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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이 인격이다

김선희 지음 | 나무생각


다정함이 인격이다

김선희 지음

나무생각 / 2025년 2월 / 312쪽 / 19,800원





1장 마음이 깨진 당신에게



지치고 피로한 나를 먼저 살필 것


기실 피로 사회다. 우리 중에 피로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피로감을 인지하여 해소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다. 즉 피로 관리력이 필요한 것이다. 일과 사랑, 현재와 미래, 몸과 마음, 유무형의 자산, 내면과 외부 환경, 이 모두를 꾸려가기 위해선 하루하루 내 피로를 돌보는 자세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른 대단한 능력보다 하루하루 피로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핵심일지 모른다. 피로 관리력이 바로 슈퍼 파워다. 꿋꿋하고 의연한 성인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피로 관리력이 필수다.

과부하에 걸린 사람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명민하게 감지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에너지 수준, 가동 상태, 남은 에너지를 아는 것이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직업이 있든 없든 우리 일상은 외력과 내력이 싸우는 순간과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외부의 요구 사항이 있고 내면의 욕구가 있다. 외부의 요구 사항을 인지하고 대응하는 동시에 내면의 욕구와 소망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펴야 한다. 외부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내면의 욕구를 무시하면 결국 탈진이 오고 일상과 심신의 건강은 어떤 식으로든 망가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적응’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적응과 부적응의 기로에 서 있다. 성공보다 적응이다. 적응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에너지 만능 시대여서일까. 우리는 자신이 지쳐 있다는 걸 감지하는 데 둔감하다. 상승하기 위해, 최고를 거머쥐기 위해 에너지를 가동하고 또 가동한다. 마치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양 살아간다. 외견상 안정되고 침착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고도의 만성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팽팽한 고무줄 그 자체다. 늘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거머쥐어야 하고, 성취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기에 내가 나를 몰아붙인다. 압박감과 한 몸이 되어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결국 일중독자가 현대사회에 넘쳐난다.

직장인들만 일중독이 아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부모 중에도 일중독자가 넘친다. 완벽하게 빈틈없이 자녀를 밀어붙이는 부모, 자녀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불나방이 된 부모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부모의 헌신과 열정이라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다. 과열 상태로 자녀의 삶에 침입함으로써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자녀 삶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자녀다. 자녀들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얼마나 과잉으로 가동되고 있는지를 부모가 민감하게 감지하고 앞서서 관리해 줘야 한다.

짜증 다반사:
맹렬하게 살아가느라 피로감을 무시하면 외면당한 그 피로감은 다른 모습으로 둔갑해 출현한다. 대표적인 것이 짜증이다. 짜증은 공개적인 곳에서는 감춰지다가 집에 와서 드러날 수 있고, 회사에서 감춰지다 애인 앞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감춰지다가 온라인 악성 댓글로 드러나기도 한다. 불평불만, 한숨, 게으름, 과민함 등 다양한 증상도 부추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짜증이 표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에는 주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한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갈등의 씨앗이 된다.

물론 짜증을 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짜증이 난다면 우선 내 컨디션을 점검하는 게 현명하다.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누군가를 들이받고 싶을 때, 호흡을 가다듬고 멈추자. 외부를 탓하기보다 ‘내가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다’, ‘내 누적 피로감이 쌓일 대로 쌓여 선을 넘은 것이다’의 가능성을 열어두자. 나를 재정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지쳤을 때 멈추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피로감을 명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일이 돌아가지 않아 과민해질 때 짜증을 낸다든지 타인을 탓한다든지 혹은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는 식의 소모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심호흡하며 ‘초점’을 조정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혹여 ‘내가 피로해서 이러는 것은 아닐까?’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자신을 놔준다. 그렇게 쉼표를 찍는다. 이들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도 현실적인 내 에너지 레벨과 집중력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다. 진정한 효율이다.

그러나 경쟁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은 경쟁자, 타인 또는 슈퍼맨이 기준이다. ‘저 사람은 안 쉬는데 내가 쉰다고? 내가 더 앞서야지.’ 비교하는 마음이 솟아오르며 무리하게 밀고 나가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이게 바로 내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긴 자의 모습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의 내면에는 끊임없는 비교하기 프레임, 경쟁심과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럴 때 번아웃이 온다.

