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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프란치스코 교황 외 지음 | 윌북


나의 인생

프란치스코 교황 외 지음

윌북 / 2025년 4월 / 296쪽 / 19,800원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라디오에서는 연신 뉴스 속보가 쏟아졌다. 마리오 베르골료는 평소처럼 일터에 가기 전 라디오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방금 청소를 마친 아내 레지나가 옆에서 막간의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커피의 진한 향이 고향 이탈리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서인지, 마리오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작은아들 오스카르의 울음소리가 마리오의 평화를 깨트렸다.

마리오는 집을 나서며 작은아들을 안고 달래는 레지나와 포옹하고 인사를 나눴다. 조금 있으면 로사 할머니가 와서 막 세 살이 된 큰아들 호르헤를 데려가 낮 동안 돌보아줄 터였다. 마리오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충격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마리오와 레지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유럽에 사는 친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로사 할머니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르헤는 로사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

로사 할머니는 제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른이셨습니다. 저를 처음 주님께 이끌어주신 분은 할머니셨어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죠.

그 무렵 저는 막 세 살이 되었을 때니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당시를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아요.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전쟁 소식을 전했죠.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친척들이 편지로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어른들이 편지를 큰 소리로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원자폭탄


축구 경기가 시작하기 전 경기장의 라디오에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이 이끄는 일본 대표단이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 올라 항복에 서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상의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몇 달 전에 전쟁이 끝났었다.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자,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던 것이다. 그리고 5월 7일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945년 9월 2일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적대 행위가 종식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을 기억하며 오늘날에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발생한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원자폭탄으로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15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호르헤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에게서 원자폭탄 이야기를 들었다.

***

1945년 8월, 원자폭탄 두 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치명적인 무기를 쐈다고 말했지만, 그 무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원자폭탄이 뭐예요?” 모두가 궁금해했어요. 시간이 지나자 신문과 라디오에서 원자폭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전쟁을 목적으로 원자력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일어날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범죄입니다. 매우 부도덕한 행위지요! 새로운 전쟁 무기를 만들면서 어떻게 평화와 정의의 옹호자인 양할 수 있을까요? 대량 살상 무기는 거짓된 안정감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무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의심과 공포뿐이니까요. 폭탄과 같은 무기의 사용은 환경과 휴머니즘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합시다.

1948년 막냇동생 마리아 엘레나가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셔서 더는 우리를 모두 돌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49년 오스카르와 저는 엔리코 포촐리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산토스 앙헬레스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6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저는 기숙학교에서 무엇보다 공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운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을 일깨워줌으로써 편견이나 방향 감각 상실이 없는 가톨릭 문화가 제 몸에 배게 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기숙학교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습관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습관들은 가톨릭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 방식을 형성해주었습니다. 열두 살 때 사제의 소명을 처음 느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용기를 내어 마르티네스 신부님께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성소에 대한 열망은 195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강렬하게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냉전 그리고 매카시즘


1953년 6월의 어느 날 아침 7시, 호르헤 베르골료는 실험실 문을 열었다. 당시 16세였던 호르헤가 다니던 제12 산업학교는 학생들에게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현장 실습을 하게 했다. 그러나 호르헤가 그 이른 겨울 아침 실험실을 방문한 것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호르헤를 맞아준 에스더 발레스트리노는 독재 때문에 조국에서 도망친 파라과이 생화학자였다. 에스더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실습 시간 외에는 시사 문제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에스더는 매일 아침 신문을 사 와서 읽었다. 그날 아침 신문 해외 면에는 미국의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설 로젠버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두 사람은 2년 전 소련 스파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판사의 판결에 따르면 로젠버그 부부는 핵무기에 관한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고 한다. 이것은 냉전의 결과,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매카시즘의 가장 잔인한 결과였다.

***

비오 12세 교황님께서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는 전 세계에서 지금도 집행되고 있는 사형을 용납할 수 없어요. 사형은 정의의 패배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사형이란 우리가 주님에게 받은 것, 즉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로 결정하는 건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겐 그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로 보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단결하여 사형제 폐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단결해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에스더는 제게 책과 잡지를 추천해주었는데 그중에는 공산당 관련 출간물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수준에서의 독서, 그러니까 에스더가 속한 세상을 알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에 관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교회에도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재산을 공유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입니다.

