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8월 / 300쪽 / 18,500원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악마의 식물’ 감자
아일랜드인 100만 명을 대기근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감자 역병: 성경에도 전혀 언급이 없어 악마의 식물로 여겨져 왔던 감자를 영국인들이 식량으로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접어들어서였다. 다만 잉글랜드 북부의 아일랜드만은 예외였다. 이곳에서는 황량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가 귀중한 작물로 대접받으며 널리 퍼져 나갔다. 아일랜드에 감자가 보급된 시기는 17세기 무렵이었는데, 시기 면에서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일랜드 인구는 감자 덕분에 19세기 초 300만 명에서 800만 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행복한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40년대에 들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창궐해 지독한 흉작이 이어졌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주식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감자가 없으면 꼼짝없이 굶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기근이 닥쳤고 100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갔다.
감자 역병 원인 조사 결과 감자의 증식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감자는 씨감자를 심어 키우는데 그 과정에 증식이 일어난다. 아일랜드에서는 전국적으로 수확량이 많은 단일 품종을 선택해 감자를 재배했다. 한데 이처럼 품종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 품종이 특정 질병에 취약할 경우 전국의 감자가 모두 그 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급기야 감자 역병으로 인해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가 씨가 마르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때 이미 농약이 존재했으나 그것은 와인용 포도를 위해 개발한 것이라 신종 작물인 감자에 생긴 역병에는 효과가 없었다.
원래 감자의 원산지인 남미 대륙의 안데스 지역에서는 여러 품종을 섞어서 심었다. 품종이 다양하면 어떤 병원균이 덮쳐도 그중 살아남는 강인한 품종이 있게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에서는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감자를 전해주는 과정에서 품종을 깐깐하게 선별했다. 그리고 결국 한정된 품종만 재배하여 전국의 감자가 역병에 걸리는 참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 아일랜드는 기근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더구나 감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던 아일랜드인에게 감자 흉작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아일랜드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어 죽어가는 동안 영국은 팔짱 낀 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냉담하고도 무심하게 대응했다.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를 같은 나라라기보다는 식민지 속국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그런 태도를 목격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 정부와 시민들에 강한 불신감을 품었고 이는 훗날 아일랜드 독립으로 이어졌다.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세계 역사를 바꾼 감자: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은 아일랜드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식량이 바닥나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신천지로 여겨졌던 미국을 향해 길을 떠났는데 그 수가 400만 명에 달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은 서부개척을 끝내고 바야흐로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아일랜드인은 대규모 노동자 집단으로 변신해 미국 공업화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결국 대규모 노동력 유입으로 국력을 키운 미국은 초강대국 영국을 앞지르며 세계 최고의 공업국가로 발돋움했다.
대기근으로 인한 미국으로의 이주민 중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J. F.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 케네디가 있다.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J. F. 케네디는 달 탐사 계획을 추진한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케네디 가문은 J. F. 케네디 대통령 외에도 저명한 정치가와 기업가를 여럿 배출한 대표적인 미국 명문가 중 하나다. 그 밖에 레이건과 클린턴, 오바마 등 여러 대통령도 아일랜드계이고 디즈니랜드를 만든 월트 디즈니와 맥도날드의 창업자인 맥도날드 형제 역시 아일랜드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J. F.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 케네디와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대기근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제35대 미국 대통령 J. F. 케네디를 비롯한 여러 대통령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달 탐사 계획도 추진되지 않았을 것이며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인류 최초의 달 착륙도 없었을지 모른다. 감자라는 식물이 미국 역사와 더 나아가 세계 역사를 그리고 우주과학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셈이다.
인류의 식탁을 바꾼 새빨간 열매 토마토
토마토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 재료로 자리 잡은 숨은 이유: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토마토를 관상용 식물로만 재배했다. 그러다가 토마토가 식용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나폴리 사람들이 먹으면서부터였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토마토를 들여왔을 때 이탈리아는 아직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나폴리왕국은 스페인령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나폴리 사람들이 처음으로 토마토를 먹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배가 등에 들러붙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어쩔 수 없이 먹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나폴리는 스파게티의 본고장이다. 당시에도 나폴리는 스파게티를 대량 생산하는 기술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나폴리 사람들은 대량 생산한 스파게티 소스에 토마토를 사용하면서 ‘나폴리타나’라는 이름의 파스타 요리를 탄생시켰다. 나폴리에서 요리에 처음 이용할 무렵만 해도 토마토는 고급음식 재료가 아니었다. 토마토소스를 얹은 나폴리 스파게티는 노점상이 솥에서 삶아 내주면 노동자들이 포크나 숟가락도 없이 손으로 집어 먹으며 배를 채우던 서민 요리였다.
