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스즈키 쇼 지음 | 알토북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스즈키 쇼 지음
알토북스 / 2024년 7월 / 240쪽 / 17,800원
1장 사랑도 기술이다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배워야 한다자, 이제 《사랑의 기술》의 1장으로 들어가 보자. 현대 사회에서는 사랑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랑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감정’이라고 착각한다. 왜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되었을까? 프롬은 1장에서 이 착각의 배경이자 전제로 세 가지 오해를 지적한다.
첫 번째 오해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으로 안다.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문제, 즉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오해한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연애 서적을 보면 ‘이성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옷을 입으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언급한다. 독자의 최대 관심사도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운 인간이 될 수 있는지’다. 그 방법으로 남성은 돈과 권력, 여성은 이성을 매혹시키는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관한 책은 찾아볼 수 없다. 프롬이 생각했던 사랑의 전제는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랑하는 관계가 설정되면 ‘사랑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여자의 행복은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다’라는 정서가 만연하다.
다음 상황을 떠올려 보자. 당신은 A를 사랑한다. 그런데 A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호감은 있는 것 같은데 ‘좋아한다’라거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편 B는 당신에게 열정적으로 구애를 펼친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을 누굴 택할 것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A인가? 아니면 당신을 사랑하는 B인가?
당연히 A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B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라면 다르다. A는 가난하고 B는 부자라면 더 많은 사람이 B를 선택할 것이다. 이런 선택의 근간에 ‘행복은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만일 이에 수긍한다면 당신은 미성숙하고 미성숙한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받는 관계’의 원형은 모성애에 싸여있는 단계, 즉 유아 단계의 사랑이다. 따라서 당신은 정신적으로 아직 유아인 셈이다.
사랑할 대상에 눈독 들이지 마라우리가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오해는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대상’의 문제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사랑할 능력은 있지만 사랑할 대상이 없다고 단정한다. 과거에는 부모 혹은 중매자가 정해준 상대와 먼저 혼례를 올리고 사랑은 그 이후에 키워나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자유연애 시대가 열림으로써 크게 달라졌다. 자신의 힘으로 배우자를 찾아 나서며 자기 에너지와 관심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찾는 쪽으로 기울인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살아온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도 무의식중에 시장 원리, 즉 ‘교환’ 원칙을 따른다.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수준의 ‘양질의 상품’을 찾으려 한다. 처음부터 싼 물건을 찾는 사람이 없듯 상대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개 탐나는 ‘득템’을 찾는다. 평소라면 고가라서 엄두도 못 내지만, 운 좋게 정가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상품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가정환경이나 학력, 연봉, 외모 등 조건을 따져보고 상대방을 선택한다. 하지만 인간은 상품이 아니다. “자신에게 이득인지 손해인지에 따라 상대방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라고 프롬은 묻는다.
사랑을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그 사람은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자신의 미숙함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훨씬 더 좋은 짝이 있을 거라며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다. 이런 사람은 사랑하는 면에서 성장하지 못했기에 그 다음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사랑에 빠지는 건 환상에서나 가능하다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가정에 이르는 세 번째 오해는 연애 혹은 사랑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저절로 빠지는 것’이라는 착각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영어로 ‘fall in love’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뜻으로 이에 대해 프롬은 정확하게 말했다.
여태까지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고 친밀함을 느끼며 일체(혹은 합일)에 빠지는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가슴 벅차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사랑하게 되면 두 사람이 급속하게 친밀감을 느끼고 하나가 되는 순간, 마치 기적처럼 사랑에 빠지게 진다. 특히 성적인 관계에서 시작된 연애는 순간적인 설렘과 크게 관련이 있다고 프롬은 말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불꽃이 튀듯 순간 타오르는 사랑에 빠지면 처음에는 서로에게 푹 빠져 황홀감에 젖어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흥분은 자취를 감추고 사랑은 끝을 향해 간다. 사랑할 때 ‘쉬이 타오르고 쉬이 식는 편’인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프롬은 이런 사랑을 비판했다. 프롬은 영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현대인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자 원인이다.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잘못된 사랑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당신이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당신은 고민에 빠진다.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외면과 내면을 갈고닦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찾고 서로 호감을 느끼고 육체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바로 이 관점에서 <사랑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장 에리히 프롬의 사랑
사랑이 무너진 곳에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핀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가는 대대로 유대교 랍비 집안으로 증조부, 조부 모두 저명한 랍비였다. 프롬의 아버지도 랍비로 살기를 원했으나 생계를 위해 작은 와인 상점을 운영해야 했다. 프롬은 어렸을 때부터 조부의 영향으로 탈무드 학자를 동경했고 랍비 밑에서 탈무드 학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굳게 믿고 소중히 지켜왔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문명의 종말이자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청년 프롬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가치관이 180도 뒤집힐 만큼 큰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해, 프롬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에는 자신이 바라는 배움이 없다’라며 1년 만에 자퇴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공부했다. 전쟁을 계기로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람직한 사회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고 싶었던 듯하다. 프롬은 대학에서 유대인 커뮤니티에도 적극 참여하며 많은 지식인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접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접한 그는 인간의 심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신 분석학 연구에 몰두했다.
