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함께 춤을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 흐름출판
악마와 함께 춤을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흐름출판 / 2024년 12월 / 300쪽 / 19,000원
1부. 꽃이 만발한 정원으로의 초대
초대장 _ 당신과 내가 지닌 악의 정원당신에게 정원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곳은 푸르르며 아름다운 꽃으로 무성하다. 당신은 매일 정원을 성실하게 관리한다. 그럼에도 며칠만 관리에 소홀하면 잡초가 정원을 점령하고 망친다. 우리는 잡초가 다른 식물에 해를 가하기 전에 뽑아내거나 제초제를 뿌려 제거해야 한다. 당신에게 잡초는 제거하거나 통제해야 할 대상이다. 이 정원이 바로 당신의 삶이며, 잡초는 분노와 시기, 앙심, 경멸과 같은 나쁜 감정이다. 최고의 정원은 잡초가 없는 정원이고, 최고의 삶은 나쁜 감정이 없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나쁜 감정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나쁜 감정은 잡초가 아니라 ‘지렁이’다. 이 녀석은 지면 바로 아래에 살아서 땅을 조금만 파보면 끈적거리고 징그러운 모습으로 흙 속을 휘젓고 다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렁이를 역겨워한다. 우리는 꽃만 감상하고 정원에 지렁이가 산다는 사실은 잊고 싶어 한다. 하지만 꽃과 마찬가지로 지렁이도 정원의 일부이며 지렁이가 존재한다는 건 정원이 번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녀석들이 없어지길 바라는 건 조화롭고 풍요로운 정원이 없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사랑스럽게 유지하고 싶다면, 이 꿈틀이 주민을 받아들일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신이 지렁이를 사랑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나쁜 감정은 우리가 잘 사는 걸 훼방하기 때문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나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은 감정을 그저 ‘올바른 방식’으로 느끼거나 혹 나쁜 감정이 들더라도 그것을 좋은 쪽으로 ‘돌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쁜 감정은 좋은 삶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다.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나쁜 감정도 좋은 삶의 일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감정이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까닭은 우리가 감정의 일부는 통제할 수 있고 일부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을 억지로 느낄 수 없으며, 이미 느끼고 있는 감정을 TV 끄듯이 ‘꺼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감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화를 내고 싶지 않을 때는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슬픔이 몰려올 때는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한다. 만약 감정이 소화 작용처럼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반대로 감정이 완전히 통제 가능하다면 옷장에서 셔츠를 고르듯 감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감정이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고, 또 감정이 그 스펙트럼의 어디쯤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감정은 분명 우리의 일부다. 하지만 감정 그 자체도 삶을 지니므로, 우리는 감정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다룰 내용이다.
1장. 감정을 통제하려는 사람들
우리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다룬 에세이에서 조지 오웰은 간디의 극도로 절제된 생활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간디가 제한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향신료나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 식단, 술이나 담배 금지, 사치품 금지, 가정에서의 안락함 억제, 성욕 자제, 친밀한 우정 등. 간디는 가족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이들 모두 같은 규율을 준수하게 했다. 이렇듯 깨달음과 평화를 얻기 위한 그의 헌신은 종종 가족과의 갈등을 불렀다. 그중 가장 심각한 건 장남인 하릴랄과의 갈등이었다.
하릴랄은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동참했고 그로 인해 3년 동안 여섯 번 투옥됐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출소했을 때 간디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하릴랄은 가족을 경시하고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아들은 평범한 삶을 원했다. 교육을 받고자 했고 직업과 가족을 원했다. 하지만 간디는 하릴랄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걸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절제된 헌신을 따르지 않는 삶을 “무미건조하고 동물적인 삶”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절제되고 희생하는 삶 대신, 평범한 인간의 삶을 원했던 하릴랄을 탓할 수 있을까?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간디 같은 사람은 분명히 우리 같은 사람보다 더 유능하거나 더 강하다. 비록 우리가 하릴랄에 가깝더라도 우리는 간디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오웰은 간디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이 ‘인간은 실패한 성인’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이 가정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성인은 인간 삶의 최고 형태다. 우리 모두는 결점이 많고 게으르므로 성인이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성인에 가까울수록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니 성인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오웰은 묻는다. 왜 인간 삶의 최고 형태가 성인이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결국 오웰의 요점은 성인이 되려면 인간성을 덜어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인간성을 덜어 내면 소중한 것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하릴랄이 옳고 간디가 틀렸다고 주장한다. 하릴랄의 우선순위가 옳고 간디의 우선순위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저 좋은 인간이 되길 원할 뿐이다. 조지 오웰에 따르면 좋은 인간이 되는 게 성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 인간은 실패한 성인이 아니다. 오히려 성인이 실패한 인간이다.
