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
천수이 지음 | 부키
사랑 없이 우리가 법을 말할 수 있을까
천수이 지음
부키 / 2025년 1월 / 292쪽 / 18,000원
1장 준비―달동네 K-장녀, 로스쿨에 가다
녹슨 칼의 쓸모내 이름 ‘수이’는 ‘다를 수(殊)’에 ‘다를 이(異)’를 써서, 다르고 다르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너는 이름부터가 별종이라 평범하게 살기는 어렵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살면서 가끔 남들은 안 겪을 법한 일을 겪을 때마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생각나곤 한다.
2007년 여름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고시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항상 예능 프로그램만 틀어져 있던 식당 텔레비전에서 웬일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사학법과 로스쿨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이었다. 나와는 관계없는 뉴스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사법시험을 함께 준비하던 친구가 자기는 로스쿨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끝까지 승부를 봐야지!”라며 배신자라고 볼멘소리했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6년 뒤 나 역시 로스쿨에 입학했다.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부모님 덕분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달동네 신림동에 살았다. 그중에서도 공동묘지가 있던 터라는 의미로 ‘떨어질 낙’에 ‘해골 골’ 자를 쓰는 ‘낙골’이라는 이름의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뻔한 살림에 훔쳐 갈 것도 없는 동네에는 가로등이나 순찰차가 적었다. 오직 밝은 달만이 우리 동네를 지켜 줬다. 그래서 나는 달이 좋았고, ‘달동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고지대 산기슭에 있어 서울 어디보다도 달이 가깝고 크게 보이는 우리 동네를 좋아했다.
부자 동네에서는 재산을 가지고 싸운다던데 우리는 대물림된 가난을 저항 한번 못하고 받아들였다. 친구들의 부모님은 새벽이면 버스정류장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서성이다가 반장이라는 사람이 지목하는 순으로 봉고차에 몸을 싣는 일용직 아저씨, 늘 동네 어느 집에 모여 하나에 몇 원짜리 인형 눈을 밤새 붙여 고작 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버는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나마도 부모님이 있는 친구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한 집 걸러 한 집은 이혼을 했고 편부모 가정, 조부모 가정에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은 없는 집이 없었다. “누구 엄마 집 나갔더라”라는 말이 거의 일상다반사였다.
1990년대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문맹자가 많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동네에서 교육의 중요성은 이미 뒷전이었다. 내 친구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었다. 그럼에도 내가 변호사를 꿈꾸게 된 건 넉넉한 환경에서 태어나서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미 재개발에 떠밀려 서울 이곳저곳에서 이사를 온 달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이사를 나가지 않자 용역 깡패들이 포클레인으로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아비규환이 반복됐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야학도 방화로 한 줌 재가 됐다. 뛰어놀던 골목길이 하루아침에 포클레인에 밀려 버리고 이웃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법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도시는 발전해야 했고, 누구도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주변 환경이 나를 공부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녹슨 칼’과 같았다. 맨주먹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날카롭지도 않아 잘 갈고 닦기 전에는 쓸모가 없었다. 녹슨 칼을 제대로 쓰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것’이라며 늘 꿈을 잃지 않게 도와주신 부모님, 자기들은 고졸이어도 나에게는 공부하는 게 대단하다고 응원해 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난은 자주 내 발목을 잡았다. 학원 수업이나 과외 한번 받기도 어려웠다. 자꾸만 환경을 탓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겨우 대학에 갔다. 성인이 됐으니 더 이상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장 생활은 가능했지만 성적이 떨어지자 미래가 걱정됐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했다.
변호사가 되겠다며 사법시험에 도전했던 몇 년간 딱 한 번 사법고시학원 종합반에 등록했다. 그 당시 300만 원 가까이 되던 수업료를 카드 할부에다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 마련했다. 이후로는 단과반만 들었지만, 민법 기본강의 한 과목만 해도 5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원룸 월세는 30만 원, 식권은 한 장에 2,700원이었다. 여기에 책값, 기타 생활비까지 합하면 직장도 없는 우리 부모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돈 얘기를 할 때마다 기약도 없는 미래를 붙들고 부모님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 염치없고 죄짓는 기분이었다.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그렇게 고시생 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됐고, 사법시험은 폐지됐다.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 취업을 하기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포기하면 평생 후회가 남을 것 같아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또다시 돈이었다. 고시생 생활도 돈 때문에 마음 졸였는데 ‘돈스쿨’이라는 로스쿨에 과연 내가 갈 수 있을까. 내가 다닌 로스쿨의 한 학기 등록금은 약 1,000만 원이다.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입학했다. 3년 전체 등록금의 3분의 2 이상은 장학금을 받아 나머지만 학자금 대출로 메웠으니, 학부 다닐 때보다 더 적은 학비를 낸 셈이다. 그만큼 악착같이 공부했다. 분명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적어도 당장은 돈 걱정 없이 감사하며 학교에 다녔다.