나폴리 사람들이 스파게티를 처음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늦어도 17세기 말 즈음에는 이미 스파게티가 존재했던 것 같다. 나폴리는 피자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피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가루로 만든 반죽에 토마토를 얹어 먹던 요리에서 비롯되었다. 피자 역시 18세기 무렵 노점에서 싼값에 배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서민 요리였다.
당시 토마토소스는 나폴리 이외의 지역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토마토소스를 사용한 요리를 ‘나폴리타나(나폴리풍)’라고 불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이국 식물 토마토가 나폴리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 재료로 자리 잡은 셈이다. 이탈리아 요리에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토마토는 오랫동안 외면당하던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벗어나 단숨에 이탈리아 음식문화를 크게 뒤바꾸어놓았다.
식량이 아닌 작물 중 전 세계 생산량 1위에 빛나는 토마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 1~3위는 뭘까? 1위는 옥수수다. 그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은 밀이고, 3위는 벼다. 주요 곡물인 옥수수, 밀, 쌀은 ‘세계 3대 곡물’로도 불린다. 그다음 4위는 감자, 5위는 대두인데 토마토는 세계 5대 주요 작물 바로 뒤인 여섯 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그러고 보면 1~5위 작물의 경우 주 식량으로 전 세계인을 먹여 살리는 식물들이다. 토마토는 식량이 아닌 작물 중에서는 생산량이 가장 많은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토 하면 흔히 이탈리아를 떠올린다. 그러나 전 세계 토마토 생산국 중에서 이탈리아는 생산량이 5위에 지나지 않는다. 토마토케첩을 대량 생산하는 미국도 3위에 그친다.
그러면 전 세계에서 토마토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바로 중국이다. 그 뒤를 잇는 나라는 인도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계 인구 순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두 나라 모두 인구가 아주 많고 그만큼 소비량도 어마어마하다. 아무튼 이제 중화요리와 인도 요리에서 토마토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 재료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토마토가 유럽을 거쳐 아시아에 전해진 시기는 유럽 선박이 아시아를 빈번하게 드나들던 대교역 시대로 17세기 이후였다. 이처럼 토마토는 불과 몇백 년 동안 전 세계 음식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토마토는 감칠맛 성분이 풍부하고 가열해도 그 감칠맛이 사라지지 않아 다양한 요리에 맛을 더해주는 일종의 조미료로 쓰인다. 새빨간 토마토는 언뜻 보기에는 과일 같지만 많은 사람이 디저트용으로 먹는 것 못지않게 요리재료 중 하나로 여기고 가열 조리해서 영양을 섭취한다. 이런 특징을 고려하면 토마토는 과일보다는 채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대항해시대를 연 ‘검은 욕망’ 후추
금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 식물, 후추: 유럽 대륙의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에서는 주로 볏과 식물이 자라는 초원이 펼쳐지는데, 볏과 식물 줄기와 잎은 인간이 식량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이 딜레마적인 문제에 맞닥뜨려 어떻게 식량 문제를 해결했을까? 그들이 발견한 해답의 실마리는 ‘초식동물’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먹을 수 없는 볏과 식물의 잎과 줄기를 베어 소·돼지·양 등의 초식동물에게 먹여 기르고 다 자란 동물의 고기를 식량으로 삼았다. 이런 배경에서 야생의 초식동물이 가축으로 바뀌고 축산업이 시작되었다. 유럽인에게 가축을 키워 얻은 고기는 매우 중요한 식량이었다. 참고로 가축은 영어로 ‘livestock’인데, 이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재고’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이 오면 가축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는 일이 녹록하지 않았다. 풀을 베어 보관해둘 수 없었던 당시에는 먹이를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겨울이 닥치기 전 최소한의 가축만 남기고 나머지 가축을 도살해 고기로 만들었다. 고기는 부패하기 쉬워 저장성이 떨어지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고기로 버텨내야 했다. 그들은 고기의 부패를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향신료도 그 방법 중의 하나였다. 조금 과장하면 향신료는 ‘언제나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고 풍요로운 식생활을 구현해주는 마법의 약’이었다.
