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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전쟁사

서천규 지음 | 북코리아


클래식과 전쟁사

서천규 지음

북코리아 / 2025년 5월 / 304쪽 / 22,000원





중세시대 전쟁과 바로크 음악



백년전쟁이 만들어낸 《오를레앙의 처녀》


십자군전쟁의 소용돌이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백년전쟁이 발생해 무려 116년 넘게 지속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지속한 전쟁은 단순히 두 왕국 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동맹국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럽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그동안 군인은 일종의 특권을 가진 귀족 자제나 기사계급이 중심이었는데,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평민도 군대의 일원이 되었다. 반면 중세 봉건제에서 대표적인 용병 그룹이었던 기사계급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을 흔히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벌인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영토 문제와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잉글랜드 왕조 소유의 영토가 많았고, 잉글랜드에서 백작이나 공작이 임명되어 영주로 다스리고 있었다. 물론, 이들 영주는 기본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는 이중 구조를 갖는 셈이었다. 특히, 프랑스 북서부의 노르망디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은 1066년 잉글랜드를 침략해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리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잉글랜드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 없이 죽음을 앞두게 되자 부왕 필리프 4세의 형제인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의 아들 필리프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둔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가 반대하면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사벨라가 죽은 샤를 4세의 여동생으로 당시 에드워드 3세의 부왕인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2세가 양성애자인 데다 정치적으로 무능하여 국정이 파탄에 이르자 이사벨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킨다. 그리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혔다. 이런 이유에서 이사벨라는 자신이 샤를 4세의 누이동생이므로 왕녀로서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샤를 4세의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가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옹립하자 이를 묵시적으로 용인해 몇 년간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필리프 6세가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지인 아키텐을 무단으로 점유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노르망디 해안에도 함대를 보내 위협을 가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은밀히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면서 잉글랜드를 견제하도록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다시 꺼내들었다.

에드워드 3세는 마침내 프랑스를 향해 도발적인 도전장을 던지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북쪽의 모직 공업 도시로 잉글랜드와 경제적 관계가 깊은 플랑드르 지방을 외교적 노력으로 자신들 편에 서게 하여 동맹을 맺고 종주권을 주장했다. 아울러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로 프랑스 남쪽의 아키텐령에 속해 있는 가스코뉴를 잉글랜드는 지키고자 했고, 프랑스는 탈환하고자 했다.

1337년에 전쟁을 개시한 에드워드 3세는 1340년에 북부 브뤼허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프랑스는 잉글랜드 본토를 공격할 수 없게 되어, 백년전쟁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7월과 8월에 카엔 전투와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파리까지 진군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병력을 집결시켜 대응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일단 플랑드르로 철수한다. 프랑스군이 추격하자 잉글랜드군은 방어하기 유리한 크레시 지역에 진용을 갖추고 전투에 대비한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군이 석궁과 중기병(중무장의 말을 탄 기사)을 주력으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장궁을 훈련시켰다. 석궁이 분당 3~5발을 쏜다면 장궁은 10~20발을 쏘고, 더 멀리 쏠 수 있었다. 또한, 중기병이 말을 타고 돌진하는 것에 대비해 이동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이동이 지연되면 장궁을 쏴서 격퇴하도록 했다. 기사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뚫지 못할 때는 말을 쏘도록 했다. 아무리 강한 중기병의 기사라도 말이 없으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기동이 거의 불가능한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적은 병력임에도 대승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북부의 해안 도시 칼레를 11개월가량 포위해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당시 흑사병이 돌아 더는 전투가 불가능했다. 잉글랜드의 승리는 농민이나 평민으로 구성된 장궁병의 활약이 돋보인 결과였다. 이에 반해 중무장을 한 기사는 제대로 활약을 펼치지 못해 무용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가 이끄는 군대가 이번에는 프랑스 남부를 공격했다. 아키텐을 중심으로 북으로 이동하며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당시 프랑스는 필리프 6세가 죽고 장 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1356년 흑태자의 군대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이끄는 군대를 대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초기 전쟁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이어나갔다. 포로로 잡혔던 장 2세는 끝까지 포로 석방보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런던에서 죽었다.

