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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용어의 탄생

김성근 지음 | 동아시아


과학 용어의 탄생

김성근 지음

동아시아 / 2025년 2월 / 372쪽 / 22,000원





과학(科學 / science)


라틴어 경구인 ‘스키엔티아 에스트 포텐티아(scientia est potentia)’는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로 번역된다. 이 유명한 말은 흔히 근대과학에 사상적 주춧돌을 놓았다고 알려진 17세기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서 『신기관(Novum Organum)』(1620)에 나오는 말이다. 베이컨은 이 책에서 당시까지도 강력한 위용을 떨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이해 방식을 비판한 뒤, 근대인들은 자연을 확고하게 지배하고 그것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술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 경구 중에 나오는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가 오늘날 영어 ‘science’의 어원이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스키엔티아’를 ‘과학’으로 번역하지 않고, 단지 ‘아는 것’ 혹은 ‘지식( knowledge)’으로 번역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시 ‘스키엔티아’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 science가 등장한 것은 이미 14세기 중반 무렵부터였다. 그런데 당시 이 어휘도 오늘날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라틴어 ‘스키엔티아’와 마찬가지로 ‘아는 것’ 또는 ‘지식 일반’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아는 것’ 또는 ‘지식 일반’의 의미로 사용되던 라틴어 scientia, 또는 영어 science는 언제부터 오늘날과 같은 ‘과학’으로 탈바꿈했던 것일까? 그 개념의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과학사적 사건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 17세기 전후의 과학혁명(The Scientific Revolution)이라는 사건이었다. 이 과학혁명은 고대 이래 강력한 영향력을 뽐내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갈릴레오 갈릴레이,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 등 17세기 과학자들은 신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계했으며, 인간은 그것을 실험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신이 자연 속에 숨겨놓은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과학혁명의 시기를 거치며 단지 ‘아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라틴어 scientia나 영어 science는 관찰, 실험과 같은 증명이 가능한 사실에 기반을 둔 자연계에 대한 특별한 탐구 방법론의 의미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18~19세기를 통해 science는 ‘지식 일반’이 아니라, ‘전문 영역별로 세분화된 학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과학혁명 이후 학문 각 분야가 점점 전문화된 경향과 관련이 깊다.

1833년 케임브리지에서는 제4차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시인 새뮤얼 콜리지는 당시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급증하는 직업적 전문가 집단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지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이에 영국인 철학자 윌리엄 휴얼은 물리학 연구자(a cultivator of physics)를 당시 ‘의사’를 뜻했던 physician이라고 부를 수 없기에 physicist(물리학자)라고 불렀던 것처럼, 과학 연구자(a cultivator of science)를 ‘scientist’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19세기 전반의 영국에서는 지질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각 분야가 새롭게 탄생하거나, 전문화·세분화되었고, 그 같은 특정 분야를 연구하는 전문가 집단이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라틴어 scientia라는 어휘에 ‘ist’라는 어미를 붙여 만든 scientist는, 매우 좁고 특수한 영역을 연구하는 사람을 지칭했기 때문에 결코 좋은 어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넓은 영역을 폭넓게 공부하는 교양적 지식인, 즉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는 달리, 특정 분야만을 깊이 파고드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scientist는 때마침 대량 생산 시스템과 산업의 분업화를 주도한 미국에서 유행했고, 이후 영국 및 유럽으로도 역수입되면서 서양 학계에 확산되었다.

이로써 ‘아는 것’ 또는 ‘지식 일반’을 의미했던 라틴어 scientia 혹은 영어 science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과학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관찰, 실험에 기반을 둔 특별한 실증적 지식’이라는 의미와 함께, ‘분과화된 학문, 즉 전문화, 세분화된 학문’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 것이다. Science를 둘러싼 이 같은 두 가지 개념적 변화는 오늘날 영어 science가 셀 수 있는 명사인 복수형 ‘사이언시즈(sciences)’로 사용될 때는 분과화된 학문 영역의 의미로, 셀 수 없는 명사인 단수형 ‘사이언스(science)’로 사용될 때는 특별한 학문 방법론을 갖춘 지식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에서 여전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어 ‘과학’은 ‘분과의 학’을 의미했다:
서양에서 science가 등장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아시아의 문헌에 ‘과학(科學)’이라는 어휘가 등장했다. 중국 청나라 건륭제가 편찬한 『사고전서『』에 따르면 북송의 이방(925~996) 등이 편찬한 시문집 『문원영화』에 이미 중국어 ‘커쉐(科學)’라는 어휘가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한자어 ‘과학’은 오늘날 우리가 science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중국과 조선 등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리 등용시험, 즉 ‘과거지학(科擧之學)’을 줄인 말이었다. 이후로도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라는 어휘가 간간이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을 가리켰다.

