도 어떤 인간적 가치들은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부서질 것이다. 그런 인간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대단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필요하지도 않다. 또 우리는 그런 파괴가 일어난 뒤에야 그 가치들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가장 중요한 문제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바둑을 더 잘 둔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동차가 사람보다 빨리 달리지만 육상에는 여전히 여러 달리기 종목이 있지 않은가? 달리기 선수들의 수입이나 자부심이 자동차 때문에 타격을 입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도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동물이 많이 있었다. 둘째, 많은 사람이 ‘인간다움’은 신체 능력보다 사고 능력과 더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라는 종의 장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셋째, 자동차가 사람이 달리는 방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넷째, 사람이 자동차에게 달리는 법을 배우지는 않는다.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패배한 직후 기자들이 프로기사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많은 기사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인간 기사는 할 일이 없어지는 거냐’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상당수 기사가 인간은 인공지능이 둘 수 없는 ‘인간의 바둑’을 두면 된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나는 그들을 만났고 “인공지능이 둘 수 없는 ‘인간의 바둑’이란 뭔가요?”라고 물었다. 뜻밖에도 7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인간의 바둑’이 뭔지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바둑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도 ‘인간의 바둑’을 향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대로 인간의 바둑을 버리고 인공지능처럼 두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신진서 9단은 ‘외워서 두는 수는 보통 20~30수에서 끝이 난다’라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AI 포석을 20~30수까지는 외워서 둘 수 있다는 얘기다. AI 포석을 외워서 둘 수 있는 한계가 그보다 좀 더 위에 있다고, 대략 50수까지라고 말하는 기사들도 있다.

그런데 바둑대회에는 제한 시간이 있다. 흑과 백이 각각 자기 수를 고민하는 데 쓸 시간이 정해져 있다. 초반 포석을 외워서 빨리 둘 수 있다면 그만큼 중반과 종반에 생각할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결과 젊은 일류 기사들은 대국할 때 초반에 걸리는 시간이 엄청 짧아졌다. AI 포석을 공부한 젊은 기사들은 초반 수십 수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둔다. 이런 대국의 초반은 사실상 서로 암기량을 확인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이런 트렌드 속에서 초반에 드러나던 기사들의 개성이랄 것도 사라졌는데, 이것을 ‘인간의 바둑’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둑계에서 이런 현상을 아쉬워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AI를 거부하고 ‘인간의 바둑’을 추구하는 노력을 보기는 어렵다. 실은 ‘인간의 바둑’이 무엇을 뜻하는지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프로기사들은 그런 논의를 할 시간에 AI 포석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목진석 9단이 설명했다.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 느낌에는 80~90퍼센트의 기사가 AI 포석을 그대로 둬요. 처음 30~40수 정도는 그냥 암기한 포석을 서로 ‘따다다닥’ 두죠. AI가 측정하는 이길 확률은 줄어들더라도 자기가 두고 싶은 대로 두는 기사들이 있기는 하죠. 그런 개성 있는 기사들이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포석, 똑같은 바둑을 두는 기사들만 존재한다면 보는 재미가 사라질 테니까요.”

나는 그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도 기사들에게 그런 조언을 했는지 물었다. “그게 딜레마였어요. 선수들이 자기들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국가대표팀은 이겨야 하잖아요. 아쉽지만 제가 아쉽다고 해서 선수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는 없죠.” 이겨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가장 큰 욕망이었다. 국가대표팀이든 프로기사 개인이든 마찬가지였다. 멋진 바둑을 둔다든가, 아름다운 바둑을 둔다든가, ‘인간의 바둑’을 두는 것은 이기고 난 뒤에 고민할 일이었다. 여러 프로기사가 ‘인간의 바둑’ 혹은 바둑의 예술성을 묻는 내게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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