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다리, 서울을 잇다
윤세윤 지음 | 동아시아
한강 다리, 서울을 잇다
윤세윤 지음
동아시아 / 2025년 2월 / 312쪽 / 20,000원
양화대교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양화대교라고 하면 노래 제목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강의 다리 중 가장 많이 노래 제목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양화대교이기 때문이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김세레나의 <제2한강교>, 진송남의 <이별의 제2한강교>, 인디밴드 제8극장의 <양화대교>가 양화대교를 노래의 소재로 삼았다. 이는 양화대교가 서울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 또한 양화대교를 매우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양화대교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전부 우리나라 엔지니어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장대교량(교각 간 거리가 200m를 넘어가는 대형 교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화대교는 한국의 설계 및 시공 기술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다리를 건설한 엔지니어들은 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양화대교 건설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과 경험이 한국의 대규모 토목 사업 수행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양화대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가능케 한 기술적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화대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화대교라는 이름이 아니었다. 당시 한강대교 외에 광진교가 한강에 있기는 했지만, 광진교가 있던 지역은 1970년대 강남개발 이전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서울 한강에 새롭게 지어진 양화대교를 ‘한강대교’ 다음에 만들어진 다리라 하여 ‘제2한강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2한강교는 사실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6·25전쟁 때 한강에 하나밖에 없는 한강대교에 군과 피난 인파가 뒤엉키며 군사 작전 등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이를 개선하려면 전쟁 시 군사적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는 다리가 추가로 필요했다. 당시는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휴전’이라는 단어는 언제든 다시 전쟁이 재개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국정의 많은 부분이 전쟁 준비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2한강교는 비상시 인천으로 들어오는 군용물자를 신속하게 한강을 건너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화대교는 전시에는 통제되어 오로지 군사 작전에만 사용하고 평시에도 군사 목적의 이동을 우선하도록 계획되었다.
서울 서부와 수도권 서부를 연결하는 이런 태생적 목적 때문에 지금도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와서 한강을 건너고자 할 때는 양화대교를 건너는 것이 편하고 빠르다. 자이언티의 노래에서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라는 가사가 나온다. 자이언티가 학창 시절에 강서구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서울 서부 방면에서 택시를 운행했다면 자연스럽게 서울과 부천, 부평 등 인천 방면을 오가는 손님을 태우는 경우가 많아, 으레 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위해 양화대교를 건너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이렇듯 노래 가사 속에서 다시금 양화대교의 공간적인 의미를 상기하게 되다니, 그만큼 이 다리가 서울과 수도권 서부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로 생활 속에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다.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강 다리양화대교는 196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65년에 완공되었다. 양화대교의 설계는 임봉건 대한설계공단 대표 외 20여 명의 기술진이 6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임봉건 대표는 니혼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등의 프로젝트에서 기술적 부분을 많이 의논한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양화대교의 공사는 한강대교를 복구해 본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에서 맡아서 진행했는데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도 임봉건 대표의 기술적 능력을 인정하여서인지 이후 임봉건 대표는 지금의 현대엔지니어링의 전신인 현대종합기술개발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양화대교는 현재의 한국 기술력으로 본다면 상당히 초보적인 수준의 교량이지만 당시 기술로는 공사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고 홍수로 인해 몇 차례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선유도를 중간 지점으로 진입 방향 각도가 틀어지게 설계되어 완공된 양화대교는 위에서 바라볼 때 묘한 비대칭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초기 양화대교가 완성되었을 당시 국민 성금을 모아 UN군 참전기념탑을 양화대교 북단에 만들었는데 그 밑을 차량이 지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마치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남단에는 국내 최초로 입체교차로를 만들어 차량이 돌아서 진행 방향을 변경하니 다리가 기승전결을 보이는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현재의 우리가 보는 양화대교는 2개가 같이 있는 쌍둥이 다리인데 교통량의 증가로 1982년 4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된 것이다. 이후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한강의 다리들을 전면적으로 조사했는데 하류 쪽 옛 다리의 노후화가 심한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 1996년부터 양화대교 구교의 상부 구조를 전면 철거하고 재시공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상부 구조 철거 과정에서 교각에서도 의심스러운 문제점들이 발견되어, 교량의 하부 구조까지 보강 작업을 시행한 후 2000년에 재개통했다. 구교 공사로 인해 신교의 보수·보강이 지연되었으나, 구교가 개통된 후 신교 보수·보강 공사가 시작되어 2002년에 전체 8차선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현재 양화대교는 강북 쪽 교각과 교각 사이가 넓은 곳에 아치 구조가 있다. 2010년경 경인운하 계획과 맞물려 큰 배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일부 교각을 철거하고 경간이 넓은 아치구조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운하’라는 국가사업이 정치적 대립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면서 공사가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이미 교각을 철거하여 기형적 임시 구조로 인해 교통사고와 홍수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임으로 당시 행정1부시장이 시장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공사의 공정률이 80%에 멈춰 있던 양화대교 아치 구조 변경 공사를 계속 진행했고, 2012년 신교 쪽 아치를 올리며 양화대교는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완공 이후에도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치 구조 변경공사에서 무면허 철거업체가 폐기물을 한강에 그대로 버린 것이 밝혀져 현장소장이 구속되고 공무원들이 입건되기도 했다.
