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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본색

양상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언론본색

양상우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 292쪽 / 18,500원





‘너 자신을 알라’, 언론에 관한 환상



정직하지 않은 언론, ‘진실’에 무지한 언론인


“불편부당(不偏不黨) 정의 옹호(正義擁護)”(《조선일보》), “더 중앙에 두다”(《중앙일보》), “세상을 보는 맑은 창”(《동아일보》), “세상을 보는 균형”(《한국일보》),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한겨레》), “정론 직필 공명정대”(《경향신문》)….

한국 주요 신문들의 모토와 사시(社是)다. 한결같이 균형과 정직, 공정을 내세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들을 통하면, 세상의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신문들의 이 약속을 빈말로 여긴다. 실제로 많은 이가 언론에 냉소적이다. 과장, 축소, 왜곡 같은, 언론이 해선 안 될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과 실망을 쏟아낸다. 그렇다. 언론이 자신을 어떻게 내세우든, 우리가 경험하는 언론은 편파적이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며, 실상을 과장하거나 축소한다. 그렇기에 세상의 광고 중에 가장 과장된 광고는 어쩌면 한국 언론들의 모토와 사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언론이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언론인이나 언론을 접하는 누구에게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당위다. 언론의 소명과 규범을 다루는 언론학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저널리즘의 제1원칙이 ‘진실의 추구’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다. 언론이 전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소설(fiction)이나 선전(propaganda)에 불과하니, 바로 그 순간 언론은 언론이기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사회를 영위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도 ‘언론’과 ‘언론의 자유’였다. 언론이 자유로워야 진실이 드러날 수 있고, 진실에 기반해야 민주주의가 바르게 작동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기 일쑤다. 언론의 현실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대체 ‘언론이 전달한다는 진실’은 어떤 것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실망스러운 것은 언론인들은 ‘언론이 전하는 진실’에 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인들은 언제나 진실을 전한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 진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또한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프로페셔널’


사람들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달리, ‘언론이 추구하는 진실’에 관한 언론인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이런 다양함은 그들의 ‘행동 규범’이자 ‘지향하는 가치’인 저널리즘에 관한 이해가 언론인마다 다른 데서 연유한다. 대부분 언론인이 저널리즘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언론인을 위한 표준화된 교육·훈련 매뉴얼이나 시스템도 없다. 언론인들은 한결같이 ‘프로페셔널(전문 직업인)’이라 자처하지만, 실상은 딴판인 셈이다.

한국의 현실을 보자. 규모가 큰 유력 언론사라 해도, 전문 직업인인 언론인이 되기 위한 공식적인 교육은 입사한 뒤 길어야 6개월가량에 불과한 짧은 교육이 전부다. 언론사에서 실무를 교육하는 교육자는 매번 바뀌고, 입사 시기에 따라 교육의 기간이나 세부 내용이 달라지는 일도 흔하다. 변치 않는 것은 교육과 훈련 방식이다. 한국의 언론사에서는 언론인의 길에 갓 들어선 기자들을 ‘견습 기자’ 혹은 ‘수습기자’로 부른다.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론인 양성은 선배 기자들이 하는 일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히는 도제식으로 이뤄진다. 더욱이 최근에는 이런 교육마저도 약화되고 있다. 도제 관계를 뒷받침하는 서열문화와 일상적인 초과노동이 21세기의 수평적 의사소통과 자율을 중시하는 시대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탓이다. 이에 따라 도제식 교육을 고수해온 한국의 전통 언론은 기존의 교육은 물론, 채용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 이후에는 디지털에 기반한 소규모 언론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여기에 사실상 언론의 역할을 하는 유명 유튜버와 블로거 등 인플루언서까지 포함하면, 이른바 언론인의 그 숫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기존의 언론인들이 받아온 도제식 교육은 물론, 언론에 관한 어떤 교육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다.

요컨대, 언론인들은 스스로 ‘프로페셔널’이라 자부하지만 정작 프로페셔널에 걸맞은 전문 교육과 훈련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전체 언론계 차원의 경험이 체계화되어 전수되거나 공유되지도 않는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이들이 자신들이 전달하는 진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적 이해도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사람들을 깨우친다’는 언론인들이 자신의 일과 처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금성의 독자, 화성의 언론인


