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프랑스
허연재 지음 | 미다스북스
안녕! 내 사랑 프랑스
허연재 지음
미다스북스 / 2024년 12월 / 312쪽 / 22,000원
1. 인물 - 빈센트 반 고흐의 끝, 내겐 시작
반 고흐를 만나기 전, 시동부터(예약한 차가 아닌데요?) / 후아시앙프랑스3월 26일 오전 7시 15분.
지금 난 샤를드골공항 근처 호텔 방이다. 눈을 뜨니 비몽사몽이다. 어젯밤엔 여행 동지 Y와 M이 샤를드골공항에 날 마중 나왔다. 우리 세 사람은 짐을 챙겨 샤를드골공항 내에 위치한 렌터카 서비스 장소로 향했다.
다행히 여행 가방 세 개가 차 트렁크에 맞춤형처럼 딱 들어맞았다. 트렁크에 짐도 무사히 실었고, 우리 셋도 무사히 탔고, 차에 기름도 빵빵하게 가득 찼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첫 번째 행선지로 향하면 된다.
아무것도 없는 방 _ 슬픔도 언젠가는 끝나는데 / 오베르슈아즈렌터카에 올라타자마자 망설임 없이 향한 첫 번째 목적지는 오베르슈아즈다. 오베르슈아즈는 파리를 중심으로 북서쪽 발두아즈주에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3월 프랑스 북부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적한 프랑스 시골 풍경과 시야가 트이는 드넓은 평야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상쾌했다. 파리 외곽에서부터 출발한 덕분에 교통체증 없이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오베르슈아즈에 도착했다.
점차 좁은 길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Y는 속도를 줄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일요예배를 보고 나온 듯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담한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보였고 이 마을의 중심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차 창문을 살짝 내리니 어디선가 향긋한 빵 굽는 버터 냄새도 난다.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점심을 먹고 있고, 장을 보고 양손에 묵직하게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주말엔 공영주차장이 무료라 오베르슈아즈 시청 뒤편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주차했다. 주차장 앞쪽에 있는 깜찍한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인형의 집처럼 귀여운 이 건물은 오베르슈아즈 시청이다. 시청 앞쪽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그림 <오베르의 시청> 판넬이 설치돼 있었다. 길목 초입에서부터 고흐의 그림을 발견하니 이 작은 소도시, 오베르슈아즈를 온 이유가 실감이 난다.
내가 여길 찾은 건, 심적으로 고되고 힘들 때 나를 찾아온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을 밟아보고 싶어서다. 그의 삶과 인생은 지금의 나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아 내적으로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흐가 사용했던 밝은 채도의 색감들은 내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곤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삶을 엿볼 수 있는 라부여관으로 제일 먼저 향했다. 라부여관 외관은 핑크빛과 진한 체리 우드 색이 감도는 페인트로 칠이 되어 있고 규모는 작았다. 한눈에 보아도 매우 오래된 곳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여관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고흐의 박물관 겸 식당으로 운영된다. 1층에 있는 식당은 19세기부터 운영되어 온 와인 상점 겸 레스토랑이었으며 여전히 현재까지 그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창문 안을 빠끔히 들여다보니, 몇몇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마치 19세기로 돌아간 옛날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 같았다.
비수기 시즌이라 매표소 앞에는 줄 선 사람들도 없다. 난 표를 구매했고 매표소 직원은 영어 투어는 15분 후에 시작할 예정이니 여관 건물 계단 앞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해 주었다. 매표소 앞쪽에는 벚꽃나무처럼 생긴 꽃이 풍성한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다. 키가 크고 화사한 이 나무가 라부여관의 음침하고 우울한 공기를 정화해주는 듯 보였다.‘고흐가 이곳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여길 지켜 왔던 나무였을까?’
1시 반이 되자 라부여관 2층에서 동그란 안경을 쓴 귀여운 여성 가이드가 라부여관에 오신 걸 환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덧붙여 자신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으니 양해해 주길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가이드는 그녀만의 독특한 악센트로 고흐가 오베르슈아즈에 온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오베르슈아즈에 머물렀던 기간은 거주했다고 말하기엔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다. 1890년 5월 20일, 고흐는 37세가 되던 해에 오베르슈아즈에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약 7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다. 동시에 예술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흐는 이곳에 오기 전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위치한 생폴드무솔 수도원 정신병동에 머물면서 정신과적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좋은 에너지를 채우면서 솟구치는 창의력을 발산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홀로 방치되면 또다시 정신적 질병에 고통을 겪을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 닥터 가셰의 진료를 받기로 했다. 따스한 날씨 덕분에 살기 좋은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온 이유도 닥터 가셰가 사는 오베르슈아즈로 오기 위해서였다. 닥터 가셰는 오베르슈아즈에 거주하고 파리를 왔다 갔다 하며 진료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작품을 사랑했고 예술가들의 심리를 너그럽게 잘 이해하던 인물이었다. 고흐의 동생 테오는 그라면 자기 형을 잘 돌봐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라부여관 2층 내부는 아트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쪽 편에 있는 문을 여니, 고흐의 방이 있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 펼쳐진 좁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순간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나무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 부식된 듯 균일하지 않은 벽의 빛깔, 오래되어 쾌쾌한 냄새가 밴 나무판자들이 나의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서서히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 어깨에 진 화구통과 무거운 이젤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반 고흐의 무거운 한숨까지.