오웰은 성인의 삶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오웰이 보기에 성인이 되려면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아예 끊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 조지 오웰에 따르면 성인 간디는 사람들이 의미를 찾는 것, 이를테면 가족, 음악을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다. 하릴랄이 갈망하는 가정생활이 간디의 눈에는 무미건조하고 하찮고 시시한 것이다. 오웰이 보기에 성인의 삶이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은 인간성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오웰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 좋은 종류의 감정적 삶은 나쁜 감정이 없는 삶이다. 분노, 질투, 악의를 덜 느끼면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나쁜 감정을 모두 제거한 감정 성인(聖人)이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걸 열망해야 한다. 나쁜 감정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감정 성인이 되는 게 아예 안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틀렸다. 우리는 감정 성인이 되길 원하면 안 된다. 감정 성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인간성을 덜어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감정 성인은 여러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정 통제형 성인’이다. 이런 성인들은 나쁜 감정은 정원의 잡초와 같아서 뿌리를 뽑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자라지 못하도록 땅에 소금을 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되도록 적게 느끼거나 전혀 느끼지 않아야 한다. 철학의 역사에는 감정 통제형 성인이 많다.
2,000년이 넘는 역사의 스토아주의는 21세기에 들어 ‘신스토아주의’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신스토아주의의 메시지는 스토아주의 원칙을 실천하면 직업적 삶과 생활 전반에서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스토아주의 훈련법에 따르면 두려움을 느낄 때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적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반복해서 생각하면 두려움에 익숙해져서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스토아주의는 내면의 평정심과 회복력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감정 성인의 또 다른 현대적 형태는 ‘마음챙김’이다. 인도 전통과 선불교, 도교 철학에 뿌리를 둔 마음챙김은 신스토아주의와 마찬가지로 결국 우리가 나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훈련한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오는가: 감정 통제형 성인은 감정이 마음을 통제하는 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 필사적으로 없애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지 않은가. 영혼을 짓누르는 슬픔, 어리석은 사랑, 불타는 질투. 우리는 절망적인 순간에 이렇게 속삭인다.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난 뭐든 내줄 수 있어.’ 감정 통제형 성인의 결론은, 감정을 더 잘 통제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일리가 있다.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은 주체성, 즉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감정 통제형 성인에 따르면 감정은 주체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 통제형 성인은 세상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 게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즉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믿음을 바로잡으면, 감정도 바로잡을 수 있다. 간디의 말처럼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밧줄을 뱀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 통제형 성인은 우리가 인간계에 신경을 덜 써야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나쁜 감정을 피하려고 껍데기 속의 거북이처럼 살아가는 게 가치가 있을까?
삶이 왜 편안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에겐 신스토아주의와 마음챙김 열풍이 행복하고 편안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라이프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질문해야 할 건 삶이 왜 안락의자 같아야 하냐는 것이다. 언젠간 우리 모두 고통과 좌절, 비통함에 직면할 것이다.
감정 통제형 성인의 주요 매력 중 하나는 균형감을 가지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 말인즉슨 큰일은 걱정하되 작은 일에는 연연하지 말라는,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에 감각을 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모욕이나 불만을 심각한 불의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와 부딪혀 그 하루를 망치게 되면 온 우주가 나를 깎아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감정 통제형 성인은 나쁜 감정의 근본 원인은 중요하지 않은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학파와 간디도 어떤 면에선 일리가 있다. 그들 말대로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느낀다면 세상과 삶에 애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부정적으로 보는 걸 오웰과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에 완전히 얽매여 있고 그것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 통제형 성인은 인간사의 혼란스러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 혼란이 바로 당신의 삶이다. 그 혼란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성을 버리려고 힘쓰는 것이다.
그래도 나쁜 감정은 우리에게 온갖 고통을 주지 않나? 그래서 나쁜 감정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다른 형태의 감정 성인을 만나야 한다.
