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이는 세계사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 윌북
펄럭이는 세계사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윌북 / 2025년 5월 / 388쪽 / 22,000원
세계 곳곳의 삼색기18세기가 끝나가던 1789년과 1799년 사이, 프랑스는 대격변의 물결에 휩쓸렸다. 절대군주제는 사라졌고 여러 나라가 혁명전쟁에 시달렸다. 이 장은 유럽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지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그린 ‘프랑스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깃발 애호가들 사이에서 프랑스혁명은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 유명한 프랑스 삼색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삼색기는 전 세계 혁명가의 이성과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고 다수의 주권국 국기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비할 만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국기는 영국의 유니언잭이 유일한데, 영국 국기가 식민지 확장을 통해 위상을 다졌다면 프랑스 국기는 삼색기가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원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삼색기의 기원은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과 관련이 깊다. 파리 시민은 프랑스 왕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이 사건이 프랑스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혁명군은 파리의 상징색인 파랑과 빨강으로 된 모표를 모자에 달고 다녔다. 그해 혁명군의 압박에 못 이겨 소집된 국민 제헌의회는 단순화된 도안의 국기를 채택했다. 프랑스가 과거와의 단절을 꾀한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리는 도안이었다.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중앙의 흰색이 파리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인민을 상징하는 빨간색에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은 국민이 군주를 통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인권에 대한 높은 이상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공포정치로 바뀌고 말았다. 파리의 단두대는 거의 하루도 쉴 날이 없었고 ‘공공의 적’을 바지선에 태워 센강으로 데려가 대포를 쏘기도 했다. 1795년부터 프랑스를 통치한 집정부는 공포정치의 종식을 목표로 삼았지만 1799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집권 후 국기를 손보기도 했다. 원래는 줄무늬 폭의 비율이 30(파랑), 33(하양), 37(빨강)로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같은 폭으로 조정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의 탄생을 공표하고 자신을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원래 군주제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교황을 대관식에 불러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게 했는데, 그 찰나에 왕관을 낚아채 제 스스로 왕관을 썼다. 마치 “나를 황제로 만든 사람은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려는 듯이.
흥미롭게도 나폴레옹은 세계 문장학에도 공헌을 하였는데, 고대 로마에서 널리 사용되던 독수리를 왕실 문장으로 선택했다. 대관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는 독수리 모양으로 만든 황금 왕좌에 앉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독수리는 프랑스 국기에 안착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나라들의 문장에서 만나게 된다.
나폴레옹이 타도된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원되면서 프랑스 국기는 혁명군의 삼색기에서 왕실의 백합기로 돌아갔다. 백합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순결을 상징하는 흰 백합을 든 모습으로 종종 묘사되기도 해서 이러한 상징성을 이유로 유럽 문장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왕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바로 프랑스 국기는 혁명군을 대표하는 삼색기로 돌아왔다. 그러다 1871년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파리코뮌이 72일간 권력을 장악하면서 프랑스의 삼색기는 다시 한번 공식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이 기간에 프랑스 국기는 아무 무늬 없는 빨간색 깃발이었다. 그 이후로 빨간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게 되었으니 프랑스 국기가 소련과 중국 국기를 앞서간 셈이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구현한 삼색기는 카리브해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깃발에 두루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삼색기는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반도에 치살피나 공화국이라는 위성국을 수립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새 국기를 만드는 데 크게 힘을 쏟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단순히 프랑스 국기에서 파란색 줄무늬를 초록색으로 대치했다. 초록은 과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에 있었던 밀라노 공국의 문장에 사용된 색이기도 했다.
1802년 치살피나 공화국은 국명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이 신생국가는 빨간색, 흰색, 초록색 정사각형을 서로 겹친 매우 특이한 형태의 국기를 채택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며 이탈리아 공화국의 국기에 자신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추가하였고, 정사각형 모양은 그렇게 폐기되었다. 한편 20세기에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도 국기에 똑같은 독수리를 넣었다. 훗날 나폴레옹의 독수리는 나중에 보게 될 아프리카 ‘제국’의 깃발에도 진출하게 된다.
이탈리아인은 몇 년간 나폴레옹의 통치를 받으면서 프랑스혁명의 핵심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단일국가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리소르지멘토(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이탈리아반도의 여러 국가를 통합해 단일국가를 수립하려고 한 운동)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혁명가가 나폴레옹 시대의 초록, 하양, 빨강 삼색기를 공식 깃발로 정한 것은 지극히 이해할 만한 선택이다.