‘언론이 전해야 할 진실’을 제각각 중구난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언론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스 소비자인 일반인들도 ‘언론이 전해야 할 진실’에 관해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먼저 ‘진실’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들은 특정 현안에 관해 언론이 전하는 진실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확증 편향 때문이다. 확증 편향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심리적 경향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런 확증 편향을 바탕으로 뉴스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내용일수록 진실이라 여긴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언론 보도를 두고도 서로 다른 판단이 나오는 이유다. 언론인 역시 자신이 가진 확증 편향에 따라 사실을 수집하고 맥락을 선택해 보도한다. 특히 대부분 언론인은 자신이 보도한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정상적인’ 독자나 시청자라면 당연히 이를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많은 언론인과 수많은 언론 수용자 사이에는 확증 편향과 인간적 한계로 인해 생겨난 간극들이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극복이 쉽지 않은 간극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이 간극들은 한데 모이면 수많은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강처럼 깊고도 넓다. 또한 이 강에서는 새로운 사건들이 쉼 없이 흘러가는 물결처럼 넘실댄다. 언론이 그 강을 건너 진실을 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의 한국처럼 나에게 ‘참언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레기’이고, 나에게 ‘기레기’인 언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언론’인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닌 일반인과 언론인 사이의 간극은 더욱 커진다.



변함없는 뉴스, 진화하는 뉴스 시장



불변의 욕구, 생존과 흥미


어떤 뉴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끌까? 자명한 얘기이지만, 사람들은 생존 본능과 그와 연결된 감각을 자극하는 뉴스에 가장 먼저 눈과 귀를 빼앗긴다. 재난이나 전쟁에 관한 소식 등이 대표적이다. 또, 임박한 위험을 알리는 소식 다음으로 중요한 뉴스는 공동체 구성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었다. 죽음 또한 인간의 생존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소식은 여전히 헤드라인 뉴스다.

재난이나 죽음처럼 생존을 위협하는 정보 말고,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뉴스도 예나 지금이나 가치 있는 뉴스다. 예컨대, 자연의 변화나 개인이나 공동체의 경제 활동과 관련된 정보는 삶을 위해 필요한 실용적인 뉴스다. 그러나 뉴스 역사학자들은 사람들이 단순히 흥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뉴스를 찾아왔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정보나 생존에 위협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주변 환경을 조사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 범위는 넓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흥미로운 뉴스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뉴스 시장의 등장과 변화


본능에서 비롯한 인간의 뉴스 욕구는 여느 재화나 서비스처럼 뉴스의 소비와 공급이 이뤄지는 메커니즘을 생겨나게 했다. 이른바 시장의 메커니즘이다. 시장을 다루는 경제학에서는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이 생산 비용과 시장 가격에 좌우된다. 이런 원리는 뉴스 혹은 정보 시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보의 공급도 정보의 생산(수집·저장·가공)과 전달에 드는 비용에 직접적으로 좌우된다. 정보의 수집·저장·가공·전달 수단이 부족해 정보의 공급에 드는 비용이 커질수록, 정보는 희귀해지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높아진다. 또 비싼 정보는 결국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소수의 전유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선 실질적인 뉴스 소비자도 극소수에 불과하고, 시장다운 시장도 등장하기 어렵다.

문자가 발명되면서 정보는 본격적으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는 자연에 대한 이해도 진전되고 사회도 성장하며 새로운 정보의 양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혜택은 글을 읽을 수 있는 극소수 지배계층에게만 돌아갔다. 정보는 증가했어도 널리 유통될 수 없었고, 시장다운 뉴스 시장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수많은 뉴스 소비자와 뉴스 공급자가 나타나, 시장다운 시장으로 뉴스 시장이 등장한 것은 인쇄 혁명 이후였다. 17세기 이후, 인쇄물을 통한 뉴스와 정보의 대량 배포가 적은 비용으로 가능해졌다. 문맹률도 낮아져 인쇄 매체를 볼 수 있는 이들도 크게 증가했다. 직업적 뉴스 공급자 또한 함께 늘었다. 근대적 신문들이 속속 생겨난 것도 이때다. 이어, 기업의 형태를 띤 신문사가 나타났고 비로소 근대적 뉴스 시장도 등장했다.

20세기는 대중 미디어의 전성기였다. 한 번에 수백만 부를 찍어내는 신문에 이어, 일거에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뉴스를 전하는 방송이 가세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 전달의 시공간적 한계는 사실상 사라졌고, 대중이 얻는 정보와 질과 양도 비약적으로 개선됐다. 뉴스 혹은 정보의 생산과 전달은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자리 잡았고, 언론의 기업화와 산업화도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이 시기에 신문과 방송 같은 전통 언론은 정보의 대중화를 이끌며, 정보의 수집과 공급에서 여론의 형성에 이르는 ‘정보 프로세스’의 중심에 섰다. 이에 따라 신문과 방송의 언론인은 한 사회에 통용되는 ‘진실’에 관한 실질적 공인자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전통 언론과 언론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 때문에, 뉴스 소비자는 뉴스 시장의 주인공이었음에도 정보 공급을 독점한 전통 언론에 의해 대상화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후 디지털 기술과 인프라에 힘입어 뉴스와 정보의 수집·저장·전달 비용은 또 한 번 극적으로 감소했다. 거대한 윤전기와 방송시설이라는 언론 산업의 진입 장벽이 사라지자,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뉴스 미디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뉴스 공급자들 간의 경쟁도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치열해졌다. 대중 미디어를 거치지 않는 정보와 뉴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운동선수, 연예인, 정치인, 기업과 정당 등은 물론 일반인들도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직접 소통한다. 이들의 소셜 미디어 팔로워는 많게는 수천만 명에 이른다. 모두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이제는 이들 또한 뉴스와 정보의 공급자다.