사랑의 크기에는 범위가 있다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프롬은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출판했다. 이 책은 파시즘이 독일에 출현하게 된 이유를 사회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해명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프롬은 사회 사상가이자 정신 분석가로 큰 주목을 받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인간은 고독을 가장 두려워한다.”라는 전제에서 모든 해석을 시작한다. 인간은 고독을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유를 동경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유를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자유로워질수록 개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고독에 신음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다시 고독에서 도망치려고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다. 거대한 권위에 몸을 맡기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내어주고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그래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와 파시즘 국가가 탄생한 이유’를 깊이 파헤쳐 보면 이 같은 인간 행동 원리에 원인이 있다. 결국 국민이 스스로 원해서 파시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947년에 출판된 프롬의 《자립적 인간(Man, for Himself)》도 이전 작품과 동일하게 자유를 주제로 쓴 책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살려면 ‘생산적 성격’을 갈고닦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사랑과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이성을 기르고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이후 1956년 출판된 책이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을 주제로 삼았지만 실제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립적 인간》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사회사상서이자 철학서다. 이 책의 주요 취지는 우리가 사회 변혁을 고민할 때 국가 체제나 정치 문제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사랑이 어떻게 사라져가고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랑은 형태가 없다. 또한 정체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 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중요한 요소이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 사람과 사람을, 세계를 연결한다. 이와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심리 문제이다. 지금 우리도 어떤 형태든 사랑 문제의 막중한 짐을 지고 있지 않은가. 유대인으로 태어나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정신과 바람직한 사회 모습에 관심을 두고 “왜?”라는 의문을 던졌던 에리히 프롬. 그의 의문이 최종적으로 이른 곳에 바로 ‘사랑’이 있었다.
3장 사랑에 담긴 힘
‘생산적 성격’과 ‘비생산적 성격’《자립적 인간》에서 프롬은 인간의 성격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하나는 ‘생산적 성격(사랑의 본질을 낳는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비생산적 성격(잘못된 사랑을 낳는 자세)’이다. 여기서 비생산적 성격은 ‘수용형’, ‘착취형’, ‘축적형’, ‘시장형’으로 세분된다. ‘수용형’이란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성향이 강한 성격을 말한다. ‘착취형’이란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과 교묘함을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려 사람이다. ‘축적형’은 소유가 유일한 삶의 기쁨으로 인간의 활동이나 관계성보다 질서나 안전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성격이다. 마지막으로 ‘시장형’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따라 오로지 ‘교환’ 원칙만을 고수한다. 이렇게 네 가지 성격은 잘못된 사랑의 형태를 낳는 ‘비생산적 성격’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남에게 받는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생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발신하며 그것의 가치를 점차 높여나간다. 여기서 생산성 혹은 비생산성 하면 물질적인 것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프롬은 정신적인 영역을 의미했다.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또는 행복을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스스로 더 높은 수준을 지향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사랑’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유익한 거래를 원한다. 자본주의는 ‘교환’을 토대로 성립되었다. 우리는 일하고 월급을 받는다. 즉 노동을 돈과 교환한다. 또한 음식과 교환하기도 하고 집과 교환하는 등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에 의해 굴러간다. 인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교환’을 통해 인간은 인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교환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산에 사는 사람은 열매를 따오고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은 생선을 잡아 서로 맞바꾸는 등가 교환으로 경제가 시작된 것일까?
사실 교환은 ‘증여’, 즉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은 사람은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기에 여기에서 ‘교환’이 생겨난 것이다. ‘빼앗는 것’에서는 절대 교환이 시작될 수 없다.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면 절대 상응하는 무엇으로 보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확대해 생각하면 사랑도 ‘주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올바른 의미의 사랑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숙한 사랑은 둘로 쪼개지지 않는다프롬은 ‘성숙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전체성과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결합’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을 제공한다. 이것은 타인과 분리된 벽을 허무는 힘이고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으로 인간은 고독감과 고립감을 극복하고 각자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전체성을 잃지 않는다.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역설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둘이 하나가 되면서도 각자가 독립된 존재로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한쪽의 개성을 몰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합일에 이르는 것을 ‘성숙한 사랑’으로 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쓴 대화편 《향연》에 사랑의 발생에 관한 신화가 나온다. 플라톤보다 훨씬 앞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신화다.
머나먼 옛날, 인간은 둥근 형태로 원형을 이루며 손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원통 모양의 목 위에 두 개의 닮은 얼굴로 살았다. 이런 인간들이 힘도 좋고 야심이 넘쳐 신들에게 덤비려 하자, 제우스는 그들의 거만함을 용납할 수 없다며 각각 둘로 쪼개버렸다. 이때 반으로 찢긴 인간은 쪼개진 자신의 반쪽을 찾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프롬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인간은 결코 ‘둘로 쪼개진 조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독립적일 뿐 상대와 합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독립적이면서 타인과 합일한다’는 모순된 현상이 바로 프롬이 말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독립된 인간인 채로 완전한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독립을 유지하되 타인과 합일할 때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기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다르기에 정신적인 합일을 이루려 한다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을 억누르고 상대방에게 동조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그로 인해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서로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합일에 이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프롬의 ‘사랑론’이다.
사랑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다프롬은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라고 했다. 프롬은 이 ‘능동적인 힘’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사랑은 능동적인 활동이며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관여하는 것’이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