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나이토 히로후미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나이토 히로후미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6월 / 274쪽 / 18,500원
①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추동한 알코올음료 와인
쌀로 술을 빚어 마신 역사보다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신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와인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실제로 벼농사 문화권 사람들이 쌀로 술을 빚어 마신 역사보다 몇몇 특정 지역민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신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 인류가 언제부터 와인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수천 년을 넘어 1만 년에 가깝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추정이다. 이는 고대 인류 문명 태동기에 이미 본격적인 와인 양조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와인은 어디에서 탄생했을까? 와인 발상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캅카스의 조지아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조지아에는 기원전 6,0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와인 관련 유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 항아리 유물을 정밀 분석한 결과, 그 항아리가 와인 양조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조지아와 함께 유력한 와인 발상지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아르메니아에는 기원전 4,000년 무렵 유적으로 추정되는 와인 양조장이 남아 있다. 어떤 학자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이 역사상 최초로 와인 양조를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와인 양조가 서아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의 와인 생산력과 와인 문화는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다. 고대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을 매개 삼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와인 양조 기술을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집트 땅에서는 와인 양조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고대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은 와인을 사랑했다.
이 두 고대문명은 고도로 발전한 음식 문화와 당시로선 최첨단이라 할 만한 농업 기술을 보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한 과일음료의 하나인 포도 주스를 와인이라는 수준 높은 알코올음료로 변화시키는 공정은 당대인들에게 마술처럼 여겨졌다. 체계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와인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와인을 생산하려면 체계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 문화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 섣불리 포도 주스를 와인으로 변화시키려 하면 실패할 위험이 크다. 아무리 애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아도 시큼털털해서 마시기 힘든 평범한 액체만 만들어질 뿐이다. 게다가 한꺼번에 많은 양의 와인을 생산하려면 야생 포도에만 의존할 수 없어 제대로 된 포도 재배 기술을 갖춰야 한다. 이집트도 메소포타미아도 고대에는 문자를 발명할 만큼 고도로 발전한 문명을 이룩했기에 수준 높은 와인 양조 기술과 와인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아테네 등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민주정치를 추동한 놀라운 알코올음료 와인고대 그리스인들이 와인을 즐기는 방법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이는 그리스식 ‘연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그리스식 연회에서는 ‘큰 잔’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들은 저마다 자리에 앉아 큰 잔에 와인을 가득 채운 다음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다. 이런 그리스식 연회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심포시온(symposion)’이라고 불렀다. 이는 ‘토론’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ymposium의 원형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식 연회를 유심히 살펴보면 와인은 당대의 민주제 및 철학의 발전 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와인이라는 음료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달변가로 만들어주며, ‘지적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와인, 청주, 맥주 등 대다수의 술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활력을 불어넣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와인에는 다른 알코올음료에 없는 묘한 특색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왜 다양한 알코올음료 중 유독 와인만 마시는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줄까? 이는 와인 속에 함유된 ‘타닌의 효능’ 덕분이다. 그렇다면 커피와 차는? 커피와 각종 차에도 타닌이 들어 있다. 커피에 함유된 타닌은 달콤한 향기를 내는데, 때때로 사람을 명상에 잠기게 한다. 와인에는 단맛, 신맛, 감칠맛 등 다양한 맛과 정보가 응축되어 있다. 와인이 지닌 다양한 정보는 마시는 사람의 두뇌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와인을 마실 때 와인에서 꽃향기 비슷한 향취를 맡으면 미의식이 발동해 지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식이다.
소크라테스는 과음하지 않고 ‘적정량의 와인을 한 번에 조금씩 마신다’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와인은 이성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유쾌한 환희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또 유대교에서는 와인을 가리켜 “이성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술”이라고 말한다. 와인은 여느 알코올처럼 단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지성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와인을 마시는 자리는 이내 지적인 대화가 활발히 오가는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걸출한 철학자가 수없이 등장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즐겁게 와인 잔을 기울이며 지적 토론을 벌이는 장소라면 어디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와인을 즐기는 공간에 자유가 있고 평등이 존재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치가 태동할 토대가 갖춰지고 튼실한 씨앗이 마련된 셈이다.