한자어 ‘과학’이 영어 science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였다. 일본어 ‘가가쿠(科學)’라는 어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에도 시대 후기의 의학자이자 난학자였던 다카노 조에이가 1832년에 집필한 의학서 『의원추요내면』에서였다. 이 책에서 다카노는 “인신궁리(人身窮理)는 의가(醫家)의 일과학(一科學)으로서 인체는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역하기도 어렵다”라고 썼다. 여기서 ‘인신궁리’란 오늘날의 생리학에 가까운 것으로, 생리학은 의가의 한 과학이지만,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인체의 탐구는 몹시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맥에서 ‘과학’은 전문 분야, 혹은 분과의 학문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거의 사용된 적이 없던 ‘과학’이라는 어휘는 메이지 유신(1868) 이후 다시 등장했다. 1871년 1월, 훗날 일본의 문부대신이 된 이노우에 고와시는 신정부에 새로운 교육제도의 설계를 담은 《학제의견》을 제출했는데, 그 안에는 “어학을 배워서 서양인에게 구두로 가르침을 받고 과학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즉 서양 언어를 공부한 뒤 그 어학적 바탕 위에 개별 학문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으로, 여기서도 ‘과학’은 각각의 개별 학문, 즉 분과학문을 의미했다.

초기 일본에서 사용된 ‘과학’이 ‘분과의 학(學)’을 가리킨 데는 그 나름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본래 과학의 ‘과(科)’ 자는 벼 화(禾) 자와 말 두(斗)와 자가 합쳐진 것이다. 즉, 되나 말 같은 용기로 곡식의 양을 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서양의 science에 내재된 ‘분과학문’적 특징이 한자어 과(科) 자가 가진 의미와 매우 유사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어휘가 science가 가진 분과학문적 특징을 잘 포착하기는 했지만, 사실 학문을 잘게 나누어 깊이 연구한다는 것만으로는 서양의 science가 가진 특징을 모두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서양의 science가 제대로 이식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science만이 가진 ‘특별한 학문적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통적 학문 방법론과 구분되는 새로운 학문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

일본 최초의 근대 철학자 니시 아마네는 science를 ‘학’으로 번역했다:
서양의 science가 가진 또 다른 특징, 즉 특별한 방법론은 일본의 근대 철학자 니시 아마네가 최초로 소개했다. 니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 주관, 객관, 오성, 감성 등 다수의 번역어를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니시는 1870년 11월경 『백학연환』에서 science라는 어휘를 ‘학(學)으로 번역했다.

니시는 1874년에 쓴 「지설」이라는 논문에서 ‘학’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니시는 인간의 마음이 지(智), 의(意), 정(情)이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는데, 이 중 최고인 지가 이(理)를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전쟁을 학(學), 또는 강구(講究), 연마(鍊磨)라고 불렀다. 또 지(智)의 보루를 학교, 지(智)가 할거하는 구역을 지식이라고 칭했다. 인간의 마음에 들어 있는 지(智)가 학의 기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니시는 학(學)이라는 것이 지(智)가 이(理)를 획득하기 위해 행하는 전쟁과 같다면, 학의 목적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이러한 학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시찰, 경험, 시험 등 세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이 셋은 사실상 종래의 전통적 ‘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근대의 자연과학적 방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처럼 시찰, 경험, 시험 등이 학을 추구하는 구체적 방법이라면, 니시는 연역의 법과 귀납의 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연역의 법은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일을 이해하는 방법이며, 귀납의 법은 다수의 사실을 모아서 하나의 일관된 진리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마침내 학(學)과 술(術)의 양상이 나타난다.

니시에 따르면, 학(science)이 진리를 추구하는 이론적 행위라면 술(art)은 그 학을 활용하여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기술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니시는 이 ‘학’과 ‘술’의 관계를 ‘과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學)은 사람의 성(性)에 있어서 그 지(智)를 열고, 술(術)은 사람의 성에 있어서 그 능(能)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과 술은 그 취지가 다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소위과학(所謂科學)에서는 두 가지가 혼합되어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니시는 science를 ‘학’이라고 번역하고, ‘과학’이라는 한자어는 화학과 같이 세분화된 ‘분과의 학’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니시는 전통적 학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납의 법, 연역의 법, 그리고 관찰, 실험, 시험과 같은 근대과학적 방법론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해했다. 전통적 ‘학(學)’의 개념은 니시에 의해 새로운 ‘학(science)’의 개념으로 재정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철학(哲學 / philosophy)


