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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없음

헬렌 톰슨 지음 | 윌북


질서 없음

헬렌 톰슨 지음

윌북 / 2025년 10월 / 480쪽 / 29,800원





1부 지정학



1장 | 석유 시대의 시작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를 “재앙적인 합의”라 부르며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했을 때, 이는 단순히 하나의 국제 조약을 파기하는 행위를 넘어섰다. 그것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을 규정해 온 석유와 권력의 방정식을 뒤흔드는 거대한 도박의 시작이었다. 트럼프가 내세운 “최대 경제 압박”은 이란의 석유 수출을 옥죄었지만, 역설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군의 드론이 격추되고 사우디의 석유 시설이 공격받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한계와 NATO 동맹의 깊은 균열만을 드러냈다. 이 모든 혼란의 기원은 20세기 초, 석탄의 시대가 저물고 석유라는 새로운 검은 황금이 세계의 동력으로 떠오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유 시대의 서막은 미국을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밀어 올린 거대한 지정학적 전환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유라시아 대륙이 세계사의 중심이었지만, 비유라시아 국가였던 미국은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두 대양이라는 자연적 방벽 뒤에서 독자적인 성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 성장의 핵심 동력은 바로 펜실베이니아의 유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였다. “우리는 성경보다 등유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석유는 미국의 일상을 밝혔고, 헨리 포드의 ‘모델 T’는 석유를 단순한 조명 연료에서 산업 시대의 혈액으로 바꾸어 놓았다. 유일한 경쟁자였던 러시아의 석유 산업이 1905년 혁명의 불길 속에 바쿠 유전과 함께 잿더미가 되면서, 다가올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을 에너지 패권은 사실상 미국의 손에 완벽하게 쥐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석유가 현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자원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무대였다. 윈스턴 처칠이 영국 해군의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을 때, 그는 “수많은 문제에 대응해 무기를 들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말대로, 전쟁은 석유 확보를 위한 처절한 투쟁이 되었다. 독일은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여 흑해를 봉쇄함으로써 러시아의 석유를 차단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루마니아 유전에 목을 매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연합국의 대의가 석유의 파도를 타고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파도의 80퍼센트는 대서양 너머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전쟁은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만들며 막대한 금융 권력까지 안겨주었다. “우리가 빚을 갚지 않는 한 우리를 봉건제후국으로 취급할 것”이라는 영국 대사의 한탄처럼 유럽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하지만 이 막강한 권력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실질적인 패권으로 곧장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 내에 깊게 뿌리내린 고립주의 정서와 유럽에 막대한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가들의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다시 한번 석유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임을 증명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독일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본질적으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파국적인 결정의 이면에는 캅카스 유전 없이는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냉혹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유럽의 제국들 역시 에너지 자립에 처절하게 실패했고, 전쟁의 향방은 또다시 서반구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는 미국의 석유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쟁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동맹을 공고히 하는 한편, 중동에 새로운 불안의 씨앗을 심었다. 석유를 매개로 한 아랍 군주국과의 전략적 동맹과 유대 국가 창설에 대한 국내의 강력한 지지라는 두 상충하는 압력 사이에서, 미국은 과거 대영제국을 괴롭혔던 지정학적 딜레마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석유 시대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이 오래된 단층선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2장 | 석유를 보장할 수 없다


2014년 11월, 유가가 5개월째 하락하는 상황에서 OPEC은 이례적으로 생산량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배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었다. 그들의 계산은 복잡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셰일오일 붐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지만, 더 깊게는 시리아 내전에서 자신들의 숙적인 이란과 러시아를 재정적으로 압박하려는 지정학적 노림수가 깔려 있었다. “석유가 시리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이라는 한 사우디 외교관의 말처럼, 이는 석유를 무기로 한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저금리 환경 덕분에 미국의 셰일 기업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러시아는 시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 이란은 핵 합의 타결로 오히려 석유 수출을 늘리는 기회를 잡았다.