그리스는 독특한 지형 요인 때문에 오리엔트 세계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기 어려워 민주정치가 탄생하고 발전하기 유리한 조건이었다. 여기에 더해 고대 그리스, 그중에서도 특히 아테네인들은 와인을 매개로 지적 토론을 즐기며 민주주의를 더욱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이렇듯, 와인은 민주주의라는 아기를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낸 식량이자 요람과도 같은 술이었다.
고대 그리스 이후 민주주의를 표방한 고대 로마의 이탈리아반도, 근세의 영국, 프랑스, 독일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와인을 즐겨 마셨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은 오랜 세월 대규모 와인 산지로 명성을 얻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와인을 마시며 꿈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며, 그 과정에서 지적으로 변화해가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를 빚어내기에 와인보다 맞춤인 알코올음료는 없지 않을까?
와인으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입은 로마제국의 기독교기독교와 와인의 관계는 저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으로 작용하며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뒤 열두 제자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린 뒤 예수는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하나하나 건네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예수는 와인이 담긴 잔을 제자들에게 건네며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내가 흘리는 언약의 피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예수는 와인이 자기 피를 상징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그는 와인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또 하느님을 믿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최후의 만찬’ 이후 기독교에서 와인은 신앙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도 성스러운 음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와인은 성찬식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으며, 가톨릭의 미사와 개신교의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뿌리내렸다.
최후의 만찬에서 와인은 예수의 ‘부활’을 상징한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는 포도가 발효되어 와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재생’의 개념을 발견했다. 발효 과정에서 포도는 새로운 액체 와인으로 ‘재생’한다. 와인은 ‘재생’,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부활’을 상징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부활했듯,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된 와인은 예수의 부활을 예고했다.
기독교가 탄생하고 발전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갈 무렵, 이 종교는 한동안 로마제국 안에서 모진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는 왜 로마인에게 박해받았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사람(정확히는 예수)의 몸과 피를 ‘빵’, ‘와인’과 동일시하는 교리 및 행위가 시민에게 거부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무튼, 그럼에도 거대한 제국 안에서 기독교 신자 수는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4세기 말에 급기야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의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은 ‘와인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그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은 멸망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기독교 교회와 수도회는 혼돈에 빠진 서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와인은 수도회를 통해 명맥이 이어져 문화를 창조하고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요람이자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② 와인을 정치에 교묘히 활용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유럽의 패권자였던 카롤루스 대제는 왜 와인 양조에 온 힘을 기울였을까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는 세계사만이 아니라 와인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카롤루스 대제가 등장하기 전부터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주목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제국이 붕괴한 이후 조각조각 나뉜 서유럽 세계를 재통합한 인물이다. 그는 로마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랑고바르드족과 싸워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동방에서는 아바르족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작센 지방 공략을 시작으로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크 왕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후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의 아버지’로 불렸다.
유럽을 평정한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가 씌워주는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부터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당대 유럽의 패권자였던 카롤루스 대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는 한편으로 자기 왕국 안에서 와인 양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왕국 전역에 세워진 교회에 토지를 하사하고 와인 양조를 독려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직접 와인 양조 방식까지 세세하게 지도하는 등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했다. 또 포도를 발로 밟아 으깨어 과즙을 내는 방식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의 명령은 와인 양조에 ‘위생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와인을 신성한 음료로 거듭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또한 그는 위생을 고려해 와인을 가죽 부대에 저장하는 관습도 금지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왜 그토록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열을 올렸을까? 아마도 카롤루스 대제는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독교와 함께 와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듯하다. 그의 통치 시기에 거대한 왕국으로 급성장한 프랑크 왕국은 마치 어른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지만 미숙한 청소년처럼 여전히 불안정했다. 이 덩치 크고 불안정한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 그는 왕국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교회를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제국을 효율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로마 교황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각지의 교회를 포섭해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게 아닐까.
