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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입니다

강국진 외 지음 | 부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입니다

강국진 외 지음

부키 / 2025년 3월 / 376쪽 / 22,000원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운 투사들



가명으로만 남은 헝가리인 의열단원, 마자르


김원봉을 찾아 헤매는 낯선 유럽 남성:
1920년대 초반 중국 베이징 뒷골목에서 시작된 뜬소문은 조금씩 조심스럽게 새어 나왔다. 소문 내용도 괴상했다. 낯선 유럽 출신 남성이 베이징 골목골목 술집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람을 만나면 다짜고짜 “김원봉이라는 사람을 아느냐”라고 묻고 다닌다는 것이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와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등 조선과 일본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일본 헌병과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 의열단, 그 의열단을 만들고 이끄는 주축이 김원봉(1898~1958)이었다. 그런 김원봉을 아느냐고 동네방네 대놓고 물어본다는 것부터가 의아한 노릇이었다. 그것도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유럽 사람이 김원봉을 찾는다고 하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그 남성은 너무나 진지하고 간절했다. 이 소문은 드디어 김원봉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김원봉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남성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며 기뻐했다. 사실 이 남성은 몽골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이태준이 소개해주기로 약속했던 ‘헝가리 출신 폭탄 전문가’였다. ‘마자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이 남성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의 운전기사가 되면서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이태준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 몽골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계획에 따라 몽골로 갔으며, 그곳에서 몽골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복드 칸을 치료한 덕분에 의사로서 큰 명성과 존경을 얻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자르는 왜 몽골까지 오게 되었을까. 당시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협정을 체결하면서 수립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었다. 191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세르비아에서 암살되면서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 당시 러시아와 벌인 전투에 파병된 헝가리 군인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어 러시아에 억류되었고,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어 10년 넘게 시베리아와 몽골 등지를 떠돌아야 했다. 마자르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몽골까지 흘러들어왔다. 마자르는 마자르인(Magyar)이라는 뜻이다. 즉 마자르라는 이름 자체가 우랄산맥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중부 유럽 헝가리 평원으로 이주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오늘날 헝가리를 구성하는 핵심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설가 박태원이 1947년에 펴낸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에 따르면 김원봉이 베이징에서 이태준과 만난 자리에서 성능 좋은 폭탄을 구하는 문제로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자 이태준은 여비가 없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불운한 처지이지만 폭탄 제조에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마자르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마자르는 “만약 저의 기술이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유용하다면 기꺼이 약산의 일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반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결성한 때는 1919년 11월이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대상으로 한 암살·파괴를 통해 전국적인 반일 항쟁을 벌이는 노선을 추구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300건이 넘는 의열 투쟁을 벌일 때마다 가장 큰 문제는 폭탄이었다.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졌는데 정작 불발탄이거나 폭발하더라도 성능이 형편없어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의열단에서는 성능 좋은 폭탄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폭탄 전문가가 합류한다면 의열단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김원봉은 이태준이 마자르를 데리고 몽골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이태준은 몽골에서 베이징으로 되돌아오던 도중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 ‘붉은 군대’에 맞서 싸우던 백군 소속 부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김원봉은 이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그런 와중에 베이징에 낯선 유럽 남성이 나타나 자기를 찾는다고 하니 김원봉은 혹시나 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김원봉과 마자르가 만났다. 이태준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하던 마자르는 이태준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 베이징에 도착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원봉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영화 <밀정> 루비크의 실제 모델:
김원봉과 마자르는 곧바로 상하이로 이동했다. 상하이에 있는 프랑스 조계는 일본의 감시망에서 자유로워 폭탄 제조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의열단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집 한 채를 구해 지하실에다 비밀 폭탄 제조소를 차렸다. 비용은 10월 혁명으로 막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 정부의 원조금으로 조달했다. 비밀 시설에는 의열단 단원 이동화와 현계옥이 머물며 마자르를 도왔다. 현계옥은 대구 기생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마자르의 부인 행세를 하며 일제 경찰들의 감시를 따돌렸다.

