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뭇잎에서 숨결을 본다
우종영 지음 | 흐름출판
나는 나뭇잎에서 숨결을 본다
우종영 지음
흐름출판 / 2025년 8월 / 396쪽 / 23,000원
1장. 감(感), 느낌의 높낮이
생태감수성 : 내 안에 있는 너를 만나기 위해우리는 숲길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바다를 바라보며 분노를 가라앉히며,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상쾌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과학은 오래전부터 자연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감상적인 환상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배제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인식만 선호한 채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어온 것이지요. 이러한 교육은 생태감수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생태계에서 고립된 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분리된 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찾는 이유는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가 인간에게 상실감을 느끼게 하고 우울증 같은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자연과 분리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태감수성을 길러 자연의 가치를 느끼며 ‘내 안의 또 다른 너’를 만나야 합니다.
생태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지구 환경 문제를 거시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자연과 자신의 삶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주변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생태계에도 깊이 공감하며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특정 새나 식물의 부재와 같은 현지 생태계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환경 윤리를 따르는 제품을 구입하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피하고,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색합니다.
생태감수성을 쭉쭉 올리려면 우선 일상에서 자연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요. 산책이나 캠핑, 텃밭 가꾸기처럼 다양한 야외 활동을 하거나 집 안에 작은 화분을 들이거나 화단을 만들어 상추, 깻잎, 방울토마토 등을 직접 재배해보세요. 식물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식물과 자연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고 그것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주변의 식물들을 관찰하고 식물도감을 만들거나 버려진 땅에 꽃씨를 뿌리고 식물들의 생태를 알아가다 보면 생태감수성이 쑥쑥 올라가며 식물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대상과 일체화되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시를 쓰기 위해 대상과의 일체화를 통해 그것에 몰입합니다. 일체화의 방법 중에는 의인화 기법이 있습니다. 의인화 기법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조이스 킬머의 시 「나무」 중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마른 입술을 내리누르고 서 있는 나무, 온종일 신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라는 표현에서 나무는 마치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연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을 의인화하며 자연의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자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해석함으로써 자연과 깊이 교감할 수 있게 됩니다.
생태감수성은 생태계가 환경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는 해수면의 상승, 폭염, 홍수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생물 다양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생물체들은 적응하거나 이주하거나 멸종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지구의 생태계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하지만 생태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생태계를 위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모든 생명체가 지속 가능하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 늦기 전에 지구 환경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적절한 앎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지적 방법과 체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어른들은 그동안 잘못 인식되어온 관념에서 벗어나 자연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생태감수성을 키워야 합니다. 잘 안되면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면 됩니다. 어린이가 꽃에게 물어보는 것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세상을 바라보면 내 안에 있는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름(difference) : 나를 이루는 방식나무와 풀,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구분하기 쉬울까요? 풀은 작고 나무는 크니까 나무가 더 구분하기 쉽다고 생각하겠지만, 30여 년 동안 식물에 대한 강의를 해온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무가 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처럼 온대지방의 풀은 대부분 일년생이거나 다년생이어서 생애 주기가 짧지만 나무는 오래 삽니다. 따라서 풀은 자신의 몸을 변화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으나 나무는 한자리에서 오래 살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물려받은 유전자의 명령대로 살다간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같은 종의 나무라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나무만 그럴까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릅니다. 하물며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 외모는 물론이고 성격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다름은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문화, 언어, 생각,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도 크게 다른, 다양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이 모이면 다양한 시각과 접근 방식이 만나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결책이 탄생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문화와 전통과 생각을 알아가며 세상을 깊게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에 따른 다름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얻고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름은 내 안의 나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나’는 나와 다른 타인들과 교류하면서 만나는 대상마다 내가 달라지는 마음을 느낍니다. 『나란 무엇인가』의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에 따르면 ‘나’는 하나가 아니고 상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하나라고 볼 수 없으며, 내가 교류하고 있는 타자의 숫자만큼이 바로 ‘나’입니다. ‘나’는 상대에 따라 내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감정을 인지합니다. 즉, 변하지 않는 진정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이지요. 결국 개인은 유일한 자기가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로 이루어졌으므로 ‘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분할 가능한 ‘분인(分人, dividual)’이라는 것이지요.
다름은 다양성의 원천입니다. 다양한 문화와 관습, 언어와 종교, 생각과 의견이 공존하는 세상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곳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성은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측정하는 지표가 됩니다. 농장에서 작물의 생산성을 측정하기 위해 땅의 영양 상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사회의 건강도도 다양성이라는 지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단순히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기본 구조 안에 그것들이 얼마나 잘 녹아들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건강함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하지요.
다름은 생태계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특히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양한 생태계는 환경 변화와 교란에 대응하는 능력이 더 뛰어납니다. 질병이나 환경 변화로 인해 한 종이 멸종되면 다른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생태계가 계속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유전적으로 다양성이 클수록 질병과 해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지며, 미래의 진화적 적응을 위한 자원을 제공하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의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생물 다양성은 단순히 생물이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른 종들이 함께 사느냐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다름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힘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실용적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죽여도 괜찮다고 인식되기도 하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부터 무한히 뻗어나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생각을 생태계의 문제로 확장하면 한 종을 죽이는 행위는 한 종만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연쇄 살생을 벌이는 일입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저서 『인생의 역사』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 덕분에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러 개의 나로 이루어졌고 여러 개의 ‘나’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와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모두 ‘나’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매년 5월 21일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 문화 다양성의 날’입니다. 이 날은 전 세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일방적인 문화의 획일화, 거대 자본에 따른 소비문화의 상업화에 대응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문화를 존중하여 다름의 가치를 보전하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대회의 슬로건은 “서로의 다름을 즐기자”입니다. 창밖의 나무도 다름을 즐기고 있나 봅니다. 바람에 고개를 까딱하는군요. 한 나무에 주변 나무의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이시나요? 그 나무의 유전자와 주변 나무의 문신이 새겨져 한 나무의 다름을 만들었으니까요.
