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권력 미식 경제학
쑤친 지음 | 이든서재
식탁 위의 권력 미식 경제학
쑤친 지음
이든서재 / 2025년 6월 / 272쪽 / 18,800원
제1장 진화의 선택
정착의 선택 _ 안정적 식량 확보로 인한 제1차 경제혁명수렵과 채집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시대에 인류 먹거리의 구성은 다른 동물의 식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이 내어주는 그대로의 야생 과일을 채집하고 동물을 잡아먹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의 수렵채집 기술도 발달했다. 그러나 기후나 토양·습도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여전히 운에 의존하여 먹거리를 발견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발견하는 장소가 무작위적이었다. 몇 개의 산을 넘어도 먹거리를 찾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구할 수 있는 먹거리의 종류와 수량이 들쭉날쭉했다. 동물 수렵뿐만 아니라 식물의 채집 역시 무작위성이 강하다. 얼마 헤매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야생 포도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힘들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도 고작 버섯 몇 송이만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무작위성’은 전체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 도전이었다.
약 12,000년 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전 세계 인류의 숫자가 300만 명을 넘어선 때가 있었다. 원시적인 수렵과 채집 방식은 불어난 인구의 식량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더 빨리, 더 멀리 이동해야 하며 이주 빈도 역시 더 잦아야 했다. 그러나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것은 힘들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변화무쌍한 기후 변동이나 맹수를 만나 많은 사람이 길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적절한 거주지를 제때 찾지 못하면 무리가 떼로 굶어 죽는 일도 빈번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인류: 9,000년 전쯤 인류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주 생활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갑자기 이동을 멈추고 한곳에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육류와 식량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동물을 길들이고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 획기적이고 탁월한 선택은 인류의 미래에 직접적이고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세계의 모든 부족들이 마치 하늘의 계시라도 받거나 약속을 한 것처럼 모두 비슷한 시기에 발걸음을 멈추고, 가축을 기르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우기 위해 동물에서 식물에 이르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기르고 재배했다.
수렵의 시대에는 사냥꾼들이 사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더 나은 파트너와 조수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눈에는 이동 속도가 매우 빠르고 용맹하며 충분한 지능을 소유한 늑대가 가장 적합한 사냥 파트너로 보였고, 동물 중 늑대를 가장 먼저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선사시대에 길들인 늑대가 바로 오늘날의 ‘개’이다. 개는 ‘먹보 인류’가 길들인 최초의 동물이 되었다. 또한 ‘먹보 인류’는 개 역시 육류 공급원의 하나로 삼으려고 했으나 개는 인간 못지않게 많이 먹는 데 비해 살이 찌지 않아 육류 생산량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반면 돼지는 개와 달리 먹는 대로 살이 올라, 인간이 주는 사료량에 비해 고기로 전환되는 효율이 매우 높아 인간의 육류 공급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더 많이 먹기 위해 작물을 재배하다: 동물을 길들이는 데 노하우가 생긴 인류는 힘든 노동을 대신해줄 또 다른 동물을 찾고 싶었다. 4,500여 년 전, 코카서스 산맥 남쪽 지역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에 매우 적합한 야생마를 발견했다. 이 야생마를 길들여 쟁기를 끌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인류는 말이 이동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보 인류’는 말을 이용함으로써 외출이 훨씬 수월해졌고, 사냥의 효율성도 대폭 상승했다. 이렇게 길든 말은 곧 아라비아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류는 식물도 길들이기 시작한다. 야생에 자생하던 식물을 재배가 가능한 식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획기적인 방법으로 재배되던 식물 중 밀, 보리, 렌틸콩 등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물로 남아있다. ‘먹보 인류’는 처음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일념으로 작물을 재배했다. 그러나 경작지의 지리적 위치와 시간, 경작물 종류에 대한 선택은 문명 형성의 직접적 결정요인이 되었다. 밀과 보리는 바빌론 문명을, 옥수수는 멕시코의 고대 마야 문명을 형성했다. 쌀과 기장은 중국의 황하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제2장 수요와 공급의 힘
향신료 시장의 서막 _ ‘먹보 인류’의 무서운 식욕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정리했다. 피라미드와 같이 5단계로 구분한 인간 욕구 중 가장 낮은 1단계는 ‘생존 욕구’다. 매슬로는 사람은 낮은 수준의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높은 수준의 욕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시 사회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인류는 끊임없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생활 수준은 그저 근근이 살아남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즉,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매슬로의 욕구 단계의 최하층에 머무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채 백 년이 안 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배고픔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생존과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서 미식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다양하고 더 맛있는 먹거리를 찾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럽의 부자들은 동양에서 건너온 향신료가 음식을 화려하게 변화시키는 맛에 매료되어 향신료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향신료를 핵심으로 하는 거센 물결이 유럽 미식의 세계를 잠식했다.