졸업해서 변호사가 되고 나니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 마이너스 통장까지 빚만 가득했다. 그래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건 로스쿨 덕분이다. 로스쿨이 아니었다면 나는 변호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고마움과 함께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로스쿨의 수혜로 꿈을 이룬 만큼, 보통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로스쿨의 도입 취지에 걸맞은 일터를 찾고 싶었다.
그 바람대로 나는 대한민국의 23,624번째 변호사가 되어 취약 계층을 상대로 무료 법률 상담을 진행하는 공공기관에서 직장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어느 구청의 복도 한쪽이 내 사무실이었다. 복도에 앉아 있다 보면 변호사 선생님은 어디 계시냐는 질문이 가장 먼저 날아왔다. 정말 변호사가 맞나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상담을 시작하곤 했다. 하루 평균 예닐곱 명을 상담했는데, 주로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고령의 어르신,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찾아왔다. 사선변호사보다 내가 가깝게 느껴져서인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고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거나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존경하는 변호사님이 내가 만날 의뢰인들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존중받아 보지 못한 분들이 많아서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 서툰 것뿐이라며, 더 친절하게 대해 드리면 진심이 통할 거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래서 더 친절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참 서글펐다. 나 자신이 누구보다 어렵게 살았기에 어려운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지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큰소리가 나고 같은 얘기를 수십 번씩 반복하다 보니 처음의 마음들이 자꾸만 흩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한번은 의뢰인에게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연결도 잘 안되고 통화 때마다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오니 짜증이 났다.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수화기 너머에서 우리 아빠보다도 더 연배가 높으신 분의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온다.“먹고사는 데 바빠서 도무지 신경 쓸 겨를이 없네요.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그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난이 내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면, 이제는 내 상담이 의뢰인들에게 살아갈 힘을 보태 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달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변호사의 ‘호(護)’자는 ‘말씀 언(言)’과 ‘자 확(■)’이 결합한 것으로, ‘말로 붙잡다’라는 의미다.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말로 보살피고 돕는 것이 변호사다. 내 인생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던 츄리닝 수험생이 타인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도와야 하는 정장 입는 변호사가 됐다. 이 폭풍 같은 변화가 아직도 꿈만 같다. 내 앞의 작은 서류봉투 속에 담긴 의뢰인 한 분 한 분 인생의 무게를 느끼며, 변화는 있어도 변함없는 사람이 되길 기도했다.
2장 시작―변호사인 듯 변호사 아닌 변호사 같은
속는 것도 나, 속이는 것도 나때로는 남을 속이는 것보다 나를 속이기가 더 쉽다. 실제로 나는 종종 나를 속인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반복해서 주입하다 보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자신감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뭐든 적당히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이게 과해져서 근거 없는 자만에 빠지고 자기 객관화가 전혀 안 될 때다. 이런 경우에 나한테 불리한 기억을 지우고 사실과 다른 기억을 만들어 내거나, 내가 잘못한 일에 여러 이유를 갖다 붙여 방어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한다. 내가 나를 속이는 걸 모르고 세상이 나를 속인다고 생각하면 타인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정신 승리나 허언증, 리플리증후군(현실을 부정하고 마음속으로 꿈꾸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이라는 말을 들으며 손가락질 당하게 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리플리>의 주인공 ‘리플리’(이 이름에서 리플리증후군이 유래했다)는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자의 신분을 도용해 살아간다. 거짓된 누군가가 되는 게 초라한 자신보다 낫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모두를 속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결국 자신의 거짓말에 갇혀 버린 리플리는 이제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찾지 못할 거라며,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고 말한다. 나를 속이는 삶은 결국 안에서부터 허물어진다.
그러니 내가 맞다는 확신이 들더라도 한 번씩 뒤돌아봐야 한다. 어떤 상황을 나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대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닌지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많은 실패나 문제는 자신에게 속아서 일어난다.
