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이연화 지음 | 위너스북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이연화 지음
위너스북 / 2024년 10월 / 224쪽 / 17,500원
Part1: 전시와 친해지기
우리가 볼 수 있는 전시들
전시를 보는 이유
비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을 연습하기: 전시는 일상을 벗어난 비일상의 공간입니다. 적절한 온도, 조도, 습도가 맞춰진 실내 공간에는 가지런하게 정렬된 사물들이 이름표를 달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비워둔 공간과 조용한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어색함을, 누군가에게는 안도감을 줍니다. 만약 전시를 보는 일에 약간의 문턱을 느끼는 분이라면, 심호흡 한 번 하고 전시장 문을 열어 봅시다. 아무리 좋은 것이 앞에 있어도 굳어 있는 어깨로는 그 무엇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감상은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의도가 담긴 전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감상하는 법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기획자는 우리에게 전시물이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다듬고,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거기에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 싶어서 설명을 덧붙입니다.
비일상의 공간에서 세세하게 살펴보는 연습을 하고 나면, 새로운 시각으로 일상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은 본래 풍부하고 다채롭습니다. 하지만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해요. 수많은 것들 중 대체 무엇을 살펴야 하는 건지 막막할 때가 있고, 그러면 그대로 흘려 넘기기도 합니다. 관람을 통해 서서히 나의 곁의 일상을 새롭게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그걸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비일상의 공간으로 떠나게 됩니다.
전시에서 익히는 관찰: 물론 단숨에 즐거움에 도달하기는 어려워요.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존중할 수 있으려면 많은 관찰과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존중을 ‘격식’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존중과 격식은 다르지만, 격식을 통해 존중이 실현되기도 하니까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학술연구나 미술시장이라는 세계와 마음을 주고받고 함께하는 과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전시장의 격식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그래서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주 쓰는 격식의 방식을 참고 사항으로 두고 존중을 익혀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감상할 장소가 꼭 전시장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무엇에든 이끌린다면 감상은 가능하겠죠. 그럼에도 우리는 왜 구태여 전시장에 가서 무언가를 감상하는 걸까요? 답은 질문 속에 있습니다. 전시장은 전시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전시는 준비된 것을 천천히 살피는 것만으로도 연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전시 공간의 유형전시 공간의 유형, 운영주체와 미션은 전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면에서 박물관·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 대안공간, 복합문화공간 등 전시 공간의 유형을 알아두는 건 도움이 됩니다.
박물관·미술관(Museum): 박물관(博物館)은 여타 전시 공간보다 가장 권위 있고, 학술적인 비영리기관입니다. 기관 자체가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립 박물관과 미술관도 그렇습니다. 법적인 근거에 따라 적절한 건물, 소장품, 인력이 요구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구분이 명확하지만 해외에서는 보통 뮤지엄(museum)이라는 단어로 이 둘을 통칭합니다. 미술에 특화된 박물관을 미술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용어 구분은 뮤지엄(museum)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며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무료로 운영되는 곳도 많으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학술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습니다.
갤러리(gallery): 우리나라의 경우 작품을 사고 팔 수 있으며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박물관과 갤러리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갤러리는 ‘화랑(畵廊)’이라고도 합니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작품에 대한 판매 사항을 문의할 수 있고 대부분의 갤러리에서는 전시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종이 한 장에 담아 준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품별 캡션도 해당 인쇄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비해 관련 작품이나 작업을 정리한 자료가 적지만, 훨씬 많은 수의 전시를 합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세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새로운 전시와 작가를 금세 만나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국공립 미술관을 갤러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트페어(art fair): 여러 갤러리와 작가가 함께 모여서 작품을 판매하는 행사입니다. 대규모 행사장의 여러 부스에서 각각의 판매 주체가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2003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아트페어’라는 말을 우리말로 순화하여 ‘미술장터’라는 용어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화랑미술제, 키아프(KIAF)가 대표적이며 국제적 규모의 아트페어로는 프리즈(Frieze)가 있습니다.
