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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

드림프로젝트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 명화 잡학사전 통조림

드림프로젝트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7월 / 558쪽 / 28,000원





■ 달리는 왜 밀레의 <만종> 속 농부 부부가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땅에 묻기 전 슬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을까?
파리 외곽 퐁텐블로 숲을 끼고 있는 마을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프랑스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이다. ‘바르비종파’라고 불린 이들은 자연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자연을 향한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화폭에 아름답게 담아냈다. 바르비종파 화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한 명을 꼽으라면 흔히 ‘농민 화가’로 불리던 장 프랑수아 밀레를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씨 뿌리는 사람>(1850), <이삭 줍는 여인>(1857), <만종>(1857~1859) 등이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작 <만종>을 자세히 살펴보자. 화면 위쪽 3분의 1쯤 되는 지점을 가르는 곳에 지평선이 있고, 그 오른쪽 구석에 작은 교회가 보일 듯 말 듯 자리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농부 부부가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남편은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고개를 숙여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고, 아내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겨 마주 잡고 공손하게 기도를 올리며 서 있다.

해가 질 녘, 들판에서 종일 일하던 부부는 멀리서 ‘안젤루스의 종(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교회가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종)’ 소리가 들려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감사의 마음을 기도에 담는다. 밀레는 빛과 그림자가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저녁나절 분위기 속에 인물을 절묘하게 부각하며 질박한 농부의 삶과 힘겨운 현실을 살아나가게 해주는 부부의 깊은 신앙심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밀레와 그의 작품을 연구한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이 그림은 밀레가 실제 풍경을 직접 보고 스케치한 것이 아니다. 머릿속 상상으로 구도를 잡고 계획해서 그려 낸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 탓일까? 훗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의 <만종> 속에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달리가 밝혀낸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달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우선, 그는 그림 속 부부 사이에 놓인 바구니에 주목했다. 그 바구니가 어쩐지 생뚱맞고 어색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바구니에 담긴 것은 수확한 작물이 아니라 부부의 아이, 곧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은 아기라고 주장했다. 바구니는 아기의 작은 몸과 함께 땅에 묻힐 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림의 이야기와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고단한 일과를 마친 부부가 감사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아니라, 아기를 잃은 부모의 깊은 슬픔, 그저 기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기력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담담히 보여 주는 그림인 것이다.

“밀레는 부모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중 한 부모가 죽은 아들의 시신을 넣어 둔 관 앞에 서 있는 장면을 그렸다가 자칫 그림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를 것을 염려하여 바구니로 고쳐 그렸다.”

이는 달리가 자신의 책에 남긴 문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엑스선 검사를 한 결과, 바구니 아래에 아이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밀레 연구자들은 달리의 의견에 쉽사리 동의하지도, 그의 의견에 설득당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달리의 주장의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연구자들은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뜬 형의 죽음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달리가 모든 사람이 높이 평가하는 밀레의 작품을 조롱하듯 해석했을 따름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달리의 색다른 그림 해석을 접하고 다시 그림을 보니 밀레의 작품 <만종>에 그려진 농부가 실제로 감사 기도를 드린다기보다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삼 궁금해진다. 그림 속 농부 부부는 정말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걸까? 부부는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어떤 간절함을 실어 보내고 있을까?



■ 클림트는 왜 달콤한 키스 장면을 빌려 정반대되는 ‘죽음’을 암시했을까?


엄격하고 경직된 역사주의,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회화,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경향이 싹텄다. 19세기 말의 상황이다.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확산된 이 국제 장식미술 운동을 흔히 ‘아르누보(Art Nouveau, New Art)’라고 하며, 독일에서 아르누보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Youth Style)’이라 불렸다.

한편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 가운데 유겐트슈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이 1897년 ‘빈 분리파’ 그룹을 결성했다. 빈 분리파를 주도한 예술가들은 화가이자 금 세공사, 장식미술가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래픽 아티스트, 가구·장신구·세라믹 디자이너, 유리 공예가 등 거의 모든 시각 예술 장르에 포진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아카데미의 고루한 전통과 단호히 결별하고 새로운 예술, 자유로운 예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 예술을 지향했다.

클림트의 대표작을 꼽을 때 황금빛이 찬란한 <키스(연인)>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클림트는 1907년부터 2년 가까이 제목 그대로 입맞춤하는 연인을 공들여 그렸다. 그림 속에 두 사람만의 시간, 그 황홀한 순간이 그대로 멈춘 채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연인의 감정을 따라 가만히 숨죽인 채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다 화가가 실제 금박을 활용해 장식한 화면 구석구석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 피어난 작은 꽃들이 풍기는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향기가 감도는 가운데 연인은 하나가 되었다. 남자의 머리, 여자의 얼굴, 어깨, 손, 발은 비교적 사실적, 입체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 밖의 것, 곧 그들의 몸, 의상, 꽃밭, 배경 등은 모두 장식적, 평면적으로 그려졌다. 연인의 몸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에게 흡수되고, 그들의 의상과 배경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입맞춤하는 연인을 주제로 한 작품은 예전부터 있어 왔지만 클림트는 전통적인 회화의 공식과 기법을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작품 속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은 누구를 모델로 그려졌을까? 이와 관련해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미술사가들은 클림트 주변의 수많은 여인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동반자 관계를 이어간 여인, 죽음이 가까워진 클림트가 찾은 여인 에밀리 플뢰게를 <키스(연인)>의 주인공으로 추정하곤 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물론 ‘사랑’이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지극히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사랑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발끝이 꽃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다. 꽃밭은 여인의 발 아래로 급작스럽게 끊긴다. 이로써 가파른 절벽 끝에 내몰린 듯한 간절함과 애절함이 연인의 사랑에 더해졌다. 이 사랑의 끝은 죽음일까?