나선형 계단을 끝까지 오르니 두 개의 방이 보였다. 그중 왼쪽 방이 반 고흐가 지냈던 방이다. 고흐의 방 내부는 처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이지 볼 게 없었다. 서너 평도 안 되는 공간에는 나무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프랑스에 오기 전, 라부여관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이 문구를 하나 봤었기 때문이다.“Nothing to See but Everything to Feel.”(볼 건 없지만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얼마나 볼거리가 없으면 미리 언질을 주기 위해 이런 글을 홈페이지에 남겨둔 건가 싶었는데, 직접 보니 그럴 만했다. 뭔가를 볼 거라는 기대를 안고 온다면 입장료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는 데 들인 시간과 교통비가 아까울 수 있다. 그러나 한 청년의 방황했던 일대기를 알고, 서른 중반에 삶의 추운 겨울을 버티다가 끝내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던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널브러져 있다.
방엔 제대로 된 온전한 가구 하나도 없었다. 원래 고흐가 사용하던 다른 가구들은 어디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가이드에게 물었다. 돌아온 가이드의 답변은 좀 허무했다.“고흐가 자살하고 나서, 여관 주인이 모두 태워 버렸어요.”
자살한 사람의 가구와 소지품을 그대로 두면 부정 탄다는 미신 때문에 여관 주인은 고흐가 사용했던 모든 가구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주인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괜히 내가 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의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이 공간을 보니 안타까웠다.‘여기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늠할 수는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컸던 그에게는 이 공간이 얼마나 갑갑했을지, 그리고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서 얼마나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심지어 고흐가 이곳에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슬픔은 영원히 지속될 거야.”였다.
기울어진 지붕 벽에는 작은 창 하나가 있다. 책 한 권 크기 정도로 작은 창이지만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세상의 온기가 이 방에 전해지는 유일한 통로. 아침이 되면 저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로 또 오늘을 살아보자는 다짐을 했을 것이고, 밤이 되면 달빛에 비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좌절했을 거다.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 갈등하며 살아갔을 거다.
유일하게 반 고흐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던 동력은 창작활동이었다. 고흐는 오베르슈아즈에서 두 달 동안 지내면서 엄청난 양의 작업을 쏟아냈다. 70일 동안 약 80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하루에 평균 한두 개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난 오히려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는 행위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증거인데. 게다가 예술가들은 고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우울과 고통을 안고 산다. 작품 활동을 통해 아주 잠시나마 그 고통을 잊으며 창작의 기쁨을 만끽하며 삶을 살아가는 거다. 누구보다 열심히 다작했고 몰입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고흐가 살고 싶어 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고흐가 내게 다가왔던 시기는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 사방이 모두 막다른 벽 같다는 느낌을 받게 했을 때였다. 난 나름대로 진취적인 걸 좋아해서 도전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정해진 길보다는 나만의 길을 닦아가며 살아온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길이 없으면 또 만들어 가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여자로서 전통적인 삶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등에 달린 날개가 꺾여 버린 거다. 역시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깜깜한 터널을 걷는 질풍노도의 시기 같았다.
여기 가도 길이 막히고, 저길 가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 인간관계, 커리어, 지켜왔던 신념, 모든 게 뒤죽박죽 잘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 여태 잘못 살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던 내가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런 시기에 반 고흐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의 작품과 역사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자석처럼 끌렸다. 반 고흐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방황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수많은 편지에 남긴 누구보다 솔직한 글과 그림들이 내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고 위로가 되었다.
난 아무것도 없는 고흐의 방에서 최대한 허공을 매만지며 고흐의 온기를 느끼고자 했다. 고흐의 작품으로 위로를 받았던 팬이기에 방명록에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사진을 보내 달라며 다시 한번 부탁의 말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프랑스 여행의 첫 여정은 고흐의 삶의 종착지로 시작되었다. 인제 헛된 방황을 그만 끝내고 습하고 어두운 터널을 그만 나오라는 계시 같았다. 그간 한 보자기 끌어안고 있던 불안과 우울한 생각들을 고흐의 마지막 발자취가 남은 곳에 훅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훌훌 털고 앞으로 펼쳐질 다음 여행지로 가볍게 떠나리라. 라부여관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아까 입구에서 봤던 분홍빛을 머금은 벚꽃나무를 한번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슬픔은 영원하지 않아. 이제부터 천천히 하나씩 좋은 것들, 환한 것들로 내 안을 채워 나가 보자!’