마자르가 참여하면서 폭탄 제조는 엄청난 탄력이 붙었다. 마자르의 손을 거쳐 제작된 다양한 폭탄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이렇게 많은 폭탄이라면 일제를 상대로 한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김원봉은 베이징으로 가서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상하이로 함께 가서 의열단이 제조한 폭탄 성능 시험을 참관해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의열단의 대의를 널리 알리는 선언문을 대표 집필해달라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요청을 수락했고,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김원봉과 신채호는 작은 배를 구해서 황푸탄에서 멀리 떨어진,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당시 마자르가 제조한 폭탄은 크게 방화용, 암살용, 파괴용 세 가지였다고 한다. 이 중 파괴용은 대형 통조림처럼 생겼고 무게가 대략 3킬로그램이나 되는 시한폭탄으로 벽돌로 된 건물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력이 강력했다. 성능 시험에서 폭탄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신채호는 의열단 투쟁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고, 1923년 1월 의열단의 대의를 밝히는 <조선혁명선언>을 내놓았다. <조선혁명선언>은 일본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 혁명은 정당한 수단이라고 천명했다. 특히 <조선혁명선언>이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라면서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한다”고 선언한 대목은 마자르가 제조한 수많은 폭탄이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내용이다.

폭탄을 충분히 제작했다고 판단하자 의열단은 드디어 1923년 폭탄을 국내로 몰래 옮겨 대규모 암살·파괴 작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이 폭탄을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마자르는 큰 역할을 했다. 마자르는 중국을 여행하는 유럽인 부잣집 도련님으로 꾸민 뒤 현계옥과 부부로 위장해 상하이에서 톈진까지 이동했다. 의열단원들은 마자르-현계옥 ‘부부’의 짐을 옮기는 하인들 행세를 하면서 300개가 넘는 폭탄을 옮겼다. 톈진에서는 중국 관헌들이 마자르 일행의 트렁크를 검사하겠다고 하기도 했지만 마자르는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해 “이들은 모두 내 일행이고, 이들이 가진 짐은 다 내 소유다”라며 중국 관헌들을 물리쳐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영화배우 송강호와 공유가 주연한 영화 <밀정>(2016)에는 의열단원인 연계순(한지민 분)과 부부로 위장해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는 작전에 참여하는 루비크라는 유럽 출신 남성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자르의 실제 행적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열단이 계획했던 암살·파괴 계획은 밀정이 일본 경찰에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23년 3월 14일 밤 신의주경찰서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15일 새벽 경기도경찰부가 서울에서 일제히 검거 작전에 나서 폭탄 36개, 폭탄 장치용 시계 6개, 권총 5자루, 실탄 155발, 뇌관 6개,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관원에게>라는 문서 900매를 압수했다. 폭탄을 압수한 일본 경찰은 용산공병대 폭파작업소에서 성능 시험을 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우수한 성능에 경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는 의열단이 이 폭탄을 직접 제조했으며, 그 모든 과정을 마자르가 주도했다는 사실은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의열단 내부 동향을 보고한 밀정조차 마자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마자르와 관련한 일체 사항을 의열단이 철저히 기밀로 유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래 흥얼거리고 오토바이 운전 즐기던 로맨티시스트:
의열단원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맹세하고, 언제라도 목숨을 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운동과 사격 연습, 독서를 꾸준히 했다.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스트레스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오늘 하루는 최대한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마자르 역시 여느 의열단원들의 생활 태도와 비슷했지만 사뭇 다른 면모도 있었다. 1923년에 마자르를 직접 만난 적 있다는 의열단원 김산에 따르면 마자르는 늘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는 골초였고 카드놀이를 좋아하는 데다 못 말리는 애주가였다. 마자르는 한 달에 200달러를 월급으로 받았으며 그 가운데 70달러만 쓰고 돈을 모을 정도로 알뜰한 편이었는데, 막상 70달러는 대부분 브랜디나 맥주를 마시는 데 소비했다고 한다. 192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꽤 고급 취향 혹은 과소비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마자르는 의열단에서 사준 오토바이를 타고 거의 날마다 프랑스 조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폭탄을 제조할 때는 항상 헝가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쾌활한 성격이었다.

미국의 언론인 님 웨일스가 김산을 취재하여 쓴 『아리랑』에 따르면 1924년 의열단이 조직으로서는 사실상 해체되어 각지로 흩어지면서 마자르는 이별 선물로 1만 달러를 받아 상하이를 떠났다고 한다. 그 뒤로는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다. 어디로 갔고 어떻게 살았는지 조그만 실마리조차 없이 완벽한 베일에 싸여 있다. 마자르가 그토록 열심히 돈을 저축했던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는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마자르는 식민지 조선과 아무런 연고도 없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미지의 외국인 독립운동가였다. 폭탄 전문가였고 의열단을 위해 활동했다는 것 말고는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다. 의열단은 조직 자체가 비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데다, 폭탄 제조를 총괄하는 마자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눈에 불을 켜고 의열단을 추적하던 일본 경찰조차 의열단 폭탄 제조 총책임자가 마자르라는 사실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상하이에서 의열단과 함께한 기간은 몇 년에 불과했지만 마자르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특히 마자르를 도와 폭탄 제조에 참여했던 이동화의 역할이 중요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까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했는데, 이동화는 폭탄 제조법과 폭탄 이용법, 실탄 사격 등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동했다. 이 학교 1기 졸업생에는 <청포도>를 쓴 시인 이육사도 있었으니, 마자르가 가르쳐준 폭탄 제조법이 이동화를 거쳐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졌던 셈이다.