문제는 당시 후추가 워낙 고가의 사치품이어서 대다수 사람은 손에 넣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후추는 왜 그렇게 비쌌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희소성’과 ‘막대한 유통비용’ 탓이 컸다. 후추는 남인도가 원산지인 아열대 식물로 중동의 아랍지역과 유럽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육로를 멀리 돌아 인도에서 후추를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그 먼 길을 돌아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운송비가 폭등했다. 설상가상으로 운송 과정에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많아 무사히 유럽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터라 가격이 더욱 치솟았다. 최종적으로 유럽에 도착한 후추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향신료를 차지하는 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던 시대: 이슬람권에서는 온갖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후추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십자군 원정 이후였다. 이슬람 지역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기사와 병사들이 그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본 뒤 후추를 비롯한 여러 향신료를 모국에 전한 것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그 독특하고도 이국적인 향취에 흠뻑 취해 향신료를 열렬히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추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를 육로가 아닌 해로로 유럽에 들여올 수 있다면…?’ 당대의 유럽 상인들은 만약 바닷길로 후추를 들여올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 선원들에게 바다란 주로 ‘지중해’를 의미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지중해 끄트머리에 있는 나라다. 그런 터라 이 두 나라는 지중해 무역에 활발히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두 나라는 이런 지정학적 약점과 한계로 인해 지중해 바깥의 넓은 바다로 진출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먼 바다로의 무역’이 잘 풀리지 않고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선단을 꾸려 내보내도 겨우 아프리카 대륙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반복되는 항해에서 두 나라는 연거푸 손실만 입고 손에 쥘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 북서부에는 ‘죽음의 곶’으로 알려진 보자도르곶이 있다. 그 곶은 당대의 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었으며 실제로 그때까지 그 곶을 넘어갔다가 무사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곶’을 넘어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항해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지원해 일구어낸 업적이었다.
보자도르곶 너머에서는 상아와 사금 등 값비싼 교역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후추와 비슷한 맛을 내는 멜레구에타 고추가 있었다. 멜레구에타 고추는 생강과에 속하는 식물로 후추과에 속하는 후추와는 다른 종류지만 향신료로써 활용 가치는 충분했다. 그런 영향인지 훗날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들이 멜레구에타 고추를 거래하던 장소를 ‘후추 해안’이라고 불렀다. 엔히크 왕자가 지원한 선단은 새로운 향신료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흑인들을 노예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렇게 대교역 시대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인류의 최대 암흑 역사 중 하나인 노예무역의 막이 올랐다.
마침내 포르투갈 국왕의 명을 받은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선단이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에 도달했고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뱃길을 완성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 무렵, 포르투갈로서는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1492년의 일이었다. 포르투갈에 대교역 시대의 선두 자리를 내준 경쟁국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동방항로 개척에 맞서 서방항로를 개척하는 콜럼버스를 대대적으로 지원한 결과였다. 물론 콜럼버스가 당시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덜란드는 왜 살벌한 향신료 무역 판에 도전장을 내밀었나: 그로부터 6년 후인 1498년, 실제로 인도에 도달한 유럽인이 있었다. 바로 바스쿠 다 가마였다. 그가 이끈 선단은 동쪽 항로를 이용하여 인도에 도착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성공 이후 포르투갈은 그리도 갈망하던 후추를 손에 넣기 위해 연이어 선단을 인도로 보냈고 향신료 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국력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으로 급증한 흑인 노예가 농장 등에 대거 투입되자 농민들은 차츰 일할 의욕을 잃어버렸고 이것은 생산력 감소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달콤한 부의 맛을 본 귀족들과 정치인들의 부패상이 날로 심해졌다.
이 무렵, 포르투갈이 주춤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치열한 향신료 무역 판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나라가 있었다. 바로 네덜란드였다. 한때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 돌파구가 절실했다. 여기에 더해 네덜란드는 신교도인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는데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받게 될 수도 있는 간섭과 박해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아시아의 향신료가 꼭 필요했다.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자국의 무역 독점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두 나라가 이미 진출해 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백인은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뿐이고 네덜란드인은 사실 백인이 아닌 야만인이라는 식의 나쁜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생긴 악평과 나쁜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현지 군주들과 친교를 쌓아 돈독한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