부자들은 요리에 소량의 향신료를 첨가하는 것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냈다. 유럽의 부유한 귀족들은 향신료를 가루로 만들어 ‘향신료 100%로 만든 요리’를 고안해냈다. 곱게 간 향신료를 사용하여 과자와 디저트를 만들었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 음식은 진저브레드였는데, 이는 생강 가루로 만들어 구운 것이다. 부자들이 향신료 100%의 간식을 먹은 뒤 거리를 걸으면 멀리서도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을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향신료의 이런 매력에 유럽의 많은 미식가가 빠져들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과 동양의 향신료 무역 항로는 아직 개척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에서 향신료는 왕실, 귀족, 부자만이 즐길 수 있는 매우 값비싸고 진귀한 물건이었고, 유럽 부자들의 경쟁적인 사치품으로 등극했다.
유럽 최고의 사치품이 된 후추: 미식가들의 수요에 자극받아 향신료의 몸값은 금·은과 거의 동일한 수준에 이르렀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열망은 향신료 시장의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공급을 훨씬 웃도는 수요로 인한 향신료 가격의 급등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막대한 수익 창출은 향신료 상인들로 하여금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도록 유혹했으며, 유럽의 향신료 시장은 전례 없는 번영의 시기를 누렸다. 유럽 식품 산업에서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한 덕분에 거대한 향신료 무역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이는 유럽인들이 향신료 본연의 기능을 뛰어넘어 향신료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한 결과, 품귀 현상이 나타난 탓이었다.
유럽 귀족들은 후추를 다른 향신료와 적절히 배합하여 장기간 복용하면 남녀 관계에서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사치와 정신적 공허함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유럽 남성들에게 이것은 회춘의 영약이었다. 향신료는 강력한 심리적 위안을 제공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자신의 추종자로 사로잡았다. 더욱이 당시 전염병이 창궐한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이 후추에 전염병을 예방하는 신기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염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지연시키기 위해 향신료가 든 향료 상자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
이러한 소문은 향신료에 대한 수요를 더욱 자극했다. 수요 증가로 가격은 더욱 상승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부자들은 맹목적으로 향신료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물건은 비쌀수록 소비자의 부와 지위를 과시할 수 있다. 향신료는 동양으로부터 장거리 항해를 통해 유럽으로 운반되어 오기 때문에 유럽 귀족들이 앞다퉈 구매하는 고급 품목이 되었으며, 당시 가격은 최고가에 달했다. 1248년 영국의 육두구 1파운드는 4실링 7펜스였는데, 이 돈은 당시 양 3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중세 말기에 유럽인들의 사상은 현실과 환상, 금욕과 방종의 미혹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방출할 출구가 필요했고, 향신료는 이에 물꼬를 터준 셈이다. 장거리 무역을 통해 동양으로부터 수입된 제품은 유럽 사회에 다양한 정신적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유럽인에게 ‘향신료’란 종교, 사회, 인간성, 심지어 세계를 향한 견해를 잘 반영하는 투영체였다.
제3장 High risk High return
금융의 힘 _ 경제학이 최초로 보여준 가공할 괴력항해는 원래 ‘공동 투자’ 형태였다. 16세기 이전 선원들은 선단을 꾸릴 때 임시로 집합해 운영되었다. 다시 말해, 선원들은 함께 투자하고,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손실의 부담과 이익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무역이 끝나면 곧바로 해산했다. 만약 폭풍우를 만난다거나 해적의 습격과 같은 돌발 상황을 만나면 모든 선원이 함께 피해를 책임져야 했다. 이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전 재산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엄청난 손실을 감당할 각오가 있어야만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위험으로 인해 대부분은 항해 대열에 선뜻 합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확실성의 위험을 줄이고, 항해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해답은 ‘금융’이었다. 그 시절, 금융에 능한 영국인들이 가장 먼저 방법을 고안해 냈다.
1600년 12월 31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 가지 특별한 왕실 허가서를 발급했다. 이는 런던 상인들이 ‘동인도에 무역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허가장’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은 회사가 바로 ‘영국 동인도 회사’였다. 설립 당시 회사는 직원 수 218명에 불과했지만, 악명이 드높은 회사였다. 이 왕실 허가장이 특별했던 이유는 이 허가장이 전례 없던 두 가지를 보장하기 때문이었다.