1950년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일과 사랑을 경험하고,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났으며, 무엇보다 사제 성소를 경험했습니다. 사제 성소는 초봄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

실험실과 학교를 오가는 동안 겨울이 지나고 남반구에 봄이 왔다. 1953년 9월 21일 월요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초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학생들은 봄 축제를 앞두고 약속을 잡느라 분주했다. 호르헤도 플로레스역에서 친구들을 만나 도시 밖에서 열리는 축제에 갈 계획이었다. 축제 날이 되기 몇 주 전 방송은 7월 한국전쟁이 끝났다는 소식과 9월 7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스탈린주의의 비극적 시기를 이겨낸 많은 이에게 흐루쇼프의 선출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바로 냉전의 종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계를 두 블록으로 나누는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1953년 9월 21일, 축제에 가려고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플로레스 대성당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주님께 인사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성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카를로스 두아르테 이바라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던 중 저는 갑자기 하느님을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을 경험했어요. 하느님은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분께서는 제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저는 주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자비로 그를 바라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불러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마태오의 소명 사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문장이 나중에 저의 주교 모토가 되었고, 교황이 된 지금도 제 문장에 새겨진 것은 우연은 아닙니다.

그렇게 믿음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저는 그날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땅에 엎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가려던 계획은 그것으로 끝났어요.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저를 맡기고 있었어요. 저는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혼자 조용히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에 갈 때까지 2년간 사제 성소에 대해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다가 마침내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지만, 어머니는 제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신 채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르겠다. 호르헤, 너는 이미 성인이야. 그래도 대학을 마치고 나서 결정하렴.” 어머니는 당신의 장남이 의사가 되는 걸 꿈꾸셨던 거죠. 로사 할머니는 제 성소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행복해하셨어요.

마침내 저는 엔리코 포촐리 신부님의 영적 지도를 받아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열아홉 살에 비야 데보토 대교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해, 저는 성소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소를 받기 전에는 여자 친구도 한 명 있었어요. 신학교에 다니던 때 삼촌 결혼식에 갔다가 한 소녀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어요. 얼마나 예쁘고 똑똑했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죠. 일주일 정도는 그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려 기도하기도 어려웠어요. 다행히도 그런 시기는 지나갔고, 다시 저는 제 소명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1957년 8월, 신학교에 독감이 유행했습니다. 저도 독감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나았지만 저는 열이 가시지 않아 계속 방에 갇혀 지내야 했어요. 그리고 그해 11월, 낭종 3개가 생긴 오른쪽 폐의 상엽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도 심해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저는 교구 신학교를 떠나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58년 3월 11일 저는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칠레의 선교지에서 공부했어요. 그러고 나서 산타페에 있는 인마쿨라다 콘셉시온 학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살바도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유명 작가를 초청해 학생들과 함께 기억에 남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에게도, 그리고 사제 서품을 앞두고 준비하던 저에게도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달 착륙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밤 10시 가까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산호세 신학교 기숙사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 텔레비전 시청실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장 신부님은 학생들이 역사적인 달 착륙 생방송을 볼 수 있도록 취침 시간을 늦춰줬다. 32세의 호르헤 베르골료도 그 방에 있었다.

사실, 호르헤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5개월 뒤면 사제 서품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침묵과 기도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인생의 위대한 사건을 준비하는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최초로 달에 발을 딛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

정말 잊을 수 없는 밤이었어요! 먼지 위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우주비행사가 한 말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이었어요.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입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모두는 세상이 이제 다르게 변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지구로 돌아온 후 세 우주 비행사는 1969년 10월 중순에 바티칸에서 교황의 영접을 받기도 했어요. 그날 바오로 6세가 하신 말씀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인간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신비를 알고자 하는 본능이 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그들의 용기 덕분에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우주를 향해, 더 큰 지식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사실 당시 저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사제직이라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오로 6세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두려움에 대해 묵상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면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제 서품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서른세 번째 생일을 나흘 앞둔 1969년 12월 13일이었어요. 어머니와 할머니, 형제자매들이 신학교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어머니는 미사 후에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첫 강복을 청하셨어요. 할머니가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셨던 게 기억납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셨어요. 아버지는 1961년에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포촐리 신부님도 아버지와 같은 해에 우리 곁을 떠나셔서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할머니는 5년 후인 197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서의 임무를 마친 베르골료 신부는 1983년 산미겔로 돌아와 본당 신부 겸 막시모 데 산호세 신학교 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52세에 고국으로 돌아온 베르골료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살바도르 학교에서 일상을 시작했다. 그는 학교 옆에 있는 살바도르 성당에서 고해신부로 일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베르골료 신부를 도와 부관구장으로 일하던 빅토르 조르징 신부가 새 관구장이 되었는데, 그는 아르헨티나 예수회 전체를 관장했던 베르골료 신부에게는 아주 작은 임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베르골료 신부는 그의 결정에 순명했다.

겨울이 목전에 다가온 1989년 11월 9일이었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예수회 신학생 기예르모 오르티스였다. “호르헤 신부님, 빨리 텔레비전을 보세요.”

베르골료 신부는 텔레비전 시청실로 달려갔다.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동베를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냉전의 상징인 장벽을 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곡괭이로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온 가족이 차에 올라타 국경으로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던 장벽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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