1364년에는 샤를 5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아키텐 지역의 귀족들을 선동해 잉글랜드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그로써 양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했고, 1369년 흑태자의 동생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남부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랑스가 분전했고, 해전에서도 동맹군을 동원해 승리함으로써 초기에 잉글랜드에 빼앗겼던 대부분 영토를 탈환했다.

1377년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1380년에는 프랑스에서도 샤를 5세가 죽고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두 왕이 모두 아직 젊은 데다가 내부에서 반란이 발생해 한동안 전쟁은 중단되었다. 1399년에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헨리 4세가 즉위했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가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면서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가 파벌 간 정쟁이 심화한 틈을 타 1415년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했고, 여세를 몰아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그 결과 1420년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한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왕세자와 그의 추종 세력들은 여전히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중남부에 거점을 확보하면서 항전을 계속했다.

1422년에는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임을 자칭했고, 샤를 6세의 왕세자인 샤를 7세는 스스로 프랑스의 왕임을 선언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샤를 7세는 1년여를 버텼지만 더 이상의 병력 동원도 어려워 도저히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로 잔 다르크가 등장한 것이다. 그녀의 나이 17세 되던 1429년 잔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며 샤를 7세를 찾아가 승인을 받고 전쟁에 참전했다. 1429년 4월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게 포위 당한 오를레앙 진영에 도착했지만, 그곳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고, 의견을 냈다. 특히, 포위되어 있는 5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한 것에 대해 질타했다. 마침내 5월 4일 프랑스군은 생루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했고, 5월 5일에는 생장르블랑 요새로 진격했다. 잔 다르크는 또 다른 요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지휘관은 이를 거절했다. 잔 다르크는 굴하지 않고 성내 주민과 병사들을 이끌고 재차 공격을 감행해 요새를 탈환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의 오를레앙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 그녀를 영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의 다음 공격을 파리로 예상했으나 그녀는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진격을 감행했다. 샤를 7세도 잔 다르크에게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잔다르크는 랭스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429년 7월 16일 잔 다르크는 마침내 랭스에 도착했고, 7월 17일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잔 다르크는 9월 파리를 공격했고, 10월에는 생피에르르무치를 탈환하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4월에는 콩비에뉴가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샤를 7세의 반대파)군에게 포위당했다고 하자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그곳에서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잡혔다.

잉글랜드는 비싼 몸값을 지불하고 부르고뉴군으로부터 잔 다르크를 넘겨받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그녀를 이단의 마녀로 몰아가려 했다. 그래야 프랑스의 승리도 부정하고, 샤를 7세의 왕위 계승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차례의 재판 후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해졌고 유해는 센강에 뿌려졌다.

헨리 6세는 그해 12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지만, 샤를 7세는 끝까지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했다. 잔 다르크가 죽은 이후에도 22년이나 더 지속된 전쟁은 프랑스군이 1437년에 파리를, 1449년에는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사실상 종료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칼레를 제외하고 모든 영지를 영국으로부터 탈환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1813~1901)는 백년전쟁의 잔 다르크와 관련한 3막의 오페라 《조반나 다르크》를 작곡했다. 1844년 가을에 시작해 1845년 초에 완성했으며, 1845년 2월에 초연을 가졌다. 서막과 1막에서는 조반나(잔 다르크 역)가 신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내용이 묘사되었고, 2막에서는 조반나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내용과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진행된다. 마지막 3막에서는 조반나가 영국군의 포로로 잡혀 화형에 처해질 위기에 빠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구출해주었고, 조반나는 다시 전장으로 향한다. 이어 샤를 7세는 프랑스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조반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런데 조반나의 시신을 옮겨와 샤를 7세가 바라보는 순간 조반나가 다시 살아난다. 왕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막을 내린다.

한편,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도 1879년에 백년전쟁의 잔 다르크를 소재로 4막 6장의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1801년에 쓴 비극 『오를레앙의 처녀』를 각본으로 하고 있다. 물론, 베르디의 오페라도 그 뿌리는 실러의 극본이다.