클림트가 왜 키스하는 연인을 절벽 끝에 배치해 ‘죽음’을 떠올리게 했을지 헤아려 보자면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오랜 세월 동안 중부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거지이자 구심점이었다. 특히 클림트가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이 도시는 번영과 발전의 정점에 있었다. 또한 국제 도시 빈에서는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전통에 반기를 든 인상주의, 유겐트슈틸, 빈 분리파 같은 새로운 예술 경향의 움직임이 유독 활발했다.

세기말, 세기 초의 빈은 비록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그늘에서 쇠락과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민족이 우후죽순 들고 일어나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제국은 무너지기 직전의,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희망과 절망, 발전과 쇠퇴가 공존하며 불안이 점점 고조되어 가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 클림트의 <키스(연인)>에도 반영된 게 아닐까. 절정으로 타오른 불은 결국 꺼지고야 마는 운명이니 말이다.



■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식탁에 주요리로 양고기 대신 ‘생선’을 그린 이유는?


<최후의 만찬>(c. 1495~1498)은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 중에서 <모나리자>와 함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그림은 다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주문을 받아 교회 내부 식당에 그린 벽화다. 다빈치의 그림 중에는 미완성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은 몇 안 되는 다빈치의 완성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탁월했던 다빈치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천재로 불린다. 그는 위대한 화가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음악가, 무대연출가, 디자이너였으며, 걸출한 과학자·공학자였다.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재능을 뽐낸 다빈치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이 많은 것을 두고 그가 지독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너무 방대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활동하며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말년에는 오른손이 마비되는 등 건강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한편 완성작인 <최후의 만찬>은 흡사 미완성 작품처럼 보인다. 이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오염되거나 손상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림 속 만찬에 등장한 음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78년부터 1999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치면서 마침내 식탁 위의 요리가 정체를 드러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에 오른 음식은 바로 ‘생선’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흐릿해져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작은 접시에는 생선 토막이 담겨 있고 큰 접시에도 생선 몇 마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 복원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는 함께한 마지막 식사에서 실제로 생선을 먹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식사는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의 만찬이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며 기리는 날로, 유월절 만찬에는 양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때 양고기는 애굽에서 탈출하기 전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를 기념하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에서 먹은 요리는 생선이 아닌 양고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에는 양고기 요리가 그려져 있다.

한데 다빈치는 왜 양고기가 아닌 생선 요리를 <최후의 만찬> 식탁에 올렸을까? 이는 우선 초기 기독교 시대, 곧 로마제국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물고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활용한 데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신앙을 비밀리에 유지하면서 물고기 모양으로 서로의 신앙을 확인하거나 안전한 장소를 표시하곤 했다. 왜 하필 물고기였을까?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의미하는 단어는 Ichthus(또는 ΙΧΘΥΣ)인데, 이를 ‘예수(Iesous, I)’, ‘그리스도(Christos, X)’, ‘하나님(Theou, Θ)’, ‘아들(Yios, Y)’, ‘구세주(Soter, Σ)’의 약어로 인식하고는 기독교도 사이에서 통용되는 암호 또는 간단한 신앙 고백으로 활용한 것이다. 또한 성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 물고기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생선을 먹은 일 등이 그렇다. 이처럼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관되어 왔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마가복음」 14장 12절)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장 22~24절)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를 자기 살과 피에 비유하며 제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로 인해 훗날 기독교의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고 마시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친다는 전제가 생겼고, 그에 따라 유월절에 유대인을 위해 희생한 양은 곧 인류를 구원하고자 자신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와 같으니, 최후의 만찬 주요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선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다시 말해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생선 요리는 기독교 박해의 생생한 역사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현대 미술사가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생선을 ‘뱀장어’로 특정한다. 뱀장어는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린 당시 이탈리아 밀라노의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요리로, 다빈치 역시 뱀장어 요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생선 요리는 ‘희생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와 더불어 다빈치의 개인 취향과 15세기 밀라노의 유행까지 알려 주는 흥미로운 요소다.



■ 페르메이르의 <저울을 든 여인> 속 하얀 두건을 쓴 여인은 저울로 무엇을 재는 걸까?


<저울을 든 여인>(c. 1664)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놓인 탁자 앞에서 하얀색 두건을 쓴 여인이 저울을 든 모습을 보여 준다. 여인은 저울로 무엇을 재고 있을까? 이전에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의 배경이 너무 어둡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울이 너무 작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탁자 위에 진주 목걸이와 금화가 흩어져 있는 걸 근거로 진주나 금화의 무게를 재는 게 아닐까 추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최근 현미경으로 정밀 조사를 거친 결과, 저울의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림 속 여인은 왜 저울을 들고 있을까? 정답은 ‘그림 속 그림’에 있다. 페르메이르는 그림 뒤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 놓았다. 최후의 심판이 진행되면 대천사 미카엘이 인간을 저울에 올려 영혼의 무게를 잰 다음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림 속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은 최후의 심판 때 영혼의 무게를 재는 대천사 미카엘의 저울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림 속 여인 역시 언젠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에 자기 삶을 매일매일 저울에 달듯 돌아보며 균형을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이 그림과 저울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을 통해 그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최후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왠지 두려워지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하다. 페르메이르는 이렇듯 저울을 손에 든 여인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표정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한 최후의 심판이 의미하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선하게 살면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 같다.

그림 속 저울을 든 여인이 임신한 상태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배가 임신한 여인처럼 불룩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그림 속 여인이 입고 있는 파란색 옷이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라는 점, 당시 네덜란드에서 진주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해 그녀를 세속화한 성모 마리아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화가 페르메이르는 성모 마리아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걸 깨닫게 하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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