1. 독점권(무역 독점 허가)
‘독점’은 이 회사만이 영국을 대신하여 인도에서 무역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2. ‘유한책임’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 바로 이 ‘유한책임’인데, ‘유한책임’이라 함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파산하게 되면 회사가 부담해야 할 배상액의 규모와 관계없이, 투자자의 손실은 이미 지급한 투자금 내로 제한되는 것이다. 설령 회사가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망하더라도 투자자들의 개인 재산까지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선원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 놀랍고도 참신한 두 가지 발상은 항해를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장벽을 제거하여 인류가 해상 패권 경쟁 시대를 맞이하게 했다. 영국이 유한책임과 독점권을 기반으로 무역의 새로운 시대를 열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무역 독점을 허가하고 식민지 지역을 나누기 위해 자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역사적으로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총 7개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예전에는 선원들이 한 번 항해를 끝내면 회사를 청산했고 다시 바다로 나갈 때는 그때마다 같이 항해할 선원들을 새로 구해야 했다. 이처럼 항해를 나갈 때마다 선원들이 바뀌었기 때문에, 협동성도 떨어지고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의 설립 이후, 선원들은 더 이상 해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항해업은 정기적으로 배당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책임의 부담이 현저히 줄게 된 유한책임회사의 출현으로 영국 항해는 전례 없는 열기를 띠었다. 일정 범위 내에서 위험 관리가 가능해지자 대영 제국의 식민지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런데 영국이 전 세계의 식민지 선점에 열중하던 그때, 뜻밖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소의 탄생: 1594년 네덜란드는 향신료를 얻기 위한 첫 번째 동방 항해를 시도했다. 총 289명의 선원과 4척의 선박을 파견했으나 불행히도 귀환할 때는 단 89명의 선원과 3척의 선박뿐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큰 손실을 보았음에도 무역 성과는 예상보다 좋았다. 향신료는 높은 가격에 팔렸고 생환한 선원들은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더 많은 네덜란드인이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어 수많은 소규모 해양 회사가 등장했다. 그러나 소규모 회사는 실익이 적고, 위험에 기민하게 대처하기에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14개 소규모 회사가 연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영국계 주식회사에서 ‘유한책임제’의 단점은 주주가 회사에서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회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어떤 주주가 회사의 지분을 정리하고 싶다면 회사를 청산할 필요 없이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면 됐다. 주식을 양도하는 대상이 낯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거래가 성사될 수 있는 일정한 장소가 필요했고, 결국 1609년 최초의 주식 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가 탄생하게 되었다.
주주제, 유한책임, 주식 거래, 이것이 17세기에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혁신적인 진보이다. 이어 주식 중개인, 시중은행, 신용통화, 현대의 신용 제도 등이 파생되었다. 이와 같은 금융 시스템은 세계 해양 무역을 급진적으로 활성화하고 세계 무역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핵심 동인이 되었다.
바다의 마부 네덜란드, 바다를 장악하다: 육두구, 정향, 후추, 계피와 같은 향신료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온 것들이다. 이 귀한 물건들이 해상 무역로를 따라 당시 무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에 집결되었다. 이곳에 베네치아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향신료를 실은 선박이 육지에 닿자마자 전량을 매입한 뒤 가격을 올려 유럽의 소상공인들에게 공급해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하지만 이윤이 발생하는 곳이면 늘 장사치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들기 마련이다. 1511년 포르투갈의 선단이 향신료 군도라 불리던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 도착해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점하던 향신료 무역 세계를 깨부쉈다.
그러나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과 은을 캐내느라 원래 포르투갈이 관리하던 향신료 무역을 제대로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 관리 공백을 네덜란드가 파고들었다. 네덜란드인은 장사에 능했다. 그들은 단순한 무역을 넘어, 일종의 상업적 패턴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무력으로 말루쿠 제도의 무역권을 장악하고, 향신료를 중국으로 보내 견직물을 사들였다. 중국에서 매입한 견직물을 다시 일본으로 보내 은과 바꿨고, 다시 은으로 면직물을 구매한 후, 이를 인도로 보내 향신료로 교환했다. 오늘날의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완벽한 ‘상업적 폐쇄형 루프 시스템(Closed-loop system)’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점차 모든 동인도 회사 중 무역량이 가장 큰 회사가 되었다. 그들은 아시아 해역을 따라 여러 거점을 설립했으며, 일본의 히라도섬과 나가사키에 지점을 설립하여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던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 회사에 막대한 특권을 부여했다. 군부대 창설, 독자적 화폐 발행, 타국과의 조약 체결권, 식민지 통치권 등 동인도 회사가 가진 특권으로 보면 거의 국가와 다름없었다. 200년 가까이 이 회사는 매년 평균 18%의 배당금을 네덜란드 정부에 지급했다. 물론 이 수익은 약탈로 얻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