2장. 성(性), 본바탕을 이루는
흙 : 생물과 무생물의 정거장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일컫는데, ‘호모’는 무슨 뜻일까요? 라틴어 호모(Homo)는 ‘흙’을 뜻하는 후무스(Humus)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살아 있는 흙’이 되는 셈입니다.
흙 한 줌엔 지구상의 인구보다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건강한 숲의 식물 뿌리에 붙어 있는 흙 1그램에는 약 5천 종, 10억여 마리의 세균이 삽니다! 흙은 에너지가 순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흙을 발판으로 삼아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땅속에서 생명의 대기자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또한 흙은 방금 죽음을 맞이한 개미, 진드기, 딱정벌레, 톡토기, 땅강아지, 지렁이, 뱀 허물, 다람쥐가 먹다 남긴 도토리, 동물의 똥 등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입니다.
나아가 흙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생명의 환승역이자 에너지가 순환하는 개방된 공간입니다. 흙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에너지가 이어지며, 동물에서 다시 흙으로 에너지가 되돌아옵니다. 이때 흙이 더러운 대상이 되면 생명의 환승역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지는 것이지요.
흙이 더럽다는 인식을 두고는 흙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사람들은 흙 속에 동물의 똥이나 사체들이 들어 있어 흙을 더럽다고 여기고, 흙의 입장에서는 오염 물질이 유입되거나 발로 밟혔을 때 비로소 흙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흙이 제 구실을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밟혀서 다져진 땅이 되었을 때입니다. 정상적인 흙은 광물질 45퍼센트, 수분 25퍼센트, 공기 25퍼센트, 유기물 5퍼센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수치에서 흙 속의 절반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빈 공간이 줄어들면 물과 공기가 저장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내뿜은 탄산가스마저 빠져나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썩어들어가면서 에너지를 순환하지 못하고 흙이 ‘더러운 것’이 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식물의 뿌리가 살기에 적당한 흙은 전체 부피의 50퍼센트 정도가 비어 있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물과 공기가 차지하는데 이것들의 비율은 수시로 변합니다. 비가 오면 물의 비율이 높아지고 가물면 공기의 비율이 높아집니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물과 공기가 반반일 때입니다. 공기와 물의 비율이 반반일 때 뿌리들은 흙을 자비로운 엄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뿌리는 까다롭습니다. 양립하기 어려운 두 물질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물이고, 하나는 공기입니다. 이 두 물질이 뿌리털 끝에 맞닿아 있는 흙에 동시에 존재해야 합니다. 물을 흡수할 때도 숨은 쉬어야 하니까요. 마치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때 아기의 코가 젖에 묻히지 않고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엄마가 자신의 젖을 손으로 살짝 눌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려면 흙이 다져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인도의 철학과 사상의 원천을 이루는 경전 『우파니샤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들아, 한 줌의 흙덩어리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든 것을 알게 된단다. 흙의 변형으로 만든 모든 것들은 그것을 소리로 부르기 위하여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오직 흙만이 바로 참 존재인 것이다.” 즉, 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흙에 가장 민감한 존재는 나무입니다. 나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입니다. 한 번의 선택에 앞으로의 모든 삶이 종속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흙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흙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니까요.
3장. 생(生), 어쩌다 태어난
나무의 본성 : 우리 곁의 부처오래도록 지구를 관찰해오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수억만 년 동안 파랗던 지구가 갑자기 빨개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연구할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구는 어째서 푸르른가? 기후는 왜 온화한가? 공기가 맑은 이유는 무엇인가?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원리는? 생물 종은 어떻게 해서 다양해질 수 있었나? 흙은 도망가지 않고 어떻게 제자리에 있나? 많은 사람이 굶지 않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원천은 무엇인가?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왜 사막은 점점 넓어지고 들판은 푸르름을 잃어가는가? 지구는 왜 갑자기 뜨거워지고 공기가 점점 탁해지는가? 강물이 마르고 생물이 멸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외계인은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며 그 이유를 찾아 나섰으나 어이없게도 탐사를 시작하자마자 답이 나왔습니다. 수사관이 사건이 일어나면 CCTV를 돌려보듯, 지구의 역사를 되돌려본 것입니다.
지구가 탄생한 후, 미래에 태어날 많은 생물이 하염없이 기다린 것은 나무였습니다. 나무가 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명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인류의 조상은 허약하기 그지없었어요. 나무가 없었다면 사냥을 하더라도 제대로 익혀 먹지도 못하고 밤이 되면 추위에 떨었을 것입니다. 외계인은 곧바로 나무 전문가를 찾아가 나무는 어떤 존재인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왔어도 나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 고착 생활을 해야 하기에 움직이는 생물에 비해 복잡한 생활 방식을 구사하기 때문이지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생명체인 나무를 이해하려면 우선 나무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무는 부드럽습니다. 필자가 자작나무를 심은 지 십 년쯤 지나 나무가 제법 어른스러워질 무렵, 눈이 많이 내려 걱정이 되어 찾아가보니 꼿꼿이 서 있어야 할 나무가 전부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나무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광경이지요. 멀리서 보면 마치 복분자나무를 심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휘어져 자랄까 봐 걱정스러웠지만 눈이 녹으니 모두가 꼿꼿하게 제 모습을 찾더군요. 나무는 어릴 적에 눈 무게를 버티거나 바람에 맞설 수 없습니다. 가지가 땅으로 내려앉는 현상은 자작나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들이 어릴 적에 선택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눈도 그렇지만 바람이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한 나무는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