비엔날레(Biennale): 비엔날레는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라는 뜻으로, 대규모로 진행되는 국제적 전시회를 지칭합니다. 세계 최초의 비엔날레는 1895년에 열린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입니다. 이후 전 세계에서 비엔날레라는 형식의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일명 미술계의 올림픽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참여하는 나라들이 각국의 최신 미술경향을 소개하며 각축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젊은 미술가를 중심으로 실험성과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 기준이 흐릿해진 부분도 있습니다. 3년마다 개최되는 트리엔날레(Triennale)도 있습니다.
대안공간(代案空間, alternative space): 기존의 예술계에서 주목하지 않은 작가, 메시지 등을 조명하며 기성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할 수 없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실험적으로 기존 체계 밖의 예술을 다룬다고는 하지만, 이 대안공간 역시 시간이 흐르며 그 성격이 보수적으로 바뀌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안공간이라는 말 대신 신생공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젊은 기획자나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시 공간도 나타납니다. ‘대안공간 루프’를 비롯하여 ‘중간지점’, ‘온수공간’ 등이 있습니다.
복합문화공간: 이름에서 나타나듯, 두 개 이상의 문화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대안공간과 유사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안’이라는 말이 주는 실험적인 인상보다는 운영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영리’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점입니다. 예술적 실험성과 현실적인 손익 간의 균형점이 각각 달라서 인상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반드시 예술이나 미술만을 다루는 공간이 아닌 음식과 패션 등 관련한 콘텐츠까지 확장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 주변의 박물관 찾기: 주변 박물관을 가보고 싶다면 지도 어플에 박물관이라고 검색해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쉬운 접근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국박물관협회(https://museum.or.kr/2014)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소속된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립, 공립, 사립, 대학처럼 운영주체에 따라 구분되어 있기도 하고 지역별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많은 박물관이 있었나 하고 놀라실 겁니다. 어떤 지역을 가도 박물관부터 찾는 저에게는 보물 같은 홈페이지인데요. 여행이 막힐 때는 이 목록을 저의 비빌 언덕이라고 생각하며 하나씩 가보고 있어요. 여전히 가본 곳보다 못 가본 곳이 많네요.
박물관 전시의 유형들
상설전시는 긴 호흡의 전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시를 구분할 수 있지만, 저는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상설전시와 기획전시의 구분은 ‘전시 기간’입니다. 이는 전시 구성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상설전시는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하는 전시로 10년 이상 같은 형태로 유지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4~5년 정도로 개편 주기가 짧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면적 개편 대신 일부만 개편하기도 합니다.
상설전시는 긴 시간 동일한 전시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상설전시는 보통 박물관의 미션, 비전과 같은 정책을 잘 나타내는 주제를 선정합니다. 대외적인 필요에 의해 주제나 전시물이 편집되기도 하고, 박물관 내부의 학술연구나 기획전의 성과를 반영하여 개편합니다. 자연스럽게 각 전시물의 해석자료가 풍부한 편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전시되기 때문에 관내 소장품을 중심으로 전시가 이루어집니다. 전시장은 물리적 내구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고려하고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고심합니다.
기획전시는 짧은 호흡의 전시: 기획전시는 상설전시에 비해 실험적이고 뾰족합니다. 때에 알맞은 주제를 선정하고,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자원에 따라 컨셉, 내용, 디자인에 새로운 시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전시는 각 전시가 주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에 따라 특별전, 주제전, 순회전, 소장품전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여타 기관 혹은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확보된 재원과 소장품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획을 하거나 다른 곳에서 했던 전시를 다시 한 번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꼭 기관 밖의 변화만이 특정한 기획을 만드는 것은 아니고, 기관의 목표나 필요에 따라 소장품을 갖고 하는 기획전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신소장품과 기존 소장품을 특정한 주제로 묶어 새롭게 조명할 수도 있습니다.