2장. 감정을 길들이려는 사람들어린이 책 작가 리처드 스캐리가 창조한 가상 세계 ‘바쁜 마을’은 의인화된 동물로 가득하다. 바쁜 마을의 주민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양이 허클, 열기구를 소유한 여우 루돌프 폰 플루겔 등이다. 더불어 허클의 친구인 지렁이 로리도 등장한다. 다른 주민이 모두 포유류나 파충류, 조류인 데 반해 지렁이 로리는 이 마을의 유일한 무척추동물이다. 다른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지렁이 로리도 인간처럼 행동한다. 지렁이 로리는 멋진 의복을 갖춰 입고 거대한 사과처럼 생긴 자동차를 운전한다. 로리는 모범 시민이다. 지렁이 로리는 마을의 유일한 무척추동물인데도 어떻게 주민들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을까? 아마도 교양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일반적인 지렁이와 달리 그는 깨끗이 씻고 멋지게 단장했다. 로리는 스스로를 바쁜 마을에 적합한 지렁이로 탈바꿈시켰다.
다음으로 살펴볼 감정 성인 집단은 부정적인 감정을 지렁이 로리처럼 대한다. 나는 이들을 감정 수양형 성인이라고 부른다. 감정 수양은 오늘날 ‘감정 관리’ 또는 ‘감정 조절’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감정 수양형 성인은 나쁜 감정을 뿌리 뽑거나 억누를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수양하거나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 수양형 성인은 적절히 개입하면 감정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아마도 ‘성공을 위한 옷차림’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일반인도 그 분야의 전문가처럼 옷을 갖춰 입으면 타인에게도, 스스로도 전문가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긍정 심리학을 통해 알려진 감사 연습도 바로 이런 전략이다. 감사하다고 느끼는 모든 일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매일 감사한 일을 세어 보라. 이런 습관은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더 행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감정 수양형 성인도 철학계에서 역사가 깊다. 예컨대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 단련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했다.
공자에게 감정이란: 유교의 도를 따르려면 수양을 해야 하며 그 중심은 의례 또는 예를 실천하는 것이다. 예는 가족의 본분과 제사, 일상의 예의범절, 공직자의 의무와 같은 광범위한 활동을 포괄한다. 공자에 따르면 예를 제대로 준수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으로 변모한다. 이는 인자(仁者)가 되는 방법 중 하나이며, 인은 ‘선한’ 또는 ‘인간적’을 뜻한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오직 선한 사람(인자)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경멸할 수도 있다.” 공자에 따르면 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면 인에 반하는 걸 미워하게 된다. 인자는 증오를 완전히 삼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을 증오하도록 자신을 단련할 뿐이다.
인자는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정을 느낀다. 슬픔에 대한 공자의 말씀이 최고의 예시다.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인 안회가 젊은 나이에 죽자 크게 상심하여 탄식하며 말한다.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공자가 통곡하자 제자들은 스승에게 너무 애통해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가 답한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느냐?” 공자의 요점은 사랑하는 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같은 큰 상실을 경험하는 때는 큰 슬픔을 느끼기에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다. 인자가 되려면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느끼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진정성 있게 느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감정이란: 공자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과정을 ‘성품의 탁월성’을 달성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하는데 성품의 탁월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좋은 성품의 특성 또는 미덕이라고 부르는 정직과 용기, 관대함과 같은 자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성품의 탁월성은 감정을 조절하고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는 성품의 탁월성 중 하나를 온화함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강한 분노와 지나치게 약한 분노의 극단 사이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 ‘무감각하다.’ 그리고 ‘비굴하다.’라고 표현한다. 즉 분노를 너무 적게 느끼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맞설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분노는 학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며, 온화함이라는 탁월성을 지닌 사람은 분노를 적절하게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정상인의 정상 반응: 감정 수양형 성인은 좋은 삶에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한다. 그들에게 잘 산다는 건 감정을 잘 느끼는 걸 의미한다. 감정 수양형 성인은 사람들이 감정을 적절히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올바른 성품과 올바른 사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감정 수양형 성인은 우리가 단련을 한다면 감정을 없애지 않고도 주체성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오래 기다릴 때는 화를 조금만 내면 되지만, 누군가가 어머니를 욕할 때는 화를 더 내야 한다. 이처럼 적절성을 염두에 두면 우리가 원하는 감정적 주체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