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가지 테마로 읽는 도시 세계사
첼시 폴렛 지음 | 현대지성
40가지 테마로 읽는 도시 세계사
첼시 폴렛 지음
현대지성 / 2025년 7월 / 424쪽 / 22,000원
항저우 _ 종이 화폐항저우(杭州)는 1127년부터 1276년까지 남송의 수도였으며 당시에는 임안으로 불리웠다. 969년부터 1276년까지 이어진 송나라 시대는 발명과 활력의 시대였다. 당시 송나라는 무역과 산업을 통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왕조의 수도였던 항저우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송나라는 금속 동전보다 휴대가 훨씬 간편한 지폐를 최초로 발명했고, 이 덕분에 항저우는 화폐 인쇄의 중심지이자, 혁신과 창의성의 거점이 되었다.
송대에는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국민 평균 소득 수준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신기술 등장과 농업 발전, 무역로의 설치로 중국 전역이 효율적으로 연결되어 상거래가 활발해진 덕분이었다. 중국 상인들이 머나먼 동아프리카까지 무역 네트워크를 확대하면서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사람들이 과거보다 훨씬 규모가 큰 거래를 처리하게 되면서 지폐의 도입이 촉진되었다.
오늘날 중국 최고의 상업 기반 중 하나인 항저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강이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항대운하’ 남쪽 끝 지역에 있다. 이 도시는 끝없이 혁신을 거듭한 덕분에 지금도 첨단 기술을 자랑한다. 전자상거래의 거물 ‘알리바바’를 비롯한 다양한 인터넷 기업이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어 첨단 기술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커지고 있다.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항저우 대도시권’은 인구가 2천만 명에 달해 중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항저우는 중국 내에서 관광지로도 인기가 많은데,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문화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역사 테마파크 ‘송나라 마을’(송성 테마파크)에는 당시 주민들을 재현한 배우로 가득하다.
13세기에 항저우를 방문한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항저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도시”라고 묘사하며, “천국의 도시”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당시는 이미 송나라가 멸망한 후였지만, 마르코 폴로가 접한 도시 건축물과 자산의 대부분은 분명 송나라의 유산이었다(항저우의 호수공원에는 오늘날까지도 마르코폴로 동상이 항저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 가운데 “위로는 천국, 아래로는 항저우와 쑤저우”라는 말이 있는데, 마르코 폴로의 감상을 대변한 것으로 쑤저우는 항저우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도시다.
항저우 도심과 베이징을 연결하는 대운하가 7세기에 건설되면서 남북 교류가 가능해졌고, 항저우는 이내 주요 도시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이 도시의 황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송나라의 수도가 된 12세기였다. 송대에는 목판 인쇄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어 지식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항저우의 목판 인쇄물은 생산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중국 최고 수준이었다. 목판에 문자와 그림을 조각하고 잉크를 칠한 뒤 종이에 눌러 인쇄한 이 기술 덕분에 책, 문서, 지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불교 사원에서 경전을 재생산하기 위해 개발한 목판 인쇄술은 기원후 200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지만, 제대로 자리 잡은 것은 9세기의 일이었다. 목판 인쇄술은 송대에 들어서야 비종교적 목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11세기에는 장인이자 발명가인 비승이 이동식 활자를 고안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책값이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문해율은 높아졌다. 시와 소설 등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약학과 의학 지식이 보급되면서 과학적으로도 진보를 이루었다.
일부 집계에 따르면 송대 말기인 1276년에 항저우 인구는 이미 175만 명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최초의 도시 집중화 현상이라 할 만큼 전례 없는 규모였다. 당시 항저우 시민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항구에는 갑판이 최대 네 개, 돛도 열 개나 되는 대형 선박이 즐비했다. 같은 시기에 유럽인들은 주로 노 젓는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갤리선을 타고 여행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염색과 직조 등 섬유 산업이 발전한 덕분에 시민들은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고 다녔다. 거리에서 귀족 여성을 많이 볼 수는 없었는데, 당시 중국 고위층 사이에 ‘전족’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명분으로 발뼈를 지속적으로 부러뜨려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도록 하는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은 걸어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오늘날 중국 요리의 시초가 된 음식 문화를 볼 수 있다. 당나라 초기에 중국인은 밀과 기장을 주식으로 소비하고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하지만 송나라 때부터 쌀과 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도시의 건축물도 상당히 정교해 감탄을 자아낸다.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는 항저우의 여러 놀라운 사원은 당대의 영적이고 철학적인 다양성을 보여준다. 다양한 사상 체계가 공존하며 번성했고, 도시가 부유해지면서 다양한 예술이 일상에 스며들었다.