강도죄를 저질러 구속된 아들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CCTV에 범행 장면이 다 찍혔는데도, 우리 아들이 흔한 얼굴이어서 우연히 저 사람과 닮은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얼굴은 그렇다 치고 CCTV 속 범인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검거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변호사님 모르셨어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잖아요.”라고 답한다. 본인이 사는 동네에서는 저런 똑같은 옷 입은 사람을 3분에 한 명씩 만날 수 있다며, 내가 그 동네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거라고 울부짖는다. 그럼 범행 시각에 현장 근처에서 목격된 것은 어찌 된 일이냐 하니, 그것 역시 그럴 리가 없다며 그 시간에 아들은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그날 어머님은 다른 곳에 있었던 걸로 이미 조사 끝났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 내가 아들이 나랑 있었다고 했나요? 내가 아니라 아들 여자 친구랑 있었다는 걸 잘못 말했네요. 변호사님이 자꾸 다그치니까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어.”아, 나는 의뢰인을 다그치는 나쁜 변호사구나. 어차피 나쁜 변호사로 찍힌 거 다시 차갑게 묻는다.“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짜 우리 아들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본인이 진짜 안 했으면 안 한 거죠.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부인하는 건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본인이 지는 겁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고,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도 남도 존중할 수 없게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결국 어떤 것이 진실인지 깨달을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누군가와 다퉜을 때, 혹은 일하다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겉으로는 남 탓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 잘못도 조금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이 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아냐, 나는 잘못 없어’라고 그 생각을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남의 행동에는 온갖 이유를 들어 엄격하게 따지면서, 내 행동에는 온갖 핑계를 들어 관대하게 합리화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잘못을 억지로 못 본 체하더라도 남들에게는 내 잘못이 다 보인다. 어쩌다 운 좋게 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남을 속이는 것으로는 잠깐 행복해질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나를 속여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강도죄를 저지른 아들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이미 강도상해죄로 구속된 상황에서 타인의 의사나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을 속이는 이들의 태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3장 가족―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
이제 고작 100일 주제에 탕수육을일을 시작한 지 100일이 지났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무슨 일이든 적응하는 데 최소 100일은 필요한 듯하다. 낯설고 혼란스러운 이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고, 우리는 그렇게 무사히 버텨 낸 100일을 축하한다.
나 역시 100일이 지나자 상담 기술이 조금씩 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진실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전제로 답변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다음번 상담에서는 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은 생략하고 유리한 부분을 확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걸러서 듣기도 하고, 대답을 확정적으로 하지 않기도 한다. 전에는 한도 끝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면, 이제는 거짓말 같거나 꼭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면 다른 이야기로 유도하는 기술도 쓴다.
이런 나의 성장을 스스로 기특해하며 앞으로 더 잘해 보자는 의미로 점심 메뉴는 조금 사치스럽게 짬뽕에 탕수육까지 시켰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혼자서 2인분이 넘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나만의 잔치를 벌인 뒤, 포만감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의 100일 손님이 들어온다. 다소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장애인 복지 카드를 내민다.“무슨 일 때문에 오셨죠?”
“아빠가, 아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가려고 해요.”
“아이 아빠요? 그러니까 남편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제 아빠이면서 제 아이 아버지인 사람이요.”
내 아빠이면서 내 아이의 아버지인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기분 좋은 포만감이 갑자기 불쾌한 더부룩함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둘이 살았다. 엄마는 계절마다 다른 남자를 아빠라며 데리고 왔는데, 어쩌다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면 화를 냈다. 그래서 여자는 계절마다 다른 아빠를 맞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 지체장애가 있어서, 복지관을 통해 직장을 구하고 적은 수입을 얻었다. 월급날이 오면 엄마가 그 돈을 가져갔다. 엄마는 딸의 장애 때문에 남편과 이혼했다고 생각했고, 딸을 부끄러워했다. 여자가 살면서 엄마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방에 들어가 있어.”였다. 그래도 자신을 떠나지 않은 엄마가 좋았고, 엄마가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혹시나 자기 때문에 엄마를 떠날까 봐 잘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 딸이 번 돈을 계속 가져갔고, 더 벌어 오라고 강요했다. 돈 벌어다 줄 날만 기다리며 여태 키워 준 거라는 나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속에 어느새 엄마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았다.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 아빠가 된 사람에게 접근해 아이를 가졌다. 엄마와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아빠이면서 남편이고, 아이에게는 할아버지이면서 아빠인 남자, 여기에 아기까지 네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동거가 시작됐다. 엄마와 여자는 매일같이 싸웠다. 남자는 이런 콩가루 같은 집안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노라며, 양육권을 가져오기 위한 소송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여자는 아이를 뺏길까 봐 두려움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