한강철교
모래사장 위에 지어진 한강철교 한강에도 모래사장이 있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한강철교가 있는 강북 쪽 땅은 과거에는 넓은 모래사장이었다. 과거 한강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을 보면, 나룻배가 다니는 한강 위쪽으로 너른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시민들은 한강 백사장에서 여가를 즐겼다.
한강철교는 현재 총 4개의 철교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제1철교의 건설이 시작되려던 때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인천으로 가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으려 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은 경인철도 부설권에 서명받을 수 없게 된다. 이후 미국 공사 호러스 앨런의 주선으로 1896년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냈고 한강철교의 설계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경인선의 설계가 미국인에 의해 미국 설계기준에 맞추어 진행되면서 당시 일본 기준의 너비가 좁은 협궤(폭 1,067mm)가 아닌 미국 기준의 표준궤(폭 1,435mm)가 우리나라에 사용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이 철도부설권을 가져가면서도 일본 재래선 기준인 협궤로 바꾸지 않은 것은 중국 철도의 표준궤와 연결하여 중국으로의 진출과 수탈을 위해서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협궤는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표준열차하중이 표준궤의 50~82%로 낮고, 곡선 구간 주행 시 안정성과 승차감이 표준궤에 비해 떨어진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준궤 철도의 수송능력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바를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1900년 완공 당시 한강 제1철교의 부설권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 최초의 한강 다리로 인하여 용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용산이 번화해진다. 또한 완공 후 4년 뒤인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최근에 반환된 용산 미군 기지의 땅이 일본 군영지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 한강을 건너서 용산역이 보이면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은 어쩌면 이때부터 시작된 행동 양식인 것은 아닐까?
지금 보면 그냥 다리 중 하나일 뿐일지 모르지만, 경복궁이 재건되고 30년밖에 안 되어 당시 거대 구조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거대한 한강 제1철교는 마치 괴물처럼 보였을 법도 하다. 제1철교 완공 후 경인철도 합작회사에서 “길이 3,000척의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것 같다”라고 광고하였으니,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서구 기술에 대한 충격과 경탄의 감정이 몹시 컸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제1철교는 단선으로, 철길이 하나만 있는 다리였다. 그런데 제1철교가 완공되고 5년 뒤인 1905년에는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기차수송량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경인선과 경부선이 모두 제1철교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차를 두고 번갈아 수송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새로운 한강 다리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제2철교는 1912년 9월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이듬해인 1913년 다리가 더 큰 힘을 버틸 수 있도록 보강되었다. 현재 한강 상류 쪽 2개의 단선 철교가 당시 건설된 제1철교와 제2철교이다.
1925년 서울은 을축년 대홍수라는 엄청난 물난리를 겪었다. 당시 홍수는 숭례문(남대문) 앞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그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이 홍수로 서울에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이때 송파구의 백제 풍납토성과 강동구의 암사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서울에서 가장 큰 지형적 변화가 생긴 곳은 지금의 잠실이다. 과거 잠실은 1520년 홍수 이후 잠실 북쪽으로 샛강이 생기면서 한강 중앙에 자리 잡은 섬이 되었다. 이 섬을 끼고 가장 큰 물줄기인 본류는 잠실도의 남쪽으로 흘렀는데 ‘송파강’이라고 하고, 작은 강줄기인 북쪽 지류는 ‘신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물길의 지형이 바뀌면서 북쪽 신천이 본류가 되었고 남쪽 송파강이 지류가 되었다. 1970년대 잠실 개발 과정에서 이 송파강을 메웠는데, 그중 일부가 현재 석촌호수로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이 지하철의 역명에도 남아 있는데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새내역의 역이름은 과거 신천역이었으나 2016년 역명을 현재인 잠실새내역으로 변경했다. 참고로 ‘새내’는 ‘신천’의 순우리말이다.
이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철교의 백사장 쪽 철길이 놓인 둑이 홍수에 쓸려 가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한강철교의 교각을 1~2m 높이고, 백사장 쪽에도 교각을 세워 다리를 놓았다. 현재에도 제1철교와 제2철교는 이때 복구된 교각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안전을 위하여 교각 외부를 보강하였으나, 교각 내부는 그대로이다.