공급자 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소비자의 힘은 강해진다. 디지털 시대의 뉴스 시장에서도 이는 다를 바 없다. 아울러 신문과 방송 같은 전통 언론이 장악해온 뉴스와 정보의 유통도 소셜 미디어와 웹 포털 같은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에게 넘어갔다. 결국 전통 언론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뉴스 시장의 주도권은 뉴스 소비자와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인류의 등장 이래, 뉴스 시장은 이처럼 진화를 거듭해왔다. 미디어 기술 발전은 정보의 공급비용을 여러 차례 혁명적으로 감소시키며 뉴스 시장의 등장과 발전을 낳았다. 또 시장 원리에 따라, 뉴스 공급자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뉴스 소비자의 힘은 더 강해졌다. 이런 경향은 특히 디지털 시대 들어 더욱 심화했다.



뉴스의 이상과 현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뉴스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뉴스를 구분한다. 마치 몸에 이로운 ‘건강식품’과 해로운 ‘불량 식품’을 구분하듯이 말이다. ‘불량 언론’을 얘기할 때의 가장 흔한 잣대는 사회 윤리다. 인간의 말초적 감성을 유혹하는 범죄·괴기사건·성 추문 등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황색 언론이 대표적 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를 비판하면서도, 그런 뉴스에 눈과 귀를 연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이유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들이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까닭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능을 바꿀 수 없다면, 사람들의 선정적인 뉴스 소비도 없어지지 않는다.

건강한 언론과 불량한 언론을 구분하는 또 다른 잣대는 사람들이 제각기 지닌 생각과 경험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닌 확증 편향에 부합하지 않는 뉴스도 ‘불량 식품’처럼 여긴다. 예를 들어, 정치적 편향이 강한 이들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비우호적인 언론은 황색 언론보다 더한 ‘불량 언론’이다. 즉,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진실을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에 부합하는 보도를 원한다. 이런 이율배반적 뉴스 욕망은 인간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성은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고를, 본능은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낳는다.

이런 두 특성은 인간이 원하는 뉴스에 반영된다. 뉴스 공급자들도 뉴스 소비자인 인간의 이런 두 욕구를 잘 알기 때문이다. 현실을 이치에 맞게 객관적으로 전하는 뉴스와 더불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 정파적 편향을 지닌 뉴스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따라서, ‘…해야 한다’는 당위를 아무리 강조해도,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기인하는 이런 현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되레 당위를 강조하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다. 현실을 바로 보지 않는다면,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뉴스와 언론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의 이성과 본능, 또 이 두 가지가 투영된 모든 뉴스가 중요하다. 또한 뉴스의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그 현실이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부터 뉴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해보자.

이율배반적 뉴스 욕망


진실 보도 vs 편향적 보도:
사람들은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뉴스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떤 뉴스를 신뢰할까? 언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즉 확증 편향에 부합하는 뉴스일수록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확증 편향에 일치하는 뉴스를 더 신뢰한다는 연구 결과는 심리학과 미디어 연구에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입증됐다.

이런 경향은 뉴스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뉴스일수록, 더 신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자신의 확증 편향에 부합할수록, 공정성이나 균형, 객관성 같은 규범이 제대로 지켜진 뉴스인지 여부에는 무관심해진다. 말로는 언론을 향해 ‘진실’을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과 같은 뉴스’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의식하며 뉴스를 내놓는다. 이런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있고, 이를 반영하는 좌파와 우파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성과 본능:
사람들이 뉴스를 신뢰하는 데는 다른 요인들도 있다. 이성적 인식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결과들을 보면, 사람들은 뉴스에 객관적 사실과 명확한 데이터가 담기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쓰인 기사일수록 더 신뢰했다. 반대로, 과도한 감정적 표현이나 의견이 섞인 뉴스는 상대적으로 덜 신뢰했다. 즉, 사람들은 이성에 부합하는 정연한 논리로 작성된 뉴스일수록 더 신뢰한다. 심층적인 내용, 객관적인 데이터와 시각적 자료, 다양한 관점의 제공 등도 뉴스 소비자의 이성적 인식에 부합하기 위해 뉴스가 지녀야 할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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