항저우는 위대한 창의성의 본거지였다. 11세기에 수학자 심괄은 나침반을 발명하고 세계 최초로 지형도를 그렸으며, 역시 사상 최초로 퇴적 과정을 기록했다. 그가 남긴 노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에 비견될 만큼 수학부터 천문학, 기상학, 지질학, 동물학, 식물학, 약리학, 농학, 고고학, 민족지학, 지도학, 외교, 수력공학, 금융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울렀다. 심지어 그는 다작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송대의 또 다른 지식인으로는 소동파(1037-1101)가 있다. 그는 항저우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예술, 공학자로서의 활동과 통찰력 있는 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항저우의 발전은 대개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지폐 역시 민간 부문의 성과였다. 일찍이 당나라 때부터 실크로드 상인들은 무거운 동전 줄을 갖고 다니기가 힘들어 물건을 구매할 때 종이로 된 약속 어음을 사용했다. 이후 송나라 초기, 이 같은 혁신의 가치를 인정한 정부가 동전을 약속 어음으로 교환해주는 제도를 허가함으로써 이 체계를 어느 정도 표준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지폐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게 되면서 교자(交子)라는 최초의 공식 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에는 상거래를 묘사한 복잡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경제 혁명기’라고도 할 수 있는 항저우의 황금기에 송나라 지도자들은 무역 협정과 조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많은 국제분쟁을 피했다. 그 결과 평화가 지속되어 주민들이 마음 놓고 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이는 도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미국 역사가 필립 커틴에 따르면 “960년과 … 1127년 사이, 중국은 초기 역사 혹은 오늘날까지의 세계 역사에 유례없는 경제 성장기를 거쳤다. 이는 상업화, 도시화, 산업화가 동시에 일어난 데 따른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중국 역사의 이 시기를 6세기가 지난 뒤 일어난 유럽의 초기 근대화에 비견하기도 한다.”
송나라 화폐는 항저우와 청두, 후이저우와 안치 등 송대 주요 도시의 공장에서 목판과 여섯 색상의 잉크를 사용해 균일한 디자인으로 생산되었다. 도시마다 지폐에 서로 다른 인장을 찍었고, 다양한 섬유 비율의 종이를 사용해 위조를 방지했다. 1175년, 항저우의 지폐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수는 일간 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초기 지폐에는 3년이라는 유통기한이 있었고(그 이후에는 동일 금액의 청동 동전으로 교환해주었다), 사용할 수 있는 지역도 송나라 내 특정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1265년, 항저우 공장에서 최초의 진정한 국가 화폐가 인쇄되었다. 단일한 디자인인 이 화폐는 송나라 전역에서 통용되었으며, 그 가치가 은이나 금으로 연동되었다. 금액에 따라 권종도 다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몽골의 침략으로 송나라가 막을 내려 불과 9년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지폐라는 개념은 지폐를 만든 송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어, 뒤이은 원나라 역시 교초라는 지폐를 자체 발행했다. 하지만 원나라는 화폐의 가치를 다른 어디에도 연동하지 않고 갈수록 많은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끝내 통화 가치는 폭락했다. 건전한 통화 정책 없이 발행하는 지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럼에도 지폐는 지속적이고 실용적인 발명품으로 입증되어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12세기 항저우는 발명과 창의성의 산실이자 전 세계에 지폐를 선사한 초기 경제 혁명의 본거지였다. 송대의 인쇄 기술과 지폐의 발명은 또 다른 기술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나침반과 최초의 기계식 시계, 법의학이 모두 이때 발명되었다. 그뿐 아니라 경제 성장 덕분에 일반인의 생활 여건도 개선되었다. 12세기 중국은 위생부터 문해율, 평균 소득까지 거의 모든 복지 지표가 유럽보다 뛰어났다. 평화 속에서 광범위한 지역과 교류하며 문화적 개방성을 자랑했던 항저우는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도시다.
피렌체 _ 예술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만큼 진보라는 개념이 잘 어울리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석’을 넘어 ‘르네상스의 발상지’라고도 알려진 피렌체는 정치, 비즈니스, 금융, 공학, 과학, 철학, 건축과 예술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피렌체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1330-1550), 특히 도시의 황금기였던 15세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 작품이 다수 탄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피렌체는 모직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도시다. 토스카나 지방에는 양과 목초지가 풍부해, 수 세기 전부터 피렌체에서 양모를 생산했다. 그런데 1280년경부터는 품질이 더 뛰어난 영국산 양모가 피렌체로 수입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수입한 대량의 양모를 피렌체 내에 있는 아르노강에서 세탁했다.
14세기 팬데믹으로 화가 베르나르도 다디를 비롯해 8만 5천 명에 달하던 피렌체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피렌체 시민들이 인류 발전에 이토록 광범위하게 공헌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오늘날 피렌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다. 토스카나 지방은 자연환경과 건축물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이탈리아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으로도 손꼽힌다. 피렌체는 도시 내에만 30만 명, 권역에는 150만 명 이상이 거주해 토스카나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오랜 역사와 매혹적인 풍경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관광지이며,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핵심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피렌체의 몇몇 상인은 이 도시의 완벽한 입지를 잘 활용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들여온 최고급 양모와 아시아에서 수입한 최고급 염료를 결합해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모직물을 만들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 모직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14세기에는 피렌체 인구의 3분의 1이 모직물 산업에 종사했다.