박물관, 전시, 유물이라는 세계
박물관의 탄생
박물관은 왜 생겼나요? 꼭 필요한가요?: 물건을 수집하고 학습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물관을 단순히 중요한 물건들을 모은 물리적인 장소라고 설명한다면, 이는 박물관의 존재 이유와 특성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중요한 물건을 모아 둔다면, 내 방도 박물관이 될 수 있겠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박물관의 모습은 근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박물관의 출발은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의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근대 이전까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귀한 물건들을 자신만의 공간에 보관하며 소유했습니다. 이 진귀한 물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소유주와 소유주가 초대하는 몇 명에 불과했죠. 시민혁명은 계급 사회를 붕괴시키고,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치 주체를 등장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전 시대 왕과 귀족이 모아둔 물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모두 이 귀중품들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래서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할 물리적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 박물관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민혁명 이후, 박물관은 시민들에게 문화적 자산을 개방하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박물관의 두 얼굴: 역사적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박물관이 단순한 수집 장소를 넘어,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공공 기관이라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시민혁명 직후, 박물관의 물건들은 시민의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이 되었고, 이러한 물건을 보는 관람 행위는 근대 시민에게 교육적이고 장려될 만한 것이 됩니다. 박물관은 소장품의 보존과 전시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며, 사회적 기억을 유지하고 학습의 장을 제공합니다. 전시된 물건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상과 이야기를 촉진합니다. 그리고 시민을 위해 태어난 박물관은 점차 근대국가의 입장을 나타내는 기관이 됩니다.
시대의 흐름 안에서 박물관은 ‘진보적 역사관’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진보적 역사관은 인류는 점차 진보한다는 직선적인 방향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야만은 과거이며, 문명은 미래라는 직선적 시간 축 위에 올려두고 위계를 설명합니다. 유럽과 미국 등의 나라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에 식민지를 세우는 논리 중 하나였죠. 문명은 야만의 땅에 깃발을 세우고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해석합니다. 식민지가 된 국가의 역사는 점차 밀려나고 대신 박물관이 제국의 입장으로 식민지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됩니다. 박물관은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질문하게 만들었습니다.
박물관에 대한 새로운 요구: 이러한 배경 아래 1980년대 ‘신(新)박물관학’이 나타납니다. 박물관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시금 촉구하는 움직임이었죠. 최초의 박물관은 시민을 위한 기관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박물관의 민주적, 포용적 역할을 강화합니다. 그래서 신박물관학 이후 박물관은 중립성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고 공동체 참여를 강조합니다. 역사와 해석의 과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독려합니다. 기존의 전통적 박물관학이 소장품과 전문가 중심이었다면 신박물관학은 박물관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중시합니다.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박물관이 질문하고 답변하며 상황을 해결해 나가자는 입장입니다. 박물관과 사회의 관계의 변화는 느리지만 꾸준히 나타납니다. 그리고 2022년 프라하에서 열린 ICOM(국제박물관협의회)의 특별총회에서 결정된 박물관의 정의에서도 그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 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이고 전문적으로 소통하며, 교육·향유·성찰·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은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박물관의 역할과 정의에 가깝습니다. 세 번째 줄에 나타난 ‘소통’과 ‘다양한 경험 제공’은 이제 더 이상 박물관의 부가적인 기능이 아니라 필수적인 역할입니다. 박물관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래서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일을 합니다.
박물관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박물관은 개인과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역할이 되는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 걸까요? 박물관의 권위는 시민의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보존하는 공간을 넘어, 민주사회에서 시민들이 문화적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박물관은 역사적 소장품을 통해 제공되는 진실성과 신뢰성을 토대로 소장품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기관입니다. 박물관은 시민이 더 나은 방식으로 교육받기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박물관의 권위는 시민들이 박물관을 통해 얻는 교육적, 문화적 혜택에서 비롯되며, 이는 박물관이 민주적 사회에서 공공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여러 기관에서 ‘모두를 위한 박물관’이라는 슬로건을 강조하며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은 박물관의 존재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Part2: 박물관 전시를 보는 다양한 방법
식사하듯 전시 보기
전시 경험에 대한 큰 그림이번 장에서는 전시를 고르는 방법과 전시(특히 박물관 전시)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아봅니다. 전시와 관련한 큰 그림을 그리며 시야를 확장해 보고 구체적인 경험을 만들어가면 좋겠네요.