사우디의 섣부른 유가 전쟁은 미-사우디 관계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9.11 테러소송법을 둘러싼 갈등과 사우디의 미 국채 매각 위협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양국의 ‘석유-안보 동맹’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궁지에 몰린 사우디는 결국 유가를 다시 올리기 위해 한때 적으로 여겼던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2016년, OPEC과 러시아는 ‘OPEC 플러스’라는 새로운 카르텔을 형성해 공동 감산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동맹 역시 태생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유가 상승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셰일 기업들에게도 이득이 되었고, 유럽 가스 시장에서는 미국의 셰일가스와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 위태로운 균형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중국의 석유 수요가 급감하자 러시아는 이를 미국의 셰일 산업을 고사시킬 기회로 여겼고, 이에 반발한 사우디가 또다시 유가 전쟁을 시작하면서 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후 미국, 사우디, 러시아 3국이 유가 안정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마지못해 손을 잡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2010년대에 펼쳐진 이 혼란스러운 에너지 지정학의 뿌리는 냉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전후 서유럽 안보의 현실적 수단으로서 군사동맹이 아니라 경제 원조에 의지했다. 마셜플랜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보기에 서유럽 안보는 경제동맹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군사동맹을 맺는 데 달려 있었다. 1948년에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국가들은 상호방위 동맹으로서 ‘서방 연합(Western Union)’ 결성에 동의했고,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미국도 합류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다. 조약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가 서방 연합의 5개국과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포르투갈에 어떤 공격이라도 가해질 시 대응할 법적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NATO는 에너지 안보 문제를 둘러싸고 구조적인 분열의 길을 걸었다. 이 구조적 모순은 1956년 수에즈 위기에서 극적으로 폭발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군사행동에 나섰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미국은 석유 공급을 차단하고 금융 압박을 가하며 영국의 굴복을 이끌어냈다. 앤서니 이든 총리가 굴욕적인 철수를 결정했을 때,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 총리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유럽’으로 복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대서양 동맹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미국의 배신에 분노한 유럽 국가들은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경제공동체(EEC) 창설을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유럽이 소련산 석유를 수입하는 것을 금기시했던 암묵적인 합의가 깨지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냉전 시기 형성된 이 균열과 모순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미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가 벌이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에너지 패권 경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3장 | 유라시아, 재구성되다


2015년 9월, 러시아 흑해 함대가 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나 시리아를 향했을 때, 이는 냉전 종식 이후 25년간 유지되어 온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극적인 신호탄이었다.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시리아 내전의 판도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2016년 미국 대선을 “러시아에 맞서자”(클린턴)와 “중국에 맞서자”(트럼프)는 두 개의 거대한 지정학적 구호가 충돌하는 전장으로 만들었다. 클린턴은 “여기에 걸린 것은 러시아의 야욕과 공격성”이라며 강경 대응을 주장했고, 트럼프는 되려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ISIS를 격퇴해야 한다고 맞섰다. 선거는 역설적으로 러시아와 중국 모두와의 대치를 강화하는 국내 정치 지형을 낳았고, 미국은 유라시아의 오래된 단층선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했다.

이 거대한 지정학적 요동의 진원지는 단연 유럽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유럽은 어디인가?”라는 근본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EU와 NATO의 동진(東進)은 과거 소비에트의 그늘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러시아와의 새로운 경계선을 그으며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이 첨예한 균열의 최전선에 놓였다. EU는 우크라이나를 경제적으로 끌어안으려 하면서도(“유럽 인접국 정책”), 안보의 핵심인 NATO 가입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끝내 선을 그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는 결국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전쟁이라는 파국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남쪽에서는 튀르키예가 새로운 전략적 변수로 급부상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캅카스 지역의 막대한 석유와 가스 자원이 발견되면서, 튀르키예는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에너지 허브로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극적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EU는 “유럽연합은 문명의 프로젝트이며 이 프로젝트에 튀르키예의 자리는 없다”는 문화적 배타성을 드러내며 튀르키예의 가입을 외면했다. 이는 튀르키예가 서방 세계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신오스만주의’의 길을 모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리아 내전과 그로 인한 난민 위기는 이 균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2016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수백만 명의 난민을 무기로 EU를 압박해 막대한 지원과 비자 면제 약속을 받아내는 한편, 쿠데타 시도를 빌미로 국내의 반대파를 숙청하고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동지중해에서는 에너지 자원을 둘러싸고 EU 회원국인 그리스, 키프로스와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노골적으로 힘을 과시했다.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의 또 다른 한 축에서는 중국이 거대한 지정학적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2003년 2차 이라크 전쟁은 중국 지도부에 ‘믈라카 딜레마’를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이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믈라카 해협을 언제든 봉쇄할 수 있다는 취약성을 절감한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 구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유라시아를 중국의 “지정학적 후방”으로 삼아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와의 에너지·인프라 연결을 강화하고, 동시에 해군력을 폭발적으로 증강하며 ‘해양 강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은 이러한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두 강대국 간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10년대에 걸쳐 미국이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독립’을 달성하며 세계 에너지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동안, 유라시아 대륙은 과거의 제국들이 충돌하던 19세기 말의 ‘그레이트 게임’을 연상시키는 복잡하고 위험한 경쟁의 장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의 힘은 커지는 동시에 작아졌다. 셰일 에너지는 미국에 중동에서 한 발 뺄 수 있는 전략적 유연성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유럽의 가스 시장을 둘러싸고 러시아와의 새로운 갈등을 촉발했으며, 중동에서는 사우디-이란-러시아 간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더욱 깊이 얽히게 만들었다. 냉전이 종식되며 잠시 사라진 듯 보였던 유라시아의 지정학은 에너지, 안보, 문명의 오래된 단층선을 따라 더욱 복잡하고 위험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2부 경제