국제무역 덕분에 피렌체는 직물 사업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의류 산업의 호황으로 부유한 상인 계층이 생겨났으며, 피렌체에 돈이 모일수록 금융 부문에도 혁신이 일어나 경제 성장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부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이 교환하는 플로린(1252년부터 1533년까지 피렌체에서 사용된 화폐)의 양도 갈수록 많아졌다. 따라서 피렌체는 도시 중 최초로 수 세기 동안 금화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동전 가치 평가의 권위자로 거듭났고, 플로린은 유럽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화폐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렌체는 도시 최초로 대출에 이자를 부과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유럽 전역의 은행가 대부분은 이자를 받는 게 고리대금업이라는 죄악에 해당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이자 대출은 위험성이 크고, 수익성도 떨어졌다. 그래서 유럽인 가운데 대부업에 종사하면서도 파산하지 않는 이는 유대인 정도뿐이었다. 유대인 법은 상대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관행으로 인해 반유대주의적 편견이 생겨났는데, 이 편견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네치아의 상인』에도 등장한다.
피렌체의 기독교인 은행가들은 약간의 창의성을 발휘해 이자를 받을 명분을 만들었다. 바로 채무자의 자발적 선물 혹은 채권자가 감수하는 위험에 대한 보상의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이 같은 금액을 자발적으로 지급하지 않는 이들은 피렌체 은행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향후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피렌체 은행은 이자를 부과함으로써 수익을 얻어 금융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은 피렌체인이 편리하게 대출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왕족과 교황 등 유럽 전역의 권력자들이 피렌체의 은행을 이용했다. 은행은 상인들이 채무자가 채권자와 다른 도시에 있어도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환어음을 제공함으로써 교역을 촉진하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는 피렌체 은행이 다양한 도시에 사무소와 지점을 개설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복식부기’ 방식 또한 피렌체 은행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피렌체는 수익성 높은 의류 무역과 혁신적 은행 산업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급부상했다. 덕분에 도시민의 삶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 1339년에는 유럽 도시 중 최초로 도로포장 작업을 마치기도 했다.
도시의 경제적 부는 비단 물질적 여건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혁신을 일으켰다. 휴머니즘과 고전주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성취, 아름다운 정원, 예술 등 삶의 기쁨을 중시하는 지적 운동으로, 그보다 앞서 유행한 금욕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피렌체에서 늘고 있던 상류층과 중산층은 역사와 로마의 고전 연구 같은 지적 탐구에 몰두해 여러 분야에서 잃었던 지식을 회복했다. 르네상스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재탄생’을 이루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가 라파엘로는 고대 로마 문자를 연구함으로써 고대 이집트인이 발명했던 희귀한 파란색 안료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피렌체인은 피렌체야말로 ‘새로운 로마’라고 여겼다. 한동안 묻혀 있던 고대 로마의 지식 중 상당 부분을 이들이 재발견해 다시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시민들도 그들의 도시가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참여권을 보장하는 이상적인 공화국이라고 여겼다. 사실 피렌체도 로마 공화정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치에 가까웠다. 피렌체는 당시 사회가 대부분 그랬듯 노예제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음모로도 악명이 높았다.
피렌체의 비교적 포용적인 정치 체계, 고전주의 특유의 지식을 향한 열망, 삶에 대한 뜨거운 인문학적 열정, 경제적 풍요에 힘입은 자유가 한데 결합해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이상을 만들었다. 수많은 피렌체인은 예술, 문학, 역사, 철학, 신학, 자연과학과 법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폭넓은 전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렌체 공화국은 피렌체대학교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이 학교는 1321년 설립되었다가 1473년 인근 피사로 이전했는데, 초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수도에 처음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데카메론』의 저자로 유명한 학자 조반니 보카치오 덕분이었다. 보카치오는 키케로의 서간을 발견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학자 페트라르카와 함께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글쓰기를 대중화했다. 피렌체 최고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지금도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불리는 서사시 『신곡』을 모국어로 집필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어 토스카나 지역의 방언이 다른 지역의 여러 방언을 제치고 이탈리아의 표준어로 자리 잡는 데 공헌했다.
물론 피렌체가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1300년대에 페스트가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1348년경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륙에서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면서 피렌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사망했다. 이렇게 엄청난 인명 피해는 사회와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지만, 피렌체는 이 같은 비극 속에서도 혁신과 창조의 물결을 이어갔다. 피렌체의 황금기였던 15세기에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술 후원에 재산을 쏟아부었고, 가톨릭교회 역시 많은 예술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와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가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적극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