세 번째 한강철교는 4개의 철교 중 가장 하류 쪽(인천방향)에 있는 철교로 1944년에 완공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전쟁물자 수송량이 급증하면서 한강철교의 추가 건설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제3철교는 상·하행선을 모두 갖춘 복선 철교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아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한강철교 3개의 다리를 모두 폭파하여 완전히 폐선된다. 폭파 이후에도 북한군이 한강의 다리들을 계속 복구하려 하자 미군이 항공 폭격으로 한강의 다리를 추가로 파괴했다. 이때 투하된 폭탄들이 2015년과 2016년에도 한강철교 수중에서 불발탄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1951년 서울을 수복한 후 제1철교와 제2철교는 미국 공병대에 의해 임시 복구된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한국 원조 정책의 일환으로 국제협조처(ICA)로부터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총 15억 3,660억 달러 규모의 광공업용품, 원자재, 교통시설 등을 지원받았다. 이는 원화로 2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며 1950년대 한국의 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6년 동안 2조 원은 정말 엄청난 규모의 원조액이었다. ICA의 원조로 1957년 제3철교를 완전히 복구하자 임시로 복구한 제1철교와 제2철교는 사용하지 않고 1969년까지 제3철교만 사용했다.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며 물동량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질 때 기차의 운송량도 급격히 증가했다. 제1철교와 제2철교는 임시 복구 후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교량의 상부 구조를 완전히 다른 형상의 트러스로 교체하여 1969년에 개통했다. 지금 우리가 한강에서 볼 수 있는 제1철교와 제2철교의 트러스는 이때 복구된 것이다. 운송량 증가에 따라 가장 나중에 건설된 네 번째 철교는 88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994년에 개통되었다.
제4철교가 개통된 1994년에는 교통과 건설 분야에 큰일들이 많았는데 철도와 지하철이 동시에 파업하였고, 성수대교가 붕괴하였으며 서울 5~8호선 추가 지하철 건설을 위한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되었다. 이를 보면 한강철교는 우리 사회의 격변기마다 변화를 같이 겪은 한강의 상징적인 다리이다.
한강대교
과거에는 어떻게 한강을 건넜을까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처음으로 놓인 것은 한강철교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한강을 건넜을까? 이전에 한강을 건너는 주된 교통수단은 나룻배였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나루’라는 말이 포함된 지명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터가 있었던 흔적이다. 그렇다면 한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배밖에 없었을까? 조선시대 국왕은 선대 왕들의 능에 참배하거나 온천에 가는 등 나들이를 위하여 한강을 건너곤 했다. 그렇지만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거나 풍랑이 거세거나 하는 등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는 강 위에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여 위험성이 있었다. 더욱이 나룻배로는 한 번에 많은 인원이나 물자를 옮기기 어려웠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의 융릉(현륭원) 참배와 화성 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마친 후 임시 다리를 설치하여 한강을 건넜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노량주교도섭도>이다. ‘노량’이라는 이름을 보고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이 임시 다리를 만들었던 자리가 바로 옛날 노들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한강대교가 있는 자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종종 융릉을 참배했는데, 한 번 행차할 때 동원되는 인원이 많으면 6,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대인원이 이동하기 위해서 임시로 한강에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임시 다리는 70여 척의 큰 배를 가로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들었다. 5~6필의 말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던 이 다리는 현대 공병대의 부교와 유사한 형태였다. 이 다리를 설치하는 데에만 한 달, 또 철거하는 데에도 한 달이 걸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일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한강이 다리를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는 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강의 강폭이 무척이나 넓고 홍수가 발생하면 강물이 갈수기 대비 300배 이상 불어났기 때문에 한강에 상설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이전에는 필요할 때 배다리를 놓았다가 다시 해체하곤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욱이 한강은 세곡을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으니 항상 막아놓을 수도 없었다.
한강인도교, 제1한강교 그리고 한강대교한강철교가 만들어질 때는 서울시민들의 교통수단은 대부분 도보였고, 화물은 철도와 지게로 운송되었다. 1912년 한반도에 민간영업차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후 민간용 영업차량이 늘어나면서 사람과 우마차를 위한 별도의 다리가 필요해졌다. 추가로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한강인도교’로 불렸는데 위는 트러스 구조로 짓고 백사장에는 짧은 경간의 거더교 형식의 다리로 연결했다. 2개의 다른 형태의 다리가 만나는 지점에는 둑을 쌓아 연결하였는데, 이 둑의 위치는 현재의 노들섬이다. 1917년 완공된 한강인도교는 한강철교에서 사용된 낡은 자재와 장비를 그대로 이용하여 다리의 폭이 좁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