장기적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그런 마음이 솟아날 때 스스로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안다. 어깨에 힘을 뺀다. 심신의 상태를 정성스레 돌본다. 휘몰아치듯 급변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무엇보다 ‘내가 지쳐있다’는 것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살아갈수록 중요한 것은 에너지 보존: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은 나의 에너지 레벨이 하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나날이 떨어지는 심신의 에너지 레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섭리다. 노화에 따라 에너지 레벨이 하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가올 중년기와 노년기의 탁월한 적응을 위해 꼭 필요한 자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에너지 레벨이 저하되는 것을 부정하고 ‘포에버 영’을 외치며 20대처럼 살아간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이렇게 살아가면 이들에게 다가오는 건 실수와 사건·사고밖에 없다. 실제로 몸을 다치는 일이 많고 회복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에너지 수준의 하락을 명민하게 감지하며 라이프스타일과 행동반경을 조정하는 것은 지혜로운 적응 행동이다. 행동반경과 대인관계 폭을 현실적으로 줄이는 대신 핵심적 활동(걷기, 운동, 식이요법, 내면 가꾸기, 취미와 레저 활동, 소중한 인간관계 돌보기 등)과 일상의 휴식에 좀 더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을 평안하고 탁월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내 에너지를 잘 보존하며 생활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한계를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중요한 것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아니고 에너지 보존이다. 의외로 주변인들은 잘못이 없다. 내가 지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남 탓의 늪


“선생님,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내담자 P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절절함이 상담실 카펫에 스며든다.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유를 묻는 습성이 있다. 이 일이 왜 벌어졌지?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지? 저 사람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지? 우리는 인생의 꽤 많은 시간을 인과관계를 따지고 분석하는 데 사용한다. 합리적이건 편파적이건,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인과관계를 파고든다. 하지만 인간사에서 완벽하게 명확한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를 파고드는 그 자리에는 비난과 책임 전가만 난무할 뿐이다.

연인이나 부부 같은 일대일 관계에서 비난과 책임 전가 현상은 더 뚜렷해진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의존, 기대와 좌절, 만족과 실망, 긍정 감정과 부정 감정, 욕구 충족과 욕구 불만이 오랜 세월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두 사람은 강력한 감정적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친밀 관계, 애정 관계는 곧 감정 관계다. 감정의 상호작용이라는 배에 탄 두 사람이 갈등 상황에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냉철히 노를 젓는다 해도 갈등의 원인과 답을 찾고 거기에 합의하는 일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던질 수 없는 존재인 데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내 입장을 고수하는 아집을 부리는 존재다. 감정과 감정이 얽히고설킨, 상호작용의 실타래 그 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뒤집어씌우고 빠져나오다:
난관과 좌절에 부딪힐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좋음과 나쁨’의 이분법으로 저울질을 시작한다. ‘행복과 불행’으로 가른다. ‘나쁨’, 즉 불행감과 좌절감, 실망, 환멸, 분노가 쌓였을 때 위험 스위치가 올라간다. 이 불행을 빨리 없애야 해. 어떡하지? 마음의 장부에 빼곡히 적힌 불행 리스트, 좌절 보따리를 쳐다본다. 난감하다.

그 찰나 우리는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찾는다. 지금 불쾌한 내 상태, 내가 느끼는 이 불행감과 분노는 내 잘못이 아니고 타인 때문이라 여기며 범인을 찾는다. 뒤집어씌울 사람 말이다. 연인 관계에서는 애인 탓을 하고, 부부간에는 배우자 탓을 한다. 그렇게 상대를 탓하며 나는 빠져나온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다른 걸 가르쳐준다.

자신의 불행감이나 좌절, 분노, 실망이 상대 탓이 아니라 나도 관여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상대방이 나를 자극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불행의 단독 주범은 아니다. 자기중심적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건 무의미하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나는 감정과 좌절의 원인이 전적으로 외부 요인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100%의 불행을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와 내가 만나 빚어내는 ‘그것’, 즉 전체 맥락과 상호작용을 관망하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갈등 상황에서 파트너를 탓하고 배우자를 탓하는 한, 깨달음과 해결의 자양분은 얻을 수 없다. 인생이 옥토가 될 기회가 박탈된다.

애정 관계에서 책임 전가는 독이다:
내 불행에 파트너를 탓하는 마음 자체는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탓하는 마음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남 탓하는 행동은 자기중심적 발상이자 미숙한 행위다. 파트너에게 불찰이 있다고 해서, 배우자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 불행을 철저히 상대방 탓으로 돌려버린다?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고 당신만 원망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난관 앞에서 내 행동과 사고방식은 점검하지 않고 상대 탓을 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싸움으로까지 이어 나간다면, 당신은 책임 전가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를 깨닫는 것이 상대의 심리적 불찰과 내 아픔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다. 상대도 문제지만 당신도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갈등 상황에서 남 탓을 하는 건 유아기적 대응이다. 어른의 다른 이름은 책임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2장 다름을 수용하는 새로운 방식



비판을 녹여내는 심리적 용광로


비판을 들을 때가 있다. 부당하다 느껴지는 비판, 어이없는 비판을 들을 때도 있다. 비판자가 얼굴 보며 지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 내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명료하고 담대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기주장의 적정선을 넘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시도하거나 시시비비를 따짐으로써 불화를 일으킨다면 지혜로운 대처라 하기 어렵다. 나 또한 비판자, 공격자가 되어버린다.