우리는 『약산과 의열단』을 비롯해 『아리랑』, 계봉우가 쓴 자서전 『꿈속의 꿈』 등을 통해 마자르의 활동상을 단편적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마자르의 생김새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김산이 남긴 증언이다. “그는 대략 40세쯤 되었는데, 움푹 파인 눈에 눈썹이 짙었으며, 키가 크고 강인하였고 태도가 방만하였지만 조선인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님 웨일즈·김산, 『아리랑』)



양심이 이끄는 대로 독립운동에 손을 내밀다



2대에 걸쳐 한국 독립운동 지원한 목사, 조지 A. 피치


백범 김구를 구해준 미국인 목사:
1910년 일본 식민지가 된 뒤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먹고살 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가난했다. 중국인들이 곱게 봐줄 리가 없었다. 거지 취급을 받기 일쑤였고 심하면 일본 앞잡이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여벌 옷이 없어 빨래를 하면 옷이 마를 때까지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던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망국노”라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훗날 상하이를 주름잡는 영화배우가 된 김염은 달리기 시합 도중 “왜놈의 주구”라고 놀리는 중국인과 싸우다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이후로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조선인들은 상하이에서 편안하게 바깥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인만 발견하면 중국인들이 무조건 끌고 들어가서 한잔하자고 권했기 때문이다. 홍커우공원에서 발생한 의거,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일본군을 향해 던진 폭탄 하나가 조선 사람을 바라보는 중국 사람의 시선을 걸인에서 영웅호걸로 한순간에 바꿔버렸다. 이 의거는 무적 무패를 자랑하는 일본군에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상하이 주둔 일본 군경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 군경은 즉각 폭탄 투척 배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를 지목,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김구는 일본 군경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조지 A.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1979) 목사 집으로 숨어들었다. 조계는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이다.

“그날 저녁, 어두운 밤에 한국인 4명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우리 집에 왔다. 그중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명은 한국의 위대한 영웅이며 망명정부를 이끄는 김구였다. 김구와 같이 온 사람들은 비서인 엄항섭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 그리고 김철이었다. 김구는 우리에게 오늘 홍커우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모자가 본인이라고 밝혔다.”

피치는 자신의 집으로 찾아든 김구 일행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 달 동안 숨겨주었다. 김구는 바깥출입을 아예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아주 가끔 택시를 타고 외출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극도로 조심했다. 하지만 일본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피치는 아내 제럴딘 T. 피치와 함께 김구를 중국인으로 변장시킨 뒤 차에 태워 자싱으로 피신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치 댁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며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치 부인이 급히 2층으로 올라와서 ‘우리 집이 정탐꾼에게 발각된 모양이니 속히 떠나셔야겠어요’라고 알려주고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화로 남편을 불렀다. … 부인은 자기네 자동차에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되어 뜰에서 차를 몰고 문밖으로 나갔다.”

피치 부부는 김구의 목숨과 독립운동을 살린 은인이었다. 김구가 일본 군경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를 빠져나갔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동력이 이어질 수 있었다.

피치는 김구뿐 아니라 안창호 구명 활동도 했다.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프랑스 언론인들, 지식인들과 접촉하며 체포 과정의 불법성을 집중 부각시켰다. ‘법 위의 일본 경찰’을 성토하며 공개적인 석방 운동을 벌였다. 프랑스 언론사 편집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피치는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이 한국인을 불법적으로 체포한 사실을 강조하며, 프랑스가 이를 묵인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포기하고 과거의 절대 군주가 다스리던 앙시앵 레짐(구체제)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창호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불법 체포되어 일본 당국에 인계된 지 10일이 지났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그가 홍커우공원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체포했습니다. 일본은 안창호에 대한 체포 영장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영장으로 그를 체포하고 나중에 체포 영장을 수정했습니다. 안창호는 일본 당국의 손에 무한정 잡혀 있어야 하나요? 그는 주어진 권리에 따라 합법적 공개 재판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인에 대한 검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한국인 체포와 검색에 대한 위임장을 받았습니까? 프랑스의 정치적 난민에 대한 태도를 보면 프랑스는 앙시앵 레짐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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