4장 | 우리의 통화, 당신네 문제


2011년 여름, 유로존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한 편의 드라마는 현대 세계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재정 위기에 직면한 이탈리아에 유럽중앙은행(ECB)이 보낸 한 통의 서한은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ECB는 이탈리아 정부에 긴축 재정과 구조 개혁을 명령했고, 이 압력 앞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결국 무너졌다. 그의 자리는 선출되지 않은 기술관료 마리오 몬티가 대신했다.

이탈리아의 주권이 브뤼셀과 프랑크푸르트의 손에 넘어간 이 사건은 이탈리아 정치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5년 뒤 총선에서 반기성 정당 오성운동과 유럽회의주의 극우 정당 레가가 연합하여 집권하는 배경이 되었다. 레가의 당수 마테오 살비니는 “유로가 우리 경제에 패착이었음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며 “이름만 유로일 뿐 사실은 독일 마르크이기 때문”이라고 외쳤다. 그의 신랄한 비판은 유로존이 탄생부터 안고 있었던 근본적인 딜레마, 즉 통화 주권을 둘러싼 국가 간의 위계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유로존의 이야기는 197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에서 시작한다. 달러를 유일한 금태환 통화로 삼았던 이 안정적인 국제 통화 질서는 베트남 전쟁의 비용과 미국의 무역 적자, 그리고 무엇보다 규제 밖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팽창하던 ‘유로달러(미국이 아닌 해외에서 거래되는 달러)’ 시장의 압력 속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유로달러 시장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며 각국 중앙은행의 통제를 무력화했고, 달러-금 연동의 근간을 흔들었다.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을 전격 중단했다. 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구상했던 안정적인 국제 통화 시스템의 공식적인 종언이자, 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플레이션이 일상화된 새로운 변동환율제의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브레턴우즈의 종말은 유럽에 이중의 부담을 안겼다. 유럽 국가들은 약해진 달러와 강해진 독일 마르크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유럽의 첫 시도인 ‘스네이크 체제(환율 변동 범위를 제한하는 방식)’는 회원국 간의 경제적 격차와 상이한 정책 우선순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유럽은 독일 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의 고정환율제인 유럽통화제도(EMS)를 출범시켰다. 금융 역사학자 찰스 킨들버거가 “독일 마르크화에 프랑스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이는 사실상 유럽의 통화 정책 주권을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에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은 이 흐름에서 줄곧 비켜서 있었다. 과거 대영제국의 유산인 ‘스털링 지역’ 문제와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독일 중심의 통화 블록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한편 1979년 폴 볼커 연준 의장이 주도한 급격한 금리 인상, 이른바 ‘볼커 쇼크’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강달러와 고금리는 유럽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동시에 유럽 내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독일은 긴축으로 대응했지만, 프랑스는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가 집권하며 확장 정책을 시도하다 결국 분데스방크의 긴축 정책에 굴복하는 ‘강한 프랑’ 전략으로 선회해야 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은 프랑스가 단일통화, 즉 유로화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프랑스의 목표는 명확했다. 분데스방크가 휘두르는 절대적인 통화 권력을 유럽중앙은행(ECB)이라는 초국가적 기구 안에 가두는 것이었다. 독일은 자국의 마르크화를 포기하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새로 만들어질 ECB가 분데스방크처럼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립적인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또한 부채가 많은 남유럽 국가들을 배제한 소규모의 ‘엘리트’ 통화연맹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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