별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 _ 그의 마음은 찬란했던 생폴드무솔 수도원에 / 생레미드프로방스서둘러 생레미드프로방스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올라탔다. 생레미드프로방스는 이번 여정에서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마지막 행선지다. 고흐의 일대기 시간 순서를 고려했다면, 오베르슈아즈를 가기 전에 가는 게 맞지만, 지리적인 위치와 일정을 고려하니 제일 마지막 순서가 되어 버렸다. 생레미드프로방스는 빈센트 반 고흐의 정신적 고통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창작력이 최고조로 폭발했던 곳이다. 성격 있는 반 고흐가 머물렀던 병동과 수도원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했다.
고흐는 자기 귀를 자르고 나서 아를의 노란 병동에서 지냈었다. 하지만 그 병원은 정신 치료 전문 병원이 아니었다. 고흐의 정신병이 더 심해졌고,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과 감독이 불가피했다. 결국 고흐는 자신의 의지로 1889년 5월 8일,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생폴드무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 우리는 관광 정보 안내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안내소 정문은 닫혀 있었고, ‘점심시간’ 표식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직접 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찾기로 했다. 마을 돌바닥에 박힌 고흐 동판을 따라가면 찾아갈 수 있다. 가다 보니 마을 중심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평온한 시골길이 나온다. ‘이 길이 맞나?’ 의심될 때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곳곳에 심어놓은 고흐의 그림 판넬들이 거의 20~40m마다 나타나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한 20분 정도 걸었을까? 고흐가 좋아했던 보라색 아이리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를 발견하니, ‘정말 이곳이 고흐가 지내던 수도원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늘 궁금했다. 반 고흐가 제 발로 찾아온 수도원은 어떤 곳이었는지, 어떤 풍경을 보고 지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명작에 온전히 자신을 쏟아 낼 수 있었는지도. 이 모든 걸 직접 몸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수도원 내부는 서늘했다. 마치 동굴 속을 들어가는 듯, 체온이 쓱 내려가 잠시 벗어 둔 겉옷을 입었다. 이곳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식사하고 요리했던 부엌과 식사 공간을 둘러본 후 고흐가 지냈던 방으로 향했다. 이 수도원은 11세기에 최초로 지어졌고, 17세기 초반 정신병 환자 보호시설로 지정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흐의 방으로 찾아가는 길은 좀 독특했다. 기념품 가게를 통과해서 가는 미로 같은 경로였다. 정신병동으로 사용된 곳이지만, ‘아무리 못해도 라부여관 방보다는 낫겠지?’라는 기대를 안고 걸어갔다. 드디어 고흐의 방에 도착했다. 역시나 라부여관 방보다 상태는 훨씬 좋았다. 벽은 회갈색에 초록빛이 감돌고 바닥은 얼룩덜룩하게 바랜 테라코타 색 타일로 덮여 있었다. 이 조합은 공간을 음침하고 차가워 보이게 했다. 공간 속에는 페인트 자국들로 얼룩진 화판, 나무 이젤, 의자, 침대가 있었다. 입구 가까이엔 안락의자도 있다. 아마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독서광이었던 고흐는 책을 읽고 그림도 그리면서 바깥세상 여행을 했을 것이다.
반 고흐는 이곳에서 위대한 걸작 <별이 빛나는 밤에>를 창조했다. 그림처럼 격동적인 느낌을 기대하며 난 창가로 다가갔다. 멋있을 거라 기대했던 풍광 대신 방범창 철근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의 탈출이나 낙상 사고를 막기 위해서 설치를 해두었을 것이다. 좁은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건 평화로운 뒤뜰이었다. 댕강 잘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라벤더밭,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보였다. 그림 속 높은 첨탑 교회와 옹기종기 모여 불 켜진 집들을 연상시킬 만한 그 어떤 흔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반 고흐는 동이 트기 전 밝게 빛나는 비너스를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기상했고, 비너스가 별들과 함께 밤하늘을 밝게 비춰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눈에 담은 것들을 되새김질하며 내면의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화폭에 쏟아냈다. 후방에 있는 산 능선, 회오리 문양을 만들어 내는 바람과 구름, 하늘에 닿을 듯 솟아난 사이프러스 나무와 교회가 있는 마을은 모두 고흐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다. 난 창밖 너머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서 생각했다.정말이지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대단한 기술자란 것을….
그런데 내가 봤던 고흐의 방은 실제 고흐의 방이 아니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참 후에 반 고흐 스페셜리스트의 책을 읽고 나서 뒤늦게 안 사실이다. 고흐가 실제로 있었던 방은 현재 정신과 병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건물 내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일반 외부인과 관광객들은 입장이 불가능해서 그 방과 최대한 비슷하게 조성해 놨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