혁명과 나폴레옹, 그리고 클래식



프랑스 혁명전쟁과 베토벤, 하이든


프랑스혁명은 중세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속해온 봉건제적 절대왕정체제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도시근로자, 시민 등이 저항한 민중혁명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권은 전제군주국의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군주는 헌법을 초월한 존재로 무제한적 권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고, 국체와 정체의 존립 근거가 군주의 절대적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태양왕’ 루이 14세도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울러 당시 군주의 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성직자와 귀족이었다.

국가재정을 운영하려면 많은 세금이 필요한데, 이들 귀족과 성직자 등의 기득권 세력은 전 국토의 약 40%를 소유하면서 세금은 내지 않고 그야말로 특권만 누리고 있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평민, 산업혁명 후 급성장한 수공업자 같은 부르주아의 몫이었다. 게다가 세금 징수를 특정 계층이 대행하도록 함으로써 이들은 정해진 세금을 채우려 했고, 자신들의 몫을 챙기려 농민들을 심하게 압박했다. 평민계층의 불만은 커졌고,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과거 루이 14세 때부터 국가재정이 부족하면 세수로 이를 해결하기보다 국채를 발행하거나 빌려와 충당하다 보니 채무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대물림되어왔다. 루이 16세 때는 국가재정의 절반을 선대 왕들이 대물림한 채무를 상환하는 데 투입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왕실은 여전히 사치를 일삼았고, 귀족들은 아첨하며 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게다가 1778년에는 미국의 독립전쟁에도 참전했는데, 미국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정적 부채가 생겼다. 또한, 프랑스혁명이 발생하기 몇 해 전인 1785년부터는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 수확이 급격히 감소했고, 그다음 해에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또 그다음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로 극심한 식량부족 현상이 이어졌고, 물가마저 폭등하며 민중의 삶은 궁핍해졌다.

루이 16세는 재정문제와 과세 등을 논의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런데 삼부회의 성직자와 귀족은 기득권을 가진 계층으로 같은 입장이다 보니 표결하면 평민계층은 늘 들러리를 서는 입장이었다. 당시 평민대표는 자신들의 의원 수를 2배로 늘려달라고 요구했고, 어렵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과세, 재정문제만 논의했으면 하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평민 대표들은 사회 전반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성토했고, 불평등한 표결방식에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 대표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와 같이 신분별 비례 투표를 주장했다. 평민대표들은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해 결국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루이 16세는 크게 당황했고, 이를 불법 행동으로 규정해 군대를 동원해 삼부회 회의장을 폐쇄했다. 그러자 평민대표들은 테니스코트로 이동해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또한, 일부 성직자와 부르주아에서 신분 상승한 귀족들도 국민의회에 동조하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 가운데 불안감이 커진 루이 16세가 국경 수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베르사유와 파리로 이동시켰다. 게다가 국왕이 당시 파리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재무총감 네케르를 파면하자 파리 시민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루이 16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밀려오자 파리 시민은 무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그곳은 과거부터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진 요새이기에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이 있었다. 시민이 습격했을 때 감옥을 지키던 군대와 충돌하면서 시민의 희생이 많이 발생했다. 성난 시민은 감옥 수비대장과 파리시장을 잔인하게 살육했고 그들의 목을 창끝에 걸어 매달았다.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알려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그들은 영주와 귀족들을 살해하고 토지대장을 불태웠다. 어느덧 프랑스의 권력은 루이 16세로부터 국민의회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국민의회는 이어 ‘봉건제 폐지 선언’을 하는데, 특히 신분적 차별을 타파하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파리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 국민위병을 조직했다.

8월 26일에는 국민의회에 의해 그 유명한 「프랑스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천부인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표였다. 이제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깊게 빠져들었다.

한편, 당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렀는데 국민의회와 혁명세력은 그들의 거처를 파리로 옮기도록 강요했다. 옮긴 후에는 이들의 모든 활동을 감시함으로써 감금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불안감과 위기감을 느낀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파리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국경지대에서 혁명군에게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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