카롤루스 대제는 교회를 중심으로 와인 생산을 독려하고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 연장선에서 포도밭 개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포도 농사, 와인 양조가 활발해져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카롤루스 대제가 성정이 거칠고 다루기 힘든 게르만족을 포도 농사와 와인 생산에 적응시켜 온순한 기질로 변화시키는 부수적 효과도 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③ 와인 명산지 보르도의 기반을 닦은 잉글랜드 왕 존
무능한 잉글랜드 왕 존이 세계적인 와인 명산지 보르도의 기반을 닦은 아이러니한 역사중세 시대 서유럽에서는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마치 들불 번지듯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와인 세계가 펼쳐졌다. 이 시대에 프랑스 보르도 와인은 서유럽 와인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는데, 그 과정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넘어가자. 1066년 무렵 상황이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 기욤 2세가 칼레 해협(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에 상륙했다. 그는 영국 남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윌리엄 1세(1066~1087)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왕조가 세워졌다. 참고로, 오늘날 영국 왕실은 윌리엄 1세의 혈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12세기 중반 잉글랜드 안에서 노르만 왕조의 핏줄이 끊기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기득권을 유지할 방법을 찾던 윌리엄 1세의 후손들은 고심 끝에 당시 프랑스의 앙주 백작이었던 앙리(Henri)를 새로운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윌리엄 1세의 손녀 마틸다의 아들 즉 증손자로, 잉글랜드에서 헨리 2세(재위 1154~1189)로 즉위했다.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헨리 2세는 프랑스 안에도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아키텐 공국 상속자인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한 덕분에 헨리 2세는 애초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과 앙주 백국에 더해 아키텐 공국까지 확보하면서 한때 프랑스 왕 루이 7세보다 더 넓은 프랑스 영토를 보유했다. 아키텐 공국은 가스코뉴 지방과 보르도 지방을 포함하고 있어 오늘날 와인 명산지로 이름을 떨치는 보르도는 이렇게 잉글랜드 왕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렇기는 해도 보르도와 잉글랜드의 인연이 곧바로 와인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당대에는 보르도 지역에 포도밭이 거의 없었다. 특히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와이너리가 집중해 있는 메독지구 대부분이 당시에는 거의 늪지대였다. 더구나 당시 보르도는 평범한 상업 항구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라로셸이라는 만만치 않은 경쟁 지역이 있었기에 그다지 내세울 만한 강점이 없었다. 라로셸은 당시 대표적인 프랑스 와인 산지의 하나였다. 게다가 보르도는 가스코뉴 지방 내륙에서 생산된 와인을 한곳으로 모아서 배에 싣는 화물항이었기에 위상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재위 1189~1199) 시대에 이르러 보르도는 잉글랜드와 훨씬 더 가까워졌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직접 참전해 ‘사자심왕(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무용을 떨쳤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 잉글랜드에서 거의 생활하지 않았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아키텐 공국에서 지냈으며, 성인이 된 후 잉글랜드에서 보낸 것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아키텐 공국의 보르도 지역을 본거지로 하여 가스코뉴의 와인을 벗 삼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주로 지냈다. 따라서 누구보다 프랑스 와인을 사랑하는 잉글랜드 왕과의 특별한 인연은 보르도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보르도와 잉글랜드 왕가의 관계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그의 왕위를 이어받은 존(John)왕 시대에 더욱더 돈독해졌다. 존왕은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잉글랜드 왕가가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안의 영토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에 의해 야금야금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에서 가스코뉴 와인을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보르도의 중계무역이 나날이 번창했다. 존왕의 정책 덕분에 보르도의 경제는 번영의 길을 달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프랑스 안의 영토를 시나브로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프랑스 안의 잉글랜드 영토를 도미노 무너지듯 차례차례 빼앗긴 결과, 아키텐 공국의 보르도를 포함한 일부 영토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