헝가리 국기에 얽힌 뒷이야기도 놀랍도록 비슷하다.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의 물결은 ‘국민국가들의 봄(the Spring of Nations)’이라 흔히 알려져 있다. 헝가리도 이탈리아처럼 프랑스혁명에 영감을 받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궐기했다. 초록, 하양, 빨강이 세로 줄무늬를 이룬 삼색기를 국기로 채택하려 했으나 이탈리아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선수를 쳤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대신 같은 색의 가로 줄무늬를 선택했다.
국민국가들의 봄은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대한 항거를 촉발하기도 했다. 당시 파랑, 노랑, 빨강의 삼색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프랑스 삼색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 루마니아의 국기가 되었다.
그보다 몇 년 전인 1830년, 벨기에는 브뤼셀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공연을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열정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포르티치의 침묵>을 보고 감명을 받은 관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폭동을 일으키고 곳곳의 상점을 약탈했다. 반란은 외곽 지역으로까지 번져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1년 후에야 막을 내렸다. 벨기에 혁명가들은 프랑스인에게 영감을 받아 검은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된 모표를 모자에 달고 다녔는데, 벨기에의 독립이 선포되자 반세기 전 프랑스가 제공한 디자인에 맞춰 이 민족 혁명의 색을 국기에 사용했다.
프랑스 국기는 유럽 대륙 너머로도 뻗어나갔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곳으로, 프랑스는 이곳을 ‘앤틸리스제도의 진주’라고 불렀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소비하는 설탕과 커피의 절반 가까이가 이 섬에서 생산되었을 정도다. 유럽인은 설탕을 ‘달콤한 소금’이라 부르며 향유했지만, 아이티의 현지 주민은 대부분 아프리카 노예로 부려졌다. 연이은 유혈 충돌과 황열병의 확산으로 섬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격감하자, 1804년 1월 1일 아이티는 노예 출신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공화국이 되었고 이웃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성공적인 봉기의 본보기를 제시해주었다.
새로 수립된 나라가 국기를 정한 방식은 상당히 단순했다. 혁명군 수장인 장 자크 데살린이 프랑스 삼색기의 가운데 흰색 부분(아마도 백인 식민지 개척자가 연상되었을 것이다)을 손으로 찢어낸 후 대녀에게 나머지 두 줄을 꿰매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아이티 독립국의 첫 국기는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된 2개의 세로 줄무늬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파리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 연결 고리는 실로 놀라웠다. 파리 시기는 흰 줄무늬를 추가해 프랑스 국기가 되었고, 지구 반대편 식민지에서는 이 흰 줄무늬를 제거해 파리 시기와 꼭 닮은 아이티 국기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프랑스 국기가 영향력을 행사한 서반구 나라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칠레다. 1817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던 칠레는 프랑스에 영감을 받아 파랑, 하양, 빨강이 가로 줄무늬를 이룬 국기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러시아, 파라과이 국기에 더해 파랑, 하양, 빨강으로 이루어진 줄무늬 국기가 하나 더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칠레는 좀 더 독창적인 디자인을 도입했다. 캔턴(canton)이라 불리는 좌측 상단 귀퉁이의 직사각형 부분에 흰 별을 추가하고 그 안에 원주민인 마푸체 부족을 상징하는 또 다른 별을 삽입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깃발은 현재의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신대륙에서 아프리카로 넘어가면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도 프랑스 국기가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독립국이 되었지만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매우 독특한 국기도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 가지 색상으로 구성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가로 줄무늬 중 위쪽 두 줄은 프랑스 국기에서 가져온 것이고 아래쪽 두 줄은 에티오피아 국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빨간색 세로 줄무늬는 가로 줄무늬들과 교차하고 있는데. 이는 독립을 위해 흘린 피를 의미한다. 빨간색은 국기에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색이며 대부분 피를 상징한다.
프랑스 국기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지만 프랑스 국기를 그 자체로 사용하고 있는 주권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프랑스 삼색기가 남아 있을 뻔했던 유일한 국기는 아프리카의 가봉 국기다. 1958년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낸 후 가봉은 새 국기의 캔턴에 프랑스 국기를 넣었다. 이 국기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은 기 중앙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노란색 가로줄인데, 이것은 가봉 영토를 관통하는 적도를 상징한다. 하지만 2년 후 가봉은 완전한 독립국이 되면서 캔턴에서 프랑스 국기를 완전히 제거했고, 가운데 노란색 줄의 폭을 파란색과 초록색 줄의 폭과 동일하게 조정한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 국기는 전 세계의 수십 개 국기에서 그 흔적을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지만, 프랑스 삼색기가 온전하게 들어가 있는 다른 국기는 없다. 나라의 국기가 완전한 형태로 다른 국기에도 등장하는 경우는 영국뿐이다.