대신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와 그 비판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얼토당토않은 극단적 비판이 아닌 이상, 그 비판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정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스스로는 접하지 못했을 내 모습의 일부라 여겨보는 것은 어떨까? 아프지만 말이다.

알맹이를 찾아내자:
비판에서 독성을 제거하고 정제하여 알맹이만을 사용할 수 있다면 값진 레슨일 것이다. 알맹이를 만나 소화할 수 있는 강인함과 담대함이 안에 이미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강인함과 담대함은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거꾸로, 알맹이를 소화함으로 강인함과 담대함이 내 안에 움트고 자라나기도 한다. 비판받음을 마음 상함으로만 끝내지 않았을 때 이 심리적 진실은 보람차게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과 타인을 긍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비판 속 알맹이를 찾는 일은 좀 더 수월해진다. 건강한 사람은 낙관과 비관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사람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낙관이 최소한 51%는 되어야 살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야 너그러움을 발휘할 여지가 생긴다. 나를 비판한 상대방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내게 비판을 가한 의도가 명백한 악의가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과 관점, 욕구, 살아온 역사가 각기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선 비판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심리적 우아함이 필요하다.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가 뭐라고 감히? 네 주제에?”라며 자기애적 상처와 격노에 휩싸여 상대를 경멸하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 억울해! 그간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어.”라며 피해의식을 갖거나, “그래? 너랑 이제 끝이야. 너 이제 필요 없어.”라며 상대방과 충동적으로 절교하는 선수 치기 대응은 지양하자. 미숙한 정신 승리일 뿐이다. 그 에너지를 보다 세련되게 사용하자. 세련된 다음 단계, 건강한 대응은 어떤 걸까?

비수를 녹이다:
우리 마음은 두 개의 원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원은 ‘외부 자극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마음’이고, 두 번째 원은 첫 번째 원을 품고 있는 큰 원으로 ‘첫 번째 원에서 느낀 마음을 녹여내는 마음’이다.

외부 자극, 즉 비판이나 충격, 갈등은 첫 번째 원을 향해 꽂힌다. 비수가 되기도 한다. 이때 첫 번째 원에서는 즉각적인 감정 반응과 스트레스 반응, 온갖 반사 반응과 위급 반응이 발생한다. 공격 태세가 될 수도 있다. 도망가 버리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동물적 생존 반응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외부 자극이 꽂히는 첫 번째 원(상처받은 마음)을 두 번째 원이 ‘녹여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외부 자극에 다친 마음, 상한 마음을 강인하고 담대한 ‘큰마음’으로 녹여낸다. 이것을 심리적 용광로라 한다. 내면에 심리적 용광로가 있다면 살아가면서 그만큼 든든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인지라 시행착오와 연습 그리고 믿음을 통해 생성될 수 있다. 시간이 걸린다. 값진 것일수록 획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비판을 받았다면 비판으로 상한 그 마음을 심리적 용광로로 보낸 후 녹여내자. 용광로의 스위치를 올리면 필경 그 비판은 알맹이를 남기고, 잘 정제된 하나의 정보로 처리된다. 그런 뒤 강인하고 담대한 나로 의젓하게 살아가자. 상대방이 보든 말든.

부부, 두 사람의 대서사


부부 관계는 참으로 어렵다. 어려운 게 맞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낭만적으로 구애하며 황홀감과 충만감, 합일감에 빠져 있을 때는 결혼 생활이 이다지도 어려울지 상상하지 못한다. ‘아, 이 사람이다!’라는 흥분성 환희에 서로에 대한 탐색의 시기, 성격 검증의 시기를 축소시키거나 슬쩍 건너뛰기도 하고 쫓기듯 다급하게 결혼으로 돌진하는 커플도 있다. 알고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취향 몇 가지만 같아도 서로 운명이라고 확신하며 들뜬다. 부부로서 융화를 위해 정작 중요한 영역은 살펴보지 않고서 말이다.

결혼 후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부딪친다. 갈등과 실망, 분노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배우자의 뚜렷한 불찰로 관계가 망가지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이 유달리 잘못한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부부 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부부 관계는 관계 난이도 중 최고 난이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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