영어 ‘필로소피(philosophy)’의 어원은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필로(philo)’와 ‘지(智)’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이다.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어원만큼이나 철학은 여러 학문 분야 중에서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론적, 실용적, 생산적 학문으로 분류했는데, 이론적 학문이란 신학·수학·물리학 같은 학문 분야를, 실용적 학문이란 윤리학·정치학 같은 분야를 뜻하며, 생산적 학문이란 예술·시학·공학 같은 분야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이 각각의 학문을 초월하고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 보편적 학문의 역할을 철학에 맡겼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분과학문이 점점 심화되었을 때도, 철학은 날로 전문화·세분화되는 지식들을 통합하고 초월하는 학문으로서의 역할과 기대를 잃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에서 철학은 형이상학을 뿌리로 하고, 물리학을 몸통으로 하며, 그 외의 온갖 과학은 이 몸통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과 같다고 주장했다. 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대학의 학문이 끊임없이 분과화·전문화를 지향하는 현실 속에서도 철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오직 진리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분야로서 지식의 통일화를 꾀하는 학문이라는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니시 아마네:
‘철학’(哲學, 일본어 ‘데쓰가쿠’)은 메이지 일본의 근대사상가 니시 아마네(1829~1897)가 만든 어휘이다.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의 내항 이후, 에도 막부는 서양의 외교 문서들과 서적들을 취급할 전문적인 조직이 필요함을 느끼고, 1856년 ‘번서조소’라는 외국어 관련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 기관에 교수 보조역으로 임명된 니시는 1861년 친구 쓰다 마미치의 『성리론』에 쓴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쪽의 학이 전래된 지 이미 백여 년. 격물, 화학, 지리, 기계 등 제과에 대해서는 그것을 궁구하는 사람이 있지만, 오직 희철학(希哲學) 일과(一科)에 대해서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양인들은 논기(論氣)는 구비했지만 논리(論理)는 아직 없다고 한다. 여기 한 명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내 친구 쓰다이다.

니시가 이 발문에서 쓴 ‘희철학’이라는 어휘는 바로 서양의 philosophy를 가리킨다. 희철학의 ‘희(希)’는 ‘갈구하다, 바란다’는 뜻이고, 철은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미 밝고 또 지혜로워서 그의 몸을 보존한다(旣明且哲 以保其身)”라는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희철학’이란 곧 ‘지혜로움을 갈구하는 학문’을 뜻했다. 그것은 원래 philosophy의 어원적 의미인 ‘지를 사랑한다’에 매우 가까운 번역어였다. 니시는 과학기술을 ‘논기의 학’으로, 희철학을 ‘논리의 학’으로 규정하고, 일본인들은 100여 년 전부터 ‘논기의 학’은 연구해 왔지만 ‘논리의 학’인 ‘희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친구 쓰다가 마침 이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썼던 것이다.

그런데 니시는 1862년 에도 막부 최초의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되면서 본인 스스로 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다. 동료 쓰다와 함께 네덜란드에 건너간 니시는 약 2년간 라이덴 대학의 경제학 교수 시몬 비셀링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에 정진한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 철학계에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와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를 활발하게 소개하던 옵조머르의 저작과 강의록에 심취한다. 옵조머르를 통해 니시는 이후 자신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실증철학과 만났던 것이다.

니시는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유학과 서양의 철학은 비슷한 ‘논리의 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증철학을 공부하면서 니시는 두 학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니시는 유학과 철학이 그 취지에서는 동일한 학문이지만 그 각각의 발전 양상과 내용을 비교해 볼 때, 두 학문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당시의 서양철학을 선도하는 실증주의는 “증거를 통해 확실함을 추구하고, 논리적으로 명확함을 따진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체되어 버린 유학과 비교할 때 끊임없이 ‘일신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1874년 니시가 쓴 『백일신론』은 일본에서 ‘철학’이라는 어휘가 사용된 최초의 문헌이다. 이 『백일신론』은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며, 상편에서는 정치와 도덕의 문제를, 하편에서는 물리와 심리의 문제를 다룬다. 니시에 따르면, 당시 유학자들의 몹쓸 질병은 크게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될 정치와 도덕을 하나로 혼동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정치와 도덕을 혼동하게 되면, 오로지 수기(修己)만으로 치인(治人)이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한마디로 수신제가(修身齊家)와 같은 사적 영역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같은 공적 영역의 혼동은 종교와 신앙을 통치 수단에 이용했던 전근대적 정치 체제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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