유니언잭수 세기 전 레바논 베이루트 근처의 한 작은 마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 바로 옆에 악룡이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괴물은 끊임없이 제물을 요구했다. 마을 주민들은 매일 자기 자식을 용에게 바쳤는데, 그러다 마침내 마을 통치자 딸의 차례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녀는 용의 먹잇감이 될 운명으로 제단에 바쳐졌다. 하지만 다행히 근처를 지나가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게오르기우스라는 로마 군인이 용을 물리치고 마을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는 마을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이 괴물을 죽이겠노라고 선언했다. 오늘날 게오르기우스, 즉 성 조지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가장 존경하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성 조지의 십자가는 영국 국기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깃발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 국기의 기원은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기 속 십자가는 영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상징한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흰 십자가를 사용했지만, 언제부턴가 잉글랜드군은 붉은 십자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헨리의 아들인 사자심왕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 원정부터 성 조지를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채택했다고 하는데, 그 무렵 성 조지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군대를 꾸리는 데 있는 돈을 쏟아부었지만, 함께 출정한 거의 모든 나라와 분쟁을 일으킨 탓에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와의 다툼은 여파가 컸다. 팔레스타인의 도시 아크레를 함락한 후 아크레 성벽에 예루살렘 왕국, 잉글랜드, 프랑스의 국기와 함께 레오폴트 공작의 깃발이 걸렸는데 리처드가 레오폴트의 깃발을 치워버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깃발 사건은 국기가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마침내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리처드를 레오폴트가 생포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의 국민은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거액을 모금해야 했다.
영국 국기의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다음 사건은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직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발생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나라로 남아 있었음에도 같은 군주를 모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연합을 상징하는 깃발은 영국의 성 조지 십자가를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 십자가 위에 겹쳐 그려졌다. 성경에 따르면 성 앤드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제자로,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는데, 그의 십자가는 직선 2개가 대각선으로 교차한 X자 모양이었다.
공식적으로 동등하게 맺어진 연합이었지만 사실은 잉글랜드가 약간 더 우세했다. 1606년 잉글랜드의 십자가가 스코틀랜드의 십자가 위에 배치되었는데, 당시 대다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스코틀랜드가 붉은 십자가 위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비공식 연합기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선박은 이 비공식 깃발을 휘날리며 항해했다고 한다. 이 깃발은 돛대에 매다는 작은 기, 즉 잭(jack)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유니언잭이라는 명칭은 해상 용어에 뿌리를 둔 셈이다.
반세기 후인 1649년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발발했다.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지주 출신인 청교도파 올리버 크롬웰이 스스로에게 호국경, 즉 왕을 대신하는 섭정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을 부여하며 권력을 잡았다. 그 뒤로 잉글랜드는 11년 동안 공화국 체제를 유지했고 유니언잭 대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십자가가 서로 대각선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배치된 형태의 깃발을 국기로 사용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무자비하게 정벌하면서 아일랜드의 상징인 하프가 국기에 추가되었다. 크롬웰의 정책으로 인해 전쟁과 기근이 발생했고,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나갔으며, 아일랜드 땅은 잉글랜드 신교도의 차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개신교와 가톨릭 간에 갈등이 극심해지고 결국 나라는 분열되었다.
아일랜드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어느 날, 크롬웰의 수행원은 크롬웰을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자 크롬웰은 저 사람들은 자신이 처형되더라도 똑같이 환호할 거라고 철학적인 한마디를 남겼는데, 이 말은 예언이 되고 말았다. 크롬웰이 죽고 왕정이 복원되자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교수대에 매달고 머리는 창에 꽂아 모두가 보게 했다.
영국 국기는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가 합쳐져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을 이루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잉글랜드의 성 조지 십자가와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루 십자가에 더해 성 패트릭을 상징하는 아일랜드의 붉은 십자가가 추가된 형태였다. 이후 영국 국기에는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영국 국기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 투발루의 국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다른 국기에도 완전한 형태로 등장하며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국기는 유니언잭 말고는 전무하다. 영국이 평화적으로 이혼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오늘날 사용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기의 역사는 1901년 6개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기에는 별 6개가 등장하는데, 이는 연방을 이룬 6개의 영국 식민지를 나타낸다. 왼쪽에는 영연방을 상징하는 별이 하나 있고, 오른쪽에는 남십자성을 상징하는 별 5개가 지구 남반구를 보여주고 있다. 영연방을 상징하는 큰 별은 원래 다윗의 별처럼 꼭짓점이 6개였는데, 몇 년 후 꼭짓점이 7개인 별로 대체되었다. 파푸아뉴기니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새롭게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1975년 파푸아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립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꼭짓점이 7개인 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